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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지사지 바닐라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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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충 멸절을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퇴출당하는 두 번째 인간이 있지 않을까? 


단편



식사를 마친 후, 콘스탄챠와 금란은 자리를 떠났고 나와 바닐라는 함선을 걷고 있다.


오늘만큼은 그녀가 사령관이고 내가 사용인 겸 부관.


물론 바닐라가 사령관의 업무를 대신하게 할 순 없으니 내가 평소 일상에 하는 걸 체험하기로 했다.


그 중 하나가 식사 후 오르카호를 한 바퀴 도는 것.


산책하는 겸 만나는 이들과 이야기하는 맛에 2, 3일에 한 번은 돌아다닌다.


타부대가 사는 생활공간까지 가진 않고 공공시설로 이어지는 길을 적당히 걷는다.


그렇게 복도를 지나가던 중, 우린 즐겁게 이야기하며 마주 다가오고 있는 두 인물과 마주쳤다.


"앗, 권속이여! 오늘도 바다의 찬가가 잘 들리노라!"


"아, 사령관 좋은 아침."


고딕드레스에 한 쪽 눈엔 안대를 쓴 푸른 머리칼의 소녀, LRL (일명 좌우좌)와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더치걸이었다.


"더치 안녕~. 그리고... 평안하셨습니까, 주인님?"


나는 더치걸에게 인사하며 좌우좌의 뺨을 주물렀다.


으휴, 뺨 말랑한거 봐라.


"후히, 하히마아~(하지마아~). 헌소기 하부로 후힌 혼 때는허 하냐~(권속이 함부로 주인 손 대는거 아냐~). 후히히."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웃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아보인다.


더치걸로 시선을 옮기자 그 아이가 좌우좌를 주무르는 내 손을 쳐다보고 있었다.


"응? 뭐야. 너도 해줄까?"


"어, 어? 아니야. 괜찮... 우웅~."


조금 당황한 듯 더치걸은 시선을 돌렸지만 그녀의 볼은 이미 내 손 안에 있었다.


"...으응, 웅."


좌우좌처럼 헤실헤실 웃진 않지만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간다.


은근 내성적인 속마음을 가진 더치걸로선 꽤 긍정적인 반응이다.


머리를 정성스레 쓰다듬어주는 것을 마지막으로 손을 떼자 둘 다 아쉬운 얼굴을 보였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단다.


"아침 일찍부터 어린애들에게 본인의 욕망을 푸다니, 변태적인 집사군요."


바닐라가 저렇게 질투하거든.


"응? 집사? 그러고보니 권속은 평소의 옷이 아니구나."


"그러게. 집사복이네? 멋있어 사령관."


"훗, 너희도 내 옷의 매력을 아는구나."


"근데 왜 집사복을 입은거야?"


나는 아이들에게 오늘 집사복을 입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역지사지에 대해 설명할때 아이들이 이해를 잘 못했지만 서로 역할 바꾸기 놀이라고 간단하게 요약해주었다.


"그러니 오늘은 바닐라를 사령관이라고 부르렴. 그러고보니 너희는 바닐라를 어떻게 불러?"


"어라? 짐은 그냥 권속이라고 해도 되지 않느냐?"


"놉놉. 권속은 내가 사령관일때 부르는 호칭이잖아. 나한테는 바닐라에게 부르는 호칭으로 해줘야지."


더치걸은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그냥 바닐라 언니라고 부르는데... 그걸 남자인 사령관한테 하기엔 그렇지 않아? 그럼..."


으음, 맞는 말이네. 그렇다면 언니를 남자에 맞게 바꿔서...


"오ㅃ..."


"아저씨?"


...


"풉."


웃지마라, 바닐라.


...


그래, 뭐. 아저씨. 신선하네. 뭐. 그렇지?


오빠라는 호칭에 별 미련 없지. 닥터한테 질리도록 듣는데.


...그래도 아저씨라 불리기엔 아직 나이는...


아냐! 쿨하게 인정하자! 나는 아저씨!


하하하.


"어어, 왜 그래 사령관? 되게 고민하는 표정이야. 혹시 아저씨가 싫으면..."


"아아아아니! 아저씨가 딱 좋아! 그냥 아저씨라 부르면 돼!"


나는 펀쿨섹하게 인정했다.


인정한거다, 난?!


"미련한 자존심으로 마지막 기회까지 차버린 멍청한 집사군요."


좌우좌는 아직 우물쭈물거리며 고민하고 있었다.


"으음... 그래도 나는 권속을 권속으로 부르고 싶은데..."


그러다 그녀는 좋은 생각이라도 떠오른 듯 확 밝아졌다.


"그래! 그럼 짐이 둘 다 권속으로 삼아주마!"


"에... 예?"


"둘을 전부 권속으로 삼으면 사령관도 권속, 그대도 권속이라 부르면 되지 않느냐!"


어어, 생각보다 지능적인 전략이다.


"그대는 과거부터 이 사이클롭스 프린세스를 돌봐주었으니 짐의 권속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하긴 바닐라는 좌우좌가 심심할 때 나름 간식을 챙겨주거나 놀아주기도 했다.


그런데 그거 가지고 권속이 될 수 있다니, 상당히 프리하다.


반면 바닐라는 조금 곤란한 반응이었다.


"권속이라니. 저는 그럴 생각이..."


"히잉... 싫느냐...?"


바닐라의 반응에 울상으로 변해가는 우리 프린세스님.


바닐라는 그 모습에 눈을 굴리다 결국 한숨을 뱉었다.


"하아... 알겠습니다. 까짓거 해드리죠."


"헤헤헤!"


그 말에 헤벌쭉 웃는 좌우좌.


이때 나는 한 가지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장난스런 웃음을 지으며 바닐라에게 말했다.


"자자, 아가씨. 권속이 되셨다면 그에 맞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 얼빵한 얼굴을 보니 헛소리하는게 뻔합니다, 집사."


"바로 주인님을 쓰다듬는 것입니다!"


"헛소리가 아니라 개소리였군요."


"으, 으응?"


나는 어리둥절해하는 좌우좌에게 한 쪽 눈으로 사인을 보냈다.


그 표시를 본 좌우좌는 잠시 뒤 당당한 얼굴로 말했다.


"어... 맞다! 계약의 증거로 짐을 쓰다듬으면 된다?"


근데 말이 의문형이네.


"거짓말하지 말고 이제 가기나..."


"자자, 그러지 말고."


나는 바닐라의 등 뒤에서 끌어안아 그녀의 손등 위를 덮듯 손을 깍지끼었다.


갑작스런 공격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저항했다.


"뭐, 뭐하자는 겁니까! 애초에 이게 뭐가 제가 하는 행동입니까! 그냥 주인님이 하는 일이면서!"


나는 잡은 그녀의 등을 놓지 않으며 뻔뻔하게 말했다.


"에이. 기왕 애들 기분 맞쳐줘. 안 그래도 일이 바빠서 요즘 저 애들이랑 못 놀아줬단 말이야. 지금은 바닐라가 나잖아?"


"그, 그럼 제가 할 테니까 이 손은 놓아주세요."


"나도 좌우좌 쓰다듬어주고 싶으니까 이렇게 동시에 하자."


"진짜 보자보자...!"


"자자, 주인님! 얼~굴~!"


나는 얼른 좌우좌를 불렀다.


"으, 응. 얼~굴~."


내 신호에 좌우좌는 눈을 감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나는 바닐라의 손을 잡은 채로 그녀를 소녀의 앞에 세웠다.


결국 바닐라는 죽일 듯한 눈빛으로 날 노려보더니 내 손길을 따랐다.


"우움..."


좌우좌의 말랑한 볼살에 바닐라는 조금 살기가 줄었다.


그렇게 그녀가 한 눈을 판 순간, 나는 그녀의 귀에 간지럽히듯 속삭였다.


"우리가 아기 낳으면 이렇게 귀엽겠다, 그지?"


"!!!! 이, 이딴 말 하려고 속인겁니까아아!"


바닐라는 비명처럼 소리지르며 내 손을 뿌리쳤다.


"진짜... 진짜 죽여버릴 수 있습니다! 적당히 좀 하세요!"


"알겠어. 알겠으니까 일단 진정해봐!"


나는 휘둘려지려던 바닐라의 손을 애써 잡아내며 버텼다.


근데 두 소녀는 꺄르르 웃으며 우리의 대치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 좌우좌가 우리 둘을 중재해주었다.


"권속끼리 싸우지 말거라~. 짐이 선물을 주겠노라!"


그러자 그녀는 자기 주머니에서 무얼갈 꺼냈다.


넓적한 원통형 금속에 노란색이 칠해진 철제용기, 참치캔이였다.


"권속이 된 기념으로 짐이 내리는 힘의 결정이노라! 잘 받거라!"


좌우좌는 참치캔을 바닐라에게 내밀었다.


이야, 자기 용돈 겸 좋아하는 음식인 참치를 주다니. 참...


...


참치?


"저기, 우좌야."


"응?"


"그 참치캔 어디서 났어? 너 이번주 참치캔 다 썼다며."


그 말에 좌우좌는 쩍 굳었다.


즐거움에 취해 실수를 저질러 아차 싶은 얼굴이다.


"그... 저금해둔거다."


"너 가지고 싶은 물건 사고 싶다며 파티마씨에게 저축한 거 다 줬잖아. 내가 같이 있었는데."


"..."


이젠 완전히 말이 없어졌다.


설마...


내 불안이 적중한듯 건너편 끝에서 불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네요..."


힉! 소리를 내며 좌우좌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 앞엔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소속이며 오르카호의 창고와 물자를 담당하는 검은 머리의 소녀가 있었다.


"아, 아, 안드바리..."


벌벌 떨며 좌우좌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안드바리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은 채 좌우좌를 바라보았다.


"그 참치캔... 어디서 났어요?"


"서, 선물 받은..."


"어디서 났어요...?"


"어, 어쩌다 찾은..."


"어디서어어 났어요오오?!"


"히이이익!"


좌우좌는 후다닥 달려나갔고 안드바리는 그 속도를 초월하는 속도로 그녀를 쫓았다.


저거 잡히겠네...


아이의 울음소리와 빠른 발소리만 울려퍼진 복도는 덩그러니 나와 바닐라, 더치걸을 남겼다.


"...나도 이만 갈게, 사령관."


결국 아저씨라는 호칭은 포기한 건지 호칭이 원래대로 돌아온 더치걸은 둘이 사라진 방향으로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안드바리를 달래주려 가나보다.


"어... 우리도 갈까요, 아가씨?"


"...이럴 때만 아가씹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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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자 이내로 끝낼 줄 알았건만 이렇게 길어지다니...


제목 옆에 편수 말고 부제 같은거 붙이면 좋을까요?


'역지사지 바닐라 아가씨 - 외눈 공주와 땃쥐 소녀' 같이


그러면 보고 싶은 편 찾기는 편하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