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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제는 밤일에서의 소위 '역할극'이란 것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해본 연기라는 것에서 성취감은커녕 민망함 밖에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한 번 한 번을 필사적으로 임하는 입장에서 매너리즘 따위를 논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랑하는 이의 바람에 맞춰주기 위한, 다소 특별한 서비스.

처음의 제안에 응할 때도, 리제는 그 정도의 의미밖에 두지 않았다.

물론 그 전까지의 많은 정사가 증명했듯 이번에도 틀린 생각이었다.


"앗…"


손등을 내주었을 때까지만 해도 조금 낯이 간지러운 정도였다.

하지만 드러난 맨발을 깨질 듯 조심히 들어 올린 사내가 발등에 입을 맞추어오자, 심장이 한순간에 터질 듯 두근거린다.


"사모하고 있습니다."

"……."


그야말로 기사도 로망스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말투의 고백까지 나오자 차마 어찌할 바를 모르고 손으로 얼굴을 가려야만 했다.

뽀끄루 앞에서 부러 못되게 굴었을 때의 어색한 연기는 대체 뭐였지.

아, 이번 건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아니라 그런가.


자신의 손바닥과 눈싸움을 하며 잡다한 생각으로 페이스를 되찾으려 하는 연인의 모습은 지켜보는 것 만으로도 즐거웠지만, 사령관은 리제를 그렇게 풀어둘 생각이 없었다.


"아, 응……."


조금 몸을 들어, 이번에는 무릎에 입을 맞춘다.

본래부터 전희에 충실한 - 어느 의미론 과할 만큼 - 사내다.

평소의 농밀함에 비하면 이 정도는 산뜻하다 못해 차라리 아이들의 장난에 가까울 터.


하지만 연기라는 명목 하에 완전히 달라진 시선의 높이가.

설정에 충실하게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접촉이.

그럼에도 변치 않았으리라 확신할 수 있는 사랑이 너무나도 달콤해서.


어느새 물기가 스며든 시선 속에서, 리제는 자신이 여느 때 이상으로 빠르게 달아올랐음을 깨달았다.


"당ㅅ…… 기사님."


뜨거워진 머리로 다급히나마 호칭을 정정하고, 달콤한 향이 나는 입술을 혀로 축인다.


"그대의 생각이 저와 같아서 너무나도 기쁜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야속할 만큼 짧군요."


자신이 연기에 소질이 없다는 건 낮의 일로 넌더리가 날 만큼 깨달았다.

그렇다면 진심을 섞는 편이 그나마 낫겠지.


"사랑해 주세요. 밤의 장막이 덮여있는 동안에."


*   *   *


시간은 여느 때보다도 느긋하게 흘렀다.

손을 잡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연인처럼 조심스럽게 입술을 포개고,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도 빼놓을 수 없다는 양 조심스럽게 서로를 더듬는다.

정신은 이미 황홀함에 파묻혀 눈멀고 말았지만 신체적으로는 아직 여유가 넘친다.

지금껏 지새운 밤 중에서도 드문, 혹은 처음이라고 해도 될 만한 상황.

유감스럽게도 그 생소함을 견뎌내지 못한 것은 이번에도 리제 쪽이 먼저였다.


"기사님, 이제…."


가볍게 침을 삼키고, 자신의 머리카락에 이마를 대고 있던 사내의 손을 잡아 이끈다.

부드러운 눈으로 자신을 직시하면서도 여전히 절도를 잃지 않는 동작에 내심 오기가 차올라서-

리제는, 침대에 몸을 눕히며 애가 탈 만큼 느릿한 동작으로 몸을 가리고 있던 천을 풀어 미끄러뜨렸다.


"……."


얇은 천 너머의 나신은 분명히 익숙할 텐데, 그것이 드러나는 과정은 기묘할 만큼 색정적이어서 과연 사령관도 온전히 품위있는 기사의 연기를 유지할 수는 없었다.

흐트러진 호흡과 한컷 팽창한 동공.

그렇게 순간적으로 드러난 수컷의 불꽃이, 리제에게는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천천히 다리가 벌어지고, 숨길 수도 없이 -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었지만 - 젖어든 균열이 드러난다.


상스럽다.

정말로 상스럽지만.


"주세요, 당신을."


그조차 문제가 될 수 없을 만큼, 사내를 원했다.


*   *   *


돌아온 아침.


"다음엔 악의 제국에 붙잡힌 공주님이란 설정으로…."

"재미라도 들렸어요?"

"응."

"…내키면요."


함장실에서 악의 마법에 굴복해버려- 라는 헐떡임 섞인 대사가 흘러나온 것이 그리 멀지 않은 미래라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둘 중 누구도 알아챌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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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초반부터 사령관을 몸으로 유혹하겠다고 한 주제에 진짜 제대로 된 유혹을 이제와서야 하게 된 리제이빈다.

어차피 야하게는 잘 못쓰니까 달달한 맛이나 늘리는 것을 목표로 잡기로 했스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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