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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주세요. 무서운 언니들한테 잡혔어요.

같은 실없는 농담은 어찌되었든, 적당히 빈 방까지 데려가진 후의 분위기는 리제가 생각한 것과는 달랐음.

서프라이즈 파티… 는 한 1g 정도 기대했지만 당연하다는 듯 아니었고.

그렇다고 리제한테 정말로 날이 서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고.

뭐라고 해야 할까. 어딘가 깝깝함과 허탈함과 나른함 섞인 이 분위기는-


……패배감?


- 뭐가 잘 안 풀리기라도 했어요?


반쯤은 설마 하고 지른 질문이었는데, 네 명이 동시에 움찔거리는 걸 보니 놀랍게도 정답이었던 모양이야.

그리고 이 조합이면 당연히 사령관 관련이겠지.

소리 없는 눈치 싸움이 몇 번 오간 끝에, 포문을 연 건 성격상 답답함을 견디지 못한 앨리스였음.


- 주인님, 혹시 밤일에 욕심이 적은 타입인가요?

- ……으으으응???


내가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지?

차라리 예상되는 버그가 없다는 말을 믿겠다.

아니, 그보다.


- 적어도 두 분이 끼어서 할 질문은 아니지 않나요?


호위 상황이랑 식사 준비로 중파 여부 뻔히 파악하고 있을 리리스랑 소완 당신들 말이야 당신들.

말 없는 추궁에 몇 번 시선을 피하다가, 결국 소완이 답지 않게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넘겨받았음.


- 본래는 그리 이해하고 있었사오나.

 부인께서 각방을 쓰시게 된 것을 기회 삼아, 저희 나름대로 주인을 유혹하려 애써 보았사온지라.

- 잠깐, 잠깐만요.


그러니까, '당신 남편이 안 꼬셔지는데 혹시 목석임?'이라는 상담을 하려고 하는 거라고?

이야기를 따라갈 수가 없잖아.

왜 다들 선심 써서 기다려 준다는 표정인데? 내가 비정상이야? 그런 거야?


- 너무 대놓고 말하는 거 아니에요?

- 침실에 알몸으로 쳐들어가는 정도만 아니면 괜찮다면서요?


이마를 짚은 채 간신히 꺼낸 말에 리리스가 칼같이 대답했지.

우리 리리스가 과거의 고민 따윈 저 멀리 떨쳐버린 것 같아서 나도 기뻐요.

그런데 왜 눈물이 나지.


- 아무튼, 안 통했다는 거죠?

- 처참할 정도로.


그 앨리스가 저런 표현을 할 정도라니 얼마나 심했던 걸까.

좀 다른 방향으로 걱정이 번지려는 것을 막아준 건 리리스의 첨언이었지.


- LRL에게 해 주는 것과 좋은 비교가 될 정도로 상냥하셨죠.

- Oh…….


다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것인지, 쓰라린 침묵은 짧지 않게 유지되었음.

구체적으로는, 결국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하는 것도 본처(?)의 몫이라는 걸 리제가 떨떠름하게 받아들일 때까지.


- 일단 각방을 쓰게 된 게 그이 쪽의 문제가 아니라는 건 보증하죠.

 …너무 건강한 게 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 그렇다 해도 너무 길지 않사옵니까?

- 아.


그러니까 내가 완전히 회복된 게 보이는데도 방을 따로 쓰는 것 때문에 다른 문제가 아니냐는 의혹을 가지게 되었다는 거였구나.

어지간히도 꼬였다, 하는 생각과 함께 리제는 각오를 다졌음.

마침 사령관도 호드한테 약간이나마 밤일 이야기를 한다고 했으니, 자기가 조금 수치스러운 것 정도는 감안해야지.


- 잘 들으세요. 지금 저랑 그이가 각방을 쓰는 이유는―


사령관이랑 하는 게 너무 좋아서 머릿속에 야스만 든 짐승이 되어버릴 위험성을 경고받을 정도였다.

-라는 충격적인 진실에 세 명은 잠시 벙쪄 있었다가, 곧 역으로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했지.


아무튼 '막지는 않겠지만 사령관 측을 부추겨줄 생각도 없으니 알아서 잘 해보라'는 - 현상유지에 가까운 결론이 내려진 후에는 다들 자기 그룹을 찾아 흩어졌음.

딱 한 명.


따라오긴 했지만 정작 진행되는 이야기에는 흥미를 안 보이던 원작 리제를 빼고.


*   *   *


-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있나요?

- 별로.


직접 얼굴을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창문에 반사되는 시선이 자신과 맞는 시점에서 뻔한 거짓말이었지.

어떻게 할까. 이대로 두고 나가도 별 일은 없겠지만….


- 뭐야, 해충.

- 그냥요.


리제는 의자를 끌어다 원작 리제의 옆에 나란히 앉았어.

전장을 떠나 있던 자신과는 달리 저 쪽은 아직 현역인 데다 승급까지 받았으니, 갑자기 칼이라도 휘두르면 꼼짝 없이 죽겠구나- 같은 실없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이제와 그럴 일은 없다는 건 서로가 이해하고 있었지.

그대로, 한참을 말 없이 멸망한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다가-


- 아.

- 아.


거의 동시에 밤하늘을 가르는 비행선 - 세인트 오르카 - 를 발견했지.


- …주인님이 타고 계시는 거지?

- 네. 상업 지구를 향한다고 했으니 곧 이 쪽을 지나치겠네요.


그 말을 듣자 원작 리제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고, 어디로 갈지 짐작한 리제도 따라서 이동했어.

물론 도착한 곳은 옥상 - 공중정원이었지.

파티가 끝난 것만으로 어딘가 적적해 보이는 그 곳에, 남아있던 자매들이 두 리제를 보고 신기해하긴 했지만 둘은 가타부타 말 없이 적당한 의자에 앉아서 다가오는 세인트 오르카를 바라봤음.


리제가 말한 대로, 비행선은 호텔의 바로 위를 지나쳤고-

녹음 위로 떨어지는 색색의 빛이 한 순간 정원 전체를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보이게 만들었지.

아쿠아들이 꺄아꺄아 환호하는 소리 속에서-


- …나도 행복해질 거야.


실낱처럼 가느다랗게 흘러나온 원작 리제의 말은, 간접적으로 현재의 리제가 누리는 행복함을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지.


- 그렇게 될 거예요.


사랑받음으로서 비로소 충족되는 '시저스 리제'로서의 행복일지.

레아의 소망에서처럼 해야 할 일을 하며 안정을 찾는 '페어리 시리즈'로서의 행복일지.

사령관이 소완에게 바라고, 더 나아가 모든 바이오로이드에게 바라는 것처럼 스스로에게 소중한 것을 찾아낸 - '개인'으로서의 행복일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크리스마스 휴일이고, 원작 리제는 착한… 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비교적 무해해졌으니까.

산타라는 게 있으면 그 정도는 느긋하게라도 들어 주겠지.


- 그런데. 정말 밤일 이야기엔 흥미 없어요? 서비스로 조금 디테일하게 말해줄 수 있는데.

- 시, 시끄러워, 이 해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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