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일어나."


그녀만이 가진 목소리가 귓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햇살 몇 줄기가 뺨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기상을 재촉하는 요소는 목소리와 햇살 외에도 몇 개 더 있었지만 물먹은 솜이 들어차있는 것 처럼 머리가 무거워서 좀 처럼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깨가 흔들렸고 한 번 더 일어나라고 그녀가 재촉했다. 잘못들으면 아양 떠는 것 같은 신음으로 수면을 5분 연장할 것이란 뜻을 밝히고 이불을 잡아 가슴께까지 올렸다. 


"장난 친다?"


얼마 안가 "5분 지났어." 라고 그녀가 속삭였다. 체감상으로는 10초였는데 벌써 5분이 지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분명히 거짓말을 한 것이겠지. 아무리 의식이 몽롱하여 시간감각이 뒤틀렸다고 해도 5분이 10초로 느껴지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 어떻게든 나로 하여금 직접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게 하려는 그녀의 교활한 수작인 것이다.


"계속 안일어나면 가만 안 둘 거야."


목덜미에 손길이 느껴지고 다시 귓가가 울렸다. 속삭임은 조금 더 작아져 살짝 위협적이게도 느껴졌다.


"하지 마."


반쯤 잠긴 목소리로 대답하고 이불을 어깨높이까지 끌어올려 날아들어올 다양한 공격에 대비했다.


"자… 그럼…"


손가락들이 목덜미에서 일정한 리듬으로 부드럽게 움직였다. 가볍게 뛰어 노니는 나귀가 연상되는 움직임이다. 손가락으로 된 나귀는 목덜미를 타고 어깨 끝까지 갔다가, 쇄골의 가파른 길을 따라 내려가더니 잠옷을 재끼고 속살로 침범했다. 대흉근을 타고 갈비뼈까지 내려가려던 나귀를 붙잡고 고개를 살짝 돌려 조금만 눈을 떴다. 햇살에 눈꺼풀이 진동하듯 떨었다.


"어디까지 내려 갈 셈이야."


"엄청… 비밀스러운 곳까지…" 그녀가 짓궂은 웃음으로 속삭였다. "윗 쪽 당신은 어떨지 몰라도 아랫 쪽 당신은 기운차게 일어나 있는 것 같아서."


"…건들면 각오 해."


"각오면 이미 되어 있는데?"


키득키득대는 소리가 귓불을 간질였다고 생각했는데 살짝 따뜻하고 축축한 걸 보니 혀를 무기 삼아 공격한 것임을 깨달았다. 결국 몸에 남아있는 잠기운들이 모조리 날아가버려서 그녀를 붙잡고 단숨에 밑에 깔았다. 공수전환은 진즉에 끝났는데 그녀는 한 박자 늦게 꺄악- 하고 작위적인 신음을 흘렸다. 이런. 이제부터 착실히 수비에만 신경쓰기에도 벅찰텐데 도발을 하고 있다. 경고는 해두었으니, 얼마나 각오가 잘 되어 있는지 이제부터 천천히 확인해 볼 시간이었다.


"웃… 으읍…"


혀로 혀를 옭아매고 도망치지 못하게 양 팔로 그녀의 어깨춤을 옥죈다. 진즉에 일어나 아침준비를 마친 것 처럼 말했으면서 그녀는 여전히 잠옷차림이었던 것이 살짝 괘씸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발가락들이 종아리를 꼬집어댔다. 적당히 신경만 거슬리게 할 정도의 강도라, 도발 그 이상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다. 보아하니 아직도 도발할 여유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살짝 쳐진 그녀의 눈꼬리가 추가로 도발 해 온 것을 신호로 종아리를 무릎에 감았다. 나머지 한 쪽 다리는 대퇴에 감고, 양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아 좀 더 강하게 혀를 옭아맸다. 그렇게 몇 분 동안 그녀의 입 안은 혀로 다투는 전장이 되었다. 나는 공격에, 그녀는 수비에 전념했다. 그녀가 도망가면 집요하게 쫓아가고, 때때로 도망치는 듯 하다가 역공을 펼치면 제빠르게 그녀의 잇몸을 방벽삼아 혀를 대피시키고, 적당한 타이밍에 공격을 재개하는 흐름의 반복이었다.


"아… 으응… 할래…?"


연이은 전투에 지쳐 잠깐 소강상태가 된 참에 그녀가 말했다. 뒤이어 어느새 아랫 쪽으로 향한 그녀의 손바닥이 내 의식보다도 먼저 기상해있던 그것을 다정하게 애태웠다.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입술과 손으로 그녀의 가슴께를 열어젖혔다. 부드럽고 탄력있는 두 개의 언덕이 훌륭한 탄성을 뽐내며 눈 앞에 드러났다. 살결은 무섭도록 유령처럼 희고, 시푸른 실핏줄들이 이곳 저곳에 아기자기하게 퍼져있다.


만족할 만큼 눈으로 그녀의 살결을 훑고나서 언덕의 정상으로 향했다. 저 홀로 톤이 다른 정상은 상냥한 벚꽃색을 띄고있어 혀끝으로 핥아보면 달콤한 맛이 날 것 같다는 예상을 하게 만들었다. 쪼오옥- 소리가 날 정도로 과장되게 정상을 빨아올리면서 나머지 하나의 봉우리는 손으로 부드럽게 등반했다. 봉우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즉시 형태를 변화시킬 정도로 부드러워서, 한껏 힘을 주어 움켜쥐면 그대로 부스러지는 것은 아닐까하는 으스스한 상상이 들 정도였다.      


"앙… 애야…? 너무… 앗…"


뺨에 홍조가 돌고 슬슬 젖꼭지에 피가 쏠려 단단해져간다. 달콤한 신음과 키득거림을 반 씩 섞어 흘린 그녀도 질 수 없다는 듯 내 하물에서 노니는 손바닥에서 다정함을 걷어버리고 거칠게 움직여간다. 속옷을 뚫어버리고 튀어나올 듯이 팽창한 하물이 답답해서, 나는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넣고 싶어."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키득거렸다. 입가를 따라 흘러내린 타액이 햇살의 빛줄기를 받아 요염하게 빛났다.


우리 둘 다, 말 없이 잠옷바지와 속옷을 허물벗듯 벗어던지고 깊숙히 결합하기에 용이한 위치와 자세를 잡아나갔다. 귀두 끝이 근질거리고 그녀 또한 윤기가 어린 비부 쪽이 애가 탔는지 좀 처럼 빨리 자세를 잡을 수 없었다. 아마도 서로 원하던 체위가 달랐던 듯 하여 더 헤맸던 것 같다. 


무언으로 적당히 그녀와 타협하고 귀두를 서서히 들이밀었다. 아이를 다루듯 어서오라며 웃음기 가득 중얼거린 그녀가 무릎을 잡고 위로 젖혀올린다. 그 배려를 보고만 있지 않고 거들어 그녀의 허벅다리를 붙잡고 조금 더 밀어올린다. 귀두를 비부에 붙이고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어서 원하는대로 하지 않고 뭐하냐는 짓궂은 눈초리가 분했다. 귀두를 천천히 밀어넣고, 음경을 반 정도까지만 삽입했다가 다시 빼냈다. 저항감없이 스무스하게 들어갈 정도로 젖은 주제에 여유롭게 구는 것이 살짝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만 넣고 빼내길 반복했다. 딸려 나온 애액이 고운 비단실같은 형태로 딸려나오다가 순식간에 끊어져 사라졌다. 


"진짜… 뭐 해…"


눈가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섞여있지만, 동공에는 그것을 갈구한다는 기색이 어려있다. 나는 그것을 슬슬 주도권이 넘어오기 시작했다는 증거라고 보았고 이대로 완전히 상황을 장악하기 위해 다시 반 정도만 삽입한 상태로 그녀의 양 가슴에 두 손을 가져갔다.


"읏… 가슴이… 그렇게 좋아? …그럼 가슴으로 할래?"


두 손으로 양 가슴을 자랑하듯 모은 그녀가 도발적으로 물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크기가 안되잖아."


"충분히 되거든?"


순식간에 토라진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딱히 그런 건 의식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슴 크기에 민감한 듯 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녀는 나름 자랑스러워 해도 된다. 여성 평균치를 충분히 웃도는 크기의 가슴을 소유했으니까. 그러니까 미안하다며 몇 번이고 말했는데 그녀는 영 들으려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나. 말로 안된다면 행동으로 할 수 밖에 없겠다고 판단하여 가슴을 쥔 손에 살짝 힘을 넣었다.


"윽…"


얼마 쎄게 쥐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상황에 맞지 않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이번에도 척인 것이다. 무시하고 살짝 더 힘을 줘 가슴을 괴롭혔다.


"…아파."


"거짓말."


"진… 짜… 아, 아파…"


물먹은 듯한 목소리가 뭉개진다. 갑자기 창문이 덜컹거리며 뒤흔들린다. 햇살은 쨍쨍하고 바람은 불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지금은 끝까지 거짓말을 하는 그녀를 단단히 혼내 줄 마음이 가득하여 신경쓰지 않는다.


가슴을 쥔 손에 좀 더 힘을 넣어 몸을 지탱하고 허리를 밀어붙였다. 그녀가 원하는대로 뿌리까지 완전히 삽입된 음경이 반갑다는 듯 수많은 주름을 가진 질벽이 온몸으로 환성을 질렀다. 조여지고, 달라붙어온다. 맞닿은 점막과 점막들 사이에는 공기가 오고나갈 빈틈도 없을 것 처럼 느껴진다.


"아파… 아파…"


해가 모습을 감췄다. 빛줄기들이 해를 따라 사라져간다. 그녀가 진심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것 처럼 보여 빨리 결합을 풀고 상태를 살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뿌리까지 들어간 음경을 빼내고 다시 깊숙한 곳으로 집어넣기를 반복한다. 찌걱찌걱- 축축한 점막들이 부르는 야시시한 듀엣이 더욱 빨리 움직이라며 나를 충동질한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 여전히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고 있다. 의식과 육체가 따로 논다. 이제 머리는 당장 멈추라고 거의 울부짖는데 몸은 그녀를 탐하여 모두 먹어치우려 든다. 어떻게 된 것 같다. 뭔가 잘못되도 단단히 잘못됐다. 아무리 소리쳐도 나는 듣지 않고, 살짝이라도 멈칫하기는 커녕 착실히 차오르는 사정감에 겨워 허리를 더욱 빠르고 강하게 탄력적으로 움직여간다.


"아… 아아… 아, 아하하…"


흐느끼는건지 우는건지 분간이 안되는 소리를 흘리던 그녀가 말했다.


"…미안해."


머릿 속에서 직접 떠들어대도 모르는데 그녀가 중얼거린다고 알 리가 없다. 씨발새끼야. 지금 당장 허리를 멈추고 그녀를 살펴. 개새끼마냥 허리를 흔드는 건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지금은 좀 진정하라고!


고개를 돌리고 있기에 알아보기가 힘들었는데, 그늘까지져서 그녀의 표정을 알아보기가 더 힘들어졌다. 당연히 내 몸은 그런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한계직전까지 차오른 사정감을 최대한 버티며 그저 그녀의 가장 깊숙한 곳에 연신 좆대가리를 충돌시키고 짓눌러 찌그러트릴 뿐이다. 그녀는 이제 미미한 반응조차 보이지 않게 되어 내 몸은 마치 인형을 안고있는 듯한 모습으로 비춰진다. 그녀의 몸에서 체온이 빠져나가고 곱고 흰 피부는 건조시킨 과일마냥 탄성을 잃어 불길한 색으로 변색되어 간다. 


"아! 아! 아아! 나온다! 아!"


그녀의 다리를 꺾어 짓누르고 완전히 밀착시킨 음경이 경련한다. 질내에서 하얀 폭발이 인다. 처음 몇줄기는 강한 압력을 받아 일자로 곱게 뻗어나갔다. 뒤이은 정액들은 산탄마냥 터져 그녀의 가장 깊숙한 곳 언저리에 엉망진창으로 백색의 탄흔을 새겼다. 쾌감에 겨운 내 하체는 바르르 떨고 음낭에 저장된 내용물을 완전히 털어놓을 때까지 결합을 풀 생각이 없다는 듯, 음경은 그녀의 가장 깊숙한 곳을 꾸욱꾸욱 하고 눌러댄다. 


나는 절규함과 동시에 이 이상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극상의 쾌감에 몸을 떤다. 기분 좋은 나른함이 몸을 잠식하기 시작해 그녀의 몸 위에 몸을 포갠다. 


그러자, 죽은 듯 미동도 않던 그녀가 어렵게 두 손을 들어 내 목을 감는다. 다시 한 번 '미안해' 하고 속삭인다. 그녀는 그제서야 고개를 돌린다. 마침내 확인 할 수 있던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엉망이다. 몸에 있는 체액이란 체액은 전부 눈물로 전환하여 흘려댄 것 처럼 얼굴 전체가 눈물 투성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혹은 대답하지 못한다. 무언가 잔뜩 할 말이 있어도 안하는 건지도 모르고 달리 할 말이 없어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않는건지 못하는건지 확실히 하려고 하지만 몸과 분리 된 의식은 서서히 옅어져가기 시작해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나, 내 몸은 미소짓고 다시 허리를 가볍게 튕긴다. 그녀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미소짓는다. 얼마든지 내 몸을 받아주겠다는 듯,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눈물줄기들은 기세를 키워간다.  눈물로 세안을 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인 상태인데, 또 흘릴 수 있는 눈물이 남아있는가보다. 


섹스가 존재의 이유라도 되는 것 처럼 내 몸은 다시 허리를 움직여간다. 음경은 우습게도 첫 사정 전보다도 더욱 커져 또 한 번 그녀의 안에 탄흔을 남기기 위한 과정을 밟아간다.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탄흔을.




 


* * *

          




"으아아아악!"


헤엄치듯 허공을 휘적이며 일어났다. 지저귀는 새들의 소리와 매미소리 같은 소리가 귓가를 멤도는데, 의식이 몽롱한 탓에 물속에 있는 것 처럼 흐릿하게 들렸다.


취객처럼 비틀거리다가 몸을 지탱하기 위해 처음 닿은 아무것에나 손을 짚었다. 감촉으로보아 나무인 듯 했다. 짚은게 나무였으니 안개 낀 시야에 슬쩍슬쩍 보이는 푸른 빛은 아마도 잡초들일 것이다.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진 풀일지도 모르지만 시야가 정상이 아닌 탓에 제대로 확인해 줄 수가 없으니 일단은 잡초라는 카테고리에 집어넣는다.


떠나있던 영혼이 돌아온 것 마냥 서서히 전신의 감각들이 제 기능을 찾아간다. 시야에 낀 안개가 걷히고, 물속에서 나온 의식은 정상적인 호흡을 통해 명료함을 띤다. 


촉각이 완전히 돌아오자 그제서야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까지도 느껴지는 햇살이 이제껏 계속 눈을 때려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마도 눈가만 벌개진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만큼 콧등 윗쪽 전체가 따가웠다. 두 다리가 온전히 몸을 지탱할 정도로 힘을 찾게되어 몸을 일으켜 사방을 살폈다. 숲 한복판인 것 같은 장소다. 매미 소리와 특유의 정체된 공기로 미루어보건대 여름이다. 그것이 이상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속해있던 계절은 겨울이었으니까.


"어…?"


일시적으로 사고가 지체되었다. 계절에 대한 기억은 있는데 그 계절 속 내 마지막 행적에 대한 기억이 없는 탓이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강풍을 맞고 있었다는 것과 신발을 벗고 있었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꽃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었다는 것도 기억난다. 그리고 꿈. 상황 상 이 숲에서 잠들어 있던 것 같은데 그 사이에 꾼 꿈이 너무나 생생히 기억난다. 보통 꿈이란게 이렇게 자세히 기억나는 것이었나? 뚜렷한 스토리 없이 단편적인 이미지만이 얼기설기 얽어놓아 늘 불분명한 것이 꿈일텐데 그녀와 몸을 섞는 꿈은 마치 실제했던 시간처럼 느껴졌다. 난 그녀와 몸을 섞은 적이 없는데도.


그리고 그 꿈을 통해 그녀의 존재를 떠올리자 애초에 기억은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듯이 머릿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주장했다. 어딘가 망가져버린 그녀와 재회하여 뒤늦게 미래를 그렸으나 그녀는 떠났다. 사랑하던 사람을 구원하지도 지키지도 못한 내가 저주스러워 목숨을 버리려했고, 실제로 버렸다. 높은 빌딩, 내 회사의 옥상에서 공중에 몸을 날렸고 다리든 머리든 어느 쪽이 먼저 지면에 닿았을지는 모르겠지만 터져나올 피가 꽃모양으로 퍼지기를 바랐던 것이 마지막 기억의 끝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천천히 숲을 걸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죽었을 것이다. 아마도. 아니, 분명히. 내 회사의 사옥은 그 일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따라서 살아남는다는 가능성은 없다. 그 높이에서 자유낙하를 펼치면 결과의 최소값은 죽음이고 최대값도 죽음이다. 그 높이라면 살살 떨어지든 강하게 떨어지든 아스팔트에 닿았든 잔디에 닿았든 처음으로 부딪힌 부위는 반드시 터지고 박살나는 것이다. 설령 즉사하지 않는 부위가 먼저 지면에 맞닿았더라도 고통에 쇼크사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의식이 있다. 감각도 있다. 내 시각은 숲에 있는 나무들을 인식하고 후각은 싱그러운 여름의 향을 감지하며 촉각은 물기를 머금어 정체된 공기를 느낀다. 설마, 꿈인가? 그녀와의 꿈 속에서 한 번 더 꿈을 꾸게 된 것인가? 몽중몽이라는, 뭐 그런 것인가?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죽었다. 내가 자살을 시도하기 일주일 전에 목을 매어서, 비탄으로 가득한 유서를 발치에 남기고.


일단… 주위부터 살펴보자. 죽었든, 실은 죽지 않았든 이곳이 꿈인지, 현실인지, 사후세계인지, 명확히 판별할 수 있는 수단도 방법도 없다면 침착하게 주변환경부터 살피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약 사후세계라면, 이건 좀 의외다. 나는 영락없이 지옥으로 떨어질 줄 알았는데 이 녹빛으로 가득한 숲은 지옥이 가진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싱그럽고 풍부한 색채를 띤다는 점에서 천국처럼 느껴진다. 거기서 또 의외인데, 내가 생각하는 천국이 가진 이미지는 끝없이 펼쳐진 밀밭이었다. 서구권 세계에서 으레 표현되는, 그런 광대한 밀밭 말이다. 


상황파악에는 전혀 도움되지 않는 비생산적인 사고나 하면서 얼마간 걷다보니 숲을 나왔다. 숲 한복판에서 눈을 떴어도 그리 깊지 않은 곳에서 잠들어있던 듯 했다. 숲을 나오자 펼쳐진 풍경은 어떤 의미로는 꽤 아름답고 운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질적이고 기괴하기 짝이 없게 느껴지기도 했다. 크고 낮은 건물들의 형태나 디자인이 내가 알던 것과는 미묘하게 달랐고 창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잡초와 넝쿨을 시작으로 나무에 이르기까지 온갖 식물들이 위치하고 있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도로변의 각종 차량들도 건물들과 비슷해서, 내가 알던 디자인의 차량들은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인적이 드물어보이는 숲과 인접한 곳에 바로 도시 한복판으로 보이는 곳이 펼쳐져 있다니, 내가 아는 한에선 우리나라에 그런 곳은 없었다.


터덜터덜 도시로 보이는 곳을 걸으면서 느낀 것인데 자연과 하나가 된 것 같은 인상 속에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매캐한 냄새로, 도시 어디든 그런 냄새가 감돌았다. 몇몇 구석진 곳이나 상가로 보이는 건물, 골목들에서는 그 매캐한 냄새에 어울리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도로는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었어서 하나같이 금이 가 있다. 전쟁의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듯한 장소들이 그렇지 않은 장소들 보다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이것은 좀 더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던게 아닌가 싶었지만 아무래도 나는 아직 몸이 성하지 않은 것이거나 어딘가가 이상해지기라도 한 모양이라 그 사실이 별로 놀랍지는 않았다. 그래도 살짝 꺼름칙한 것은 있었는데,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은 없어도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이기에 그로 인한 흔적이나 기척이 조금은 느껴져야 할 것인데, 그런 인적다운 인적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모두들 이미 오래 전에 사라지기라도 한 것 처럼.


얼마나 걸었을까. 슬슬 다리가 저려와 반쯤 작살난 차량을 등받이 삼아 앉았다. 평소라면 차도로 한복판에 앉는다는 행위를 했다가는 미친 놈 취급을 받았겠지만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평소라는 표현이 적용되지 않는 곳인 듯 했고 그런 취급을 해줄 만한 사람도 없어서 앉는 것에 별다른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변색되고 갈라진 도로변에 뿌리를 내린 잡초에서 개미 몇 마리가 나타나 일렬을 지어 다급하게 발치를 지나쳐갔다. 자신들의 왕국에 무언가 중대한 일이라도 터진 것 같았다. 침입자라도 나타난 걸까. 사람이 있든 없든 자연은 착실히 순환을 반복하고 있다는게 왜인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곧바로 개미들에게 사과했다. 인간이 있어서야 자연은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는 오만한 사고방식은, 자살을 시도한 놈이 갖기엔 분에 넘치는 것이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다. 높고 낮은 건물들을 휘감은 넝쿨과 넝쿨 사이로 새들이 지저귀며 날아다녔고 몇몇 들짐승들이 나는 알 수 없는 의미를 담은 울음소리를 서로에게 전하다가 골목과 건물들 뒤로 사라졌다. 그러면 바톤터치를 하듯 또 다른 종의 짐승들이 모습을 드러내 이전에 사라졌던 종들과 비슷한 행동을 하다가 사라졌다. 그렇게 네 종의 짐승들이 사라지고 반복한 참이었다.


다섯 번째로 나타난 짐승은, 상당히 다채로운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개중에는 이족보행을 하는 짐승도 있었다는 것이다. 하얀 색과 파란 색의 무늬는 먼 발치에서도 확연히 눈에 띄어 별로 강해보이지 않는 겉모습이 갖기엔 우려되는 색상이었다. 허리춤에는 날개와 비슷한 것이 다리쪽으로 뻗어있다. 왠만한 짐승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계적인 느낌의 날개로, 그것이 의아하고 신기하여 좀 더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 게슴츠레 눈을 떴다.


그리고 확인한 것은, 그 날개달린 짐승도 나를 향해 나와 비슷한 몸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짐승이 아니다.


그런 확신이 들자 용수철 튕기듯 지면을 박차고 나가 그 인간처럼 보이는 것에게 냅다 달려갔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비친 그것은 양 팔을 허둥대더니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서서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10m가 채 되지 않는 거리가 되었을 때는 왜인지 새된 비명을 질렀다. 내가 공격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렇다면 미안하다. 내가 처한 상황의 파악도 안되고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그랬다는 변명과 사과는 의사소통 중에 얼마든지 해 줄 생각이다.


"기다려!"


"꺄아아앗!"


날개로 보이는 그것이 인상에 걸맞는 기계적인 소리를 내면서 날아오르려던 것을 몸을 날려 막았다. 갈라지고 깨져 거친 도로를 대여섯바퀴 쯤 구르고 고개를 들었다. 전신이 까지고 비명을 질렀지만 일단은 낚아챈 존재의 안위가 먼저였다. 


"우으으…"


겁먹어 울먹이는 이것은, 분명히 아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신경쓰이는 것은 이것저것 있었어도 일단은 의사소통이 가능할 것 같은 존재를 찾았다는 것에 초점을 두기로 했다.


"괜찮니?"


"아… 네…"


비틀대면서 어렵게 일어선 뒤에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여기저기 들러붙은 흙먼지들을 털어주고 어디 다친 곳은 없나 면밀히 살폈다.


그렇게 면밀히 살피다가 느낀 것이지만, 이 아이. 낯설지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한 이미지라 어딘가에서 자주 봤다고 해도 믿을 정도다. 기계같은 날개를 달고 후드같은 차림을 한 소녀는 너무나 현실착오적인 인상이기에 그럴 리가 없는데, 내 기억 한 켠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는 것 처럼 느껴졌다.


"고, 고맙습니다. 인간 님."


"…뭐라고?"


눈을 맞추지 못하고 쭈뼛쭈뼛 고개를 숙이는 것 보다 나를 칭하는 그 단어가 신경쓰였다.


"인간 님?"


"어… 네. 인간 님이시잖아요?  ……아! 맞다!"


소녀는 무언가 중요한 걸 떠올렸다는 듯 퍼뜩 몸을 튕기고 몸 구석 여기저기를 뒤지더니 품에서 꺼낸 손바닥만한 물건을 입가에 댄 다음,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포, 포, 포…"


"포?"


"폭스트롯!! 인, 인간 님을 발견했습니다!"


앳된 목소리가 도시에 메아리쳤다.






* * *




편의점이 연상되는 건물에서 무너진 자재를 의자삼아 앉았다. 엘라는 여기저기 기웃대더니 양 손에 하나씩 뭔가를 들고 왔는데, 물이 든 컵 모양 용기였다. 아무래도 컵으로 삼을 만한 것을 열심히 찾고 있던 듯 했다.

   

"그러니까… 네 이름이…"  "엘라에요. 와쳐 오브 네이쳐 소속이구요. 방금은 안전지대에서 홀로 탐색하던 중이었어요."


이름은 그렇다 치고, 와쳐 오브 네이쳐? 자연의 감시자란 뜻이지? 안전지대? 뭔가 위험한 것이라도 있다는 건가? 탐색? 그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는 도시에서 뭘 찾고 있었다는 건데?


"미안한데, 다시 한 번만 말해 줘. 인간이 어떻게 됐다고?"


"…아 …음… 그러니까…"


소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숙였다. 고심하고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는게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모두들… 잠드셨어요."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해 고심한 것이리라. 그런 배려야 자살을 시도한 나에게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었지만 나를 위해 나름대로 소소한 고심을 했다는게 상당히 고마웠다. 


그러나 그 뿐이다.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에서 끝난다. 엘라라는 소녀가 말한 문장을 속으로 읊어본다. '모두들 잠드셨어요.' 그러니까. 인간이? 모두? 전부? 남김없이? 그렇다면 거리에 그 어떤 이도 없다는 것이 납득 됐지만 여전히 말도 안되는 소리로 들린다. 혹시 질 나쁜 거짓말을 통해 나를 꾀어내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왜, 있지 않나? 범죄에 이용되는 아이들. 이 엘라라는 소녀는 그런 범죄에 이용되는 소녀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게다가, 거짓말 치고는 상당히 구멍이 많다. 모든 인간이 잠들었다면 어째서 이 엘라라는 소녀는 사지 멀쩡하게 안전지대라는 곳을 유유히 거닐고 있을 수 있었을까? 엘라는 인간이 아니라는 뜻일까? 설마. 그거야말로 바보 같은 소리다. 누가 봐도 인간이다. 통통한 다리도, 가는 팔도, 어린 외모에 어울리지 않게 선명한 이목구비도, 전부 인간이라고 말해온다. 꽤 커다란 가슴은 이질적이게 느껴지긴 했지만, 크기와 상관없이 가슴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이라는 증거다.


"저는 바이오로이드니까요."


인간은 모두 죽었는데 어째서 너는 멀쩡하냐는 물음에, 엘라는 그렇게 답했다. 바이오로이드? 바이오로이드. 일상적으로는 듣기 어려운 굉장히 공상과학적인 단어가 내 머릿 속에 맴돌았다. 단어는 천천히 떠내려가는 물에 둥둥 떠다니다가, 갑작스런 급류에 휩쓸려간다. 이윽고 폭포로 떠내려가고 전조 없이 나타난 용오름에 휘말린다. 용오름은 원심분리기로 변모하고, 단어는 눈으로 쫓을 수 없는 속도로 회전한다. 두개골 안 쪽에서. 


잘게 분리된 단어는 그렇게 뇌에 스며들어 두통을 유발했다. 바이오로이드. 분명히 들어본 단어다. 기억이 명확하지 않아 어디서 보고 들었는지는 자세히 떠올릴 수 없었지만 자살 전에 몇 번이고 듣고, 보았던 단어였다. 


"괜찮으세요!?"


현기증이 돌아 몸이 기우뚱 옆으로 넘어갈 뻔 했다. 숲을 지나 도시를 돌아다니다가 이 편의점과 같은 장소에 이르기까지, 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감이 받아들이는 정보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래. 괜찮아."


보란 듯 건네받은 물을 단숨에 들이키고 완전히 비어버린 컵의 안쪽을 뒤집어 보였다.


"이제 곧 강한 분들이 인간 님을 직접 데리러 올 거니까요. 힘드시더라도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괜찮다고 여유롭게 말했는데 현기증이 좀 처럼 가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 이건 위험한데. 한 번 더 몸이 기울어질 것 같아 양 팔로 몸을 지탱했다. 이거야 원. 기묘하기 짝이없다.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의식이 남아있질 않나. 그게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보장도 없고 이 곳이 현실이라는 확신도 없질 않나. 현실도 아니면 꿈이거나 사후세계거나 할텐데 꿈은 절대 아니다. 편의점에 들어오자마자 주저앉아 잠깐 졸아버렸는데, 다시 눈을 떴을 때도 편의점이었다. 엘라의 무릎을 베개삼았다는 것은 덤이다. 꿈에서 잠들어 깨어나면 또 동일한 꿈인 경우는 나는 한 번도 겪지 못했다. 들어보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사후세계가 남는데, 사후세계는 있는지 없는지 증명되지도 않았고 그럴수도 없는 곳이니 아니라고 여겼다. 아니 그전에, 감각이 너무나 생생하다. 뭔가 사후세계라고 하면 모든 면에서 살짝 흐릿하고 불분명한 이미지라는 느낌이 있는데 이렇게 감각이 생생하면 좀처럼 사후세계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게다가 엘라도 있다. 엘라는 인류가 멸망했다고만 했지 이곳이 사후세계라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당당한 사후세계의 주민이라면 이곳이 사후세계라고 먼저 말해줄 법도 하고 숨길 이유도 없는데 그러지 않은 것이다.


"…모르겠다."


"네?"


오버클럭 된 뇌를 식히면서 중얼거린 혼잣말에 엘라가 반응했다. 신경쓰지 말라고 손을 휘휘저었는데 엘라는 또 내가 걱정 됐는지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얼굴을 들이밀며 이곳 저곳을 살펴댔다.


"…미안한데, 조금 자고 싶어."


"아, 아! 죄송해요…"


"아니… 죄송할 건 없고…"


참… 원래도 아이는 영 잘 다루는 편이 아니었지만 그걸 차치하고서라도 엘라는 상대하기가 어렵다. 다소 병약한 인상에 어울리는 소심함의 소유자가 누군가가 관심이 필요한 상황에 처하면 주저없이 접근해온다. 좋게 말하면 배려심 깊고, 안좋게 말하면 피곤하다.


됐다. 이제 더 머리를 굴리는 것은 무리다.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파악하는 것은 일단 충분히 수면을 취한 다음에 재개한다. 자살을 한 이후에도 의식이 남아있다는 것을 살아있는 것이라고 여겨도 좋은지, 그것을 기뻐해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지만 그 또한 자고 일어나 생각해보기로 한다.


그렇게 의식이 페이드 아웃 되어가기를 기다렸는데, 귀청이 터져나갈 것 같은 굉음이 지근거리에서 들렸다. 엘라의 비명이 들렸고 나는 그 비명에 한 번 더 놀라 몸을 일으키다가 중심을 잃고 나자빠졌다. 바닥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손 들어!"


비틀대며 몸을 일으키고 있는데 건물 출입구에서 다수의… 화기를 지닌 군인같은 인상의 존재들이 들이닥쳤다. 총구는 나를 향했고, 엘라는 무어라 그들에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한 번 더 굉음이 울렸다. 그것이 폭발에 의한 것임을 출입구에 각종 파편이 튀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화기를 들이대는 이들의 입이 소리없이 움직였다. 꼭 팬터마임 배우가 한 동작 한 동작 수행할 때 마다 관객들에게 착오를 일으키기 위해 움직이는 것 처럼 보여서, 나는 상황에 맞지 않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때 팔이 뒤로 젖혀져 꺾였고 다리는 무너져 얼굴이 지면에 쳐박혔다. 추측컨대 이들 중 누군가가 뒤로 돌아왔던 것일거다. 엘라의 목소리가 미약하게 들렸다. 실제로는 굉장히 크게 소리치고 있겠지만 청각이 몸에서 멀어진 탓에 좀처럼 무어라 말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의식이 흐려진다. 좋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는 것은 이제 지쳤다. 파악하더라도 좀 자고나서 해야겠다. 왜 나를 제압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군인들이 인질을 구출 할 때도 처음엔 제압을 한다고 하니 그런 것과 비슷한 뉘앙스인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게, 이번에야말로 막 잠에 들려는데 그 직전에 몸이 들려버려서 또 다시 의식이 몸에 고정되어버렸다. 성질이 나 욕지거리를 퍼부어버리고 싶다는 욕구를 꾸역꾸역 되삼키고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그러는 중에 깨닫는다. 수면방해야말로 인간을 단시간에 예민하게 만드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몸이 붕 뜬 상태로 흔들거리면서 이동하고 있는게 느껴졌다. 눈을 살짝 떠 확인해보니 들것에 실려가고 있는 듯 했다. 어느새 해는 기울었는지 폭발로 엉망이 된 편의점 근처는 온갖 조명으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거대한 사족보행의 차량으로 보이는 듯한 무언가와 내게 화기를 들이밀었던 이들이 대화하는 것이 보였다. 엘라에게는 미안하지만 거듭 생각해봐도 이 알 수 없는 장소와 이것들은 정상이 아니다. 어딘가 미쳐있다고 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쩌면 미쳐가는 것은 나이기에 그렇게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미칠듯한 수면욕 앞에서는 아무래도 좋을 것들을 생각하다가 의식이 끊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족보행 차량과, 그 외 비슷한 외형의 차량들, 엘라의 날개, 그리고 기계의 구동음 같은 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이질적인 무언가가 편의점 반대편 건물의 골목에 있었다. 붉은 빛을 띠는 그것은 거대한 눈과 같아서 전설이나 신화를 바탕으로한 영화에 등장하는 괴물 같았다. 그리고 그 아래는 새카매서, 무언가에 의해 그런 색으로 덧칠되었다는 느낌의 칠흑 일색이었다. 붉은 외눈에 어울린다면 어울리고, 그렇지 않다고 하면 그렇지 않은 인상이었다.


그 눈과 같은 것이, 똑바로 나를 향하고 있었다. 착각인가 싶어 몇 번 눈을 꿈뻑이며 똑바로 응시해봤는데 내가 실려가는 방향 그대로 붉은 외눈은 움직였다. 


'살려주세요…' 


뭐?


'아파… 도와주세요. 제발…' 


잘못들은 건가 의아해서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외눈을 좀 더 자세히 보려고 한 참에, 괴물 근처에서 공기를 강렬하게 진동시키는 간결한 굉음이 울렸다.


그 굉음을 발생시킨 무언가가 외눈을 관통했다. 아마도 내게 들이밀어졌던 화기 비슷한 것에서 탄환이라도 발사된 것이겠지. 


들것은 사족 보행 차량에 오른다. 이것에 의해 어디로 가게 되는 걸까.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의외로 빠른 차량은 금방 그 구역을 벗어났다.


건물에 가려져 그 괴물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 외눈의 붉은 빛은 미약하게 명멸하다가 힘 없이 소멸했다.





* * *





의식을 되찾자마자 두 눈이 맺은 상은 백색으로 가득한 세상이었다. 차분함을 갖추고 다시 보니 그것이 어느 시설의 천장이었음을 알았다. 몸은 뉘여있다. 고개를 돌려 장소를 둘러본다. 미니멀 아트 전시장처럼 새하얗기만 한 넓직한 장소는 단 한 마리의 세균도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이 비쳐졌다. 마치 병실 같다. 병실이 아니라고해도, 의료적인 것과 연관된 장소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내가 누워있는 이것은 병상인가. 몸 군데군데에 검사할 때나 쓰일 것 같은 장치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누구에 의한 것인지, 내게 이런 장치를 단 이유는 무엇인지 추측 할 수는 없었지만 딱히 나쁜 의도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느끼는 것에 내 머리맡에 있는 이가 한몫했다. 엘라. 엘라는 본인의 팔을 베개 삼아 새근새근 잠들어있다. 설마하니 나를 간병이라도 한 것인가. 장치나 장소로 미루어보건대 딱히 엘라가 뭔가를 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만히 곁에서 지켜봤다는 소리인데, 그럴 의리가 있나? 고작 만난지 몇 시간이 된 사이다. 아무리 선하다 해도 그렇게 부담 될 정도의 관심과 정성을 쏟을 이유는 없다. 


"…"


뭐, 그런 삭막한 생각은 접어두고, 지금은 엘라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지켜본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면 포근하게도 느껴지는 그 숨소리를 수면제 삼아 다시 잠에 드는 것 뿐이다. 


조심스럽게 엘라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후드가 벗겨져 드러난 짧은 금발은 감탄스러울 만큼 부드럽고 고와서, 이런 걸 두고 비단같은 머릿결이라고 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남아있는 피로를 날려버리기 위해 다시 눈을 감았는데 멀찍이 있는 출입문 근처에서 숙덕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병상과 출입문의 거리는 꽤 되는데도 그런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은, 아마도 출입문 너머에서 이뤄지는 대화는 꽤 큰 소리로 이뤄지고 있다는 뜻이다. 마이크라도 사용 중인가보다.


'이것 봐. 놀랍지 않아?'


여성의 목소리였다. 살짝 앳된 목소리인걸로 보아 엘라와 비슷한 연령대라고 추측했다. 아마도 대화의 주제는 나고, 뉘앙스로 보아 그 대화를 리드하고 있는 듯 했다. 대단한데. 나와 관련 된 대화라면 의료적인 내용이 주가 될텐데 엘라와 비슷한 연령대의 아이가 그런 대화를 리드하고 있다는 것인가.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 다음 들린 목소리는, 당차고 힘 있는 여성이 연상되는 목소리였다. 당황한 기색이 어려있었지만 차분함을 잃지 않은 듯 느껴졌다.


'가능한 일이니까 저 남자가 멀쩡한 것이겠지. 뇌가 FAN파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어.'


FAN파? 뇌? FAN파라니 뭘 말하는지 모르겠다. 내 뇌라도 검사하고 있던 것인가? 몸에 붙은 장치와 비슷한 것은 머리에 하나도 붙어있지 않은데.


두 여성 말고도 다른 이들의 목소리도 들렸지만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따라서 대화도 영 알아들을 수 없었다. 지겹게도 들려오는 뇌와 FAN파 라는 단어가 아직 가시지 않은 피로와 충격의 잔재를 이어붙여 버려서, 서서히 뇌를 잠식하게 만들었다.




  

* * *


다음 화


https://arca.live/b/lastorigin/31494873


휴. 생각보다 빨리 썼다. 


되는대로 금방금방 써올게~ 다음 주는 덜 바빴으면 좋겠다 ㅜㅜ


퇴고는 천천히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