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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모음


[소설] 인간 2호 나오면 후회물보다도 추노찍을거 같지 않냐 - 1


[소설] 인간 2호 나오면 후회물보다도 추노찍을거 같지 않냐 - 2


[소설] 인간 2호 나오면 후회물보다도 추노찍을거 같지 않냐 - 3


[소설] 인간 2호 나오면 후회물보다도 추노찍을거 같지 않냐 - 4


[소설] 인간 2호 나오면 후회물보다도 추노찍을거 같지 않냐 - 5


[소설] 인간 2호 나오면 후회물보다도 추노찍을거 같지 않냐 - 6



1

“휴가요?”

 

금태양은 놀란 눈으로 사령관을 쳐다보았다. 그런 그의 반응을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는지 사령관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 휴가 주고 나도 시찰 겸, 휴가 겸해서 지휘관들이랑 요안나 아일랜드 좀 들르려고.”

 

휴가. 그것도 첫 여름 휴가. 머릿속으로 가볍게 읊조리기만 해도 온몸의 내분비샘이 짜르르 수축하는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달콤하지만, 한편으론 걱정도 들었다.

 

“그런데 지휘관분들도 요안나 아일랜드에 가시면 오르카 행정 처리는 어떻게 하죠?”

 

“행정 보조가 되는 램파트가 있어서 그 친구한테 맡길 생각이야. 그래도 권한 때문에 어쩌다 한 번씩 사람 손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으니까, 그것만 좀 부탁할게. 승인만 하면 되니까.”

 

‘부탁해도 괜찮지?’라는 눈빛을 보내는 사령관에게 금태양은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2주나 주시는 데 뭔들 못하겠어요.”

 

“하하… 그래도 휴가에 겐세이 놓는 거 같아서 좀 미안하네. 고마워. 램파트 번호랑 이것저것 필요한 자료 갈 거야.”

 

사령관은 자리에서 일어나 금태양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말했다.

 

“다음 주부터 2주 동안 잘 부탁할게. 그럼 밥이나 먹으러 가자.”

 

 

2

챙!!!

 

싯누런 불똥을 튀기며 제로의 닌자도가 여우 가면의 대태도를 흘려낸다.

 

이어지는 여우 가면의 횡 베기 2회. 첫 조우에선 이마저도 버거웠지만, 어느덧 다음을 노릴 수 있는 공격이 되어있었다.

 

나기나타로 휘젓는 것처럼 느껴질 긴 리치를 가진 대태도의 공격을 흘려낸 제로는 여우 가면의 머리를 밟고 뒤로 뛰어오르며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

 

예상한 대로 하단에서 이어지는 깊숙한 찌르기가 이어진다. 튕겨내거나 옆으로 피하기는커녕, 제로는 앞으로 돌진한다.

 

“…!”

 

오른쪽 몸을 향해 들어오는 오오타치의 칼등이 손바닥으로 가도록 섬세하게, 그러면서도 과감하게 왼손으로 날을 잡아당긴다.

 

이미 몇 번의 공방으로 자세가 흐트러진 여우 가면. 제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마지막 일격을 질렀다.

 

 

3

크게 걸음을 내디디며 오른쪽 위 사선으로 제로의 닌자도가 여우 가면을 갈랐다.

 

아슬아슬하게 치명상은 피했는지, 상대는 왼쪽 볼의 자상뿐, 여전히 건재했다.

 

닌자답게 방심하지 않고 자세를 잡고 있던 제로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녀의 눈에 비치 것은 여전히 건재한 상대. 두 동강이 나 귀에 걸린 가죽끈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얼굴에 붙어있기만 한 가면을, 그녀는 천천히 집어던졌다.

 

제로를 놀라게 한 그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어째서…?!”

 

가면을 벗어던진 붉은 닌자는 눈꺼풀을 가늘게 조이며 웃었다.

 

“마법이니까, 피하기 없기~!”

 

 

4

컷 신이 끝나고 3페이즈가 시작됨을 알리는 RPG가 붉은색 위(危) 자를 띄우며 날아들었다.

 

처음 보는 공격에 당황한 금태양은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위험공격이라면 찌르기나 하단, 잡기 공격뿐, 투사체가 위(危) 자와 함께 날아온다는 설명은 없었다. 그렇다면 저 공격은 셋 중 하나일 것이다.

 

공격이 날아오는 걸 보아 하단은 아닐 것 같았다. 잡기는 더더욱 아니고. 그렇다면 전혀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찌르기류의 공격일 것이다.

 

찌르기류라면 앞으로 스텝을 밟아 간파하기를 할 수 있겠지만, 상식적으로 투사체를 간파하기로 대응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럴 거면 지금까지 숱하게 나온 활 쏘는 잡몹들을 그렇게 힘들게 잡을 이유가 없던 거잖아.

 

좀 더 고민해볼 시간이 있었다면 좋으련만, 코앞까지 다가온 투사체에 금태양은 가드를 올려 튕겨내기를 입력했다.

 

펑!

 

튕겨냈음을 알리는 불꽃과 함께, 남색 빛의 연막이 불꽃이 되어 제로의 주변을 뒤덮었다. 스턴 상태에 빠진 제로를 향해 검 끝을 세우고 돌진하는 모모의 모습이, 찰나의 순간에 화약 구름 사이로 보였다.

 

“크억…!”

 

후득퍼버버벙!!!

 

일격에 쓰러지는 제로. 이를 조롱하기라도 하는 듯 화약 구름이 검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폭발했다.

 

“…하.”

 

금태양은 폐의 공기를 입에서 폭파시키는 듯한 한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의자가 그에 맞춰 뒤로 기우뚱거리곤 기분 좋은 비스듬한 각도를 유지했다.

 

“찬바라…. 찬찬바라….”

 

쓰러진 제로 주변을 천천히 맴돌며 읊조리는 모모와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사(死)자.

 

“3페이즈도 있어…? 막막하네….”

 

시계를 거꾸로 매달아도 시간은 간다고, 어느덧 오르카와 금태양은 달콤한 휴가를 맞이했다.

 

휴가라고 해 봤자 그네들이 처한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언제라도 일선에 복귀할 가능성이 아가리를 벌리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휴가라는 이름 아래 업무도 파격적으로 줄이고 그동안 비축한 자원과 인프라를 어느 정도 소모해서 쉰다는 것은 그 비용 이상의 재충전을 도와준다는 사실은 멸망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막상 휴가가 닥치면 뭘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도 멸망 전과 마찬가지였기에, 금태양은 휴가 동안 뭘 해야 할지 일주일 내내 고민했고, 그 결과가 오르카 넷에서 한동안 센세이션을 불러왔던 <스미레 : 제비꽃은 두 번 산다>를 집어 들었다.

 

스토리도 탄탄하고 플레이의 자율도도 높아 어마어마한 추천을 받은 게임이었지만, 플레이해 본 이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하는 ‘점심 나가서 먹을 것 같은 난이도’ 때문에 선뜻 손을 뻗기는 힘든 게임이었다.

 

더군다나 썩어도 준치고 인간이라고 사령관 보조로서 각종 결제와 연구를 도맡고 있는 금태양 입장에선 진득하니 콘솔을 붙잡고 있을 여유도 없어 몇 번이나 뻗던 손을 거두었던 게임이었기에 꽤나 긴 휴식 시간이 보장된 이때에 찍어 먹어 보자고 금태양은 생각했던 것이다.

 

여가와 관련해선 진심인 이들만 모인 스정게의 평가대로 게임은 더할 나위 없이 휴가를 충실히 보내기에 적절했다. 항상 박한 평가와 함께 등장하는 난이도 이슈마저 긴 휴가와 함께 오히려 한 게임을 그만큼 오래,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는 이점으로 작용했다.

 

“패링하면 RPG 탄이 터지면서 스턴걸리는 기믹인가…. 위(危)자 뜨는 거 보면 찌르기 같은데…”

 

간파하기로 붙잡을 수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재도전을 누르려는 찰나, 금태양의 단말기가 몸을 흔들었다.

 

[금일 업무 : 창고 정리 및 지정 서류 처리 완료. 확인 부탁드립니다.]

 

무미건조한 램파트의 메시지가 화면에 아른거렸다.

 

확인이라 하면 사령관님 대행으로 처리해야 할 서류들이 남았거나 사령관님께 전해드려야 할 문건만이 남았다는 의미일 터였다.

 

역시 연산 속도는 AI를 못 따라가는구나 하고 감탄하며 금태양은 단말기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던 척추에서 기분 좋은 뿌득거림이 나른함을 더해가며 휴가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줬다.

 

“…휴가는 좋구나.”

 

겉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노인네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금태양은 방을 나섰다.

 

 

5

복도에서 만난 램파트가 위장 도색을 하고 있었을 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는데.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다고 금태양은 찌푸린 미간을 손가락으로 짓눌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눈앞에 펼쳐진 수라. 정녕 수라라는 말 말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군데군데 부서진 비품이요, 우그러진 물자들에 지난번처럼 이상한 소리를 울부짖으며 머리를 감싸 쥔 히루메, 풀린 눈을 하고 있는 마키나. 내용물이 터져 나와 성한 구석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도 볼 수 없는 삼안 교환소에 보낼 참치캔들은 뭉개지고 무너진 십여 미터 높이의 철제 선반들을 보면 양반이었다.

 

“… 도대체 뭔 일이에요?”

 

소식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와 마키나를 달래고 있는 메리에게 금태양이 물었다.

 

메리는 한숨을 푹 쉬더니 오묘하게 부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키나와 덩치만 반대지, 영락없이 사고 친 자식을 보는 부모의 모습이었다.

 

“에휴…. 비품 창고에서 간식 훔치다가 램파트한테 걸렸대요.

걸리면 융통성 없는 국방색 램파트는 안 봐줄 거 같아서 마키나가 홀로그램으로 철충 유충을 띄워서 시선을 돌리게 하려고 했는데, 램파트가 철충을 잡겠다고 전투 모드로 난동을 부렸다네요.

뭐가 잘못된 거 같아서 LRL모습을 새로 보냈더니 램파트가 무장 없는 LRL을 철충한테서 보호해야 한다고 안전 모드로 돌리고… 네… 뭐….”

 

“허.”

 

“저는 내장된 프로토콜을 따랐을 뿐입니다. 오르카 호 내에서 철충과 조우 시, 상대에 따라 경계 등급을 산출…”

 

“알아요…. 램파트 님한테 잘못 없는 거.”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금태양의 눈빛에 램파트가 대답했다.

 

무죄를 인정받아서인지, 감정 모듈이 없을 전투용 램파트의 얼굴이 묘하게 뿌듯해 보인다고 금태양은 생각했다.

 

그리고 같은 생각을 품은 메리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저 램파트 새끼 기분 좋다고.

 

“전 마키나랑 히루메나 수복 실에 데리고 가볼게요.”

 

“네. 그렇게 하세요.”

 

“그나저나 이 사태는 공방에 전할까요?”

 

“에휴… 아니요. 일단 사령관님께 전하도록 하죠.”

 

그가 직접 공방에 말해봤자 좋은 소리는 못 들을게 불 보듯 뻔했기에 차라리 사령관님을 통해 공방에 알려야겠다는 금태양의 판단이었다. 그녀들이 끔뻑 죽는 사령관님 말씀이면 서로 얼굴 붉힐 일없이 해결될 터였다.

 

“그동안 손상된 물품이나 정리할까요.”

 

“본기는 전투용으로 머니퓰레이터가 해당 작업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혼자 하십시오.”

 

헤어질 때마다 읊조리는 ‘여러분의 친절한 이웃 시티가드’ 문구를 덧붙이며, 램파트는 매정해 보일 정도로 쿵쿵거리며 창고를 나섰다.

 

“… 개새끼….”

 

산더미처럼 쌓인 각종 잔해들에 둘러싸인 채, 금태양은 서러움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6

아자아자 아자젤!

 

노동요로 틀어놓은 러버러버의 음량이 별안간 줄어들더니, 메시지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재 시각 17시. 지정된 업무 - 금일 서류 결재 확인 확인 부탁드립니다.]

 

비 오듯이 쏟아지는 땀을 이마에서 닦아내자 땀에 녹아있던 퀴퀴한 창고 냄새가 비강을 후려쳤다.

 

분명 점심때까진 충실한 휴가를 만끽하고 있었는데, 모든 일정이 청소로 뒤바뀐 지 어언 4시간. 원망스러운 ‘그 새끼’의 호출에 금태양은 한숨을 푹 내쉬며 대걸레를 구석에 기대어 놓았다.

 

아직 치워야 할 물품들은 쓰레기 매립지처럼 남아있었지만, 처음에 비하면 그나마 종류별로 분류된 쓰레기장의 모습이었다.

 

오르카에 남아있는 공방 인원으로는 당장 조치가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소름이 다 돋았으나, 사령관님의 ‘부탁’에 응한 근처 선착장에 나간 인원들이 돌아와 내일부터 작업에 착수하기로 했으니 오늘까지만 버티면 대충 해결될 거란 희망이 그를 지탱했다.

 

휴가 첫날부터 이 모양인 게 무섭긴 하지만, 설마 이런 이벤트가 또 일어날 거라고 말이야.

 

전산오류로 요안나 아일랜드에 데려가기로 한 전투용 램파트와 업무 보조를 도와줄 램파트가 바뀐 것도 말씀드려 저녁이면 원래 업무를 도와주기로 예정된 감정 모듈 빵빵한 램파트가 도착하기로 했으니 오늘 같은 헤프닝이 더 일어날 확률은 0에 수렴할 거라 금태양은 생각했던 것이다.

 

설마 서류 처리 중에도 무슨 사고를 쳤을까 떨리는 마음과 함께 뭔 사고를 쳤어도 이것까지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으로 함교에 들어선 금태양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어서 오십시오. 서류 결재와 전산 처리를 마쳐두었습니다.”

 

여기저기 주저앉은 책상과 V자로 찌그러진 채 쌓여있는 서류뭉치를 의기양양하게 뽐내는 램파트였다.

 

“… 무슨 일이에요 또.”

 

“서류 결재와 전산 처리를 마쳐두었습니다.”

 

갸우뚱거리는 얼굴 이모티콘을 액정에 띄우며 램파트는 대답했다.

 

더 이상 놀랄 기운도 없다고 생각했건만 신선함이 끊이질 않는다 이 새끼.

 

“서류 처리는 그렇다 치고 책상은 왜…”

 

그제서야 램파트가 평소의 스마일 표시를 화면에 띄우며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사실 손이라고 하기도 뭐한 금속 덩어리지만.

 

“본기는 전투용으로 머니퓰레이터가 서류 결재를 위한 서명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허나 본기에게 맡겨진 임무에 따라 본기가 지면에 서명을 남겨야 했습니다.

잉크를 머니퓰레이터에 묻혀 흔적을 남기려고 했습니다만, 지면에 안정적으로 점착될 잉크로 이용할 마땅한 물질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머니퓰레이터의 질량으로 종이에 흔적을 남길 수 있음을 확인하…”

 

“아…”

 

금태양은 정신이 멀어져만 가는 걸 간신히 붙잡았다.

 

“서 있기 어려우신가요? 건강에 이상이 생긴 거라면 의무실에 다녀오시는 걸 추천 드립니다”

 

“… 괜찮아요.”

 

산더미처럼 쌓여 구겨질 대로 구겨진 서류들은 자기가 다시 처음부터 처리해야겠다고 금태양은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애써 웃어 보였다.

 

“전산 처리는 문제없었나요?”

 

저 정도로 책상을 두들겼으면 내장된 회로에 충격이 안 갔을 리가 없을 텐데 하고 금태양은 생각한 것이다.

 

“네. 문제없이 끝났습니다. 최종 결재만 해주시면 됩니다.”

 

다행히 껍데기만 부서지고 우그러진 듯했다. 금태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후우… 다행이다. 일단 그거부터 처리할게요.”

 

“네. 이쪽으로.”

 

램파트가 자리를 비켜주려 한 발 내딛는 그 순간

 

퍽!

 

사령관의 부서지고 구겨진 책상 위 경사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해파리 수조가 넘어지며 내용물을 토해냈다. 당연하게도 액체와 초록색 물풀 건데기들은 변깃물 내려가듯 책상의 균열로 흘러 들어갔고

 

이를 보고 경악하며 한 손을 앞으로 내민 채 어정쩡하게 서 있는 금태양의 눈에 한 줄기 빛이 들어왔다.

 

바로 책상에 붙어있는 태블릿의 화면에 불이 들어온 것이었다!

 

“오?!”

 

안타깝게도 끈질긴 생명력을 증언하는 의지의 불꽃이 아니라 꺼지기 직전 발악하는 마지막 불씨였는지 삼 초 정도 들어온 바탕화면은 시꺼먼 별의 아이 배때지처럼 변해버렸고, 수조의 주스를 섭취한 균열들이 시꺼먼 연기와 진짜 불꽃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비상! 비상! 화재 발생! 신속히 대피하십시오!”

 

램파트의 팔에 질질 끌려 함교 밖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와중에도, 금태양은 오늘 처리했어야 할 3GB가량의 문서의 승천에서 초점 없는 눈을 뗄 수 없었다.

 

 

7

“저런, 마음고생이 심하셨겠군요. 식사는 하셨나요?”

 

담담한 AGS 특유의 말투지만, 잠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따뜻한 문구에 금태양은 허심탄회하게 말대답했다.

 

“하하… 뭔가 까먹었다 싶더니… 밥을 안 먹었네요.”

 

“저런, 아무리 성인이라 해도 몸은 소년이니 끼니를 거르는 건 현명한 선택은 아닐 겁니다. 주무시기 전에 간단한 요기라도 하시길 권장 드립니다.”

 

“히히… 네, 그럴게요. 낮에 창고 망가진 거 비품 정리는 끝났나요?”

 

“CCTV 서버에 연결해 프로세스 중에 있습니다. 활동이 끝나는 대로 문서화하겠습니다.”

 

“오, 감사합니다.”

 

예정보다 늦은 저녁 8시에나 도착한 램파트는 금태양의 눈에 마치 천사처럼 보였다.

 

불과 두어 시간 전, 사령관님을 따라 요안나 아일랜드로 떠난 닥터에게 연락했을 때 ‘혹시 무한 오르카 상태야? 오르카 로고만 뜨고 꺼졌다가 다시 오르카 로고만 뜨고 하는? 그럼 그거 데이터 못살려.’라는 대답을 들었을 땐 하늘이 무너지고 오르카가 무너지고 바다가 황폐화되고 하는 줄로만 알았건만, 역시 업무 보조를 위해 개조된 개체는 다른지 도착한 램파트는 놀라운 속도로 전자 서류를 다시 내려받아 처리하고 있었다.

 

덤으로 남은 한 손으로 뭉개진 서류를 대신해 새로 뽑은 문서의 절반 정도를 처리하며 금태양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도 잊지 않았다.

 

새로 뽑은 서류의 남은 반절을 처리하며 금태양은 놀부한테 꺾인 제비 다리 같은 얄팍한 희망을 덕분에 다시 추릴 수 있었다.

 

그렇게 휴가 첫날을 반납하고 시계가 11시를 가리킬 때 즈음, 결제를 끝낸 금태양은 허리를 뒤로 젖혀 스트레칭하며 램파트에게 물었다.

 

“아고고고… 허리야. 창고 비품 문서 좀 부탁드릴게요. 이제 그거만 하면 끝이네요.”

 

“CCTV 서버에 연결해 프로세스 중에 있습니다. 활동이 끝나는 대로 문서화하겠습니다.”

 

램파트의 성능으로 보면 5분도 안 걸릴 거로 생각했건만, 의외의 대답이 들렸다.

 

“어, 아직 안 끝났나요? 그럼 예상 처리 시간은 얼마정돈가요?”

 

“아직 활동 중에 있어 확답드리기 어렵습니다. 활동이 끝나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활동이요?”

 

활동이라. 처음 들었을 때 CCTV로 확인하는 것으로 이해했었지만 뭔가 오해가 있었던 거 같다. 아주 불안한 기운이 금태양의 심장을 서서히 옥죄여온다.

 

“네.”

 

“그… 활동이 램파트 님이 CCTV 확인하신다는 거… 맞… 죠?”

 

“최초 확인 20시 21분부터 현재 시각 23시 3분까지, 스틸라인 1개 분대, LRL, 알비스 인원이 창고에서 비품을 꺼내 가고 있습니다. 해당 활동이 끝나는 대로 문서화 작업을…”

 

미친!”

 

램파트가 대답과 함께 보이는 영상을 본 금태양은 자리를 박차고 창고로 냅다 뛰었다.

 

그리고 그 뒤를 쩔껑쩔껑 요란한 소리를 내며 램파트가 따랐다.

 

“무슨 문제 있으십니까?”

 

“창고 털이잖아요! 못하게 막았어야…!”

 

“사령관님께서 사소한 서리는 훈계 후 훈방 조치 하는 관용을 배풀라 하셨었습니다.”

 

“실키 가방에 복면까지 챙겨서 3시간을 터는 건 사소한 게 아니잖아요!”

 

어린 몸에 맞는 짧은 다리로 램파트에게 따라잡힌 금태양을, 램파트는 덥썩 집어 안아 들고 창고를 향해 속도를 올렸다.

 

안정적인 승차감과 달리 금태양의 가슴은 창고에 가까워올수록 불안정하게 요동쳤다.

 

창고 입구에 도착해 램파트에게서 내린 금태양의 눈앞에 들어온 건 잘 정리된 쓰레기장에서 쓰레기 산으로 돌아간 창고 내부와 바퀴벌레떼마냥 그 사이를 헤집고 돌아다니는 검은 복면의 무리들, 그리고 그 광경을 액자처럼 보여주는 찌그러진 채 애처로운 모터음만 내며 닫히지 못하고 있는 창고 문이었다.

 

“어쩐지 7번, 15번, 17번, 23번 카메라를 비롯해 1층의 카메라가 화면을 제대로 보이지 않더니, 보급 속옷으로 렌즈를 가려주었군요. 고장이 아니라 다행입니다.”

 

램파트가 태평한 소리를 하건 말건 한동안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보던 금태양을 각성시킨 건 창고를 뛰쳐나오며 금태양의 어깨를 밀친 브라우니가 내뱉은 한마디였다.

 

“Move, Bitch!”

 

“… 저 새ㄲ… 아니, 저분 붙잡아주세요. 여긴 제가 처리하고 사령관님께 보고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육중한 발소리를 내며 램파트는 브라우니가 사라진 스틸라인 숙소를 향해 뛰어갔고, 금태양은 창고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찌그러진 문틈에 걸쳐진 참치캔. 문이 안 닫히게 한 작고 귀여운 범인 놈.

 

금태양은 증오스러운 노란 캔을 쓰다듬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정확히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뒤 그를 향해 돌진하는 한 무리의 도적떼.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기마병을 마주한 장수처럼, 용맹한 자세로 전의를 불태우는 금태양은 그들이 문 앞 십여 미터에 도착했을 때 즈음, 참치캔을 줘 뽑으며 외쳤다.

 

닫혀라 참깨!”

 

“어? 어?”

 

“으아아악!”

 

짐을 얼마나 많이 챙긴 건지 충분히 감속하지 못하고 문에 부닥치는 소리가 각종 비명과 함께 이어졌다.

 

“아, 안 되지 말임다!”

 

“그, 그거 뭐야 빨리해봐!”

 

“아, 암구호! 암구호!”

 

“여, 열려라 들깨!”

 

틀렸어! 닫혀라 참깨 이 그지 깽깽이새끼들아! 크하학하흐흐윽극 흐으응윽ㅇ어엉ㅇ어…”

 

“… 쟤 울지 말임다?”

 

“… 좀 심했나?”

 

“좀 마음이 그렇지 말임다. 마음속의 삼각형이 돌지 말임다. 뾰족뾰족한 게 내장 벽을 긁…”

 

“야, 씨… 그런 거 자세하게 묘사 좀 하지 말라 했잖냐.”

 

“죄송함다.”

 

그네들이 뭐라 떠들건 금태양은 주저앉아 생각했다. 첫날부터 이 모양인데, 남은 13일, 벌써부터 막막하다고, 도저히 못 해먹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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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 이야기 : 브라우니는 미제다.


전산 오류와 서류 결제 문제라는 소재 준 라붕이들에게 압도적 감사!


이것도 거의 다왔구만


늦어서 마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