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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조우


 [다른 바이오로이들이 보이긴 하는데...방금 전의 그 바이오로이드와 다들 비슷하군.]

 

 화면 너머의 바이오로이드들은 하나같이 비장한 표정으로 총구를 이쪽을 향해 겨누고 있었다. 방금 전의 알바트로스가 보인 철충 학살 때문인지, 방금 전의 그 바이오로이드를 제외하곤 발포하진 않고 있지만.

 

 [저기, 사령관. 나도 내려가 보는 게....]

 “안 돼. 그러다 만약에 저쪽에서 발포했다가는 언니 방호복이 파손될 수 있어. 이미 그 일대 방사선량은 방호복이 막을 수 있는 한계치에 근접했어.”

 

 닥터는 그 말을 하며 잔뜩 찌푸린 얼굴로 패널에 뜬 수치들을 노려봤다.

 

 그렇게 대치 상태가 이어지려는 것처럼 보여 내가 지시하려던 순간, 뒤에서 새로운 두나이 바이오로이드들이 나타났다. 그러자 이미 있던 바이오로이드들이 그들에게 무어라 말하더니 새롭게 나타난 무리의 맨 앞에 있던 바이오로이드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나를 포함해 함교에 있던 전원의 입에서 작게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바이오로이드는 여기저기 기운 흔적이 역력한 옷을 입고 낡아빠진 방한모를 쓰고 있었다. 허리를 동여맨 건 벨트가 아닌 밧줄이었고 등에 맨 총은 상당히 낡아 있었다. 그러나 우리를 경악시킨 건 그런 사소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녀의 오른쪽 얼굴은 눈 주위가 붉었다. 혈류가 피부 가까이 집중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피부가 벗겨져 체액이 흘러나온 후 그것이 다시 엉겨 붙은 흔적이었다. 눈은 눈동자는 희뿌옇게, 흰자위는 붉게 변해 있었다. 아무렇게나 자른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오른쪽 귀는 우그러지고 뒤틀린 채 눈가와 비슷한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대장 대리이자 프리피야트 기지의 반장인 아-52. 여긴 출입 금지 구역이니 빨리 나가 줬으면 좋겠는데...보니까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근데 너흰 어디서 온 거냐?]

 [우리는 오르카호 소속 AGS와 바이오로이드다. 이 일대의 사고를 조사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런가. 잠깐, 너희들은 사고가 난 걸 어떻게 안 거지?]

 [방사능 물질이 우리가 주둔한 곳 근처에서 감지되었고. 위성으로 사고를 확인했다.]

 

 자신을 아-52라 부른 그 바이오로이드는 잠시 말없이 생각하더니 자기 이마를 탁 때렸다.

 

 [즉슨, 너희는 저런 기동형 바이오로이드와 너 같은 거대 군용 AGS를 운용 가능하고, 아직 위성에 접속이 가능한 데다 방사선 감지기까지 가진 거대 세력이라는 거군. 게다가 아마도 장거리 이동 수단까지 가지고 있고. 거 참 반갑네. 원칙상으론 안 되지만 지금은 특별 사례니 지휘관과 의논해 너희를 내쫒지 않을 수도 있겠군. 여기를 조사하려 왔다고 했지? 따라와.]

 [아, 그리고 한 가지 말하지 않은 게 있다.]

 

 알바트로스가 말하려던 찰나, 슬레이프니르가 끼어들었다.

 

 [우리를 이끄는 건, 인간이야!]

 

 그 순간 그녀를 포함한 다른 바이오로이드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뭐라 콕 집어 말할 수 없는 표정들이었다.

 

 [...정말이냐.]

 

 아까보다 낮아진 목소리로 그녀가 묻자 나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댔다.

 

 “오르카호의 사령관이자 인간입니다. 저희는 이 지역에 위치한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고가 발생했다고 판단해 이곳으로 조사대원을 파견했습니다.”

 [...바이오로이드의 목소리가 아니군.]

 

 마이크에 대고 말하자 알바트로스의 몸에 단 통신장치에서 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목소리로 판단하기엔 그리 나이가 많은 것 같진 않은데, 혹시 다른 지역에 인간들이 살아남아 지금껏 살아온 겁니까?]

 “아니오, 현재까지 살아남은 인간은 저 혼자입니다. 그리고 목소리는...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뒤에서 마리가 헛기침을 한 것 같지만 무시하자.

 

 [인간, 인간이라...그래. 뭐. 어쨌든 따라와라. 어이 너희들! 난 이 방문객 둘을 기지로 데려갈 테니 현장들 정리하고 있어! 지휘관 대리로서의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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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상실인데 전투 지휘를 한다니, 대체 어떻게 되먹은 뇌 구조이신지? 게다가 신경을 전자회로로 교체해서 그 병을 막다니. 상당히 화려한 삶을 사신 것 같군요. 게다가 잠수함 하나로 어지간한 작업을 다 하고. 신기하군요.]

 

 사령관과 오르카호의 상황에 대해 들은 아-52의 소감이었다. 

 

 “하하. 그렇긴 하지. 혹시 괜찮다면 너도 네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원래는 슬레이프니르와 알바트로스 둘을 전부 기지로 안내하려 했으나 닥터가 이 이상의 방사선 피폭은 위험하다 판단, 슬레이프니르는 복귀, 알바트로스는 퇴각한 철충 잔당들을 경계하려 기지 경계선을 돌며 정찰을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기지로 가는 건 알바트로스의 몸에 매달아 두었다가 지금은 이 바이오로이드가 들고 가고 있는 통신장치 뿐이었다.

 

 [뭐, 아무거나 물어보시죠. 전 바이오로이드니.]

 “...일단 현재 상황을 알려줘.”

 

 아-52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대답했다.

 

 [어제 새벽 3시 경. 원자로 3호기에서 불발탄 폭발로 인한 화재와 시설물 붕괴가 발생했습니다. 화재는 겨우 진압했지만 조사대를 투입한 결과 내부 파괴가 상당했고 노심이 노출된 것을 확인, 현재는 기지 경계를 맡은 소수만 제외하고 전원을 사고 현장에 투입해서 수습 중입니다. 방사선 유출량은 저희 장비론 죄다 한계치를 나타내고 있어 정확한 판단은 잘 못 하겠지만 방사선 방호력 하나는 끝내주는 두나이 기종들이 순식간에 쓰러져 실려가는 상황이죠.]

 “기지의 인원은?”

 [70년쯤 전만 해도 1개 사단 규모급 인원이 있었죠. 우리 같은 작업원만 있는 게 아닌 전문 전투 인원과 의료진이나 기계공, 요리사 같은 여러 종류의 바이오로이드가 있었지만.]

 

 짧은 침묵 후에 말이 이어졌다.

 

 [우리들을 빼고 다 죽었죠. 피폭되어서. 지금은 두나이 기종 4000명 정도와 주라블리 기종 한 명, 그게 이 기지의 전부입니다.]

 “주라블리? 그 기종이 남아 있다고요?”

 [지금 말하는 건 누구십니까?]

 “아, 제 이름은 레모네이드 알파...”

 [레모네이드? 오르카호란 곳에 그 이름을 가진 바이오로이드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갑자기 아-52의 어조가 날카롭게 변했다. 그 태도에 알파는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물론 나도. 설마 오메가가 여기에 왔던 적이 있는 건가?

 

 [...알파라. 됐어. 보니까 그쪽은 그때 그 녀석과 동일인물은 아닌 것 같네. 같은 기종인가 보지? 신경 쓰지 말아 줬으면 고맙겠군. 뭐, 어쨌든 주라블리 한 명이 남았고 그녀가 이 기지의 사령관입니다. 비록 제가 대부분의 업무를 사령관 대리로서 처리하긴 하지만.]

 “이쪽에서 도울 만 한 게 있을까?”

 [그러러면 일단 대장부터 만나봐야 할 겁니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여기는 출입 금지 구역이고 이런저런 규정이 많아서 말이죠. 말하다 보니 다 왔군요. 그쪽에서 보이진 않겠지만.]

 “아, 그거라면 장치에 영상 전송 기능도 있는데. 거기서도 조금만 건드리면 음성 모드에서 영상 모드로 바꿀 수 있어.”

 

 닥터가 옆에서 그렇게 말하자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게 있으면 진작 말하지...어떻게 하면 됩니까?]

 

 닥터가 통신장치 조작법을 들려주자 철컥거리는 소리가 몇 번 나더니 화면에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오, 잘 보이네. 보니까 인간님은 딱 알아보겠고...죄다 화려하신 분들이네. 그리고...그 붉은 눈...아니 가슴 큰...아니 야하게 입은...에라이, 죄다 그렇네. 어쨌든 그쪽은 그때 그 오메가란 녀석과는 같은 얼굴이긴 하지만 다른 바이오로이드 같네. 머리색, 눈색도 다르고.]

 

 역시. 오메가는 이곳에 온 적 있는 모양이다.

 

 그 이름이 들리자 우리들의 표정이 변하는 게 보였는지 아-52는 말없이 장치를 들고 걸어갔다. 

 

 화면 너머로 주위 풍경이 보였다. 오래되고 낡은 회색 건물들 사이로 몇몇 바이오로이드들이 지나다녔다. 우리는 화면에 잡히는 그 바이오로이드들이 두나이 기종이라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멀쩡하지 않다는 것도. 하나같이 옷을 단단히 입어 얼굴을 제외하고는 피부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두가 얼굴에 화상 자국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다. 아-52처럼 피부가 벗겨지고 짓무른 자들도 적지 않았다.

 

 삽을 들고 걸어가던 한 두나이가 갑자기 듣기만 해도 괴로울 정도로 기침을 했다. 콜록거리며 가래를 뱉어내던 그녀는 갑자기 배를 움켜잡더니 토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걷던 다른 두나이가 그녀의 등을 두들겨 주었는데 외투 깃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목은 이상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지나가던 그 누구도 그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아-52가 들고 있는 장치에만 신경을 썼다.

 

 그 모습을 보며 아-52는 우리들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혀를 찼다. 다가오는 구경꾼들을 물리며 걷던 그녀는 그 둘과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담담히 말했다.

 

 [여기서 몸 멀쩡한 바이오로이드는 거의 없습니다. 갑상선이 부푼 녀석들은 넘쳐나고. 아까 그 녀석처럼 폐에 이상이 생긴 녀석들도 제법 있죠. 아까 보셨겠지만 저처럼 피부가 벗겨지고 짓무른 건 나은 편입니다. 피부가 새로 자라나서 괴사하지 않는 게 그저 다행이지요.]

 “...의료 상태는.”

 [사제 의약품은 못 본지 60년 정도는 되었고...우리가 만드는 연고와 탕약은 있지만 재료가 이 근방 식물들이라 하나같이 방사능에 찌들어서 완성품이 독인지 약인지 모르겠군요. 붕대나 부목 정도는 있죠. 바늘과 실도. 소독약은 밀주를 증류해낸 알코올 밖에 없군요. 그나저나, 이거 계속 켜 두어도 되는 겁니까? 미리 말하지만 저희 기지는 전기나 연료 비축량이 개판이라서요.]

 “전지 빵빵한 걸로 넣었고, 윗부분 열면 태양광 패널 나온다고 말해줘.”

 

 닥터의 말을 전해주자 아-52의 한숨소리가 들여왔다. 상당히 걱정하고 있었나 보다.

 

 한동안 폐허 같은 도시 풍경과 바이오로이드들의 모습만이 화면에 잡혔다. 곳곳에 생활 흔적들이 보이는 것 치곤 지나다니는 바이오로이드들의 수가 너무 적어 아-52에게 물어보자 그녀는 대부분이 현장에서 작업 중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 직후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방호복 차림의 한 두나이가 건물 벽에 기대앉은 채로 있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척 보기에도 조악한 방호복. 구멍난 깡통이 필터가 끼워져야 할 곳에 있는 방독면. 회색 가루투성이가 된 몸. 벗겨지고 일그러진 얼굴 피부. 그리고 이 모든 것들과 대비되는 무서우리만치 평온한 미소. 피 묻은 손수건을 쥔 채 멍하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그 바이오로이드를 보고 있자니 무어라 말 못할 감정이 들었다.

 

 그때 화면에 아-52의 팔이 나왔다.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그 두나이의 목을 짚은 아-52는 갑자기 장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앉아 있는 두나이에게 다가간 그녀는 부드럽게 몸을 안아 바닥에 눕히더니 가볍게 얼굴을 쓸어내려 눈을 감겼다. 그 행동을 보던 나는 뭔지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

 

 돌아와 장치를 든 아-52의 입에선 뜻밖의 말이 튀어나왔다.

 

 [결국 체-852 녀석도 가 버렸군. 정말이지, 착한 놈들부터 가 버린다니까.]

 “...!”

 [예전부터 기침이 심해지긴 했지만, 뭐. 이런 데서 수십 년 넘게 살았으니. 어떻게 보면 오래 버틴 겁니다. 안 그래도 제조될 때의 오리진 더스트 부족 때문에 방호력도 낮은 체 번대 였으니. 너무 신경들 쓰지 마십쇼.]

 

 그 이후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우리도, 그녀도.

 

 한동안 말없이 걷던 중 갑자기 이질적인 공간이 화면에 나타났다. 

 

 건물들 사이에 있는 거대한 회색 공터였다. 그냥 보면 회색 콘크리트 바닥이었지만 그 위에 세워진 것들은 바로 이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콘크리트 바닥 위에는 수많은 십자가들이 놓여 있었다. 조그만 나뭇가지 두 개를 서로 교차해 엮은 간단한 것에서부터 묘지에서 흔히 보이는 크기 정도의 나무 십자가, 장식까지 된 금속 십자가, 심지어 교회 벽에 달릴 만한 크기의 거대한 나무 십자가까지 있었다.

 

 아-52는 다시 장치를 내려놓더니 공터를 바라보면서 쓰고 있던 모자를 잠시 벗었다 다시 썼다. 다시 돌아와 장치를 들면서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고농도 방사선 피폭으로 사망한 자들의 시신은 1미터 이상의 콘크리트로 덮어서 매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없이 그 거대한 무덤을 쳐다봤다. 저 드넓은 공터의 정체는 이곳에서 숨을 거둔 바이오로이드들의 무덤이었다. 도대체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바이오로이드들이 그 삶을 마쳤을까.

 

 아-52는 공터 옆의 한 건물로 들어갔다. 곧장 건물 지하실로 내려간 그녀는 육중한 철문-심지어 커다란 잠금장치도 달려 있었다-앞에 서서 문을 두들겼다. 몇 번 두들기자 문에 달린 조그만 창이 열리더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접니다, 대장.]

 [무슨 일이야, 난 너에게 지휘권 위임했잖아.]

 [그건 아는데, 지금 일이 좀 별나게 돌아가서 말이죠.]

 

 아-52는 여기서 잠시 주저했다.

 

 [인간의 존재가 확인되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금속음이 연달아 들려오더니 그 커다란 철문이 열렸다.

 

 [들어와.]

 

 화면에 한 바이오로이드가 보였다. 그녀를 보자마자 나는 시신이 연상되었다.

 

 어두운 지하실과 희미한 조명. 그리고 무엇보다도, 납빛 나는 저 창백한 피부.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피부에서 금속 빛이 났다.

 

 “저 살빛과 노란 눈, 녹색 머리카락...틀림없는 주라블리 기종이군요.”

 

 옆의 알파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직후 그 바이오로이드가 고개를 돌려 화면을 쳐다봤다. 마치 맹금의 눈 같은 두 노란빛 눈동자는 이쪽을 쏘아보는 것 같았다.

 

 [정말인가?]

 [어. 아까 이쪽 바이오로이드와 AGS와도 접촉했어. 얘기 들어 보니까 우리 사고 조사하려 왔다는데, 상당히 세력이 큰 것 같거든? 알고 있겠지만, 지금 우리들로선 이 사고 처리가 어렵....]

 [알아서 처리해라. 어지간한 일 아니면 현장 판단을 믿겠다. 나중에 보고만 평소처럼 누구 시켜 전하고. 이만 물러나.]

 “자, 잠시만?”

 

 예상 외의 반응에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미안하지만 네가 이곳의 지휘관이라고 들었는데.”

 [그쪽이 이 목소리의 주인이십니까. 인간...인 것 같군요. 네. 제가 이곳의 지휘관입니다. 하지만 저는 현재 업무를 볼 수 없는 상황이라 부득이하게 이 두나이 아-52에게 제 지휘권을 위임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한 그 대답에 잠시 내 말이 멈춘 사이 옆의 알파가 입을 열었다.

 

 “저기, 당신은 주라블리 기종이 맞죠?”

 [...!]

 “맞나 보군요. 5명 밖에 생산되지 않았던 기종이니까요. 아, 저는 전 PECS 소속, 현 오르카호 소속 바이오로이드인 레....”

 [나가, 당장!]

 

 갑자기 그녀가 고함을 지르자 화면이 흔들리더니 어느새 뒤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후 다시 금속음이 들리더니 조용해졌다. 당혹해하는 우리들의 귀에 아-52의 커다란 한숨소리가 들렸다.

 

 [아이고야, 하필이면 그걸. 방금 말한 거 그 레모네이드 맞지? 대장 속을 제대로 긁어 버렸네. 뭐, 당신들과 접촉하는 건 허가받았으니 목적은 달성했지만.]

 “두나이.”

 [아-52라 부르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아-52. 이곳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알려줘.”

 [뭐. 그래야 할 것 같군요. 그런데 우선 그전에 장소부터 옮기죠. 게다가 이 장치. 꽤 무겁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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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공호 속에서 주라블리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낡은 의자에 앉은 채 그녀는 오래된 나뭇조각을 매만졌다. 수십 년의 세월에 새겨져 있던 문양은 거의 닳아 잘 보이지도 않았고 이런 어두운 곳에서는 더더욱 그럴 터였지만 그녀는 그 조각을 만질 때마다 새겨져 있는 문양이 선명하게 눈앞에 보이는 듯 했다.

 

-인간. 인간이 또다시 이곳에 나타났다.

 

 고개를 약간 돌리자 벽에 걸린 은색 방호복과 모자, 마스크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 그 모든 게 네 개는 더 걸릴 만한 공간이 있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인간은 더 이상 없으리라 여겼는데.

 

 벽에 붙은 탁자 위를 보자 몇 숟가락 뜨지도 않은 채 다 식어버린 죽이 담긴 그릇이 보였다. 무심코 그쪽으로 손을 뻗자 붕대투성이 손이 보였다.

 

-어째서, 지금.

 

 조금 전에 들었던 목소리는 생생했다. 수십 년 만이었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인간의 목소리였다. 결코 바이오로이드나 철충 따위의 것이 아니었다.

 

-끝내려는 걸까, 아니면 시작하려는 걸까.

 

 스스로에게 그 같이 물은 한 주라블리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