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편

2편

3편





당신의 지휘관들은 연방 정부 청사를 기습하고 나를 체포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선출된 러시아의 대통령으로써, 전차들을 돌리고 동포들을 상대로 싸우지 말 것을 명령하겠습니다.

- 보리스 옐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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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안 산업의 내 명령권자는 3명이었다. 경영진 출신의 이사가 두 명, 그리고 장군 출신의 임원 한 명. 제한된 수의 임원들로 하여금 제한된 수의 부대의 명령권을 두고 주기적으로 명령권자를 돌려가며 배정한다. 김지석이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유지하고 유사 시에도 쿠데타는 생각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철저한 계산 하에 이뤄진다고 들었다. 


블랙리버와의 전쟁을 지휘한 것은 물론 군사학 관련 지식이 있는 장군 출신의 임원이었다. 배정된 사람은 주기적으로 바뀌었지만, 군에 몸담았거나 군사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확실했다. 그들에게 탁월한 전략안이 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군사 부대 운용에 대한 노하우 정도는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휘에 대한 교범이라도 있는 것인지 내려온 명령서는 항상 일정한 서식에, 작전술 수준의 개요와 전술 수준에서의 목표가 제시되었고, 어려운 명령이 내려올지언정 무리하지 않았으며, 나는 지휘관으로써 목표 달성을 위해 꽤 자유롭게 전술을 택할 수 있었다. 누가 배정되더라도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무난한 지휘였고, 척박한 핀란드의 전선이 백중세에서 10년 가까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을 것이다.


삼안측에서는 보급로가 끊기지 않는 한 행정과 충원에 대해서는 상부에서 알아서 처리해주었으며, 나는 병사들을 최대한 살리고 효율적인 작전으로 그들을 이끌면 되었다. 지금 마지막까지 내 곁에 남은 대원들도 그렇게 나를 따르며 길게는 사십 년, 짧아도 십 년 이상을 함께해온 이들이다. 병사로 소모되었을 이들을 수 십년간 솔선수범 이끌며 웃고 떠들며 함께 살아갔다는 사실, 그것이 내 삶의 자취이며 자랑이었다.



"대장, 저게 교차로 맞죠?"


"아. 어어. 그렇다. 본대에 연락은 내가 할테니 정지하지 않고 계속 이동하도록."


"네에."


카멜 소령의 말에 잡념에서 현실로 튕겨나오고 말았다.


툴라를 우회한답시고 트럭이 잘 달릴 수 있을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울퉁불퉁하고 비포장의 진흙 투성이인 도로를 따라 한참을 달렸다. 샛길로 빠져나온 대열에 앞서서 한 시간 가량을 달리고 나서야 다시 포장된 도로에 닿을 수 있었다. 길 양 옆으로 보이는 풍경이라고는 겨울이 코 앞으로 다가와도 푸르른 밀 밑둥이 끝없이 펼쳐진 밭들, 그리고 그 사이의 숲과 버려진 마을들. 열심히 달려도 변함이 없는 평야의 경치는 시가지를 피하면서 가자니 도저히 바뀔 것 같지가 않아 몽환적인 기분마저 들었다.


"호드에서 콘스탄틴 하나에게. M4 도로에 도착했으며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겠다."


"콘스탄틴 하나, 확인."


무전은 그걸로 끝이었다. 



"흠."


"그 놈은 뭐래요?"


"자기 전차 지휘하는 것만 해도 바빠서 그런가 오늘은 말이 없군."


"어제보단 부지런히 달리긴 하는데요 확실히."


카멜과 대화를 나누자 내 뒤에 딱 붙어 달리던 738번 워울프 병장이 심심했던 모양인지 끼어들었다.


"하하. 좀 더 속도를 내줘야 상쾌하게 달리는데 말야."


"우리가 맞춰줘야지 어쩌겠나."


"헤. 대장 성격 많이 죽였다. 러시아놈들이랑 떨어져서 그런가."



우리 부대는 포로마냥 대열 앞에 붙어가던 어제와는 달리 러시아군 대열보다 1km 정도 앞서서 달리고 있었다. 여전히 저들이 우리를 감시하고 유사시엔 공격할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척후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거리가 벌어지긴 한 것이다.


멀어진 간격은 곧 저들의 신뢰를 의미했다. 우리를 더 신뢰할 수록 더 자유롭게 움직이게 할 것이다.



"어제 저치들의 의중을 좀 들여다보았지."


"오. 나한테도 썰 풀어주는거야? 칸 대장과 악당 두목의 일대일 대면!"


"그런건 아니다만."


"워울프. 쓸 데 없는 질문으로 대장님 방해하지 마라."


카멜이 워울프를 떨어트려보려고 하지만, 워울프 병장이 그런걸 신경쓸 성격이 아니지.



"에이. 그래도 대장 표정부터 달라졌는데. 뭐 좋은거라도 얻어먹었나? 말 좀 해봐요 대장."


"우리나 저들이나 서로의 전력을 써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서서 말이다."


"그럼 미덥지 않은 동맹인가?"


"그런 셈이지."


"으흐. 확실히 어제는 오랫만에 잘 먹고 편하게 쉬긴 했지."


워울프의 반응은 가벼웠고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지는 듯 했다. 저 러시아군 부대와 동행하더라도 워울프가 가볍게 넘어가준다면 어제의 사건에도 불구하고 대원들이 크게 반발하지는 않을 것 같으니까. 


호드 대원들은 나와 오래 함께한 인원일수록 나를 더 신뢰하는 경향이 있었고, 내 결정을 의심없이 잘 따라주곤 했다. 그래서 내가 지휘한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인원들, 특히 계급이 낮은 병사들이 제일 걱정이었는데 워울프 병장이 웃어 넘길 수 있는 수준이라면 다른 이들에게서도 이해를 구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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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야의 높낮이를 따라 완만한 경사가 있었지만 포장된 도로만큼 달리기 편한 곳이 없었다. 속도는 꽤 냈지만 대원들은 여유가 있는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내 뒤를 쫓아 잘 따라오고 있었다. 어제 낮까지 먼지투성이에 지쳐있던 모습과 비교해보면 분위기가 훨씬 나아진 것을 한 눈에도 알 수 있었다. 


45번 탈론페더 소위를 잃은 다음부터 항공 정찰 없이 적성세력과 직접 맞부딪히면서 전진해야 했고, 당연한 이치로 사상자도 늘었다. 나를 포함해서 9명만이 남았을 때에는 다들 전멸을 직감한 듯 침울했었다. 물론 대원들은 내 앞에서는 다들 최대한 웃어보였지만, 나도 고작 9명 사이의 분위기도 파악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으니까. 그런데.


11시 방향 능선에 뭔가 있다.



"전 대원 우측으로 이탈!"


대원들로부터의 응답은 없었지만 급격한 감속에에 부하들의 바퀴 소리가 그르르륵 하고 떨리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도로 위에 스키드 마크를 남기며 대원들이 일제히 풀밭으로 몸을 던졌다. 흙과 풀잎이 팔다리에 차갑게 부딪히며 쓸렸다.


워커를 아예 낮은 지대로 옮겨 자세를 눕히느라 바쁜 샐러맨더를 빼고, 일사불란하게 풀밭으로 몸을 던지며 포복 자세를 갖춘 대원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나는 머리에 쓰고 있던 쌍안경을 도로 쪽으로 내밀어 능선 너머로 나타났던 검은 물체들을 다시 살폈다.


"감염된 폴른과 토미워커다. 숫자는 40... 45기 정도."


"어떻게 하죠?"


내 바로 왼쪽에 바싹 붙어 엎드린 카멜 소령이 내게 물었다.


"거리도 멀고 아직 우리가 들키진 않은 것 같다만... 우리 뒤에 오는 대열은 들키지 않을 수가 없겠지."


무한궤도가 도로를 뭉개며 잘그락거리는 소음이 바람을 타고 먼 거리를 넘어 잔잔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전동기로 움직이는 차량인데도 그 육중한 덩치 때문에 소음을 숨길 수 있을리가 없는 것이다.


"콘스탄틴 하나에서 호드에게. 무슨 일인가?"


마슬로프 대령에게 무전을 치려던 찰나, 마슬로프 대령이 선수를 쳤다.


"호드에서 콘스탄틴 하나. 당소 진행방향으로부터 11시 방향에서 철충 감염체들을 발견했다."


"알겠다."


대령의 대답 직후 서서히 가까워지던 무한궤도의 소음이 멎었다. 왼쪽 귀에 들리는 전동기의 하울링이 점점 멀어지는 것으로 보아 선두에서부터 차례로 정차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선수를 칠까요? 포격으로 먼 거리에서 타격하다가 들이치면 이길 것 같은데."


카멜 소령의 제안에 506번 퀵 카멜 중위와 645번 퀵 카멜 소위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대열에 퀵 카멜은 셋. 501번 506번 645번 모두 실력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숫자가 크게 차이나는 것이 걱정이다.


"토미워커가 걱정인데... 잠시만 기다려봐라."


"칸, 우리 쪽에서도 적 위치를 확인했다. 적 병력 구성이 확인되는가?"


"감염된 토미워커와 폴른으로 보인다. 토미워커가 6기, 폴른이 40기 정도다."


"그래... 우리가 보기에도 그렇다."


"어찌할건가?"


"어쩌냐니. 싸워야지. 그리고리 소대를 그리로 보내겠다. 합류해서 뒤따르도록."


마슬로프 대령에게 네가 뭔데 명령질이냐 일갈하고 싶었지만 당장 분란을 만들어서 좋은 꼴 볼 것이 없었으므로 참기로 했다.


"그 대령은 뭐라던가요?"


내가 무전치는 것을 기다리던 카멜 소령이 물었다.


"어느 대령? 누구지?"


"모르겠는데."


그리고 아직 마슬로프 대령이 누군지 모르는 하이에나와 워울프 상병이 내 오른편에 엎드려서 질답을 주고받았다.


"러시아놈들이 싸우겠다고 하는군. 우리에게 전차 소대를 하나 보내준다니 그 놈들과 합류한다."


"에에 우리가 보조야? 저 새끼들이 우리 무시하는거 아냐 이거?"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하이에나와 얘기하던 워울프 상병이 불만을 터트렸다.


"어제 나와 카멜 소령은 러시아 놈들이 우릴 총알받이로 쓰지나 않을까 걱정했다만, 저들이 먼저 나서준다니 마음에 드는군."


"그... 런가? 그렇게 되나?"


"대장 말하는데 토달지 마라 이 년아."


10초 사이에 혼란과 분노와 혼란을 오간 워울프 상병이 퀵 카멜 중위에게 핀잔을 먹는 사이, 다시 한 번 왼쪽에서 무한궤도와 전동기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새로운 무전도.


"채널 25... 아아 들리나 호드?"


"잘 들린다."


"그리고리 하나, 스미르노프 중위다. 지금 호드 제대의 위치로 도로를 따라 접근 중이다."


자신을 스미르노프 중위라고 밝힌 그리고리 소대의 소대장의 목소리는 마슬로프 대령보다 훨씬 젊은 듯 했다. 계급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만.


"저기 오는군."


50톤은 족히 넘을 전차가 지면을 울려대는 진동은 포복자세인 우리에게 직접 와닿았다. 전차가 접근할 수록 구르릉 위이잉 거리는 소음은 물론이고 땅바닥이 덜덜 떨리는 것이 불편을 배가시켰다. 배를 바닥에서 떼어봐야 팔다리의 뼈가 징징 울리는 기분이라. 다른 대원들의 표정도 보아하니 느낌이 비슷한 것 같았다. 아. 이것도 샐러맨더만 빼고. 


그리고리 소대의 전차 4대는 도로를 따라 우리 부대원이 포복한 위치의 앞으로 와서는 차체를 발견한 적 방향으로 돌렸다. 


"이제부터 직진한다. 뒤로 붙으라."


"우리 대원들이 전차 뒤에 제대로 붙어있을지 모르겠는데."


"무슨 말이지?"


"전차 소대가 먼저 가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우리 대열이 뒤에 붙도록 하겠다."


"뭐어... 알겠다. 좋을대로 해라."


스미르노프 중위는 그리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무전을 끊었다. 


"기동할 준비. 전차 대열 뒤로 붙는다. 전차를 엄폐물로 쓰면 좋겠지만... 너희가 잘 따라갈지 모르겠군."


"알겠습니다."


대원들의 대답 직후, 전차들이 우리 머리 위로 먼지를 흩날리며 출발했다. 우리 대원들도 풀밭을 박차고 일어나 전차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앞쪽에는 먼저 출발했던 콘스탄틴 소대의 전차들이 보였다. 전차들은 철충들을 향해 고속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2시 방향, 내가 발견했던 철충들도 보였다. 이들도 콘스탄틴 소대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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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에 전차를 상대해본 적이 많다. 아무리 바이오로이드와 AGS의 시대가 왔다고 해도 30년 넘게 지상군 지휘관으로 활동한 자라면, 전차를 얼마나 많이 마주했었겠는가.


나는 전에 전차를 상대해본 적이 있다. 전차와 교전해야할 대부분의 상황에서 그들의 화력은 스틸라인과 AGS들이 받아주곤 했었다. 우리는 그 사이에 기동성을 살려서 그들의 취약점을 노려야 했다. 장갑이 약한 측면과 후면은 물론, 저들의 보급로, 전차병을 노리는 것이 화력과 방어력의 열세를 꺾어낼 수 있는 비법이었다.


나는 전에 전차를 상대해본 적이 없다. 수 십톤짜리 전쟁기계를 정면에서 맞서 상대했더라면 나는 이미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전차를 지상전에서 맞상대할 수 있는 바이오로이드는 극히 드문 전략병기 수준의 실험기들 뿐일 것이다. 바이오로이드가 앞서는 것은 가격, 유연성과 기동성이지 화력과 방어력이 아니었다. 전차를 잡아내는 것은 보통 AGS와 공군 같은 타 병과의 일이었고, 내가 직접 공격할 경우는 최소화 하는 것이 이로웠다.




항상 적으로 마주하던 그 전쟁 기계들이 우리 편일 때의 느낌은 썩 상쾌한 것이었다. 콘스탄틴 소대는 폴른들의 미사일 공격을 장갑으로 받아내며 전진했다. 기관포가 달린 폴른들이 공격할 수 있는 사거리 밖에서, 전열화학포가 앞으로는 붉은 화염, 뒤로는 푸르스름한 아크 방전을 내뿜으며 날탄을 쏘아보내자 자칫 골칫거리가 될 수도 있었던 감염된 토미워커들의 장갑판이 시원하게 박살났다. 감탄할만한 화력이었고, 그런 감상은 나만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와... 죽여준다 진짜."


"저런 것도 매력은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손으로 직접 조준하는 리볼버만큼 맛이 있을까?"


"에이. 그래도 거포의 로망이 있지 않아? 나는 기회 되면 꼭 내 손으로 저런거 쏴볼거다."


전부터 온갖 고화력 화기에 관심을 보이던 워울프 상병과 쌍권총 마니아인 워울프 상사의 취향은 극명하게 갈리는 모양이다. 동종 바이오로이드라 둘 다 무기에 관심 갖는건 그러려니 했는데, 이런데서 극과 극으로 갈릴 줄이야. 둘의 영화 취향도 상사는 서부극, 상병은 마구 때려부수는 액션 영화로 갈리는 것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큰 포가 좋으면 카멜로 태어나지 그랬냐."


"뭐 임마?"


곁에서 워울프 상사의 말을 들은 퀵 카멜 중위가 발끈하며 끼어들었지만, 두 워울프는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이퓨스볼 던지는 구경만 큰 저압포랑 저 쌔끈한 놈을 어떻게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있어?"


"하긴, 퀵 카멜건 박격포처럼- 으악!"


둘의 잡담은 퀵 카멜 중위의 대구경 꿀밤이 상사와 상병의 머리에 순차적으로 따닥하고 직격하면서 끝이 났다.



"적들이 유효사거리 안으로 들어왔고 교전을 개시한다. 적이 마을 쪽으로 퇴각하면서 아 전차의 사각을 노리는 것 같으니 엄호 바란다. 전차 기동로에 주의하도록."


"알겠다."


스미르노프 중위의 무전대로 순식간에 토미워커를 전부 잃고 일방적으로 도륙당하던 폴른들은 능선 근처의 마을 건물들 너머로 도망치고 있었다. 그러나 도망치는 와중에도 콘스탄틴 소대의 포격에 숫자가 하나둘씩 줄어가고 있었다.


"너희들! 이제 곧-"


[쿵-]


굉음과 충격파가 전신을 훑고 지나가자 뱃속의 장기와 혈관이 어지러이 뒤섞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그리고리 소대의 3호차의 포신에서 아크 방전이 일고 있었다. 호드 대원들 중 전차 대열에 가장 가까웠던 내 머리칼이 정전기를 따라 위로 뻗치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바이오로이드라서 충격파고 정전기고 버틸만 하니 망정이지.


"저게 무기지. 리볼버가 비교가 되냐고."


워울프, 지금 그거에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감상은 거기까지 하고, 이제 교전지역이다! 우리는 저 전차들 뒤로 붙어서 저 철충들이 숨는 마을로 진격할거다! 전차병 놈들 시야가 좁으니 구석에서 튀어나오는 철충들을 우리가 대신 처리해주면 된다. 전차들 움직이는거랑 쏘는거 조심하고, 너희가 다치는 꼴은 보기 싫으니 저 전차들을 최대한 써먹으면서 전투해라! 돌격!"


"돌격!"

"가자!"


대원들의 함성과 함께 우리는 다시 한 번 전장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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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굉장히 일방적이었다. 전차는 들판에서 일방적인 사거리 우위로 철충에 감염된 폴른들을 공격했고, 철충들이 숨은 마을도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마을에 진입한 후에도 전투가 많이 어려워지지는 않았다. 우리 대원들도 근접전이 다반사였던 평소의 돌격전과는 달리 거리를 꽤 멀찍이 두고서 사격을 가할 수 있었다. 


진짜로 가까이에서 철충을 마주했던, 위험할 뻔 했던 경우는 그리고리 소대의 2호차 뒤쪽의 배수로에서 감염된 폴른 하나가 머리 위에 인 미사일 발사기를 빼꼼 내밀며 기습했을 때 뿐이었다. 그 철충은 미사일 발사기를 2호차 방향으로 제대로 돌려보기도 전에 워울프 상사의 깔끔한 리볼버 더블탭으로 미사일을 유폭당했다.


그건 확실히 손맛이 있다고 볼만한 사격이었지. 워울프 상사야 워낙 실력이 좋았고 권총 두 자루로도 충분한 전투력을 낼거란 사실을 이해하고 있으니 소총을 버려도 인정을 해주었지만, 가끔 이렇게 그녀의 리볼버 사랑을 단편적으로나마 가슴 깊이 이해할만한 에피소드들이 생기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전투로 인해 약간의 지연이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늦게나마 오늘 목표로 하였던 거리를 도달했다. 러시아군 대열은 어제보다는 고속도로에서  훨씬 멀리 떨어져나와 숙영지를 잡았다. 철충들에게 쫓기고 있다는 불안감, 그러나 소규모 교전에서는 압도적으로 승리했다는 안도감이 뒤섞여있는 듯한 위치 선정이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라면 어렵겠지만 전장에서 오래 구른 지휘관의 직감이라고 해두자.


우리 대원들은 하루만에 러시아군이 제공하는 천막을 치고 야영하는데 익숙해졌다는 듯 일부는 땅을 고르며 짐을 정리했고, 또 일부는 러시아군 보급트럭에서 물자들을 얻어내러 떠났다. 물론 야전에서 뼈가 굵은 호드의 노련한 대원들이 야영하는데 익숙하지 않을리가 없었지만, 인간들이 하는 식으로 하는건 또 다른 경험이었으니까.


그리고 다들 부지런히 움직이는 와중에 농땡이 피우고 있는 인원도 보였는데...


738번 워울프 병장은 자기 롤러 워커 한 짝 위에 대여섯살 남짓 되어보이는 여자아이를 태운 채 맨발로 들판을 방방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이는 잔뜩 신이 났는지 꺅꺅 소리를 지르고 두 팔을 하늘에 휘저으며 속도를 즐기고 있었다. 아이는 금발에, 창백한 피부를 가졌지만 볼은 유독 새빨갛게 물들어있었고 뺨 위에 주근깨가 돋보였다.


병장의 남은 워커 한 짝은 어디갔나 둘러보니 샐러맨더의 워커 옆에 세워둔 저것 같다.


내가 신나서 먼지를 일으키며 돌아다니는 워울프를 멍하니 보고 있자 옆으로 퀵 카멜이 다가왔다. 남은 카멜 중 경력이 제일 짧은 645번 퀵 카멜 소위였다.


"인간 아이인가?"


"그렇...죠?"


"대체 어디서 데려온거지?"


"이 대열에 있던 아이 아닐까요?"


"그래?"


"아까 보급 트럭 위치가 어딘지 찾으려고 좀 돌아다녀봤는데, 트럭들 중 많은 수가 민간 차량이더라고요. 짐칸에도 민간인들이 많이 타고 있었고요. 아마도 피난민?"


"그렇겠지. 수가 얼마나 되던가?"


"꽤 돼요. 그러니까... 대열의 반이 넘을지도 모르겠네요."


"생각보다 비중이 높군."


"예. 진짜로요. 이 대열의 전투력이 기대 이하일지도 모르겠네요."


"그건 딱히 걱정하진 않았다. 어차피 장갑화된 차량이 아니면 쓸모 있는 전력이 안될테니까. 맨몸의 인간 보병이 AGS 상대로 이런 들판에서 유의미한 전투력을 내긴 힘들지."


"그런가요...."


소위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워울프 병장이 우리를 발견했는지 워커를 몰고 이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장! 얘 좀 봐라. 귀엽지?"


"대체 어디서 데려온거냐 워울프."


"보급트럭에 가다가 우연히 마주쳤는데, 얘가 날 알아보지 뭐야."


"알아봤다고?"


살짝 놀라 아이를 내려다보자, 아이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칸, 언니 칸 맞죠? 나는 까챠에요. 까챠 오를로바. 추도보라는 마을에서 왔어요."


"안녕 까챠. 네 말대로 나는 칸이란다."


"알아요. 인터넷이랑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언니 진짜 예뻐요."


"어... 그래. 고맙다."


솔직하게 말하겠다. 전쟁터에서 들을거라고 생각도 안했던 말이 꼬마 아이의 입에서 나와서 잠깐 당황했다. 표정으로 티가 났을지는 모르겠는데, 워울프랑 퀵 카멜은 눈치가 빠르니 알아챘을지도 모르겠다.


"얘가 대장 한 번 보고싶다고 그러더라고. 내 말도 잘 듣고 바이오로이드라고 뭐라 그러지도 않고 얼마나 착해."


워울프는 까챠를 발견한 것에 대해 굉장히 의기양양해 보였다.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 뿌듯함인지 즐거움인지 잘 구분이 안될 정도였다.


"알겠으니 문제만 안생기게 해라 워울프."


"에이 좋으면서 괜히 쌀쌀맞게 그런다. 알았어."


"언니! 달리자!"


"그래 가자!"


"잠깐."


워커의 전원을 올리고 위이잉 하는 모터소리와 함께 마구 달려나가려던 워울프를 제지했다.


"왜요?"


"잠깐만. 잠깐만 조용히 해봐라."


멀리서, 잔잔하게 중년 여성의 외침이 들려왔다. 내가 잘못 들은게 아니라면 '까챠'라는 외침이다.


"들리나?"


"어... 잘 모르겠는데."


"기다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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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챠'를 찾던 사람은 장년의 여성이었다. 기골이 무척이나 장대한 이 아주머니는 팽이를 연상시키는 실루엣을 가지고 있었다. 무채색이되 충분히 검지 못한 긴 바지와 꽃무늬의 셔츠, 그리고 무던한 갈색의 외투는 썩 어울리는 조합은 결코 못되었다. 그 굵은 상체를 울림통으로 쓰는 것인지 목소리는 멀리 뻗어나가는 힘이 있었고, 내가 까챠를 찾아다니던 가족 구성원 중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가장 먼저 듣게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는 까챠를 애타게 찾아다녔고, 마침내 찾아냈을 때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그 옆에 워울프가 있던 것을 보자마자 분위기는 뒤집혀버렸다. 비록 주름살에 파묻히긴 했지만 젊을 적의 미모를 약간이나마 엿볼 수 있었던 얼굴은 분노로 인해 일그러져 그 흔적마저 사라져버렸다. 


"너희 삼안 것들이 온갖 범죄에 납치 살인으로 유명하다지만 이젠 아이까지 납치하고 그러니?"


"아이 아주머니 그런거 아니라니까는."


"맞아 할머니. 이 언니 나 잘 놀아줬어."


"얘는? 납치범은 항상 처음에 잘 대해주는 법이다. 네 엄마 아빠랑도 오늘 얘기 좀 해야겠구나!"


"그러니까 할머님. 제가 납치를 하거나 뭐 그런게 아니고."


"아니라고? 전쟁용 바이오로이드년이 아이에게 무슨 볼 일이 있나? 노인네라고 우습게 보는게냐?"


"그... 그게..."


"아냐. 내가 먼저 놀자고 했어. 저기 칸 언니도 있단말야."


까챠가 나와 퀵 카멜 소위를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할머니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할머니는 우리 고개를 돌려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워울프를 향했던 분노와 독기는 눈동자에 서린 채 우리를 향해 방향만 바꾸었을 뿐 변함이 없었다. 


할머니는 우리를 잠시 노려보다가, 볼 일도 없다는 듯 아무 말도 없이 까챠에게로 시선을 돌려버렸다.


"어른들이 호드는 특히 조심하라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니? 텔레비전 시청에 대해서도 어멈이랑 좀 이야기를 해봐야겠구먼."


"그치만..."


"말이 너무 심한거 아니요 할멈? 카챠가 말했잖-"


[퍽]


워울프 병장의 항의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워울프가 카챠의 이름을 내뱉은 순간 할멈의 손이 올라갔고, 워울프의 턱을 힘껏 후려쳤기 때문이다.


"어디다 내 손녀 이름을 대! 내 이번 일에 대해서는 군에 단단히 따질거외다! 가자꾸나. 가족들이 모두 걱정하고 있다."


"안돼요! 언니... 언니...."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할멈은 까챠를 안아들고 뒤돌아섰고, 워울프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저 할망탱이를 그냥!"


"안된다 카멜."


성내며 뛰쳐나가려던 퀵 카멜 소위를 붙잡아 말렸다. 


"이런걸 두고 본단 말이에요?"


"안돼."


"이이익...!"


화를 삭이는 카멜을 두고 워울프에게 다가갔다.


"병장, 워울프 병장. 괜찮나?"


"대장... 어... 괜찮은데, 미안."


"사과하지 마라 워울프. 네 잘못은 없다."


슬픈 사실이지만 전쟁터로 변한 지역에서는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738번 워울프는 중동에서 작전을 했을 때도 어린아이와 줄곧 잘 놀아주곤 하였다. 이번에도 아이가 먼저 관심을 보이자 별 다른 고민 없이 맞장구치며 잘 대해줬을 것이다. 


"아이 가족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못한 탓이지 뭐."


"아니 정말로, 자책할 것 하나 없으니 기죽지 마라."


"응... 나 이런걸로 기죽는 성격 아닌거 알잖아 대장. 진짜로 괜찮아."


워울프의 입은 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연보랏빛 눈동자의 깊은 곳에서는 수심이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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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