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1편

2편

3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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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 <지혜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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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대충 전말은 들었네만,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병사들 사이에서 이야기 길게 돌아서 좋을 것도 없으니 말이지."


마슬로프 대령은 사건에 별 다른 감흥이 없다는 듯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번 일 따져봐야 피차 피곤하니 너무 깊이 따지지 않도록 합세. 내 그 가족한테는 대충 둘러대 둘테니 자네 대원들도 민간인들과 너무 마주치지 않는게 좋겠어."


"좋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하지."


"자네 대원들 잘 좀 간수해주게. 이런 일이 자꾸 생기면 내 입장도 곤란하니."


네 놈의 정치적 입지에 작은 불편이 생기는게 워울프의 슬픔보다 크겠느냐 싶었지만 따지고 들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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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오셨어요."


"어어."


우리 천막에 들어가자 퀵 카멜 소령이 귀가하는 이 맞이해주듯이 인사해주었다. 천막 가운데 세워진 난로 겸 조명 덕분에 천막 안은 꽤 따듯했고, 누런 조명 덕분에 퍽 아늑해보이기도 했다. 


대원들은 편한 복장으로 개인 정비를 하거나 자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식사한 흔적들은 진작에 치워두었고, 다들 헐렁한 복장 한 장 정도만 걸치고 휴식을 하거나 장구류를 손보고 있었으니까. 다만 숫자가 좀 부족해보였다.



우리 부대에 지금 남은 대원은 9명이다. 계급 순으로,


501번 퀵 카멜 소령

506번 퀵 카멜 중위

645번 퀵 카멜 소위

331번 워울프 상사

634번 샐러맨더 하사

738번 워울프 병장

931번 워울프 상병

427번 하이에나 상병


그리고 나.


지금 천막 안에 보이는 인원이라고는 카멜 소령과 소위, 워울프 병장과 샐러맨더 뿐이었다. 카멜 소위와 샐러맨더는 카드놀이가 한창이었고 워울프는 가만히 쉬고 있었다.


"왜 넷 밖에 없나?"


"자유 시간이라고 놀러 나갔을걸요?"


"자기들끼리? 놀러 나간다고?"


"글쎄요?"


카멜 소령이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안그래도 인원 관리 좀 하라고 한 소리 듣고 오는 길인데 말이지."


"누가 대장한테 감히 그런 말을 했어요? 마슬로프죠?"


"이젠 계급도 안불러주기로 했나?"


"오늘 보니까 인간들도 대장 계급은 신경도 안쓰던데요 뭘. 스미르노프 중위인가 하는 그 사람 중위인데도 대장 이름을 막 부르는데 저라고 신경을 써야하나요?"


"뭐 우리 부대는 애초에 계급에 그리 연연하지 않으니까."


"그것도 그렇고요. 아무튼. 마슬로프가 그랬죠?"


"누구겠나 그럼. 뭐 별 일 없었으니 신경쓰지 마라."


카멜과 대화를 하고 있자니, 워울프 병장이 내용을 엿들었는지 슬쩍 옆으로 붙어왔다.


"그거 나 때문이지 대장?"


"아 워울프. 기분은 좀 나아졌나?"


워울프 병장의 표정은 눈에 띄게 나아진 것처럼 보였다. 따듯한 음식과 휴식의 힘이란 그런 것이니.


"응. 걱정해준 덕에. 그래서 그 대령이 뭐래?"


"대령? 퀵 카멜이 이야기 해줬나?"


"카멜이 알 만큼은 알아둬야 한다고 그러더라고."


카멜이 대원들에게 적당히 이야기를 해준 모양인데, 카멜 소령이 경륜이 있으니 알아서 잘 정리해서 전달해줬을거라 믿는다. 부대의 현재 상황은 구성원들 모두가 궁금해 할테고 어차피 언젠가는 이야기를 해야하니까. 시시콜콜한 기싸움과 관련한 것은 빼고.


"그랬군. 까챠 관련해서 이야기가 나온 것은 맞지만 정말로 별 일 없었다."


"뭐라고 했어? 징계라도 한대?"


"그런게 없었으니까 별 일 없었다는거다만. 나더러 민간인과 충돌 생길 일이 없도록 인솔만 잘 해달라더군."


"싱겁네."


"우릴 억지로 합류시킨게 자기 자신이니, 자기 입장을 생각해서 시끄럽게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그 대령이란 사람은 부하들한테 우리 대장처럼 신뢰를 못받나보다. 당당하지 못한거지."


"맞아."


워울프의 감상에 카멜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곤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씨익 웃었다. 작은 뒷담화였지만 서로 보기에 썩 괜찮았던 모양이었다.


"카멜."


"네?"


"내 질문에도 대답을 해줘야지."


"어... 다른 대원들이요? 으음... 아! 그리고리 소대 2호차 조종수란 사람이 워울프 상사를 찾아왔었어요."


"드미트리 소대?"


"네. 벌써 몇 시간 됐는걸요."


"찾아가봐야겠군."


"워울프 상사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그래도. 걱정스럽다."


워울프 상사도 40년씩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대원이었지만, 다른 부대원을 대해본 경험이라곤 스틸라인의 보병들 밖에 없을 터인데다가 인간들을 대해는데는 서투를지도 모른다. 이 군인들이 그리 호의적이진 않다는 것도 알고 있고 지휘관에게 한 소리 듣기도 했으니 더더욱.


"저도 따라갈까요?"


"아니. 여기는 네가 최선임으로 관리 해줘야지."


"네..."


"잘 갔다와 대장."


카멜 소령과 워울프 병장의 배웅을 받으며 다시 돌아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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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이 비슷하게 생긴 전차들 사이에서 특정 차량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아니 다행인 점은 이 대열에 남아있는 전차라고는 1개 전차 대대 정도밖에 안되는 수준이라서 정 필요하다면 일일이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스틸라인 부대 안에 들어가서 특정한 어느 브라우니를 찾아내는 것처럼 무리한 일은 아닌 셈이다.


운이 좋게도 오늘 함께 전투에 나섰던 그리고리 소대와 콘스탄틴 소대의 차량들이 어떤 도장이 되어있는지, 어떤 부속물을 달고 있는지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어둠 속에서도 사소한 부분까지 잘 볼 수 있는 시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도 잘 된 일이다.



앞서 나열한 그런 연유로 그리고리 소대의 천막들은 꽤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4대의 전차들이 앞뒤로 둥글게 호를 그리며 이어져 천막들을 보호하고 있었는데, 3호차와 4호차는 정비 중인 인원들이 있었다. 전차 승무원인지 정비병들인지는 구분이 안되었지만 그들도 어둠 덕인지 나를 신경쓰지는 않았다. 천막은 우리가 사용하는 것 정도 크기의 천막 2개로, 전차 소대의 승무원을 다 합쳐봐야 12명 수준임을 고려하면 아주 널널한 배정이었다.


워울프 상사가 어느 천막에 있는지는 목소리가 들려서 아주 쉽게 알 수 있었다. 1호차 앞의 천막이었다. 천막 주변엔 지키는 사람도 없고, 천막 안에는 왁자지껄하게 목소리가 들리니 안면몰수하고 들이쳐보기로 했다.



"그래서 엄폐물에 따다닥, 한 방씩 먹여주고 나니 조용해지더라고. 그렇게 코수*를 처음으로 손에 넣은거지."


* Koskenkorva, 핀란드의 보드카.


문을 위로 밀어올리자 입구 옆에 앉아있던 워울프 상사는 이미 술을 좀 들이켰는지 손에 금속 술잔을 들고 손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천막 안에 들어서자마자 술과 음식의 냄새가 강렬하게 풍겨왔다. 안쪽에는 워울프 말고도 러시아군 대원들이 다섯, 그리고 퀵 카멜 중령과 하이에나도 사이에 끼어있었다. 모두들 손에 술잔이나 그릇을 하나씩 들고 있는 것을 봐서 한창 술상이 벌어지는 중인 모양이었다.


입구와 반대쪽을 보며 한창 떠들던 워울프 상사를 빼고 나머지 7명의 시선이 천막 입구를 들추고 들어선 나를 향했고, 워울프도 이내 낌새를 채고는 내 쪽을 돌아보았다.


"어이야. 우리 대장님이 왜 여기 계실까?"


"워울프, 또 사고친건 아니겠지?"


"그럴리가. 다들 친절하게 대해줬다고. 이거 봐아. 우정의 증표가 따로 있겠어?"


이미 거나하게 취해서 볼이 새빨개진 워울프는 내게 보드카 병을 내밀어보였다. 벨루가 보드카. 비싼 놈이긴 하지.


워울프 상사의 술주정을 보고 군인들이 껄껄대며 웃어대었다. 카멜과 하이에나도 같이 웃었다.


"대장도 앉아. 같이 마시자."


"음..."


"새 손님인데 인사라도 하시죠."


내가 말없이 고민하자 군인들 중 가장 나이가 있어보이는 중년 아저씨가 말문을 열었다. 군인들도 다들 편한 복장이라 계급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애초에 같이 술이나 마시자고 온 것도 아니고 나간 대원들이 사고치지 않나 확인하고 싶었던 것인데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조금 시간을 써야겠다.


"나는 앵거 오브 호드의 지휘관 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싸워나가는 전사들을 만나게 되어 영광이다."


"하하하하."


인삿말에 양념을 좀 쳤더니 뭐가 그리 재밌는지 다들 웃는다. 웃음이 좀 사그라들자, 중년 아저씨가 다시 사회를 받았다.


"우리는 여기 중위님부터 소개하는게 맞겠지. 먼저 하시지요."


"1호차 전차장 스미르노프 중위입니다."


이미 들어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낮의 전투 중에 들었던 그리고리 소대 소대장의 목소리였다. 목소리로 예상했듯이 성인이 된지 몇 년 지나지 않은 듯 젊은 외모였다. 자기 관리가 잘 되었는지 각지게 깎은 금발 머리에 수염도 흔적 없이 잘 면도되어 있었다. 키나 체형은 평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얼굴은 얇은 것이 날카롭다는 인상을 받았다. 


"낮에 이미 무전 상으로 이야기를 나눴었지요 우리는."


"말투가 많이 누그러졌군 중위."


"상사님이 초대를 하셨으니 예의를 차려야지요."


"상사?"


"나요."


가장 먼저 말을 걸어주었던 중년의 군인이 대답했다. 


"2호차 전차장 소볼로프 상사올씨다."


"반갑다."


자기를 소볼로프라고 소개한 남자는 약간 작은 키에, 다부진 체형을 가지고 있었다. 짙고 굵은 눈썹에 넙대대한 코, 전체적으로 각진 골격에 걸맞게 얼굴도 네모낳다는 느낌을 강해게 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팔자주름은 있지만 갈색 머리카락이 새지는 않았고 가르마를 반반 갈라놓아 단정한 느낌을 주었다. 


"내가 여기 워울프 상사를 초대했소."


"뭔가 일이 있었나?"


"오늘 전투에서 우리 뒤통수를 지켜줬으니 답례로 술이나 한 잔 주려고 했지."


"에헤-"


워울프가 실없는 소리를 내면서 얇게 잘린 살라미를 입으로 밀어넣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군."


말은 그렇게 하지만 어떤 꿍꿍이가 숨어있는지 몰라 소볼로프 상사의 표정을 살폈다. 소볼로프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위로 피하더니, 이내 다시 나를 바라보고는 입을 열었다.


"칸 지휘관이 뭘 걱정하고 있는지는 알겠지만 우린 이전부터 전투에서 함께했던 인원들을 자주 초대하곤 했다오."


속마음 읽어내는게 귀신같군.


"그런가?"


"초대해놓고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제 때 감사를 못해두면 감사를 표할 기회가 없어지는걸 많이 봐왔소. 전차와 같이 투입되는 병과는 많지만 아무래도 전차가 제일 오래 살아남는 편이니."


"아이 아저씨 술맛 떨어지게."


"워울프!"


"아니 괜찮소. 손님 들여놓고 할 이야기는 아니지."


"내가 대신 사과하겠다."


"됐으니 소개나 마저 합세. 여기는 우리 포수요."


소볼로프 상사가 자기 왼편의 삐쩍마른 젊은이를 가리켰다.


"볼코프 하사입니다."


"우린 그롬(гром; 우레)이라고 부르는데-"


"상사님."


"우레 말인가?"


"하아."


볼코프 하사는 내 입에서 '우레'라는 단어가 나오자 짧게 한숨을 뱉었다. 소볼로프 상사는 볼코프 하사의 반응을 보며 장난기 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삐쩍 마른 사람이긴 해도 우레같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날쌔보이거나 총명해보이진 않는데 말이지.


"왜 별명이 우레가 됐지? 좀 날쌔기라도 한가?"


"말해도 되나 드미트리?"


"이미 엎어진 물 아닙니까?"


드미트리 볼코프인 모양이군.


"좋아. 간단한 뒷이야기가 있소. 이 친구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전투할 때 포를 잘못 쏜 적이 있었거든."


소볼로프 상사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볼코프 하사는 술잔을 쭈욱 들이켰다.


"변전소라도 쏜건가?"


"아니. 좀 더 유치한 이야기라오. 가즈프롬(Газпром) 본사 건물 꼭대기에다가 포탄을 쳐박아서 가즈프롬을 그롬(Гром)으로 만들어버렸다네. 러시아 제1의 기업을 개명해버렸지."


"우하하핫."


진지한 우스갯소리인가 잠깐 고민을 하려고 했는데, 우리 대원들과 러시아군 대원들이 함께 웃어버렸다. 천막 안의 9명 중 볼코프 하사와 나만 웃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나는 볼코프 하사를 배신하고 웃는 시늉이라도 하기로 했다.


적당히 웃음이 가라앉자, 소볼로프 상사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뭐, 이 쯤 해두고, 다음 사람으로 넘어갑시다. 다음은... 안토노프?"


자연스럽게 시선은 취한채 실실거리고 있는 하이에나를 지나 다음 사람으로 넘어갔다.


"중사 안토노프요. 1호차 포수고."


"반갑다."


"반갑소."


안토노프 중사는 전차장인 스미르노프 중위보다도 나이가 많아보였다. 그래봐야 한 30대 중반 정도 되어보였지만. 말을 반갑다고는 하고 있지만 그리 달가워보이지는 않았다. 아니면 그냥 자기 손에 들린 술잔에 더 진심이었을 수도 있고.


"그리고 저는 아브라모프 중사입니다. 제가 여기 워울프양과 손님들을 모셔왔죠."


아브라모프 중사는 안토노프와 내가 서로 더 할 말이 없다는 것을 파악했는지 재빠르게 끼어들었다.


"아. 2호차 조종수시라고 들었습니다만."


"예. 호드 숙소에서 이미 대원분들과 얼굴 도장을 찍었었지요."


작은 키에 뒤로 밀어넘긴 흑발 올백머리, 짙은 눈썹에 매부리코, 확실히 인상적이라 도장 찍었을 법 하지. 안토노프가 아무 말 하지 않을 때 재빠르게 끼어든 것으로 보아 눈치는 빠른 사람일 것이다. 여기저기 얼굴 도장 찍고 다닐 정도면 화술도 괜찮겠지.


"이름은 다 텄으니, 자."


소볼로프 상사가 자기 앞에 있던 술병을 들어 빈 금속 잔에 붓더니 내 앞에 내밀었다.


"한 잔 받으시지요."


"음. 나는 저희 대원들이 사고치지는 않나 확인하러 온겁니다... 만."


"문제 없지 않았소? 혹시 술을 못하는거라면-"


"우리 대장이 술 얼마나 잘먹는데! 나도 어제 처음 알았다니까?"


워울프는 확실히 많이 취한 것 같군.


"워울프양은 그렇다고 말하는데 지휘관께선 어떠신지...."


"대장. 같이 놀다 가요."


"카멜...."


우리 대원들과 소볼로프 상사는 대놓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다른 러시아군 부사관들도 각자 자기 잔이나 접시에 시선을 둔 채 나를 곁눈질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일어나면 이들과 제대로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올까? 당장 내일도 함께 작전을 해야할지도 모르는데 괜찮을까? 우리 대원들은 더 취하고 나서도 무사할까?



이런 걱정같지 않은 걱정들을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뿐임은 나도 안다.


내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마슬로프 대령이 줬던 잔과는 달랐지만 여전히 기계부품 같았다. 그게 그리 중요하지는 않지만.


쭉 들이켰다. 좋은 보드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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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하늘엔 어제와 같이 은하수가 그득히 넘쳐흐르고 있었다. 지평선 근처에 구름이 좀 보였지만 경관을 망칠 정도는 결코 아니었다.


"아- 잘 마셨다!"


"잘 마셨다!"


모임은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여러차례 술을 권하던 모습과는 달리, 내가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아서 소볼로프 상사가 자러 가겠다고 자리를 떴기 때문이다. 퀵 카멜 중령과 하이에나 상병은 만족스러운지 취해서 기분이 좋은건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잘 마셨다고 외쳐댔다.


"그런데... 워울프 상병은 어디있나?"


"워울프? 여기있잖아요."


카멜이 워울프 상사를 들어다 내 앞에 들이댔다. 워울프 상사도 많이 취해서 그런지 헬렐레 한 얼굴로 자기 키보다도 작은 카멜 손에 들려있는 모습이 꽤 우스웠다.


"아니 워울프 상사 말고 상병. 931번 말이다."


"아-"


카멜이 고민하면서 워울프를 툭 내려놓았는데, 똑바로 착지했다. 이걸 보면 별로 안취했나 싶기도 하고....


"모르겠는데요."


"나. 내가 알아."


"그래 하이에나. 어디로 갔지?"


"걔 미니 빔 프로젝터 들고 나가던데, 영화 틀러 간거 아닐까."


"이 들판에서 영화를 어디다가 틀 수 있지?"


"장갑차 옆면에다가...? 모르지 나도."


"정답!"


워울프 상병이 뒤에서 하이에나를 와락 껴안으며 등장했다. 하이에나가 워울프보다 키는 더 크다만 덩치는 그렇지 않으므로... 불쌍한 하이에나는 앞으로 넘어져버렸다.


"미친 년아!"


"에헤. 미안."


"워울프 상병."


"안녕 대장."


"술 마셨나?"


"나? 아니 건전하게 영화만 봤지. 술 마신건 대장 쪽 같은데?"


"흠흠. 네 말이 맞다."


하이에나는 워울프 상병을 밀어내고 무릎을 털며 일어났다. 워울프 상병은 확실히 술에 취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기분은 무척 좋아보였다.


"영화는 어디서 봤지 워울프?"


"아까 말했잖아. 장갑차 평평한 곳에다가 빔 프로젝터 틀어놓고 봤지."


"문제될 일은 없었나?"


"영화 한 편 보는데 문제될게 뭐가 있겠어."


"그랬다면 다행이군."


"그래서 영화관 인기는 좋더냐?"


워울프 상사가 워울프 상병 옆에 붙어서 물었다.


"그럼. 액션 영화만큼 취향 안가리고 잘 팔리는게 있겠어? 막사 그득히 들어차서 봤지."


"그 정도면 우리보단 분위기가 나았겠는데? 좀 괜찮은 남자 없었냐?"


"제대로 씻지도 관리도 못한 병사들이 볼 게 뭐가 있어. 전차병들 다 부사관들 아냐? 오히려 그 쪽이 낫지 않아?"


"그건 상대적으로 늙은이들이란 소리지."


카멜 중위가 실망스럽다는 듯 답했다.


"반반한 사람도 있긴 했는데."


"그건 네 기준이 너무 낮은거고."


하이에나의 말에 워울프 상사가 면박을 주었다.


"스미르노프 중위 괜찮지 않았어?"


"그 사람은 가망이 없는데 애초에 빼야지."


"그런가?"


"될리가 없잖아. 바보야?"


"누가 누구보고 바보래?"


주제가 인간들에게 걸리면 문제될 쪽으로 넘어가길래 한 소리 하기로 했다.


"하이에나랑 워울프 둘 다... 아니 너희 모두 실없는 소리하다가 인간 군인들한테 걸리지나 않게 주의하도록 해라."


"에이 진짜 별 걱정을 다해."


"하이에나 네가 대장 마음을 알기나 하냐."


내 편을 들어주는건 카멜 중위밖에 없군.


"그런데 그 스미르노프씨는 왜 안돼? 혹시 고자야?"


나와 카멜의 말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궁금증 해결에 나서는 워울프 상병이다. 내가 얼굴을 쓸어내리자 고맙게도 카멜이 등을 토닥여준다.


"기혼자야. 신혼이래."


"에이."


하이에나에 답변에 워울프는 싱겁다는 듯 실망하고 말았다.


"결혼한지는 얼마나 됐대? 


"올해 여름이라니까 해봐야 서너달 아닐까?"


"그래? 와이프 얼굴은 봤냐?"


"아니...."


"왜?"


하이에나가 답을 주지 않자 워울프 상사가 입을 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내에 신혼집이 있었대."


"오. 저런.... 괜히 캐물어봤네. 술자리 분위기 장난 아니었겠다."


다행스럽게도 그 답변이 워울프 상병의 호기심에도 종언을 가져다 준 모양이었다. 그런데 나도 그런 얘기는 못들었던 것 같은데?


"내가 없을 때 한 이야기인가?"


"어? 음... 그렇네. 대장 들어오기 전에 한 이야기였어."


"내가 들어갔을 때는 평범한 술자리였다만, 초면인 이들에게 그렇게 무거운 이야기를 했을 줄은 몰랐군."


"확실히 대장 들어오고 나서는 그런 얘기 더 안하긴 했지."


"더 있었나?"


"말도 마셔. 연락 안되는 가족 얘기부터 해서 보병 중대 몰살당한 얘기에 어후... 지금 생각하니까 술 마신거 올라올 것 같다."


워울프 상사는 기억하기 싫다는 듯 넌더리를 냈다.


"그게요. 뭐 얘기하다가 그리로 이야기가 빠졌더라... 누가 우리 부대원 잃은 얘기 했다가 주제가 그 쪽으로 가버려서."


"몰라. 기억 안나. 기억할 필요도 없고."


카멜 중위와 하이에나도 한 마디씩 거들며 분위기가 급격히 냉랭해져버렸다. 내가 괜히 말을 이었군.


"아 뭐 술자리 좋은거 좀 있었냐고 물어볼랬더니 그런 자리였을 줄은 몰랐네. 암 생각 없이 영화나 본 내가 낫다."


"그래. 워울프 말이 맞다. 빨리 들어가기나 하자."


"근데 확실히 그건 있어요."


"뭐 말인가?"


퀵 카멜 중위가 대화를 끝내기 싫다는 듯 새 장을 열었다.


"부하들끼리만 통하는게 있는건지 모르겠는데, 우리끼리 있을 때는 가족 얘기, 동료 얘기 서스럼없이 막 했었거든요? 근데 대장 들어오고 나서는 입들을 싹 닫더라고요."


"글쎄, 내가 들어간 다음에도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했던 것 같다만."


"음... 그건 맞는데요... 뭐라고 해야하지?"


카멜은 묘사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 듯 애꿎은 턱만 검지로 톡톡 쳐대며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술기운 때문일지 정말 어려운 것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모습을 보고 워울프 상사가 답답하다는 듯 끼어들었다.


"대장 앞에선 자기네 희생자나 뭐 그런거. 슬펐던 일을 말을 못하더라고. 대장 들어오고 나선 잡담 아니면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만 했잖아? 이유는 모르겠네 나도."


"맞아. 그건 것 같네요. 생각해보면 대장이 소장 계급 달고 있어서 그런거 아니에요? 원래 높은 분 오면 얘기하기 부담스러워 하잖아요."


"그런가? 그 사람들 바이오로이드 계급 그리 신경 안쓰는 것 같던데. 대장도 뭐 계급장 달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스미르노프도 소볼로프도 말 편하게 했잖아."


"나도 그건 아닌 것 같군. 애초에 스미르노프 중위는 오늘 나한테 무전할 때 반말로 시작했기도 하고."


"스미르노프가 반말했다고요? 와 아까 알았으면 한 대 때려줬을텐데."


"굳이 그럴 것 까지 있나? 너희들도 나한테 딱히 존댓말을 하진 않는데. 아 카멜은 빼고. 고맙다 카멜."


"에헤헤."


카멜은 멋쩍게 웃었고, 워울프 상병은 하이에나를 붙잡고 스미르노프가 누구인데 나랑 무전을 했냐고 묻고 있었다. 낮에 있던 교전에서 전차보고 감탄하던건 벌써 잊어먹었는지 모르겠다.


"30년 넘게 본 우리가 반말하는거랑 그 인간들이 반말하는거랑 같나?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대장."


나와 함께 한 기간으로만 따지면 가장 오래된 대원인 워울프 상사가 따져들었다. 진지하게 화난 말투는 아니었지만.


"상사 너는 내가 케시크일 시절부터 반말을 했었는데, 함께한 기간은 상관이 없지 않나."


"그랬나? 하하."


"나는 정말로 신경쓰지 않으니까 너희들도 어디가서 이걸 문제삼지 않았으면 좋겠군."


"예이 예이."


상사가 대표로 대답을 마치고, 대원들은 또 다시 각자 원하는 잡담을 떠들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우리 부대의 천막이 가까웠고, 천막 너머에서 반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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