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사항



꿈같던 여름밤, 그날을 기억할 꽃갈피 1편


재료 : 꽃갈피 + 하르페이아

깁니다

시 쓰던 사람의 소설이라 글이 장황할 수 있습니다 ㅠㅠ

소설 속 캐릭터의 묘사가 기존 캐릭터와 다를 수 있슴미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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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이네요. 하르페이아 님이 읽기 꺼려지는 책이라니.”

   

금란이 흥미로운 표정과 함께 찻잔을 들어 올렸다.

   

마감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카페 호라이즌은 낮동안의 부산함이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한산했다. 하르페이아는 초조한 얼굴로 찻잔을 기울이는 금란을 지켜보고 있었다. 금란은 하르페이아의 불안함을 느꼈는지 잔을 내려놓고는 빙그레 웃었다.

   

“가사집이에요. 한반도 지역에서 인기 많았던 가수의 노랫말을 모아놓은...”

“아하. 가사집이라니. 좋네요.”

”작사에 도움이 될까 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펼 때마다 영 이상한 기분만 들고 이해 안되는 말들만 적혀 있어서요. 금란 님이 마침 그 지역 출신이시니...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

“당연하죠. 부담 갖지 마셔요. 혹시 잠깐 볼 수 있을까요? 혹여나 제가 알던 노래일 수도 있으니까요.”

   

책을 건네받은 금란이 책장을 빠르게 훑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하르페이아의 눈이 빛난다. 정말 책을 읽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책장이 빠르게 넘어갔고, 금란의 눈은 닫혀 있었다.


하르페이아의 의심이 미처 고개를 들기도 전에 금란은 책을 덮고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유감스럽게 제가 아는 가수의 노랫말은 아니네요. 하지만 좋은 노랫말이에요. 만약 노래가 남아있다면 들어보고 싶을 정도로요.”

“버... 벌써 다 보신 건가요?”

   

눈이 동그랗게 뜨인 하르페이아가 물었다.

   

“그럼요. 이런 일에는 감각이 예민한 게 도움이 되곤 해요. 다만, 그것 때문에 책을 읽을 땐 버릇처럼 느끼는 것보단 기계적으로 읽곤 해요. 마음을 울리는 것들에 금새 빨려들거든요. 특히 이런 책들에는 더더욱.”

   

금란의 표정이 묘한 분위기를 띄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슬픈 눈빛을 하고 있을것만 같은. 들뜬 기분으로 폈던 책을 다시 덮었을 때 나도 저런 모습이었을까. 하르페이아의 머릿속에 얼마 전 해변가의 풍경이 펼쳐진다. 카페 창문 너머로 져가는 노을빛을 맞는 금란의 얼굴에 하르페이아의 심장이 다시 간질거렸다.

   

“하르페이아 님이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이해가 돼요. 그 감정의 정체를 왜 알 수 없는지도.”

   

노을에서 시선을 거둔 금란이 다시 하르페이아를 보며 미소지었다.


카페에서 처음 얼굴을 마주했을 때와는 다른, 씁쓸한 초콜릿이 입 안에 남은 듯 찝찝한 기분이 낳은 웃음인 것처럼.

   

“다신 주인님을 볼 수 없다면, 하르페이아 님은 무슨 생각이 들 것 같아요?”

   

금란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주방에서 들리는 호라이즌 부대원들의 웃음소리가 둘 사이의 적막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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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신 주인님을 볼 수 없다면, 하르페이아 님은 무슨 생각이 들 것 같아요?”

   

테이블을 두드리는 하르페이아의 손가락이 당황스러운 소리를 냈다. 입술이 달싹이다 다시 멈칫, 금란의 물음에 대한 답은 이미 떠올랐지만 하르페이아는 쉽사리 꺼내지 못했다.

   

다신 사령관을 볼 수 없다면. 지금처럼 피하는 것도 할 수 없이, 사령관이 영영 사라진다면.

   

“상상이 잘 안 가요...”

“괜찮아요. 말할 수 없는 것도, 당황스러운 것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요. 겪은 적 없는 것들을 떠올리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니까요. 주인님은 언제나 저희 곁에 있었으니까.”

   

책 속의 가사들이 들리는 듯, 하르페이아의 손이 절로 테이블에 가사들을 적었다.

   

어떤 노래 가사는 가을 속 어느 편안한 일상을 말했다.

슬픈 구석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고 퍽 따뜻하게 읽혀서,

항상 시끄럽고 요란한 스카이나이츠 부대원들이 생각나 웃음이 나온 적도 있다.

   

또 어떤 가사에는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덤벙거리는 성격을 핑계 삼아 와락 안기고 싶었던 적,

일기를 쓰다가 사령관 이야기를 적을 때면 괜히 펜에 힘이 들어갔던 적,

처음 무릎을 빌려서 책을 읽던 적과 무대에서 눈이 마주쳤던 기억이 머리 위를 맴돌았다.

   

이때부터였다.

책의 표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사령관이 떠오르기 시작한 게.

   

하르페이아의 손이 다시 멈췄다. 다음 노랫말로 넘어가야 하는데, 적을 수 없었다.

사령관이 없는 세상을 떠올려야 하니까.

   

떠오르는 풍경은 예쁘다.

오늘처럼 구름 한 점 없는 여름밤이다.

해가 져도 무더운 날씨에 온몸에 땀이 흐르지만 바닷바람은 내 마음을 아는지 종종 더운 몸을 식힌다.

구름 한 점 없으니 절로 하늘을 보게 된다.

하나 둘 셋. 그러다 그만두기를 몇 번이나.

셀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로 별은 빼곡하게 밤하늘을 채운다.

철썩이는 소리가 아름답다.

달이 불러온 물결을 하늘로 달려가다 넘어지기를 반복하며 물보라를 일으킨다.

그러다 바위를 때리는 파도에 모래사장을 밟는 발걸음이 멈춘다.

   

“세이렌 님. 실례인 줄 알지만, 조금만 더 있어도 될까요?”

   

금란은 마감시간이 지난 것을 알리려 가까이 다가온 세이렌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이렌은 하르페이아를 흘끔 쳐다보더니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쓰세요. 너무 문지르진 마시고. 그냥, 흐르게 두셔요.”

   

하르페이아의 머리색과 똑같은, 가장 높이 오른 햇빛을 따다 수놓은 것 같은 노랑색 꽃이 그려진 손수건으로 얼굴을 감싸고, 그녀는 숨 죽여 울었다.

   

떠올리기도 싫은, 이별이 바꾸어놓은 풍경에 갇힌 채.

하르페이아의 눈은 여전히 허전하게 아름다운 여름밤 속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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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으세요?”

   

하루를 정리하는 소음도 사라진 카페가 부자연스러울 즈음, 세이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녀의 손에는 노랑 마카롱이 들려 있었다.

   

“레몬 마카롱이에요. 아직 메뉴 개발 중이라 입맛에 안 맞으실수도 있지만...”

   

하르페이아는 발개진 눈으로 세이렌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꿈속의 여름밤에 빠져들던 하르페이아의 눈이 다시 빛을 찾았다.

   

“아직 손님이 계시니까 서비스로 드리면 어떨까 해서...”

   

끝없이 가라앉던 하르페이아의 눈빛이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여름밤에는 해가 늦게 지는구나.


카페 주방에 걸린 시계는 어느새 아홉 시를 훌쩍 넘겼다. 카페를 가득 채우던 노을빛도 어느새 다 거두어졌다. 카운터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고 몰래 지켜보는 운디네와 네레이드, 그 뒤에서 카운터를 서성거리며 소리를 크게 내며 하품하는 테티스의 모습이 보인다. 카운터 너머로 보이는 주방은 달걀 껍질과 거품기가 아무렇게나 팽개쳐져 있었다.

   

“마카롱, 방금 만든 거에요?”

“네... 단 걸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네레이드가... 아, 그게 아니라. 조만간 마카롱을 메뉴로 낼 생각이라서, 시... 실험 차 만들었어요!”

   

속내를 들킨 세이렌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고, 카운터에서 지켜보던 운디네와 네레이드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꺄하핳ㅋㅋㅋㅋㅋ 다 들켰넼ㅋㅋㅋㅋ”

“웃지마!”

“그러니까 네리네리가 준다고 그랬잖아! 아, 너무 귀여워! 이래서 세이렌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니까.”

“아... 진짜...”

   

세이렌이 카운터를 보며 빽 소리쳤다. 부끄러워하는 그 모습이 퍽 귀여워서, 하르페이아는 홀린 듯 세이렌의 손을 꼭 잡았다. 손 안에서 세이렌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고마워요. 저 마카롱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아시고.”

   

하르페이아의 손은 맞잡으며 세이렌은 밝게 웃었다. 거품기를 들고 달걀 흰 자와 치열하게 싸우고, 오븐을 열면 쏟아지는 검은 연기에 눈물이 핑 돌기를 몇 번. 까맣게 타버린 마카롱에 좌절하며 트레이를 꺼내려다 데인 손목이 쓰린 건 아무래도 좋은 듯했다.

   

하르페이아는 마카롱을 한 입 베어물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의 달달함 뒤에 따라오는 은은한 레몬향이 절로 웃음을 자아냈다. 혹시 싫어하진 않을까 걱정하던 세이렌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어올랐다.

   

“금란 님. 이만 갈까요? 다음에 책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후훗. 네.”

   

사령관을 보고 싶다가도 보기 싫어지는 변덕은 여전하지만,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까지고 일어나지 않을 상상 속에 갇혀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 본 연애소설에서 밤이 다 가도록 통화하던 두 남녀의 대화가 생각난다.

   

잠이 안 오는 밤은 지독하리만큼 조용해서 이따금 고개를 드는 불안과 의심도 여느 때보다 크게 들리니까. 혹시 나만 애태우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틀렸다 말해줬으면 해서. 꿈에 당신이 나오더라도 연결되지 않은 시간이 허전해서 견딜 수 없다고. 여자는 전화를 걸었고, 남자는 졸린 기운을 억지로 누르며 반갑게 그녀의 목소리를 맞았더랬다.

   

조용한 건 싫어. 여자의 말에 남자는 준비하기라도 한 듯 말한다. 가끔 너무 뜬금없는 말들을 하기도 해서 여자는 웃음이 터지기도 했지만. 그것도 좋았다고. 그것마저도 행복했다고. 

   

시시콜콜한 이야깃거리와 별 거 아닌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드는 그 장면이 이제는 이해가 간다. 이유없는 걱정이 사령관을 피했던 이유라니. 어서 찬물에 몸을 씻고 침대에 눕고 싶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거품에 씻어 내리고 숙소의 모두가 잠들 때까지 읽지 못한 책을 마저 읽고 싶었다.

   

그러다 모두가 잠이 들어 조용해지면, 슬그머니 일어나 전화를 걸고 싶었다. 사령관과 이어지고 싶었다. 볼 수 없다면 목소리로라도. 천천히 예전처럼 사령관에게 달려들고 싶었다.

   

“하...”

   

하르페이아는 문득 자신이 바보같다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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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지막 날이네요. 그동안 편히 쉬셨나요?”

   

복도에서 마주친 아르망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벌써 사흘이 흘렀다. 그리고 다행히도 오르카 호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카페 호라이즌은 다음 영업을 기약하며 간판을 걷었고 사흘간 숙소에 틀어박혀 스틸라인 온라인에 접속해있던 그렘린이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격납고로 향한다. 티아멧은 아우로라와 함께 주방에서 디저트를 만들었고, 페어리 시리즈는 오랜만에 피크닉을 다녀왔다고 했지.

   

“피곤은 덜어내신 것 같은데. 걱정은 아직인 것 같네요.”

“하하... 아르망은 못 속이겠네.”

   

부관들이 내 업무를 나눠 처리했음에도 나는 편히 쉬지 못했다.

   

갑판에서 본 하르페이아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태도가 달라질만한 이벤트가 있었다면 또 모를까. 무슨 이유로 하르페이아가 나를 피하는지 알 수 없으니 무작정 거리를 좁히기도 겁이 난다.

   

차라리 내가 몇 번이고 바보가 되고 말지. 섣부르게 다가가다 일을 그르치고 싶지 않다. 겉으로 보여지는 성격과 외모와 다르게 하르페이아는 여린 아이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누가 거리를 두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먼저 다가가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나.

나는 그간 내가 누리고 살던 특혜의 중요함을 톡톡히 느끼는 중이다.

   

“후훗. 사령관님은 이런 일에는 꽤 신중하시네요. 그간 잘해오셨으면서 말이죠.”

   

아르망이 빙긋 웃었다. 돌려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가끔은 아르망이 하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있다. 그저 멋쩍게 웃을 수밖에.

   

그간 잘해왔다니.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걸 했을 뿐인데.

   

“안녕하세요. 주인님. 그리고 아르망 님. 휴가는 잘 보내셨는지요?”

“오르카 호를 지켜준 여러분 덕분에요. 안녕하세요, 금란 님.”

   

뒤를 돌아보니 금란이 어느새 다가와 인사했다.

   

“소첩이 금일 주인님의 호위를 맡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능력이지만, 주인님의 안전을 위해 명을 다하겠습니다.”

“응. 잘 부탁해.”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마지막 날이니, 아무쪼록 후회없는 휴가 되셨으면 좋겠네요.”

   

아르망이 내게 눈을 맞추며 빙긋 웃었다. 후회없는 휴가라니. 아르망의 뼈 있는 말이 나를 찌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표정 조금, 말 몇 마디 섞어본 것만으로도 나를 꿰뚫어보는 아르망의 말에 몸에 힘이 들어간다.

   

오늘이 아니면 다음은 없을 수도 있다. 지금이 아니면 후회할지도 모른다.

   

“저, 주인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끊어진 하르페이아와의 연결을 어떻게 다시 이어야 할까. 얼굴에 두껍게 철판을 깔고 다시 스카이나이츠 프로듀서로서 여지를 만들어 볼까하는 억지 계획을 생각하던 찰나, 금란이 나지막히 말을 걸었다.

   

그제서야 금란의 모습에 눈이 간다.

   

단아하게 차려입은 복장에선 금란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묘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한 손에 단단히 쥔 환도에선 임무를 대하는 올곧은 자세가 보였고, 자루에 달린 보라색 장식은 수수한 그녀의 모습에서 화려함을 살짝 꺼내 보이는 듯 돋보였다.

   

그러다 금란과 눈이 마주쳤다. 금란은 서둘러 머리에 쓴 죽립으로 얼굴을 가렸다. 황급한 움직임에 단단히 땋은 금란의 머리 한 줌이 빠져나왔다. 그동안 수 많은 전투에서 한 번도 흔들림이 없던 금란인데.

   

“금란, 울었어?”

“...”

   

화장기 없는 그녀의 눈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금란은 아무 말 않고 내 소매를 붙잡고 복도를 걸었다. 부대원을 마주칠 때마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가속이 붙은 듯 빨라졌다. 나를 잡아끄는 걸음에서 여태 금란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당혹감이 느껴졌다. 금란은 한 번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내 옷소매를 잡았던 그녀의 손은 어느새 손목을 거쳐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사령관실에 도착하고 나서야 금란은 내 손을 놓았다.

   

“무슨 일이야?”

“죄송합니다, 주인님. 잘 참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항상 조심하고 있다고 자신했는데... 익숙하지 않아서...”

   

금란은 이제야 깊게 내린 죽립을 들춰 얼굴을 드러냈다. 발그레한 얼굴과 그것보다 더 붉은 눈가. 서둘러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제, 하르페이아 님과 이야기를 나눴어요. 그리고... 그날 밤에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노래 몇 곡을 들었습니다. 하르페이아 님은 그 노래의 가사집을 읽고 계셨습니다. 노래를 들으면서 가사집의 내용을 떠올리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금란은 얕게 눈을 뜬 채 빙긋 웃었다. 순간 금란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진다. 그 모습이 다신 볼 수 없는 것을 떠올리는 것처럼 서글프게 느껴졌다.

   

“그 모습은 너무 슬프고, 또 아름다웠습니다. 하르페이아 님의 마음이 그대로 제게 전해지는 것 같아서...”

   

   

금란의 눈에 당장이라도 흐를 것처럼 무겁게 눈물이 맺혔다. 눈물이 흐르고, 금란은 흐르는 눈물을 닦는 것 대신 나를 바라봤다.

   

“사랑하는 마음을, 다신 볼 수 없을 거라는 한 줌의 걱정을. 도저히 가볍게 여길 수 없어서...”

“...”

   

아직 휴가는 끝나지 않았다. 출입금지인 사령관실은 누구도 들어오지 않았고 금란은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그리고 오랫동안 그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검정 바탕에 부는 짭조름한 바닷바람과 하늘을 빼곡하게 채웠던 별빛. 금란이 들려준 하르페이아의 이야기에선 얼마 전 그리폰과 음료수를 마셨던 갑판의 여름밤이 떠올랐다.

   

“주인님. 부탁드려요. 망설이고 계시다면 부디 용기를 내어주세요.”

“...”

“용기를 내어, 안아주세요. 어여쁜 마음이잖아요.”

   

이야기가 끝맺고 내게 웃음짓는 금란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노랑빛일랑 없는데. 하르페이아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문득 가슴 속 어딘가가 간질거렸다. 수많은 조명 속에서 노래하던, 서투른 몸짓으로 부지런히 준비한 무대에서 환하게 빛나던 하르페이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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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새벽, 휴대 모듈이 울렸다. 이 시간에 볼일이 있다면 통신이 아니라 침실 문을 두드렸을 텐데.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모듈을 들었다.

   

“... 여보세요?”

“아, 받았다. 아... 안녕. 사령관.”

   

통화 버튼을 누르자 하르페이아의 속닥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들킬까 조심스럽게, 혹여나 들뜬 마음이 보일까 숨죽여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안녕, 하르페이아.”

”다행이다. 안 자고 있었구나. 아닌가? 설마 내가 깨웠어, 사령관...?”

“아냐. 이제 막 자려고 누웠어.”

“아, 그래? 아하하. 다행이다. 다행이다.”

   

하르페이아는 숨을 가늘게 줄여 웃었다.

   

“그런데 전화는 왜? 할 말 있으면 직접 오지.”

“아, 사실 그게... 나도 그러고 싶었는데... 아! 책을 읽었는데, 어느 남녀가 밤 늦게까지 통화를 하다 잠들었다는 내용이 있는 거야. 그게 방금부터 엄청 궁금했거든! 그래서 침실에 가는 것 대신 전화했지.”

“아하하... 그랬구나.”

“아... 혹시... 쉬는 데 방해됐어? 아하하... 그렇지? 가뜩이나 사령관 고생하는데. 쉬는 데 전화 걸어서 미안해. 끊을게?”

   

하르페이아의 목소리가 위태롭게 떨렸다. 순간 버거울 정도로 느껴진 어색함이 적막을 만들었다.

   

평소라면 얼마나 떨어져 있던 고민하지 않고 안기던 그녀가 다가오는 걸 주저한다. 하르페이아의 마음을 들은 이상 더 이상 주저할 순 없다. 하르페이아가 통화를 걸기까지 얼마나 많은 용기를 냈을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다.

   

조금 짓궂더라도 용기를 내기로 했다. 아르망의 말마따나, 지금이 아니면 다음은 없을 것 같았으니까.

   

“하르페이아. 부탁 하나만 해도 돼?”

“으... 응? 부탁...?”

“응. 함장실에서 봐.”

   

통신을 끊고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나 함장실로 향했다.

   

선물을 쥔 손에 땀이 찬다.

   

이야기 속 두 남녀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야기의 절정으로 향하는 복도를 걷는 다리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자리에 앉아 배에 힘을 꽉 줘도, 아무도 없는 함장실의 끝과 끝을 힘껏 뛰어도 긴장은 가라앉지 않았다. 

   

“사... 사령관... 나 왔어...”

“어? 응! 왔어?”

   

팔굽혀펴기를 해야하나 고민하던 중에, 함장실 문이 열렸다.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하르페이아가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었다.

   

“참. 새벽에 갑자기 무슨 책? 안 피곤해?”

“피곤하지. 그래도...”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듯 대화하고 있지만 껄끄러운 거리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자는 생각으로 일을 벌려놓긴 했는데 오랜만에 얼굴을 보며 하는 대화라 그런지 찰나의 침묵에도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긴장으로 축축해진 손바닥을 쥐며 말한다.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지.

   

“언제까지 이럴 순 없잖아.”

“아... 알고 있었구나.”

“당연하지. 조금 서운했다구.”

“치...”

   

문에 몸을 숨긴 채 발그레한 얼굴을 한 하르페이아가 천천히 함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자. 내가 읽던 책... 그런데 왜 이걸...?”

   

하르페이아가 손을 쭉 뻗어 책을 건넸다. 갑작스러운 소리에도 놀라 도망갈 것처럼 그녀의 손은 떨리고 귀는 타는 듯 새빨갛다.

   

“그리폰한테 얘기 들었어. 몇 주째 이 책만 붙잡고 있다면서. 그래서 궁금했어. 이렇게 오래 읽은 책은 처음이지 않아?”

“어... 응... 어쩌다 보니... ”

   

그녀의 손에 닿지 않게 조심히 책을 건네 들었다. 주저하는 그녀의 발은 뒤로 향했고, 내게 향해있던 그녀의 손은 어느새 무얼 틀어막는 것처럼 급하게 거둬져 가슴팍을 눌렀다.

   

“무슨 책이야?”

“아! 저번에 서울에 있었을 때 입수한 책이야! 유명한 가수가 불렀던 노래 가사집. 예전에 작사할 때 참고하려고 읽기 시작했는데. 별로 재미는 없더라고. 기분도 이상해지고. 읽지 마, 읽지 마. 사령관도 읽으면 분명 후회할 걸?”

   

말을 잇는 그녀의 몸짓이 유독 활기차다. 손을 휘저으며, 가만있지 못하겠다는 듯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기도 한다. 숨이 차는 건지 생각을 정리하는 건지, 말을 하다가도 몇 번을 멈추고 단어를 고친다. 이따금 몰아쉬는 그녀의 숨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하르페이아. 이리 좀 와볼래?”

“응...? 왜 그래...?”

“얼른, 얼른!”

“앗!”

   

서서히 멀어지려는 하르페이아의 손목을 잡았다. 얇은 손목에서 자그맣게 그녀의 맥박이 느껴진다. 빠르고 뜨겁다.

   

그녀의 발그레한 얼굴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진짜 나빠, 사령관. 오늘 왜 이렇게 짓궂어?”

“미안해. 주고 싶은 게 있어서.”

   

서랍을 열어 작은 기계와 음성 출력 단자를 꺼냈다.

   

손가락 두께의 크기에 디스플레이도 없이, 세 개의 버튼과 단자를 꽂을 작은 구멍밖에 없는 단순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물건이다. 게다가 음성 출력 단자는 직접 단자를 연결해야 소리가 출력된다나.

   

패널의 기록보다 종이에 적힌 활자를 더 좋아하니까 아날로그도 좋아할 거야. 준비하며 들었던 안일한 생각을 후회하며 하르페이아에게 선물을 건넸다.

   

“사령관, 이게 뭐야?”

   

내 옆에 가까이 앉은 하르페이아가 그것들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래 전 쓰이던 물건의 형태를 가졌으니 영문을 몰라하는 하르페이아의 반응은 당연하겠지.

   

“내 선물이야. 한 번 들어봐.”

   

나는 단자를 연결해 한 쪽을 하르페이아에게 주었다. 노래를 재생하기 전까지 영문을 몰라하는 하르페이아는 엎드린 채 팔에 얼굴을 꽁꽁 숨겼다.

   

조용한 밤하늘에 아름다운 별빛이. 멀리 있는 창가에도 소리 없이 비추고.

   

그녀의 발그레한 귓불이, 괜히 어쩔 줄 모르고 꼼지락거리던 내 손이, 무어라 말하고 싶어도 해치고 싶지 않은 옛날의 노랫소리가 더운 여름밤에 적히고 그려졌다.

   

우리는 빨간 얼굴을 서로에게 숨기고서 조용히 속삭였다. 함장실에 파란 달빛이 아스라이 비춘다.

   

한낮의 기억들은 어디론가 사라져.

   

“나도 잘 모르겠어. 왜 그동안 사령관을 피했을까? 사령관이 너무 보고싶다가도 너무 보고싶지 않고. 어디가 너무 간지러워서 가만있지 못하겠는데, 혹시나 우연히 마주칠까 아무데도 갈 수가 없을까.”

   

얼굴을 감춘 하르페이아가 나직히 속삭였다.

   

여름 별빛을 닮은 피아노. 노랫말은 덤덤히 그 안에 마음을 덮는다. 한 쌍의 이어폰을 나눠가진 우리는 같은 노래를 듣고 있어도 왜 같은 마음을 느낄 순 없는지. 연결돼있어도, 닿아있어도 물음으로 서로를 느낄 수밖에 없는지.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랬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이 가사집 때문이야. 이제 알겠어. 이 책을 덮고 나서 왜 자꾸 묘한 기분이 들었는지.” 

   

부드러운 노랫소리에 내 마음은 아이처럼 파란 추억의 바다로 뛰어가고 있네요.

   

“혼자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랬을까. 노랫말은 분명히 사랑을 하고 있는데.”

   

노래소리 너머로 가늘게 그녀의 웃음이 들린다.

   

“나는 그냥 달려가 안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못 하는데. 그런데 이 가사들을 보고 있으면 사령관이 사라지면 어쩌지, 그런 생각이 자꾸 들어서. 그게 무서웠을까? 진짜 바보 같지. 책을 너무 많이 읽었나 봐. 쓸데없는 생각이 자꾸 드네.”

   

은은하던 피아노 소리가 점점 거세진다. 여름 별빛을 보여주던 노래는 파도 소리가 돼 찰싹이며 마음에 잦아들었다.

   

엎드린 하르페이아의 손을 찾아 꼭 잡았다. 긴장됐는지 땀이 난 손은 차가웠고 작게 떨리고 있었다. 갑자기 닿은 손길에 어쩔 줄 모르고 작게 꿈틀거리더니 곧 내 손을 맞잡았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기분좋게 노랫소리를 덮었다.

   

하르페이아는 나를 마주보았다. 이제는 고개를 들고, 부끄러운 얼굴은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간 아껴둔 말들을 모두 전하려는 듯. 노랫소리는 작아지고, 하르페이아의 몸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깊은 밤, 아름다운 그 시간은 이렇게 찾아와 마음을 물들이고.

   

“이게 무슨 마음인지 잘 모르겠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같은 곳에 있었잖아. 지금 앉은 자리에. 가끔 내 숙소에 놀러오기도 하고. 작전 때문에 하늘을 날다가도 갑자기 목소리가 들리면 기분이 좋고. 우리들을 위해서 정말 근사한 일들을 꾸미기도 하고. 가끔 숨이 막힐 정도로 멋있기도 한, 그런 사람.”

   

“오. 대단한 사람이네.”

   

“칫. 바보야. 하여튼 정말 바보야, 바보.”

   

영원한 여름밤의 꿈을 기억하고 있어요.

   

선명하던 달빛이 흐려진다. 멀리 있는 산 너머에서 새벽을 몰아내고 있다. 노래는 꺼놓은 지 오래. 재잘재잘 이야기하던 하르페이아의 목소리가 뜸해지고, 대신 잠든 그녀의 숨소리가 들린다. 하르페이아의 얼굴이 마치 미소지은 것처럼 보인다.

   

몰래 스카이나이츠 숙소에 잠든 하르페이아를 뉘이고 나오니 피곤이 몰려온다. 뻐근해진 몸이 불편해 기지개를 켰다. 오랜만에, 참 오랫동안 같이 있었구나. 그간 들었던 거리감에 어색했던 분위기, 새벽 내내 나를 괴롭힌 졸음의 반동이 몰려온다. 밤을 샜다는 게 이제야 실감이 됐다.

   

“괜한 생각이었네. 사령관은 여기에 있잖아. 헤어질 것부터 생각하다니. 진짜 괜한 생각이야. 너무 쓸데없어서 다신 안 할거야. 히히.”

   

해가 눈부시게 눈을 찌른다.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는다.

   

눈을 질끈 감고 이불에 얼굴을 숨기니 잠들기 전 그녀의 말과 새벽 내내 들었던 노래들의 가사가 재잘재잘 머릿속을 맴돈다.

   

마치 어제를 잊지 마라는 듯. 어제처럼 짧았던 여름밤이 오면 꼭 떠올려야 한다 조르는 것처럼.

   

‘다시 아침이 찾아와도 잊혀지지 않도록.’

   

잊으면 안돼. 안겨 속삭이는 것처럼.

   

어서 밤이 되어라, 되뇌며 잠에 들었다. 아직도 아른거리는 햇빛이 노란 게 꼭 누구 머리카락 같아서.

꿈속에서도 하르페이아가 나를 부르며 뛰어올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