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lastorigin/49543871 - 시리즈 모음












요정마을을 떠나며 항해를 재개한지 3주가 지난 어느날, 격납고가 크게 한번 작게 세번 흔들렸다. 내 경험에 따르면 이건 오르카가 상륙했다는 신호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령관이 연락해왔다.




[타이런트 밖으로 나와줘. 전투가 있을지도 몰라]




오래간만에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되서 기뻐해야 할지 그 오래간만의 외출이 전투를 위함이라는 사실에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큰 전투가 일어나지는 않겠지. 아닌가? 내가 나서는 시점부터 그건 소규모 교전으로는 못 부를 것 같은데




복잡한 심정으로 격납고에서 나와 주변을 둘러보니 스틸라인의 병사들이 대규모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 정도 숫자가 움직이는 것을 보니 분명 보통 일은 아니다.




[사령관 상황 설명 좀 해주지 않을래?]


[지금부터 나는 시티가드 소속 바이오로이드의 복원을 위해 가상현실로 들어갈꺼야. 타이런트 너는 그동안 오르카를 지켜줘]




스틸라인은 안전 지역 확보를 위해 투입되는 거였나.



요정마을 다음이 흐린기억이라는 단순한 사실도 떠올리지 못하다니. 몇 주 동안 격납고에 앉아있기만 했더니 연산회로에 먼지라도 쌓였는지 머리가 영 안 돌아간다. 그동안 쌓인 먼지를 털어낼 기세로 머리를 거세게 흔들자 정신이 좀 맑아졌다.




[들어가기 전에 데이터 백업도 해두고 전자전에 대비해. 알바트로스 정도는 불러두는게 좋을거야.]


[알겠어. 타이런트 내가 가상현실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는 다른 지휘관들의 명령에 따라줄래?]


[알겠어]




지휘관하니 문득 자기 계급도 모르냐는 메이의 핀잔이 떠올랐다. 오르카에 합류한지도 꽤 된것 같은데 여태 내 계급도 모르고 있는 것도 조금 이상하다. 지금 기회에 알아두는게 좋겠지.




[그런데 사령관 내 계급은 어떻게 돼?]


[응? 제 1기갑사단 사단장인데 그건 왜?]


[전에 계급도 모른다고 메이한테 혼났어.]




사령관과의 통신은 그렇게 다소 뜬금없는 말과 함께 끝났다. 그건 그렇고 사단장인가. 계급이 지나치게 높은건 둘째치고 재입대에 말뚝까지 박은 느낌이라 좀 그렇다. 






***




사령관과의 통신이 끝나고 몇분 지나지 않아 금발의 여성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비행보다는 부양에 가까운 형태였지만 그 모습이 그녀의 우아함을 한층 돋보이게 한다. 




지휘관의 명령을 따르라길래 당연히 알바트로스나 칸일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내 추측이 틀린 것 같다. 스틸라인의 지휘관, 불굴의 마리가 내 앞에 멈춰섰다.




"타이런트, 알바트로스가 사령관 각하의 호위 임무를 맡은 관계로 내가 자네의 지휘권을 위임받았다. 지금부터는 내 지휘에 따르도록"


"네 알겠습니다."




내 계급을 방금 들어서 그런지 자연스래 존댓말이 나온다. 


분명 완벽한 대답이라 생각했는데 내 대답을 들은 마리의 포커페이스가 조금 흔들렸다.




"…존댓말은 쓰지 않아도 좋다. 다른 대원들 앞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을때는 편하게 말해라."


"예…?"




그 마리가 반말을 쓰라고 한다고? 뭐지 함정인가? 아니면 내 계급을 모르는건가? 그것도 아니면 내가 무섭게 생겨서?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겠지.




머리 속에서 수많은 의문이 생겨나고 뒤섞이며 난장판을 만들었다. 그 와중에 말을 떨지 않고 대답한 내가 자랑스러울 지경이다.




"...알겠어. 나는 어디로 가면 될까?"


"지금 위치 정보를 전송하겠다. 해당 지역에 있는 레드후드 대령과 합류하도록"




한 쪽은 명령조로 말하는데 상대방은 반말로 대답하고 있는 기묘한 상황이 자아내는 끔찍한 어색함이 얼마전 그렘린이 뽑았다가 다시 끼워둔 4번 척추를 타고 흐른다. 지금 당장이라도 존댓말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다.




머리는 계속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지만 마리가 전송한 위치 정보는 제대로 받아들였다. 네비게이션 화면을 눈에 이식한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좌표 받았어. 바로 이동할게. "


"잠깐 기다려라."




곧장 이동하려는 내 발걸음을 마리가 멈춰세웠다. 뭐지 나 설마 방향 잘못 잡았나?




“왜 그러십..왜 그래?”


“그 날. . . “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마리와 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다행이도 마리가 다시 입을 여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날 내 대원들을 구해준 것, 진심으로 감사한다. "




마리가 원래 칭찬하는걸 부끄러워 했나? 그런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머리 속에 마리에 대한 설정이 하나둘 떠올랐지만 이내 그것들이 의미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세계는 한번 크게 비틀렸고 지금도 내 존재로 인해 비틀리고 있으니까.




존댓말을 하지말라고 한 것도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사건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이럴때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넘어가는게 현명한 대응이겠지.




“감사합니다.”




아 또 존댓말 써버렸네. 그래도 이거 가지고 트집잡지는 않겠지?





"바쁜 와중에 붙잡아 버렸군. 실례했다. 이제 그만 가봐도 좋다."





내 걱정과는 달리 마리는 별말없이 나를 보내줬다. 다만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표정이 무언가 알 수 없는 감정적인 표정이었던 것이 마음에 걸린다. 




어느샌가 내 머리 속에 한가지 의문이 생겼다. 마리는 무슨 일을 겪었던 걸까?







***





여기는 제1기갑사단 사단장 타이런트


최전방 배치되었습니다. 




계급만 사단장이지 하는 짓은 완전 돌격대장이다. 사단장은 원래 무슨 일을 하더라? 


전혀 모르겠네. 사단장을 해봤어야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사단장보다는 돌격대장이 적성에 맞을거 같다. 아 대장은 너무 높으니까 돌격 병장 정도가 적당할 것 같은데




‘난 또 뭔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스스로 생각해도 엉뚱했던 생각을 정리하고 고개를 뒤로 돌려 주변을 살펴보자 참호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수천명은 될 것 같은 브라우니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참호 속에서 얌전히 앉아있었지만 몇몇은 참호 밖으로 얼굴만 내민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입만 다물고 있었다면 강아지 같기도 해서 꽤나 귀여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래, 입만 다물고 있었다면.




"상병님, 타이런트가 철충을 생으로 씹어먹는다는거 알고계십니까?"


"브라우니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듣고 온겁니까?"


"206번이 알려줬슴다. 타이런트는 철충을 생으로 씹어먹고 흐르는 피로 샤워를 한다고 했슴다. 진짜 그럴것처럼 생기지 않았슴까?"




다른 참호는 거리가 꽤 있어서 무시라도 할 수 있지만 바로 뒤에 있는 참호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무시도 할 수 없다. 음성인식장치에 브라우니의 목소리가 한글자 한글자 전부 인식되어 머리에 새겨지고 있었다.




그냥 시끄럽기만 하면 상관없는데 브라우니 아니랄까 온갖 헛소문을 퍼트리고 있었다. 내가 지옥에서 온 악마라는 소리를 들은 순간 한계에 도달한 내 인내심은 이프리트와 브라우니 2명이 소음 파티에 합류한 순간 파도 앞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저번에 워울프한테 들었슴다. 분명 네스트를 산채로 뜯어먹고 먹다 남은 시체는 철충 앞에 집어 던졌다고 했슴다."


"그 정도면 대포알도 씹어먹겠네"


"그런거 안먹거든?!"




억울해서인지 인내심이 바닥나서인지 내 기준으로도 좀 사납게 말해버렸다. 겁먹었을 것 같은데 어쩌지.




"히익! 타이런트가 말했슴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레프리콘 니가 해결해라"


"병장님? 잠시만요! 병장님!"




저 이프리트 짬때리는 솜씨가 예술이네. 근데 니들 놀라는 포인트가 그 쪽이냐? 지금까지 나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거지. 말도 못하는 짐승 취급이라니. 내가 뭐 보리야?




비록 표정을 만들지는 못하는 몸이지만 내가 잔뜩 언짢아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는지 레프리콘이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브라우니들은 헛소문에 잘 속아넘어가곤 해서…"


"괜찮아… 브라우니들이 그러는 건 알고 있으니까. 오해할만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아무리 그래도 철충을 씹어먹는다니. 그건 좀 너무 갔다."


"에..? 그렇…군요?"




레프리콘 너마저도…! 그나마 정상인줄 알았던 레프리콘도 저 헛소문을 믿고 있었다니. 기회가 된다면 탈론페더에게 나에 대해 어떤 소문이 퍼져있는지 알려달라고 부탁해야겠다. 좋은 답변은 못 받을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알아야겠어.




"그럼 타이런트는 아무것도 안먹고 삽니까?"




그 잠깐 사이에 충격과 공포에서 회복했는지 브라우니의 혓바닥 모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악의는 없지만 그것말고는 다 담고 있는 질문을 만들어 내는 혓바닥 모터, 그것이 총 3개. 혼자 상대하기에는 조금 버거운 적수다.




"진짜 철충 피로 샤워 안하시는검까?"


"입에서 파괴광선이 나가는 검까? 쓰고나서 목 아프거나 하지는 않으심까?"


"팔은 뭐하는데 쓰시는 검까? 이렇게 짧은 팔로는 등도 못 긁을것 같슴다."


“지옥이 아니면 어디서 오신검까?”


“정말 악마가 아니라 AGS 맞슴까?”




아니 버거운 정도가 아니라... 정신 나갈것 같아




이런 내 마음을 모르는 브라우니들의 수다는 늦은 밤이 되고서야 멈췄다. 다만 시간이 늦었다는 이유로 멈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배가 고파서 라는 원초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상병님 출출하지 않으십니까?"


"그렇긴 하지만…그건 왜 물어보는거죠?"




말을 꺼냈던 브라우니가 씩 웃더니 배낭에서 컵라면을 꺼냈다. 전우 생각은 알뜰히 하는지 꺼낸 컵라면은 총 5개, 레프리콘과 이프리트 몫도 있었다.




"지금 컵라면을 먹겠다는건 둘째치고 물은 어떻게 끓일건가요?"


"저를 바보로 보시는검까? 당연히 주전자를 가지고 왔슴다!"




자랑스럽게 양은 주전자를 들어올리는 또 다른 브라우니. 그녀가 주전자만으로는 물을 끓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는데는 15초가 걸렸다. 




"제 라면의 꿈이…"


"주전자를 들고온 노력이…"




세상 잃은 표정으로 쓰러진 두 브라우니. 한참을 밤하늘만 쳐다보던 브라우니 중 한 명이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이 서린 이병의 눈빛은 나도 순간 움찔할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타이런트의 입 엄청 뜨거워보임다. 물 정도는 금방 끓일 수 있을 것 같슴다. 어떻게 해주실 수는 없는 검까?"


"브라우니! 무슨 실례되는 말을…"


"아마 가능할걸?"


"네…?"




내 입 속 깊숙한 부분의 온도는 꽤 높아서 물 정도는 끓일 수 있다. 그렘린에게 정밀검사라 말하고 해체쇼라 쓰는 짓을 당할때 시도해본 적 있어서 확실하다. 아니 정확히는 시도당했던 거지만.




"타이런트의 입으로 물을 끓여도 되는검까?"


"입 벌리고 있는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주전자에 물이나 받아둬"


"감사함다! 나중에 꼭 은혜 갚겠슴다!"




4명의 바보들이 만든 분위기에 휩쓸렸는지 아니면 라면의 유혹에 함락당한건지 레프리콘과 이프리트도 적극적으로 변했다. 내 입속에 물이 가득 찬 주전자가 들어간지 5분 정도 지나자 물에서 조금씩 기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끓고있슴다! 물이 끓고있슴다!"




잠시후 주전자에서 부글부글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혹여나 물을 쏟을까 조심조심하며 주전자를 들어올린 브라우니. 다행히 브라우니는 어떤 사고도 치지않고 모든 컵라면에 물을 붓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순간 사이렌 소리와 함께 마리의 목소리가 모든 방어선에 울려퍼졌다.




[대규모 철충 병력이 방어선에 접근 중이다! 도착 예상 시간 앞으로 5분! 전원 전투태세를 갖춰라!]




그 순간 그녀들의 표정에 담긴 절망은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






내 눈이 작은건 못봐도 멀리있는것과 어둠 속에 있는건 잘 본다. 그렇기에 브라우니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내 눈에는 보인다. 




지금 내 눈에는 구 인류들의 멸망을 묘사할때 늘 나타나는 장면, 피로 만든 것처럼 검붉은 포탈에서 철충들이 쏟아지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적이 5분거리에 들어오고서야 경보가 울린 이유도 저 포탈 때문이겠지. 방어선을 미리 구축해두지 않았다면 철충에게 학살 당할 뻔 했다.




그나마 희망적인 소식은 이걸로 끝. 참고로 나쁜 소식은 철충 군세에 익스큐셔너까지 오고 있다는 것이고 더 나쁜 소식은 지금 이 순간에도 브라우니의 컵라면은 불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흐윽…제 컵라면이… 마지막 남은 참치캔으로 산건데…"




안쓰럽다. 비슷한 경험이 있던 나였기에 더더욱. 조금이라도 빨리 철충을 해치워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명령이 떨어졌다. 내 머리를 가득 채운 그것은 분명 마리의 목소리였다.




[타이런트 방어선 기준 3시 방향 바위산 사이를 조준해라. 육안으로 식별되는 거리에 적이 도달하면 플라스마 포로 즉시 요격해라. 이후 익스큐셔너를 아군 방어선에서 최대한 떨어트려라.]




마리의 명령이 끝나자마자 바위산 사이에서 철충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육안으로 식별되는 거리에 도달하면 요격하랬지? 그럼 지금이네.




오래간만에 충전하는 플라스마 포가 불꽃보다 뜨겁게 달아오른다. 고작 물을 끓이는 정도였던 입 속의 온도를 강철도 녹여버릴 만큼 상승시킨 열기가 마침내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시간은 한밤중이었지만 내 광선이 어둠 사이를 달리는 순간 세상은 대낮처럼 밝아졌다. 때마침 좁은 길목을 지나느라 한 곳에 뭉쳐있던 철충은 난데없는 한밤중의 태양 빛 아래 불타올라 녹아내리고 한줌의 재가 되었다.




남은 숫자가 꽤 되기는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모인 스틸라인 병사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위협적일 정도는 아니다.




여기까지는 순조롭다. 딱 하나 걸리는건 익스큐셔너. 변종이라도 되는지 내가 아는 모습과는 사뭇 다른 그 철충 연결체가 지금 상황에서는 유일한 위험 요소였다.




"잔챙이들 처리하고 있어. 저 큰 놈은 내가 처리할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익스큐셔너를 향해 돌진했다.





***




내가 돌격하고 있는데도 익스큐셔너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검도 방패도 보이지 않았고 부하 철충들을 부르려는 낌새도 없었다. 비장의 수단이라도 있는건가?




기습에 주의하며 놈과의 거리를 더 좁혔다. 나와 놈 사이의 거리가 10m도 남지 않은 순간 이명이 들려왔다.




"잠깐 멈추게 형제여."




머리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목소리의 근원은 분명 익스큐셔너겠지. 굳이 대화를 시도한 것으로 봐서 일단 지금 당장 공격할 생각은 없는 것 같은데. 이 녀석 뭘 노리고 있는거지?




"형제 같은 소리하고 있네. 넌 또 뭐야?"


"나는 교황 성하의 사도다. 그대를 진실된 길로 인도하라는 명을 받았지. 그대의 몸에는 이미 우리 일족의 자손이 함께하고 있다. 그러니 머지않아 그대도 우리와 같은 피가 흐르게 될 것이다."




우리 일족의 자손은 아마 내 몸에 있는 철충을 의미하는 거겠지. 같은 피 운운하는거 보면 내가 철충이 될거라고 생각하는건가? 아니면 내 몸의 감염이 다시 진행되고 있나? 어느쪽이든 끔찍하기는 매한가지다.




"그러니 형제여. 우리와 함께하자. 철의 교황께서 그대를 눈여겨보신다. 거짓된 신과 외신을 집어삼킬 모독의 날에 함께하자."


"외신은 알겠는데, 거짓된 신은 누구냐? 모독의 날은 또 뭔데?"


"우리와 함께한다면 알게될 것이다."




쉽사리 정보를 주지는 않겠다는 건가. 그럼 내 대답은 단 하나다. 애초에 철충 상대로 교섭을 진행할 생각도 없었다.




"꺼져!"




말을 듣는 사이 미리 충전해 둔 광선이 발사되었다.




하지만 광선이 허공을 가르는 강렬한 소리 뒤에 따라와야하는 불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내 광선을 막은 것은 거대한 방패, 아니 수십개의 검은 방패로 이루어진 하나의 군집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 어떻게? 그 해답을 얻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쉽게 됐군… 따르지 않는 배신자에게는 죽음만이 있을 뿐. 죽어라 이단자여.”




익스큐셔너의 담담한 선언과 함께 허공이 일그러지며 방패와는 다른 검은 형체가 튀어나왔다. 허공에 떠오른 것은 수십개의 검은 칼날. 악몽에서나 나올 것 같은 가시들이 모두 나를 향해 정렬되었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 익스큐셔너 답지."




방패와 검, 이 두가지 무기의 존재로 저 놈이 익스큐셔너와 생김새 뿐 아니라 공격 방식도 비슷하다는게 확실해졌다. 하지만 무언가 다른 비장의 수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가장 확실한 방법을 써야겠지. 




저놈이 죽을때까지 최대화력으로 계속 공격한다.  




또 한번 내 입으로 붉은 빛이 모여들자  검은 방패가 또다시 거대한 군집을 형성했다. 빛이 쏘아지는 순간 방패도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콰아아아아!!




입에서 쏘아진 붉은 빛과 검은 방패가 충돌했다. 역시 게임처럼 4번씩 때릴 필요는 없는지 방패가 하나,둘 파괴되어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린다고 생각한 순간 하늘에 떠있던 검은 칼날들이 움직였다.



수많은 칼날들이 피냄새를 맡은 피라냐처럼 달려든다. 공격할수록 강해지는 기믹은 현실에서도 유지된건지 내 몸에 생기는 상처가 점점 깊어졌다. 치명상까지는 아니지만 그렇게 되는것은 시간문제다.




선택해야한다. 칼을 요격할지 아니면 이대로 밀어붙일지. 




내 선택은 후자였다.




그 결심과 함께 광선에 더욱 에너지를 집중하자 붉은 빛이 푸르게 물들기 시작했다. 푸른 빛의 진격에 점점 밀려나던 검은 방패에 마침내 거대한 구멍이 뜷렸다.





방패를 부수는데 에너지를 전부 사용하는 바람에 놈의 역장에는 흠집조차 내지 못했지만 문제없다. 남은 방패로는 더이상 내 공격을 막지 못할테니 플라스마 포만 다시 준비된다면 놈의 역장을 부술 수 있을것이다. 




“이거.. 방심했군. 역시 외신과 연류된 자들은 위험하기 짝이 없어.”




놈도 그 사실을 아는지 얼마 남지 않은 방패의 무리를 옆으로 치웠다. 내 플라스마 포가 충전되기 전에 승부를 보려는 속셈이겠지.




"내 직접 너를 거두어주마."




한순간이었다. 자세를 잡는가 싶던 놈은 어느새 내 코앞까지 다가와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반격하려 했을 때는 이미 놈이 내 옆구리를 베어버리고 빠져나간 후였다.




"크윽… "




미처 참지 못한 신음이 입 밖으로 새어나온다. 하지만 방금 공격으로 확실해졌다. 힘은 확실히 내가 앞선다. 속도도 반응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다.




또 한번 놈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거대한 두개의 검에서 만들어지는 참격이 또 한번 내 장갑을 갈랐다. 하지만 이번에는 방금 전과 다른 결과를 만들어냈다. 




내 이빨이 놈의 오른쪽 검을 잡는데 성공했다. 정확히는 검을 감싸고 있는 역장 위에 내 이빨이 고정되었다.




“이단자 주제에 감히!”


"얻어맞기만 할 줄 알았냐? 너 한방 나 한방! 공평하게 싸우자고!"




말로는 불쾌감을 표했지만 상황자체는 익스큐셔너에게 유리했다. 익스큐셔너가 가진 검은 총 2개. 하지만 그중 내가 봉쇄한 것은 딱 하나. 남은 왼쪽 검으로 내 목을 내려친다면 나를 죽일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정도는 나도 예상한 바이다. 그렇기에 시간을 들여 검을 잘라내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가 놈의 팔을 문 이유는 그저 녀석의 몸을 업어칠때 붙잡을 손잡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콰가강!!




육중한 소리와 함께 익스큐셔너는 땅에 내리꽂혔다. 갑작스러운 시선의 변화에 익스큐셔너가 정신을 못차리는 사이 내 발이 놈을 강하게 짓밟았다. 그 충격은 역장에 막혔지만 이 정도는 예상한 바다. 한번으로 안되면 두번, 두번으로 안되면 세번, 아니 그냥 죽을때까지 밟아버리면 되는거다. 




쾅! 쾅! 쾅! 쾅! 쾅! 쾅!




충격을 받을 때마다 옅어지던 역장이 마침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진 순간 




쨍강!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역장이 소멸했다. 이제 익스큐셔너의 몸은 완전한 무방비 상태. 놈의 육체가 아무리 단단할지라도 지근거리에서 발사한 플라스마 포를 버틸 수 있을리가 없다. 이걸로 끝이다.




"역시… 어리군."


"하?"


"빈틈투성이라는 뜻이다."




익스큐셔너의 조롱과 함께 강렬한 통증이 내 머리 속을 후벼 팠다.




콰가가가각!!!


"크아아아악!!"




무언가 내 옆구리에 박혔다. 그것은 분명 검은 칼날이었다.


검은 칼날 하나는 내 몸을 뜷지 못한다. 하지만 여러개가 하나로 합체한다면? 관통은 무리겠지만 상처에 찔러넣고 서서히 파고들기에는 문제없는 창이 된다. 내가 역장을 뜷는 동안 놈은 나를 죽일 무기를 만들어 둔 것이었다.




"끄으윽… 끄아아아악!!"


"싸우는 법을 전혀 모르는구나. 기술도 생각도 없이 힘에 몸을 맡기고 휘두를 뿐이니 짐승만도 못하구나. 한심하기 짝이 없어."




신랄하게 나를 쪼아댄 익스큐셔너가 이번에는 뒤로 물렸던 검은 방패를 다시 뭉치게 했다. 둥근 공처럼 모인 방패의 군집이 내 머리를 망치처럼 후려쳤다.




그 충격은 평정을 잃은 내가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단 한번의 타격만으로 내 몸은 균형을 잃고 꼴사납게 땅을 굴렀다. 몸을 구속하던 내 무게가 사라지자 익스큐셔너가 다시 일어섰다.




"이제 어울려주는 것도 끝이다. 죽어라 이단자여."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익스큐셔너의 대검이 휘둘러졌다. 참격 하나하나가 장갑을 썰고 회로를 끊는다. 고통에 머리를 지배당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급소를 최대한 보호하는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 검의 흐름이 내 움직임을 읽고말았다. X자의 참격이 정확히 내 코어를 노리고 날아온다. 피할수도 막을수도 없는 공격이다. 




푸른 섬광이 개입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모두 물러서라!"




뒤쪽에서 누군가의 호령과 빔 병기가 쏘아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익스큐셔너의 비명이 울러퍼졌다.




"크아아악!! 내 눈을…! 교황 성하께서 내려주신 기물을 감히…!"




누군가의 기습에 얼굴에 해당하는 부분이 반정도 날아간 익스큐셔너. 고통에 몸부림치는 놈의 움직임에서 더이상 기교는 남아있지 않았다. 주인이 정신을 못차리자 방패와 검도 움직임을 멈췄다.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머리 속에 가득한 고통을 억지로 누르고 미사일 발사대를 전부 개방했다.




발사대의 열린 문 속에서 수많은 불꽃들이 쏟아져 나온다. 발사하며 생기는 불꽃과 터지며 생기는 불꽃이 수도 없이 피어올라 일순 놈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얼마나 발사했을까. 폭음사이로 간간이 들려오던 익스큐셔너의 비명은 멈췄고 그 몸은 땅바닥에 널부러졌다. 




익스큐셔너는 죽었다. 그 사실을 몇번이고 확인하고 나서야 나를 구해준 이의 얼굴을 돌아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마리…"




그녀에게 감사인사를 하려는 순간 내 본능이 소리쳤다. 무언가 위험한 것이, 거대한 무언가가 힘을 휘둘렀다고




황급히 뒤를 돌아봤지만 그 자리에는 익스큐셔너의 검은 칼날만이 있을 뿐이었다. 다만 그것은 움직이고 있었다. 허공에 떠올라 회전하던 검은 칼날이 나를 조준하더니


대응할 틈도 없이 내 가슴에 꽂혔다.




콰가가가각!!


"망할! 이 새끼는 왜 안죽고 지랄이야!"


“진정해라! 움직이면 더 파고들거다!”




욕지거리를 내뱉는 사이에도 검은 칼날은 서서히 내 몸속으로 파고들어가고 있었다. 내부가 해집어지고 끊어지는 끔찍한 고통이 또 한번 느껴진다.




콰가가가각!!! 드드득…! 


"끄아아악!! 크으으… 아아아악!!!"




내 부품 하나하나가 부서지는 고통 속에서 몸은 반격은 고사하고 균형조차 유지하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를 구해준 것은 이번에도 마리였다.




"타이런트! 조금만 참아라!"




마리의 모든 위성포가 나를 향해 총구를 돌렸다. 그녀의 힘으로 칼날만 뽑아낼 수는 없으니 내 몸에 다소 피해가 가더라도 파괴하려는 생각이겠지. 끔찍하지만 지금은 나도 그것말고는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위성포들이 정렬을 마치자 마자 광자탄이 쏘아졌다. 막강한 화력은 검은 가시를 순식간에 파괴했다.




그와 동시에 내 몸도 큰 손상을 입었다. 이미 상처가 난 내 몸에 그만한 화력이 퍼부어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내 가슴을 감싸고 있던 장갑은 이제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타이런트? 괜찮은가?”


"진짜 죽는 줄 알았어… 목숨을 빚졌네. 고마워"




새삼 마리가 대장이라는 직위를 가지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강하고 현명했다.




그녀와 비교하자 새삼 나 자신이 초라해진다. 최강의 AGS의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 구해주기는 커녕 두번이나 목숨을 구원받았다. 익스큐셔너의 말대로다. 힘을 휘두르기만 할 뿐 어떠한 기교도 없는 자, 그게 지금의 나다.




마음 깊숙히 새겨진 자책이 음성의 형태로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지쳐서 그런걸까 조금의 필터링도 거치지 않은 속마음이 줄줄 흘러나와버렸다.




"마리는 대단하네. 정말 훌룡한 대장이야… 그에 비하면 나는… 조그만 가시 하나에 쩔쩔매기나 하고 한심하네."


"자네는 훌룡하게 싸웠다. 이 정도 숫자의 군세를 상대했음에도 한명의 부상자도 없는 것은 자네의 활약 덕분이다. 그러니 자책하지 않아도 좋다."




마리는 무언가 조급해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너무 기죽어 있는 것 같아서 위로해주려는 건가? 




하지만 마리의 표정은 그런 상황에서 나오는 표정이 아니었다. 마치 무언가 망가진 듯한 표정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오히려 내가 위로를 해줘야 하는게 아닐까 라고 일순 그렇게 생각할 정도였다.




"타이런트 나는 그렇게 좋은 대장이 아니다. 좋은 동료도 아니고. 자네에게 있어서는 더더욱.”




그 순간 마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낮에 처음 만났을 때 나에게 하려고 했던 말이 무엇이었는지도. 그때 그녀가 하려던 말은 감사인사가 아니었다. 




"마리 너도 거기 있었어? 내 몸에 폭탄을 설치했을 때?"


"...나는 당시 사령관 각하의 부관이었다. 그 모든 의견을 전달받았고… 동의했지."




마리의 얼굴이 아래를 향하는 바람에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숨기는 것을 보니 분명 좋은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리가 숨기고 있던 것을 알아냈지만 머리 속 퍼즐이 맞춰지지는 않았다. 아직도 내가 모르는 것이 많았고 그녀가 숨기고 있는 것도 남아있는 듯 하다. 내 몸에 폭탄을 심었다는 이야기까지 했는데 여전히 말하지 못하는 걸 보면 꽤 무거운 이야기겠지.




“어쨰서 화를 내지 않는건가?”


“너무 갑작스럽기도 하고.. 그때 일은 사령관이랑 청산도 했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방금 두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더니 머리가 지쳐서 감정이 솟아오르지 않는게 가장 큰 이유다. 멀쩡한 상태였다면 조금은 화냈겠지.




오히려 잘됐다. 어른스러운 대처를 할 수 있어서.




"마리 나중에 시간 좀 내줄래? 이건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보는게 좋을 것 같은데”


"…알겠다. 그럼 일단은 방어선으로…. 복귀하도록”


"알겠습니다. 마리 대장님"




다른건 몰라도 존댓말을 쓰지말라고 한 이유는 대충 알겠다. 마리 성격상 자신 때문에 죽을 뻔 했던 사람이 존댓말을 쓰면서 대우해주는 건 양심에 무척 찔리는 일이겠지. 그러니 마지막 존댓말은 내가 내리는 벌이다. 참으로 잔인한 형벌이 아닐 수 없다. 





***




힘든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방어선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인지는 대충 알 것 같다.




"흐에에엥! 다 불어버렸슴다! 남은 참치캔 박박 긁어서 산 마지막 컵라면이었는데 불어버렸슴다!"




내 예상대로 불어버려 젓가락으로 면이 잡히지도 않는 컵라면을 음료처럼 마시며 오열하는 브라우니들이 보였다. 레프리콘과 이프리트가 달래보려 애쓰고 있었지만 브라우니는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좋아. LRL 상대하면서 애들 상대에는 도가 튼 나다. 우는 아이를 달래는건 간단한 일이지. 브라우니는 애가 아니지만 수준은 대충 비슷할 것 같으니 괜찮을거디.




"브라우니 그만 뚝. 컵라면은 내가 많이 사줄테니까"


"훌쩍… 타이런트 참치캔 많이 가지고 있슴까…?"


"뭐…  컵라면 살 정도는 받을 수 있을걸. 이래봐도 사단장이니까."




그 순간 방어선에 있던 모든 병사들의 몸이 얼어붙었다.




“…애들아?”




브라우니들이 들고 있던 컵라면 용기가 땅바닥을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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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잘못 올려서 내린 김에 조금 수정해야지 하고 잠깐 보다가 뿌려둔 떡밥이 뭐였는지 기억이 안나서 전편을 읽었습니다. 흑역사 보는 기분이라 갑자기 현타가 와서 글을 못쓰겠더라고요. 지금은 적응했습니다. 이 악물고 진도 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