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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가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딱히 챙겨야 할 물건도 없었고, 당분간은 나도 자유 시간이니까.

복도를 걸을 때마다 이따금씩 붙어오는 어린 아이들이 내 무릎을 잡느라 조금 늦긴 했지만.

 

그 중에는 더치걸도 있었다.

 

 

 

“사령관 어디가?”

 

“그냥 밖에 가서 산책 좀 해보려고.”

 

“... 그렇구나.”

 

 

 

1회차에서는 내가 구하지 못했던 아이.

 

저 아이도 그 때의 기억을 받았을까? 만약 받았다면 어떤 기억이었을까?

죽은 이후의 공허감이었을까, 아니면 죽기 직전의 고통이었을까.

 

여러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의미 있는 질문은 아니니까.

 

 

 

“힘든 거 있으면 말해.”

 

 

 

나는 더치걸의 머리카락을 헝클어주며 말했다. 얼굴 한쪽이 무너져 내렸던 더치걸은 그 부분을 여전히 붕대로 감싸고 있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몸의 상처는 아직도 회복되지 못했다.

저급 바이오로이드로 태어난 이 아이는 어쩌면 남은 생도 저 상처와 함께 살아가야 할 지도 모른다.

 

한 쪽 눈이 보이지 않는 채로.

하나의 세계를 절반 밖에 보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 씩씩하게 견뎌낼 것이다.

 

 

 

“응. 알았어.”

 

“그래, 말 나온 김에 한 번 물어보자. 뭐 가지고 싶은 거 있어?”

 

“가지고 싶은 거?

... 저거.”

 

 

 

혼자 버티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을 테니까.

 

더치걸은 마침내 이곳이 자신 혼자 악착 같이 버티고 생존해야만 했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두 개의 눈으로도 보지 못했던 세계를 하나의 눈이 담았다.

 

그래.

 

이 아이는, 드디어 아이가 되었다.

 

 

 

“LRL이 들고 다니는 곰인형. 그거 가지고 싶어.”

 

“알았어. 다음에 올 때 가지고 올게.”

 

 

 

더치걸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침대 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이윽고 들려오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이 애가 잠에 들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저 웃는 모습 하나를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걸어와야 했던 걸까.

나는 더치걸의 이불을 제대로 덮어준 뒤, 다시 밖으로 향했다.

 

저벅-

 

저벅-

 

 

 

“포, 포티아 주방장님!! 여기 불 나요, 불! 무, 물이 어디 있지??”

 

“당황하지 말고 가스부터 끄세요. 여기에 물 부으면 주방 다 터져요.”

 

 

 

저벅-

 

저벅-

 

 

 

“마리아 선생님! 저 다 그렸어요!”

 

“어머, 안드바리 양은 이번엔 뭘 그린 걸까요?”

 

“창고 물품 뺏어먹는 알비스 때리는 거요!”

 

“하, 하하하... 그러면 안 되요. 말로 잘 타일러야지요.”

 

“선생님 저도 다 그렸어요!”

 

“저도요!”

 

 

 

저벅-

 

저벅-

 

 

 

“흐음, 마키나 양. 이번 dress는 무언가 sales point가 부족하지 않나요?

뭐랄까, 조금 더 impressive하고 gorgeous한... 그래, 유리 공예품 같은 걸 달아보면 어떨까요?”

 

“이런 식으로 말씀 하시는 건 가요?”

 

“Excellent! 역시 마키나 양의 hologram은 편리하다니까요?

어떻게, 이번에 전시회를 한 번 열려는데, 참여해볼 생각은 없나요?”

 

“제 마키나 뺏어가지 마세요오! 안 그래도 커미션 때문에 바쁜데에!”

 

“Oops, Sorry, ms. 메리.”

 

 

 

저벅-

 

저벅-

 

한 번의 발자국을 내디딜 때마다 하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딘가에 기록되어 있던 이야기도 있고, 오직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이야기도 있었다.

 

소완에게서 주방장을 물려 받은 포티아.

난생 처음으로 샐러맨더에게 포커를 이긴 하이애나.

단정한 옷을 입고 유치원에서 선생님 역할을 하는 앨리스.

최애 케이크가 딸기에서 초코로 넘어간 에밀리.

스틸라인 온라인에서 용을 상대로 13전 8승 7패의 기록을 보유하게 된 감마.

우주 궤도를 떠돌던 하늘치를 지상으로 내려 보낸 엡실론.

마침내 민트초코파이가 아닌 어엿한 고기파이를 만들 수 있게 된 하치코.

 

무수히 뻗어나가는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한 때 게임이었던 이야기는 어느새 거대한 설화의 숲을 이루었다.

 

그저 게임이라는 하나의 틀 속에서 살아가던 이야기가,

마침내 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세계를 향해 발을 내디딘 것이다.

 

 

 

“사령관님?”

 

“사령관님!”

 

“사령관님~”

 

“사령관님.”

 

 

 

그리고 오직 나만이,

 

그 모든 이야기를 알고 있다.

 

게임을 했던 플레이어였기 때문이 아니라, 2번의 환생을 거친 환생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로서.

 

 

 

“아르망.”

 

“오셨군요. 폐하.”

 

 

 

나를 향해 공손히 인사를 하는 아르망.

 

그녀의 붉은 케이프가 바람에 날린다.

 

선선한 바다 바람이 잔잔한 물결처럼 내 뺨에 스쳤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직 나만이 아는 모든 이야기.

 

그 이야기의 끝을 장식하기엔, 이곳만큼 어울리는 곳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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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르망의 옆에 앉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아르망 역시 나의 옆자리에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파도가 절벽에 부딪히는 소리.

숲의 나뭇잎을 가르고 흘러가는 바람의 스산함.

처음에는 차가웠던 주변의 공기도 이 아이의 옆에 있으니 따스하게 느껴졌다.

 

나 대신 머나먼 수평선을 바라보는 아르망.

하늘인지 바다인지, 그 어드매를 닮은 푸른 눈동자는 처음 보았을 때도, 지금 보았을 때도 변함 없이 깊고 심오하다.

그런 눈으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녀가 받은 1회차의 기억은 대체 뭐였을까?

 

 

 

“제가 처음 폐하를 뵀을 때를 기억 하시나요?”

 

“1회차 때? 아니면 2회차 때?”

 

“둘 모두입니다.”

 

 

 

아르망이 살며시 고개를 돌려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 둘 모두를 바라는 건 조금 욕심이었을까요?”

 

“내가 기억 못하고 있었으면 그렇게 말했겠지. 그런데 다 기억이 나네.”

 

“정말로요?”

 

“아르망이라면 알 거 아니야.

내가 이제 무슨 말을 하게 될 지.”

 

 

 

언제부턴가 내가 이 아이들을 볼 땐 두 개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1회차의 상처투성이 얼굴과, 2회차의 순진무구한 얼굴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하나의 상황에서 있을 수 있었던 두 가지 사건이, 모두 if가 아닌 현실이었던 세계.

 

아르망을 볼 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글쎄요. 데이터가 부족해서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건 폐하도 마찬가지겠죠? 게임에서도, 1회차에서도 여기까지 오시진 못하셨으니까.”

 

“... 그래.”

 

“그럼 서로 똑같네요.

저는 폐하의 미래를 볼 수 없고, 폐하도 제 미래를 알지 못하시고.”

 

 

 

아르망이 웃으며 바닥에 놓인 풀을 쓰다듬듯이 매만졌다.

 

미래를 알지 못한다.

누군가에겐 당연한 이 한 문장이 아르망에겐 한없이 어색한 일이었다.

 

 

 

“... 그래도 무섭네요. 폐하의 앞날을 제가 봐드릴 수 없다는 게.”

 

“뭐, 내 앞날 모르는 건 내가 제일 무섭지 않겠어?”

 

“만약 제가 사향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면 폐하께선 그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요?”

 

“역사에 만약이란 건 의미 없어. 알잖아?”

 

“그 힘이 없다면 저는 평범한 바이오로이드에 불과한 걸요.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 조금 막막하네요.”

 

 

 

아르망은 다리를 가슴께로 모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미래 예지를 위해 어마어마한 자원과 오리진 더스트를 투입한 바이오로이드, 아르망.

그녀에게 앞날이 보이지 않는다는 무력함은 다른 이들이 감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일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존재 이유였으니까.

 

 

 

“아르망.”

 

 

 

그래.

 

 

 

“그 대신, 이제 ‘사람’이 됐잖아. 사람 중에 미래를 알 수 없다고 불안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 그렇군요.”

 

 

 

존재 이유’였’다.

 

그게 모든 이야기의 마지막이다.

 

바이오로이드로 가득했던 지구에서 바이오로이드가 사라지는 이야기.

 

‘한 때, 바이오로이드는 인간에게 봉사해야했다.’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설화의 모음집이 있다면, 그 첫문장은 아마 이렇게 시작할 것이다.

 

아르망은 한없이 차분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반짝이고, 희미한 바다 향기가 나는 듯한 색채. 가운데의 동공 역시 깊은 심해처럼 짙은 남색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

 

 

 

그런 그녀가 갑작스럽게 새로운 화두를 꺼냈다.

 

 

 

“저는 어떤 이야기를 써보려고 합니다.”

 

“이야기?”

 

“어차피 이제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으니 무엇이든 해봐야겠죠. 아마 재미있는 일이 될 것 같네요.”

 

“재미... 있으면 상관은 없는데, 그걸 나한테 왜 말하는 거야?”

 

“허락 받아야 쓸 수 있는 글이니까요.”

 

“응?”

 

“폐하의 일대기를 쓰고 싶습니다.”

 

 

 

아르망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1회차의 기억이 돌아온 분들은 분명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안정적이지 못한 분들도 계시죠. 아예 잊어버리신 분도 계시고.

뿐만 아니라 새로 합류해 오시는 분들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십니다.”

 

“그야 당연하겠지...? 그 애들인 1회차에서 아무런 상관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알려야지요.”

 

 

 

그녀의 손에는 책 모양의 홀로그램 투사기가 들려 있었다.

 

아르망은 그 책들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며 허공으로 황금빛 창을 띄웠다.

 

1회차의 기억들이 영상처럼 남아 있는 창을.

 

 

 

“누군가는 망상뿐인 연극이라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그저 유희를 위해 만들어진 동화라 생각할 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게 이 이야기를 꽁꽁 숨겨야 할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 ... 쉬운 일이 아닐 거야.”

 

“압니다.”

 

 

 

허공의 홀로그램은 어떤 장면에서 툭 하고 멈췄다.

 

나를 위로해주고 있는 아르망의 모습.

난생 처음으로 시체 사진을 보고 이 세계의 진실을 깨달은 나를, 그녀는 말없이 다가와 끌어 안아 주고 있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폐하께서 쉬운 길을 택하지 않으셨음을 압니다.”

 

 

 

그 때 내가 얼마나 두려웠었는지.

 

 

 

“그러니 저도 그렇게 해보려 합니다.

당연히 저 혼자서는 할 수 없겠죠. 몇 분 정도는 도움을 받을 생각입니다.”

 

“누구한테? 딱히 도와줄 만한 사람은 없을 거 같은데...”

 

“정말 그리 생각하시나요?”

 

 

 

아르망은 웃으며 내 뒤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사락- 사락-

 

누군가 풀잎이 가득한 들판 위로 걸어오고 있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자리를 향해서.

 

몇 망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보인다.

다만 무언가 시끌벅적 떠들며 오고 있는 것은 확실히 들리는 듯했다.

 

 

 

“호드 이야기가 가장 앞에 와야 맞지 않겠나? 1회차에서 가장 먼저 면담했던 게 나였던 걸 잊은 건 아니겠지.”

 

“그래요. 그럼 가장 긴 이야기는 스틸라인이 차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람 수가 많으니 적어야 할 이야기도 많을 수 밖에 없죠.”

 

“그럼 뭐, 우리 캐노니어는 입 닫고 있으란 건가? 어린 에밀리 데리고 골방살이 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다 나오는데.”

 

“... 흐, 흠. 잘 됐군. 호라이즌 이야기는 뒤 쪽으로 빼주시오. 아니, 그 부분은 아예 빼버려도 좋지 않을까 싶소만...”

 

“페어리는 할 만한 얘기가 많지 않아서 좀 그러네요. 한다고 하면 리제 얘기가 절반은 될 것 같은데.”

 

 

 

팔짓 어깨짓 다 하며 과장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지휘관들.

 

칸은 꽁지 머리를 휘날리며 아스널, 마리와 논쟁을 벌이고 있었고, 용과 라비아타는 멀찍이 떨어져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레아는 기하학적인 날개를 움직이며 그런 지휘관들을 망연히 쳐다보고 있었다.

 

 

 

“... 그럼 맨 마지막은 컴패니언의 이야기로 채우죠.”

 

 

 

그런 그녀들 뒤에서 조심스럽게 따라오는 아이.

 

리리스가 내 시야에 보이자 비로소 어색했던 그림의 마지막 조각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한 부대의 지휘관들.

각자가 수십, 수백의 이야기를 대표하는 묶음이었다.

저들이 한 번 걸음을 옮길 때마다 지나간 자리엔 처연한 설화의 흔적이 잔상처럼 남았다.

 

 

 

“폐하.”

 

“... ...”

 

“저희는 이토록 이야기하고 싶었답니다.”

 

 

 

아르망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는 지휘관들을 향해 목례를 했다.

 

푸른 초원 위에서 흩날리는 붉은 망토에 시선을 빼앗긴 지휘관들은 그제야 우리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직 1회차의 트라우마가 가시지 않은 몇몇은 내 시선를 마주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했고, 아닌 몇몇은 나를 보고 반가움에 눈을 반짝이며 걸음을 재촉했다.

 

각자에겐 각자의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모두가 다르다.

 

원인은 너무도 단순하다.

 

그 이야기는 그녀들이 작가였으며,

동시에 그녀들이 독자였으니까.

 

그러니, 이제 모두가 함께 쓰려는 것이다.

 

 

 

“오랜만이오, 아르망 추기경. 사령관은 보고 왔소?”

 

“예. 오랜만에 말씀을 나누니 마음 속에 기쁜 마음이 샘솟더군요.”

 

“누가 봐도 그렇게 보입니다. 추기경.

그나저나 이제 각하의 일대기에 관해 이야기를 해야 할 텐데...”

 

 

 

모두가 함께 읽으려는 것이다.

 

더 이상 누군가의 상처로, 누군가의 옛 기억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

 

영원히 기록될 하나의 이야기로 남기 위해서.

 

 

 

“일단 제목부터 정해봐야 하지 않겠소? 어떻게 하는 게 좋을 지 이야기 해봄이 좋을 것 같소.”

 

“흠... 악마 같은 사령관의 몸으로 환생한 사람의 이야기이니 ‘악마 환생’ 같은 건 어떻습니까?”

 

“별로 읽고 싶은 제목은 아닌 것 같군.

좀 더 패도적이고 직설적으로 ‘일반인이었던 내가 환생하고 나니 철충 학살자?’ 같은 게 좋을 것 같다.

실제로 지구 상의 철충을 싹 쓸어버리기도 했으니...”

 

[칸, 이 미친 년아! 누가 보면 철충 분석 보고서 이름인 줄 알겠다!]

 

“오, 레오나인가? 그런데 사령관의 방에서 뭐 하고 있나? 뒤에 발키리 부관도...”

 

[사, 사정이 있어서 이러는 거니까 신경 꺼!]

 

 

 

패널 너머로 긴박하게 들려오는 레오나의 목소리.

 

고개를 뻗어 화면 너머의 모습을 슬쩍 보니 내 이불을 아예 뒤집어 쓰고 있었다.

 

반절 이상 뜯겨진 이불을 말이다.

... 저게 원래 저렇게 작은 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자세히 보니 나머지 절반은 발키리가 쓰고 있었다.

 

 

 

[아, 아무튼 제목 쓴다고 했지? 그럼 ‘라붕이’라는 단어 써보는 게 어때?]

 

“라붕이? 그게 뭔가?”

 

[몰라. 그냥 사령관이 자기는 그런 거라 했거든.]

 

“라붕이... 라붕이...

... 그럼 좆 같은 인간인 사령관의 몸으로 들어왔으니 ‘ㅈ간 사령관 몸으로 환생한 라붕이’ 같은 게 어떨 것 같나?”

 

[... 그것도 별로 긴 한데 아까 것보단 그게 더 나을 것 같다.]

 

 

 

레오나의 말에 나머지 지휘관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해결해야 할 또 다른 문제가 남아 있던 모양이다

.

이제는 아예 둥글게 모여 앉은 아이들이 서로 속닥거리며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자, 이제 정말 중요한 일인데, 

첫 번째 에피소드는 어느 부대로 해야 하지? 의견이 있는 사람 있나?”

 

“호드가 좋을 것 같소.”

 

“캐노니어로 하지!”

 

[발할라! 발할라!]

 

“저거 또 정신줄 놓고 있네. 체통을 지켜라 레오나. 이것도 엄연한 지휘관 회의다.”

 

[에이씨 몰라! 이번에 잘 하면 앞으로 평생 남을 건데 그런 게 대수야?

발할라! 시스터즈 오브 발할라!]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던 아르망이 비지땀을 흘리며 레오나의 통화에 음소거 버튼을 눌렀다.

 

 

 

“... 아시다 시피 레오나 대장은 현재 정신 상태가 불안하기 때문이 약간의 필터링이 있겠습니다. 동의하십니까?”

 

“동의합니다.”

 

“칸 대장도?”

 

“.... 동의하오. 내 친구라지만 어쩌다 저 모양이 된 건지 모르겠군...”

 

 

 

칸은 빈혈이 온 것 마냥 자기 머리를 집고 비틀거렸다.

 

하지만 회의에 참여한 그녀의 태도는 가히 전투적이었다.

조금이라도 자기 애들의 아픔과 억울함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다른 지휘관들도 그것만큼은 양보하지 않고 덤벼들었다.

 

 

 

‘이렇게 보니까 진짜 딱 20대 아가씨들 모임 같은데...’

 

 

 

더치걸의 묘비 옆에 앉아 있던 나는 말없이 모여 있는 지휘관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치 MT에서 한 데 모여 떠드는 것 같은 모습.

소주만 없을 뿐이지, 내가 대학교 신입생 시절에 갔던 오리엔테이션과 판박이였다.

 

그 때 난 인기도 없고 말솜씨도 없어서 불 꺼진 방에서 ‘라스트 오리진’만 주구장창했었지.

나에게 끼라고 말하는 친구도 없었고, 밝은 거실에 모여 떠드는 애들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어느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서.

 

하지만 지금은.

 

 

 

“그럼 사령관의 의견은 어떤지 물어봐야 하지 않겠소?”

 

 

 

나를 보는 무수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저리 평범하게 살았어야 했지만, 피와 살점이 터지는 전쟁에서 그토록 긴 시간을 보내야 했던 아이들.

 

카페에 가서 커피 향을 음미하고, 노래방에서 목청 터져라 노래를 불렀을 저 나이에 누군가의 명령으로 싸워야 한 지휘관들.

 

언젠가 세상이 돌아오는 날이 오면, 그 땐 저 아이들도 한껏 멋을 부린 채 길거리를 거니는 날이 올 것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반드시.

 

 

 

“사령관? 사령관? 자고 있나?”

 

[에이, 눈 뜬 채 자고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우리 사령관은 가끔 그러지 않나, 레오나.”

 

[뭐, 옛날엔 그랬지. 그나저나 자는 모습도 어쩜 이리 잘생겼을까아...]

 

“... 통령. 소관은 레오나 대장 입에서 저렇게 꿀 떨어지는 말이 들릴 때마다 약간 위화감이 드오.”

 

“하하... 아마 1회차 때 기억이 돌아와서 그런 거겠죠.”

 

 

 

어느새 내 앞에 바글바글 보인 지휘관들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 보고 있었다.

 

대충 지금까지 나온 화두를 종합해보자면 다음과 갔다.

일대기의 내용 전개와 구조는 누가 잡을 것인가, 안쪽에 들어가는 삽화는 누가 그릴 것인가, 삽화를 넣을 거면 아예 그냥 만화로 만드는 게 좋지 않겠느냐...

... 이렇게 말하니 오히려 더 정리가 안 되는 거 같은데.

그리고 심지어 지금 말하는 주제는 또 다른 것이었다.

 

 

 

“폐하? 안 주무시는 거 압니다.”

 

“... 왜 그래.”

 

“한 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이야기의 첫문장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 지금은 저게 주제다.

 

독자를 이야기로 몰입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 소설의 첫문장.

내 머리 속에는 유명한 소설의 여러 첫문장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미 있는 걸 담습하는 건 나보다 아이들이 더 잘할 것이다.

 

 

 

“몇 가지 문장을 만들어봤는데 한 번 봐주시지요.

[의식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자, 피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붉어졌다. 침대에서 남의 몸이 일어섰다.]”

 

 

 

저건 ‘설국’의 첫문장을 인용한 거고.

 

 

 

“[사령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사-령-관. 혀 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사. 령. 관.]”

 

[그건 내가 만든 거야 달링~]

 

 

 

저건 ‘롤리타’의 첫문장이...

...

... 아니, 니들이 쓰는 거 일대기 아니었어?

 

 

 

“[오늘 내가 세상을 떠났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갑작스러운 환생에 당황해 하셨을 각하를 떠올리며 만든 문장입니다.”

 

 

 

저건 ‘이방인’의 첫 문장...

 

 

 

“[어느 날 아침 뒤숭숭한 꿈에서 깨어난 사령관은 잠자는 자신이 침대에서 흉측한 모습의 한 마리 악마로 변한 것을 알아차렸다.]”

 

“고전 소설에도 환생을 써먹은 게 있더군. 

물론 저건 인간이 아니라 벌레로 환생한 거였지만, 우리도 뭐 딱히 다르지 않았던 것 같아서 선택했다.”

 

 

 

저건 ‘변신’의 첫 문장...

 

 

 

“[나는 좆됐다.

이게 내가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진짜 좆됐다.]”

 

“흐, 흐음. 뭐, 그런 일이 있었다면 다른 것보다 당혹감이 먼저였지 않겠소?

조금 경박한 단어가 있었다는 건 안다만 소관은 그저 소관의 의견을 말했을 뿐이오.”

 

 

 

저건 ‘마션’...

 

 

 

“[신이 없는 세계에서, 한 인간이 악마의 몸으로 환생했다.]”

 

 

 

저건... 다른 소설에서 가지고 온 게 아닌데?

 

 

 

“주인님만의 이야기를 다른 글에서 차용해 쓴다는 게 도통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리리스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환하게 빛나는 호박색 눈동자는 자신이 만든 소설 첫문장이 마음에 든다는 듯 자부심으로 가득 차있었다.

 

아무튼, 역시 박식하기로는 나보다 애들이 더하지.

하나 같이 나쁘지 않는 시작이다. 아니, 애초에 저것보다 나은 첫 문장을 만드는 게 가능할까?

나한테 그럴 재능이 있었으면 환생하기 전에 작가로 살았겠지.

 

 

 

“... 조금 주제를 바꾸는 게 어때?”

 

“예?”

 

“첫 문장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하면 딱히 말할 게 없을 것 같아. 너희가 말한 것 이상으로 잘 쓸 자신이 없거든.”

 

 

 

나는 더치걸의 묘비를 지지대 삼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앉아 있던 것 때문이었을까, 몸에서 으드득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를 멍하니 올려다 보는 아이들.

그리고 그들 옆에는 작게 만들어진 더치걸들의 위령비가 남아 있었다.

 

들고 온 국화와 십자가를 들고 나는 위령비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니까 그 대신, 마지막 문장은 이거로 하자.”

 

 

 

그리 크지 않고, 그리 작지도 않은 무덤.

누군가 던졌던 국화들은 변색되어 흙빛으로 변했고, 썩어가며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 주변엔 키르케가 매일 갈아주는 수십 종류의 꽃들이 즐비했다.

 

무수히 많은 색의 꽃들 사이로, 나는 가지고 온 국화를 꽂아 넣었다.

더 이상 애도의 의미로 던지는 것이 아닌, 그저 한 송이 장식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모든 싸움이 끝난 사령관은, 아이들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들고 온 십자가를 아이의 무덤 위에 놓으며 나는 생각했다.

 

더치걸의 영혼이 사라지기 직전, 나에게 했던 그 문장을.

곰곰히.




「“사령관.”

 

“응.”

 

“나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들어줄래?”

 

“... 그래.”」



 

참 오묘한 운명이다.


어쩜 그 아이의 마지막 진심이 그 한 문장으로 화할 수 있는 것인지.


참으로 신기하고, 기이한 일이었다.

 



‘함께 해줘. 이 세상의 마지막까지.’

 



그게 나를 구원한 카나리아가 하고픈, 마지막 말이었다는 것이.


마음이 간지러웠다. 작은 솜털 같은 깃이 감정의 경계를 허무는 듯한 감각이 일었다.


어디서부터 슬프고, 어디서부터 기뻐야 하는지 일말의 맥락조차 잡을 수 없는.

 

나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내 마지막 말을 경청하는 대원들.

 



“[사랑하는 아이들아.]”





아아.

 

그래.


결국은 사랑이었구나.

 

너희들이었다.

 

너희들이,


내가 사랑한 사람이었다.

 

 

 

“[함께 하자. 이 세상의 마지막까지.]”

 

 

 

-ㅈ간 사령관 몸으로 환생한 라붕이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