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진짜 바보야? 근육의 움직임에 익숙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무리하게 움직이면

다치기만 할 뿐이라는 건 상식이잖아. 



몸을 최대한 많이, 자주 움직여서 얼른 적응하고 전선에 나가고 싶단 말야....



무리를 하면 오히려 역효과야.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일상적이고 정적인 활동부터

천천히 체득해 나가는 게 장기적으로 봤을 때 도움이 돼. 무작정 달리는 게 아니라. 



으으음... 어쩔 수 없나... 일단 오늘 하루는 신세져야겠네. 괜찮은 재활 치료 추천해줄 만한 거 있어?



지금 정도 수준이라면 젓가락 연습부터 하는 게 좋겠네.

미리 특별 환자식을 부탁했으니까 가만히 기다리도록 해. 저번처럼 주방까지 달려 가려다가 넘어져서

염좌로 재입원하지 말고. 



알았어. 

....재활 치료 어느덧 4일째인데 그동안 잘 보살펴줘서 고마워, 리제 양. 



흥.... 너가 빨리 나아야 주인님의 특별 취급이 끝나니까, 당연한 일이야. 



.......너가 여기 있는 동안은 일단 내 환자기도 하고. 



리제는 칭찬에 대한 방어력이 낮은 모양인지 얼굴을 붉히며 연신 파닥거리더니 다른 병실로 향했다. 

밥은 남기지 말고 무조건 전부 먹되, 소화 잘 되도록 꼭꼭 삼켜서 위에 부담을 주지 말라는 조언을 남기고. 

그녀가 떠나고 잠시간 후 입원실의 문이 열리며 백발의 주방장이 직접 서빙 카트를 끌고 나타났다. 




흐응, 오늘은 복도에서 마주치게 되지 않을까 염려했사옵니다만,

어인 일로 부뚜막 위의 고양이처럼 가만히 앉아계신지요. 



아. 하하하..... 친절하신 간호사님에게 조언을 받았거든..



'친절'이라. 이 순진한 어린 양을 보면 절로 측은지심이 샘솟는 마음을 어찌할 바를 모르겠나이다. 

모든 친절에는 어떠한 보상 행위에 대한 기대가 기저에 깔려있음을 포세이돈의 참모께서 모른단 말입니까? 



의도야 어찌 되었건간에, 나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작용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니까. 



... 설마하니, PECS의 군을 이끄는 수장이 이렇게 물러터진 사고를 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사오나,



그러한 때 묻지 않은 심상은 응당 교섭의 관계를 초월하는 법이지요. 

...자, 사담은 여기까지. 



소완은 침대에 설치되어 있는 간이 책상 위에 차분히 음식이 담긴 접시를 차례차례 올려두었다. 

목제 책상 위에 접시가 소리 없이 마치 깃털처럼 내려앉는 모습은 그녀가 일류 주방장임을 알리듯

기품이 넘쳐흘렀다. 




오오.... 잘 먹을게.



허기가 지실테니 음식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소화에 도움이 되고 원기 회복에 좋은 전복죽이 메인 디쉬이며

전채는 병아리콩 샐러드로 간단한 콩 요리를 준비했사옵니다. 

곁들어 먹을만한 음식으로는 마침 옥수수가 대량 입고되어 옥수수 수프가 있습니다. 

식후 디저트로는 아로니아 콤포트가 곁들여진 프렌치 토스트가 있습니다. 



..........음! 잘 먹을게!



샐러드의 콩은 가급적 젓가락을 이용하시길 추천 드리옵니다. 

1시간 후 그릇을 수거하러 오겠지만 무리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오락의 하나로 여겨주시옵소서. 



마음 써줘서 고마워, 소완 양. 역시 듣던대로 일류 주방장이구나. 

....진작 리제의 말을 듣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으면 좋았을텐데. 



아마 우리 귀여운 정원사 아가씨도 이렇게 말씀하셨겠지만,

당신께서 쾌차하셔야 우리 마음 약한 주인이 한시름 걱정을 덜테니

이 모든 일은 동시에 저를 위함이기도 하옵니다.

하오니,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라는 것을 명심하시지요. 



뭐야, 해충. 아직도 안 갔어?



오! 리제 양! 이제 막 음식 설명이 끝난 참이야. 헤헤... 정성스럽게 차려준 성찬에는

지고의 주방장님의 극진한 설명이 가미되어 마무리되는 법이지. 

 


어이쿠, 하룻강아지도 제말하면 온다는 옛 속담 그대로군요. 

소첩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하룻강아지가 아니고 범이거든? 흥, 주방일 외에는 문외한이라니까. 



예예, 일자무식한 저를 부디 용서하세요. 후후. 




소완은 입꼬리가 잔뜩 올라간 채 천천히 고개 숙여 인사하고 카트를 끌며 나갔다. 

확실히 그녀는 범이었다.




둘은 사이가 좋구나. 



저딴 거랑? 어딜 봐서? 아무래도 시력에도 이상이 있는 모양인데 정밀 검사 필요해?



후훗.



멀린은 대답 없이 미소 지었다. 



그날 밤



멀린, 자?




병실 침대 커튼 너머로 밝혀진 전등으로 비쳐지는 멀린의 인영에게 말을 걸자

그림자는 실루엣 너머로도 화들짝 놀랐음을 알 수 있게 크게 요동쳤다. 




우악, 아서?! 안 돼! 나 지금 머리 엄청 떡졌는데...!

아니, 그보다 정원사 아가씨가 알면 엄청 화낼 걸...?



리제는 이미 재워두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금은 너를 보러 온 거야. 




커튼을 소리나지 않도록 살짝만 걷히고 몸을 옆으로 틀어 매끄럽게 멀린의 침실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 




오.... 이 야심한 밤에 몰래 레이디의 거처에 잠입하다니.... 

아서에게서도 대괴도의 자질이 보이는걸?



흠흠, 오늘 낮에 뛰다가 넘어져서 다쳤다고 전해 들었거든. 걱정되서 온 거야. 



뭐지, 이 간질간질한 감각은?! 지금 나 약간 몸상태가 이상해진 거 같은데?!



그럼 내가 신기한 마법 보여줄까? 



엉?



손을 조심스럽게 뻗어서 아서의 뺨에 손바닥을 대자 놀라서 휘둥그레해진 멀린의 눈이

곧 뺨을 통해 전달 받은 온기에 취한듯 반쯤 감겼다. 마치 말미잘 안에 숨으려는 흰동가리처럼

멀린은 그 안으로 더욱 파고들려는 듯이 얼굴을 손바닥에 부비었다. 




지금은 어때?



간지러운 감각은 사라지고, 대신에 욕탕에 들어간 것처럼 몸이 따뜻해졌어. 

뭔가 안정되는 느낌이야. 세상 만사 모든 불안이 눈 녹듯이 사라진 것처럼. 



또 다른 마술 보여줄까? 



헉, 또 있어?



멀린의 앉아있는 침대 위로 자리를 옮겨 그녀의 옆에 똑같은 자세로 등을 기대어 앉아서

살포시 얼굴을 당겨 가슴팍에 껴안았다. 




눈을 감아봐. 



으응....



뭐가 들려?



아서의... 심장 소리. 




솔직해지는 마술이야.



헤헤... 그게 뭐야. 

근데... 이러고 있으니까 진짜 마음이 편안해진다. 

꼭 온천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네. 



오늘 하루는 어땠어?



응.. 리제랑 소완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어. 

둘다 솔직하진 않지만 모두 좋은 애들이더라. 



....아서에 대한 애정이 아주 열렬하다는 것도.. 너무나도 잘 알았고. 



멀린이 책망하는 듯한 눈빛으로 올려다보고 시선이 교차하자

다시 그녀의 얼굴을 당겨 쇄골 언저리에 묻게 하였다. 




이런, 솔직하게 만드는 최면이 풀리려고 하네. 



헤에... 좋다, 아서 냄새.. 



..소완과 리제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어. 

그래서 놀랍더라. 그 둘이 이렇게까지 잘 융화하고 서로 좋은 시너지를 보여준다는 게. 



난 합류한지 얼마 안 되서 잘 모르겠지만, 분명 아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겠지. 



나만이 노력한 게 아니야. 오르카의 모두가 함께 노력한 거지. 

....정도나 방향성의 차이가 있어서 오해를 사기 쉬울 뿐, 어쨌든 마음은 분명하니까. 



나도 그 둘을 보고, 아서가 더 좋아졌어. 

...몸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멀린이 살포시 눈을 감고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하자,

이에 응하여 그녀와 입술을 포개었다가 곧 떼었다. 




 

후후후후후... PECS의 대악당이자 초천재 전략가 미소녀 멀린 님의 첫키스.

감상은 어떠신지?



백골난망 황공무지로소이다. 



으헤헤헷, 뭐야 그게!



근데, 이거 키스 아니야.



엥?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멀린의 턱을 검지와 엄지로 살짝 당겨 입을 벌린 뒤 조심스럽게 다시 입술을 포개어

혀 끝으로 굳게 다문 멀린의 치아를 벌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곧 어쩔 줄 몰라 다소곳이 그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는 멀린의 혀를 찾아 그 선단과 프랑스인의 볼인사처럼

살짝 맞대어 인사하고 혀 위를 긁거나 밑을 삹는 등의 한바탕 장난을 친 뒤에야 고개를 뺐다. 




....??! ...????



아하하... 역시 침범벅이 되네. 




새빨개진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멀린의 머리 뒤를 받치고 엉덩이를 밀어서 침대에 눕혔다. 

앞머리를 걷어 이마에 가볍게 키스하고 눈썹을 한번 어루만져준 다음 이불을 걷어올려 멀린을 덮었다. 




아직 재활 운동 중이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리제랑 소완 말 잘 듣고 얼른 본래 몸상태를 회복하자.

...할 수 있지? 



...으, 응..



다시 고개 숙여 멀린의 이마에 두번 키스했다. 



잘자, 멀린. 나의 현자 님. 



잘자, 아서. 나의 왕..




다음날 아침





............



..............



그니까 땀 때문에 침대 시트가 다 젖어서 직접 갈려고 한 거라고?



이, 이 내가 밤중에 소변을 지릴 리가 없잖아.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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