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븐의 뒤를따라서 얼마나 숲속을 걸었을까

어느 시점부터 나무의 밀도가 드문드문해지더니 얼마안가 시야가 탁 트여오기 시작했다


세월에 의해 여기저기 파여있지만 흙길보다야는 훨씬 반듯한 포장도로가 나오고

그 포장도로를 따라 걷자 어느새 꽤 큰 규모의 주택가가 눈앞에 나타났다

바닷바람에 침식된 낡은 주택들이 줄지어 서있는 광경

아니, 사실 그 중 대부분은 집의 형태가 아닌 바스라진 나무기둥들의 무더기에 가까운 외형이었다


"쨘! 바로 여기야."


레이븐이 한 주택앞에 서서 두팔을 뻗어 자랑한다

여태 지나쳐온 집들중에선 그나마 겉으로는 제일 견고하고 멀쩡한 주택이었다

비록 문짝과 창문은 전부 떨어져 나가있었지만 적어도 문틀과 창틀이 남아있다는점이 어딘가?

현관문이 있을 자리에는 낡았지만 깨끗한 커텐이 하늘하늘 흔들리고있었다


하지만 그런것 보다 먼저 들어온건 따로있었다

주택의 외벽과 지붕에는 마치 크리스마스용 장식 전구줄같은게 치렁치청 둘러져있었다

저 구석에 자그마한 수동발전기가 전선에 연결된채 배치되어있는것 보면 아마 켜지는거겠지...?

문 옆에는 어디서 주워온건지 알수없는 현수막이 대강 걸려져있었고, 휘갈겨져있어 단번에 알아보긴 힘들었지만 검은 위장크림으로 'Raven's variety store'이라고 적혀있었다


"'레이븐의 잡화점'?"


"맞아 꽤 괜찮게 꾸미지 않았어?"


"혼자서 이 모든걸 꾸민거라면 정말 굉장한걸요..."


허- 하는 표정의 다크엘븐과 감탄한 표정의 이그니스

그치? 그치? 하며 의기양양해진 레이븐


"외견보단 안쪽을 더 열심히 꾸몄어. 들어와 봐!"


레이븐은 다크엘븐과 이그니스의 손을 잡아 끌며 집 내부로 들어갔고, 나와 아스널은 서로 마주본채 어깨를 으쓱하곤 따라 들어갔다

현관복도를 따라 거실로 들어서자 벽난로를 중심으로 넓은 공간이 비워져있었고, 바깥쪽으로는 얼핏 급조된듯한, 아무래도 직접 나무판자를 가지고 만든듯한 테이블이 나란히 세워져있었다

테이블 근처에 세워둔 마네킹이나 방 구석에 쌓여있는 작은 박스들

보자마자 가게라는 느낌이 물씬 드는 인테리어였다

과연, 이래서 잡화점이라고 해놓은거구나


"꾸미느라 힘들었겠는걸?"


"그치? 이 누나가 혼자서 이 모든걸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다고. 그래서 어때? 소감이 듣고싶은데."


"아 소감이라...으음...소감보다 먼저 드는 생각을 말해도 좋을까?"


"뭔데?"


"그래서 갑자기 이 가게는 왜 만든거야?"


다시 한 번 상기시키자면, 우린 곧 이 섬을 떠난다

그리고 분명 내 기억에, 레이븐은 섬에 남는 인원이 아니다

휴가는 끝났고 아마 앞으로 1주일도 안되는 시간사이에 가게를 연다한들 장사하기에는 빠듯한 시간일것이다

아니, 애초에 대체로 바쁜 분위기가 감도는 오르카내부 상황상 가게를 찾아오러 이렇게까지 먼 주택가로 찾아올 여유있는 대원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애초에 뭘 파는거지?


내 질문이 날카로웠는지 레이븐은 아-음- 하고 대답할말을 생각하다가 배시시웃었다


"그게 실은...에밀리를 위해서야."


"에밀리?"


레이븐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 테이블위에 엉덩이를 대고 걸터앉았다


"언젠가 파니하고 같이 에밀리와 놀아주고있을때였어. 그러다가 우연히 도심지 정찰중 찾아낸 백화점이야기가 나왔었거든. 나중에 같이들 놀러가자고 약속하는데 에밀리만 왠지 시큰둥한 표정으로 빤히 보고있더라고."


레이븐이 한번 그녀의 가게안을 둘러보곤 말을 이었다


"에밀리는 백화점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어."


"흠...에밀리는 아직 모르는게 많은 아이니까."


"그래서 뭐라고 설명해야할지 고민하다가 다양한 물건도 많고 맛있는것도 많아서 즐거운 쇼핑도 할수있는 공간이라고 설명해줬는데, 이번엔 쇼핑이란게 무엇인지 물어보더라고. 복원될때부터 늘 우리를 따라다니며 전투만 해오던 우리 에밀리에게 쇼핑이란걸 배우게 될 틈같은건 없었던거야. 뭔가 머리에 띵-하고 쥐어박힌 기분이었지."


그 말과 함께 레이븐은 장난기있는 몸짓으로 자신의 머릴 약하게 톡 두드렸다

우리가 너무 진지한 자세로 듣고있는것 같아서 잠시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하는 시도였겠지

하지만 별로 신통치않다 싶었는지 머쓱하게 웃고는 마저 말을 이어갔다


"우리 부대가 철수명령으로 한참 바쁠즈음에, 우연히 이 도시와 주택가를 발견했을때 갑자기 그때 일이 떠오르더라고. 그래서 우리 에밀리를 위한 언니의 작은 깜짝 이벤트를 하나 준비해보자고 마음먹었지. 아니, 기왕이면 우리 캐노니어 모두에게 깜짝 이벤트가 되길 바랬어."


"그래서 나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보고하지않고 몰래 일을 꾸몄던거군"


아스널은 작게 피식하고 웃었고 레이븐은 미안한듯 살짝 고개숙여 사과했다


"그래서 사흘전에 에밀리한테 들켰을때는 정말로 식겁했었다니까? 에밀리까지는 어떻게든 넘어갔었는데 그 다음에 헌터언니한테 추궁당할때는 정말로 끝장나는줄 알았지..."


"그 날 하루종일 헌터는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지. 난 단순히 생리날인줄 알았었는데 말이야."


"장담하건데 대장. 헌터언니가 생리인 날에 걸렸었다면 난 이미 이 자리에 없었을꺼야."


두 캐노니어는 농담을 주고받곤 한바탕 웃고있지만 나를 비롯한 나머지 인원은 그 남사스러움에 어쩔줄몰라하고 있었다

...빨리 다음 말을 재촉해야겠다는 생각에 헛기침을 했다


"음...그래도 나 혼자서 커다란 백화점 하나를 복원하는건 시간상으로나 인력상으로나 여러모로 무리가 많았으니까, 제일 멀쩡한 집을 하나 찾아서 작은 가게를 꾸밀 생각을 했지. 진열할 물건은 도시에 버려져있는 물건들중에서 그나마 멀쩡한것들을 주워서 진열할 생각이었어."


"겸사겸사 남아도는 전투식량도 몇개 훔쳐서 가져오고말이야?"


다크엘븐이 구석에 있는 상자중 통조림이 들어있는 상자를 찾아냈다


"훔치다니! 엄연히 신청서를 쓰고 보급받아온거야!"


"음, 레이븐? 개인이 보급을 신청해서 수령받아갈경우 그 통지서가 각 부대의 지휘관에게 전달되게 되어있다. 그리고 내 기억에 최근에 저 만큼 통조림을 배급받았다는 통지서가 들어온적은 없었던것같은데"


"응?! 그럴리가! 하지만 지금까지 종종 가져갔었던건 아무 말도 없었는ㄷ-"


그 순간 아차-싶은 표정이 레이븐의 얼굴에서 순간 지나갔다

입은 웃고있지만 눈빛은 한층 강렬해진 아스널과 아하하하고 머쓱하게 웃으며 뒷머릴 긁적이는 레이븐

이건...나중에 한 소리 좀 해야겠는걸


"뭐 어찌됬건 그렇게 작은 가게를 준비해서 에밀리에게 쇼핑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줄겸 소소한 캠프시간을 만들어주고자했던게 내 의도였어. 하지만 폐가 하나를 그럴싸한 가게로 꾸미는건 생각보다 엄청 할게 많더라고. 여기저기 패인 벽과 바닥을 메꾸는거로만 며칠이 지났었던건지...요즘들어 늦게오곤했던건 그런 이유에서야."


과연, 하루종일 그런 노동을 하고 돌아왔으니 누구라도 오자마자 금세 뻗어버리곤 했을테지

집 안에 들어서기 전 그럭저럭 견고해보였던 주택의 외견이 다시 떠올랐다

수십년간 방치되었을 주택이 그냥 그렇게 멀쩡했을리가 없었다

그녀가, 딱히 목재를 다루는 재능도 없을 레이븐이 열심히 매달려서 고쳐낸것이겠지


"하지만...그게 아무래도 에밀리에게 오해를 사고말았던것같네."


나의 한 마디에 레이븐은 약간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분명 에밀리를 즐겁게 해주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아이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미안함을 느끼고있는것일까


"음...아무래도 오늘은 일찍 돌아가야겠어. 에밀리에게 사과해야지. 사과 선물도 하나 필요하겠네. 선물은 음...아, 저 담요는 어때? 커피자국같은게 있긴한데 디자인이랑 비슷해서 아마 눈에 띄진-"


"레이븐 소령"


아스널이 짧지만 단호한 음성으로 그녀를 부르자 모두가 얼어붙었다

아까까지의 여유로움은 사라진 진지한 눈빛

비록 에밀리를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어쨋거나 며칠 연속으로 무단외박을 한것도 모자라 보급품까지 조금씩 빼돌렸던 만큼 아스널로서도 그냥 넘어가줄수 있는 선은 넘었다는거겠지

레이븐도 그 분위기를 직감했는지 웃음기를 지우고 차렷하고 정자세를 지었다


"응, 아니, 네 대장."


"준비가 완료될때까지 앞으로 며칠정도 걸릴거라 생각하지"


"이제 거의 마무리 단게였습니다. 앞으로 사흘정도면 마무리가 될것이라고..."


"사흘이라, 꽤 촉박하군. 자네 혼자서 그 기한을 맞출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지만."


"그렇습니다. 대장."


체념한듯 한숨짓는 레이븐

아쉽지만 자신들만의 작은 이벤트를 위해 전 오르카의 일정을 늦출수는 없는 노릇이다

캐노니어의 지휘관으로서도 자신의 부대가 모두에게 민폐가 되는 일은 절대로 용납할수 없는 일이겠지

거기에 아무리 세세한 불만같은건 대충 넘기고 마는 상여자 아스널이라지만 자신에게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독단적으로 이런 일을 해왔다는점이 불쾌하게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른다


"사령관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뭐...아스널의 말대로 앞으로 사흘넘게 걸린다면 꽤나 촉박하지. 특히 일의 막바지로 갈수록 예상치못하게 일거리가 더해지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렇다는군 레이븐. 그럼 이제 자네에게 한가지 질문할게 있다."


아스널의 레이븐의 어깨를 꽉 잡았다

평소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한껏 움츠려든 레이븐

그런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아스널이 입을 열었다




"최소한 내일 저녁까지 마무리지으려면 몇 명의 인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네...어,네?"


"잠깐 뭐?"


브라우니가 잘 모씀다?할때와 똑같은 표정을 짓는 레이븐

마찬가지로 예상치못한 질문에 당황한 나를, 아스널은 돌아봤다


"사령관. 우리가 본격적으로 철수준비를 시작한지 며칠이 지났다고 생각하나?"


"어디보자...용의 무전이 전달된게 보름전이니까 그 즈음부터 쉬지않고 쭉 달려왔었지."


"그렇다 사령관. 나는 오르카내에 감도는 지쳐가는 분위기를 느낄수있었다. 그 뭐라하더라...버..버어...자이나?"


"...번아웃말하려는거야? 대장?"


"아 그거다. 소령."


"뭘 어떻게해야 번아웃이 버자이나가 될 수 있는거야..."


"중요한건 그게 아니다 사령관. 나는 이 섬에서 보내는 마지막 휴식시간이 필요한때라고 말하고있는것이다."


"저...아스널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최근 저희 동료들도 철야가 잦아지면서 다들 피로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잠자코 듣고있던 이그니스가 넌지시 아스널에 동조하였다

옆에있는 다크엘븐도 따로 말은 없었지만 뭔가를 곰곰히 생각해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고있었다

확실히 요 2주 가까이 되는 시간동안 오르카는 쉴틈없이 바빴었지

심지어 그렇게나 열심히 했는데도 아직도 준비를 끝마치지 못한 부대들도 있다

단순히 할 일이 많아서 그렇구나라고 생각했었지만, 어쩌면 아스널의 말대로 심신이 지친 부대원들이 제 힘을 못쓰고있어 일이 늘어지고 있었을수도 있겠구나


"잠깐의 적절한 휴식은 조직의 사기와 일의 능률을 매우 크게 끌어올려줄수 있다 사령관. 그리고 내가 보기엔, 우리 소령이 기획한 이 작은 가게가 꽤 좋은 파티의 빌미를 던져주고있다고 생각하네만."


"흐음 그러니까 아스널의 말은...레이븐의 이벤트를 오르카 전체의 파티로 확대해서 모두를 위한 재충전 시간으로 활용하자는거지?"


"자,잠깐 사령관! 대장! 그치만...그러기엔 준비된게 너무 적은데...물건도 그렇게 많지 않고..."


"각자 남는 물건이나 필요없어진 물건을 거래물품으로 내놓게하는건 어떨까요? 제공하는 사람 입장에선 버리기 아까운 물품을 나눠줄수 있고, 사게 될 사람입장에선 물품이 다양해져서 고르는 재미가 있을거에요."


"그거 괜찮네. 우리쪽에도 바보 엘븐이 처분해야할 버터밀크가 산더미같이 쌓여있는데, 그 일을 좀 덜어낼수있는 좋은 기회가 될것같아."


"이렇게 되니까 마치 바자회같은 모습의 파티가 떠올려지네요."


아직 정해진건 없지만 어느새 파티를 앞둔것처럼 화기애애하게 수다를 떠는 이그니스와 다크엘븐

레이븐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있었고 그 옆에서 아스널은 팔짱을 끼고 의기양양하게 나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인걸. 좋아 오늘 돌아가서 각 부대의 지휘관들에게 파티준비를 도와줄수 있는 여유 인원과 파티에 내놓을 물건들을 지원받는다고 공지해볼게."


파티가 공식적으로 결정되자 그녀들의 표정이 한층 더 밝아졌다

그래, 어차피 이 섬과도 곧 작별이다

마지막으로 잠시나마 즐거운 마무리를 지어도 좋지않겠는가?


"하지만...대장? 괜찮은거야 정말?"


영락없이 혼나는것도 모자라 이벤트 준비도 그만두게되리라고 생각했을 레이븐이 아스널에게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자네에 대한 처벌은 파티가 끝나고 나서 생각해보도록 하지."


아스널은 레이븐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씨익 웃어보였다


"그리고, 소령이 직접 혼자서 여기까지 해놨는데 그냥 그만두기엔 너무 아깝지않은가."


"대..장!"


레이븐은 감격한듯이 양손으로 입을 덮은채 아스널을 빤히 바라보다가 곧 뛰어들듯이 껴안았다

흠, 그렇게 자유분방한 캐노니어 부대원들이 왜 대장에게만은 그렇게나 충성이 깊은지 알것만도 같군

하지만...아무리 인원을 지원받는다고 한들, 과연 하루만에 모든 준비가 끝날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