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매일 밤 생생하게 상영되는 어떤 전투의 기록이다.


그 기록 속에서 소녀는 거대한 몸집의 순양함을 이끌고 아군의 거점을 지키고 있었다. 

소녀가 순양함을 지휘하는 것인지, 소녀 본인이 순양함인지 알 수 없는 몽롱한 시점 안에서 그녀는 싸우고 또 싸웠다.


배후의 적을 탐지하기 위해 섬을 끼고 크게 선회할 때였다. 예상치 못한 반대편 암초에서 적함이 수면을 가르며 미끄러지듯 튀어나왔다. 

소녀는 집중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주포를 있는 힘껏 돌렸다.

순간 함이 크게 흔들리며 피탄 보고가 들어왔다. 개의치 않고 목표를 잡아 일제사격을 실시하려던 찰나,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화염이 시야를 뒤덮었다.


"어째서 집중방호구역이...말도 안돼..."


기대를 모았던 대형 순양함의 함교는 화염에 뒤덮인 성당의 첨탑처럼 타오르다 힘없이 무너졌다. 

적탄에 관통당한 집중방호구역은 기름을 끼얹은 가마솥으로 변해 그 안의 사관들과 모든 것을 불태웠다. 


소녀는 자신의 불타오르는 몸을 움츠리며 비명을 질렀다. 불타오르는 그녀의 육체는 격렬한 파도 아래로 사라지며 없었던 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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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셔는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내 시타델...시타..."


그녀는 가쁜 숨을 고르며 침침한 수면등 조명 사이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별 다를 것이 없었다. 손을 천천히 내려 바닥을 짚자  땀으로 축축해진 시트의 감촉이 느껴졌다.


"염병할...또 그 놈의 꿈..."


이 모항에 온지 약 한 달이 지났다. 그 이후로 같은 꿈을 대강 20번은 꾸었다. 대충 사흘에 두 번은 이런 악몽을 꾼단 소리였다. 

미어터지는 가슴을 누르고 다시 잠에 들려던 때였다. 숙소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손가락으로 마이크를 건드리는 툭 툭 소리, 듣는 사람의 기분을 엿같게 만드는 훅 훅 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기상. 기상. 전 함대원은 침구를 정리하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간단한 공공실 출입을...."

"아... 애미 씨발 좆같은 년...찢어버릴 수도 없고..."


당직함 셰필드의 감정없는 기상 방송에 저절로 욕지기가 나왔다. 다시 자기는 영 글렀다. 

체셔는 침대에서 반쯤 굴러떨어지듯 벗어나 땀으로 범벅된 브레이브걸 속옷을 벗고 새 옷을 더듬어 찾았다.


새 속옷을 입고 고양이 세수랑 양치를 한 다음 메이드복인지 드레스인지 알 수 없는 근본없는 옷을 입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빗으로 쓱싹쓱싹 내린 다음 고양이 귀 모양의 카츄샤를 머리에 걸쳤다. 

비뚤어지지 않았나 확인하기 위해 전신 거울 쪽으로 걸음을 향했다. 전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자 환멸이 몰려왔다. 대체 내가 여기서 왜 이래야 하는 건지. 전입 당일날 같은 소리를 인솔 장교에게 했다가 욕을 얻어 먹은 기억이 떠올랐다.


'야 이 새꺄, 너 원래 있던 곳에서도 안된다고 해서 폐함처분 될 거를 겨우겨우 여기로 데려온 거야 임마. 이런 짓거리라도 하면서 연명해야지 임마, 아니면 그냥 폐함신청 할래? 두 번 안 말한다.'


체셔는 입에 숫자 욕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고 카츄샤를 고쳐 썼다. 

그녀는 이를 갈던 것을 멈추고 턱에서 힘을 뺀 뒤 고양이 입을 만들었다. 가볍게 반 쯤 쥔 주먹을 어깨 높이까지 들어올린 뒤 포즈를 취해 보았다. 나쁘지 않았다. 방 문을 나서기 전, 체셔는 전신 거울 앞에서 오늘 하루를 위한 마지막 리허설을 시작했다.


"와아~! 서방님, 체셔를 보러 이렇게 일찍 나와준 거야? 체셔는 너무 기쁘다냥! 오늘 하루도 서방님과 함께 파이팅이다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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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항에서 할 일이라곤 그다지 많지 않았다. 기본적인 수업과정 외에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활발하고 천진난만한 티를 내 주는 것, 그리고 지휘관에게 엉겨붙으면서 애교를 부리는 것이 일과였다. 인솔 장교의 말에 의하면 이것이 같잖아 보여도 중요한 일이라고 한다.


해상 초계나 실전상황에 비하면 훨씬 쉬운 일 같지만 감정적으로는 그렇지만도 않았다. 일개 수병 신체검사조차 탈락해야 정상인 돼지자식이 함대 지휘관을 자처하고 있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그런 뚱땡이에게 달라붙어 애교를 부리는 것이 인류의 미래를 위한 길이라는 건 더 웃기는 일이었다. 역겨운 체취의 살덩어리에게 사랑스러운 스킨십을 하면서 가증스러운 연기를 하는 것은 또 다른 방향성의 용기와 인내가 필요했다.


체셔는 생각했다. 부디 이 시련이 가벼운 스킨십 선에서만 끝나기를...이런 생각을 하며 자기연민에 빠진 채 숙소동 뒷켠에서 담배를 한 모금 빨고 있을 때였다.


"오늘도 여유가 넘치시네요. 체셔 씨."


갑작스러운 소리에 화들짝 놀라 본능적으로 담배를 비벼 껐다. 고개를 돌리자 그 자리에는 메이드, 아니 메이드 같지만 이도 저도 아닌 것이 씩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체셔는 한껏 인상을 쓰고는 기도 언저리에서부터 가래를 있는 힘껏 모아 바닥에 투욱 뱉었다.


"몰아드린 연초비를 이렇게 쓰고 계셨군요. 지휘관님께서 아시기라도 한다면...."


경순양함 넵튠. 이전 기지에서부터 안면이 있던 함선이었다. 

옛 전우를 만났지만 체셔 입장에서는 그리 반갑지는 않았다. 지금 상황도 그렇지만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는 녀석이다 보니 대하는 것이 영 편하지 않았다.


"아 씨 뭔데? 너 설마 꼰지르려는건 아니지?"

"설마요. 나름 비슷한 처지인데 그런 짓을 하고 싶지는 않답니다. 그 반대로 우리 불쌍한 고양이 아가씨를 조금 도와드리고 싶어서 말이죠."

"아 빨리 용건만 말해."


넵튠은 씩 웃으며 자신의 입술을 체셔의 귀 언저리에 가져다 대었다.


"곧 지휘관님이 이 쪽으로 순찰을 올 예정이랍니다."

"뭐?"


마음과 입이 동시에 '좆됐다'를 외쳤다. 체셔는 황급히 구두 끝으로 땅을 파서 담배와 가래침을 묻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리스테린을 꺼내 입에 한웅큼 물고 우물거렸다. 알싸한 민트 그린 향이 입 전체를 타고 돌면서 어제 저녁 실수로 씹었던 볼과 부어오른 어금니 쪽 잇몸을 불태웠다. 인두로 입 안쪽을 지지는 듯한 고통에 체셔는 그만 들숨을 쉬고 말았다. 소주컵 한 컵 분량의 리스테린이 숨구멍으로 빨려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커어어억! 쿠엑! 켁! 켁!"

"그럼 수고하세요. 감정노동이란게 참 쉽지 않은 거랍니다. 전 이만 실례할게요."


기도를 맹렬한 기세로 태울 것만 같던 리스테린을 억지로 토해내고 기침을 다스리던 사이 넵튠은 떠나고 없었다. 대신 그녀가 떠난 방향으로 해군 정복을 입은 코스프레 뚱땡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좆같았다. 또 다른 전장, 또 다른 용기가 필요했다.


"아 ㅆ....와아 서방님! 이런 곳엔 어쩐 일이다냥?"

 

체셔는 지휘관을 향해 온 몸을 날리며 그를 끌어안았다. 자신의 젖가슴 너머로 느껴지는 젖가슴과 뱃살의 감촉이 역겨웠다. 

체셔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가슴을 지휘관에게 비벼 댔다. 이럴 수록 지휘관이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빨리 끝내고 오늘은 그만 엮이자, 이 돼지새끼야.


"체, 체셔쨩...오늘따라 너무 과감한 것 아닐까? 옆에는 내 비서함인 세인트루이스가 있으니까, 사적인 찐한 일은 있다 내 집무실에서 즐기는 것이 좋은 느낌이랄까?"


놈의 말에 순간 입이 얼어붙고 몸이 굳었다. 제발, 신이 있다면 거기까지는 가지 않는 기적을 베풀어 주시길. 체셔는 지휘관을 끌어안은 채로 남은 힘을 다해 몸을 부벼댔다.


"아...아...ㅆ....아잉~ 그게 무슨 소리다냥? 체셔는 서방님과 여기서 알콩달콩 스위트하게 보내고 싶은 걸! 비서함 같은건 신경쓰지 말고 여기서만...여기서 데이트하자냥!"


이렇게 말하며 체셔는 비서함 세인트루이스를 바라보았다. 

세인트루이스에 대한 정보는 어느정도 수집해 알고 있었다. 자매함의 개장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해군과 방산기업의 상층부와 만나 이런 저런 회동을 가진다는 이야기였다. 말이 좋아 회동이지 어떤 일을 겪을 지는 안 봐도 뻔했다.

체셔는 깜박임 한 번 없이 루이스를 계속 응시했다. 지금의 자신은 귀여운 고양이라기보단 주인의 처분을 기다리는 병든 사냥개에 가까웠다. 부디 눈빛 만으로 대화가 통하길 체셔는 원하고 또 원했다. 


'모항까지 굴러들어온 이 불쌍한 년이 어떤 딱한 사연일지는 귀하께서도 잘 아실 겁니다. 불쌍한 인생 한번 살려준다 치시고 이번 한번만 제발 도와주십쇼! 제발!'


잠시 뒤 씁쓸한 표정을 짓던 루이스가 지휘관의 한 팔을 휘감았다.


"후훗, 지휘관 군도 참. 귀여운 고양이랑 노는 건 티 파티 때 해도 충분하다구. 오늘 일과부터 마치고, 즐거운 일은 나랑 즐기는 게 어때?"


말랑거리는 촉감에 취해 헤롱거리는 지휘관을 루이스가 잡아 끌었다. 체셔의 옆을 루이스가 지나치는 순간 엉덩이를 툭툭 치고 지나가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지휘관과 비서함이 모퉁이를 지나 사라지자, 체셔는 제자리에 주저앉아 그대로 절을 올렸다.


"정말 빌어먹게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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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일과가 끝나고 해도 저물었다. 체셔는 속옷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어제 찍은 티 파티 사진을 이제야 쥬스타에 올렸다. 깜박하고 놔두고 있었는데 지휘관이 DM으로 계속 보채는 바람에 욕을 중얼거리며 업로드한 것이었다. 10분도 되지 않아 지휘관의 리플이 올라왔다.


'체셔어어어어 슈퍼 울트라 큐우우우우트 캣!'


리플을 보자 마자 짜증부터 몰려왔다. 그냥 사무적으로 귀엽다 한 마디 하면 될 것을, 자기 딴에는 친교를 위해 한다는 표현이 저런 거였다. 저 녀석은 이 모항 밖에 인간 친구가 있기는 할까. 그렇게 생각하니 기존의 불쾌한 감정과는 다른 다소의 연민이 감돌었다. 쓴 숨을 짧게 토해내며 체셔는 엄지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렸다.


'서방님이 좋아해 주니까 체셔도 힘이 난다냥! 오늘 하루도 수고했고 내일도 열심히 하자냥!"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폰 화면을 끄고 충전기에 꽂은 다음 아무렇게나 밀쳐 두었다. 해는 한참 전에 기울었지만 잠이 오기엔 이른 시각이었다. 

체셔는 검정 체련복을 걸치고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발코니 문을 열었다. 체련복 주머니에 모셔진 담배를 꺼내 두어 번 흔들자 라이터가 튀어나왔다. 몇 번을 더 흔들자 찌그러진 담배 한 개피가 추가로 튀어 나왔다. 넵튠 몫까지 받는 연초비 만으로 안심하기엔 소비량이 만만찮았다. 


체셔는 찡그린 표정으로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켰다. 맞바람 때문에 불이 생각보다 잘 붙지 않았다.


"에이 썅...다음번엔 터보 라이터로 사던가 해야지."


어떻게든 불을 붙이고 연기를 입에 한 모금 머금으니 하루의 고단함이 절반은 풀리는 것 같았다. 체셔는 담배 연기를 후 하고 내뱉으며 찬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신선하면서도 쓸쓸한 기운으로 온 몸의 긴장이 이완되는 가운데 머리에 뭔가 불편한게 느껴졌다. 고양이 귀 카츄샤를 아직도 쓰고 있었다. 체셔는 쌍욕을 뱉으며 카츄샤를 방 구석에 던져 버렸다.


"오늘 하루도 참 좆같았네 진짜....시발 함생 별거 없구만."


체셔는 입술 근처까지 온 담배를 창틀에 비빈 뒤 가래침을 뱉어 껐다. 이제 나머지 절반의 피로를 풀 시간이었다. 

발코니 문을 닫고 미니 냉장고를 열어 보니 발포주가 한 캔 남아 있었다. 사흘 전 모항 마트에서 8캔에 만원을 주고 산 게 벌써 다 떨어졌다.


"아 씨, 가득 채워 놨는데 또 사러 가야 하네. 다음엔 지휘관한테 앙탈 좀 부리면서 냉장고 좀 큰 걸로 바꿔 달라고 해야지."


체셔는 손에 든 발포주를 안주 없이 한 번에 들이켰다. 차가운 탄산의 짜릿함이 온 몸의 신경을 타고 흘렀다. 이 순간만큼은 술의 고급스러운 향과 풍미를 거론하는 몇몇 함선들이 발 빝에 깔린 것처럼 가련하게 느껴졌다.


"이게 바로 만원에 8캔 짜리 행복이다, 시발것들....아, 옛날통닭 사오는 걸 깜박했네."


그녀는 나른한 취기를 즐기며 불을 끄고 침대에 다이빙했다. 은은한 수면등의 빛을 즐기며 체셔는 한 가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옛날통닭 한 마리에 4천 원, 두 마리면 8천 원. 한 마리는 적고 두 마리는 배부르다. 두 마리를 질러? 

2만원이 있으면 발포주 세트에 옛날통닭 두 마리를 사고 남은 돈으로 칸센로또 두 줄을 긁을까? 

아, 내일이 수요일이니까 경함 출주일이지? 한 마리만 사고 남은 돈으로 복승식에 올인해?


세상에서 제일 가는 행복한 고민을 하다 보니 어느덧 정신이 몽롱해지고 잠이 쏟아졌다. 

이불로 배를 대충 덮은 채 체셔는 생각했다. 사흘에 두 번은 좆같은 꿈인데, 좆같은 꿈을 연이틀로 꿨으니까 오늘은 꿀잠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