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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황도에서 자행되었던 잔악무도한 대학살의 진상을 황도의 귀족들은 아는가!"


  아수라장이 된 라티느 제국의 황도.


  이곳은 소리 지르며 도망치다 드레스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귀족 영애인가 하면, 허겁지겁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다 눈먼 화살에 등이 꿰뚫려 흙무더기처럼 허물어지는 이름 모를 남자가 이곳저곳에 즐비한 와중의 황도.


"5년 전! 황녀의 명으로 황도의 뒷골목은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대학살의 억울한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그 아비규환의 아득한 혼란 한가운데서 반란의 수괴는 외쳤다.


"남녀! 노소! 가리지 않고! 모두가 죽어갔다!"


  수괴는 그리 외치며, 자신의 옆에서 비실거리고 있는 청년에게 창날을 깊숙히 찔렀다.


"끄악!"


"바로 이렇게 말이다!"


  심장을 찌른 창에 청년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곧 고꾸라졌다.


"이제 빈민의 분노를 느껴봐라! 너희들이 벌레 죽이듯 죽이면 벌레 죽듯 죽어갔던! 우리 빈민들이 죽어간 그 고통을 느껴보아라, 황도의 귀족들아!"


  그 말과 동시에 수괴 밑에 몰려든 성난 반란군들은 품 속에서 찰랑거리는 액체가 든 유리병을 꺼내, 그 심지에 단숨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곧바로 수십 여개의 불씨가 허공에서 수십 여개의 궤도를 그렸고….


  콰창! 화르륵!


"크아아악!"


"사, 살려줘!"


  불이, 타오른다.


  대륙에서 가장 찬란한 황도보다도 더 밝게.


"모두 죽여라! 아무도 살려보내지 말아라! 특히 5년 전의 학살을 주도했다던 베로니카 황녀! 베로니카 황녀만큼은 놓쳐선 안된다!"


  불길이 치솟았다. 주홍빛 선율은 그렇게 치미듯 일어나 황도를 하나의 빛깔로 채색해 나갔다.


  가지각색의 인종들. 아이, 어른, 귀족, 천민, 황도의 제국민과 그렇지 못한 거렁뱅이들. 이젠 그 모두가 주황빛으로 물들어, 광기의 격류 속에서 마구 헤엄친다.


  웅장한 귀족들의 성과 황도의 음습한 뒷골목은 서로 빛깔에 아무 차이도 없이 빨갛게 불타올라 이제 서로 구분할 수 없었다.


"흐어억."


"왜, 나는 왜! 크아악!"


"밀지 마! 밀지 말라고!"


  광기가 점령한 가장 큰 영토가 된 라티느 제국의 황도를 불과 비명이 가득 채웠다.


  모두가 한목소리로 소리지른다.


  세상이, 하나의 목소리로 물들어간다.





"멍청한 것들."


  광란의 반란이 일어나고 있는 황도, 그 중심의 가장 높은 건물인 라티느 제국의 황궁.


  반란의 수괴가 단죄를 외치던 바로 그 본인.


  황도가 자신을 죽이겠다는 역도들에 의해 처참히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황궁의 베로니카 당사자는, 그럼에도 그저 혀를 한 번 차곤 아무렇지도 않게 그 격랑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아무리 외침外侵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황도가 그리 만만했을까.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모두 진압될 게 뻔할 터인데."


"황녀 전하. 하지만 피하셔야 합니다. 폐하께서는 이미 대피하셨습니다. 아무리 저 역도들이 곧 진압될 것이라 해도 지금은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곧 역도들이 황궁에 들이닥칠 겁니다."


"나도 안다."


  이미 황가를 비롯한 황궁의 모든 이들은 피신했다.


  남아있는 것은 자신의 업보를 보고 싶다며 억지로 남아있던 베로니카와 그녀의 물건인 셰인뿐.


  이제 황녀도 몸을 피할 때였다.


  황녀는 몸을 돌렸다.


"자, 가자꾸나. 더 이상 지체했다가 죽는 건 사양이니까. 내 물건들은 어쩔 수 없지."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테라스에서 황녀가 멀어지자 셰인이 그 뒤를 따랐다.


  철저히 눈을 부라리는 셰인의 호위와 함께, 황녀는 사뿐히 황궁의 복도를 거닐었다.


  비명이 울렸다.


"크아악!"


"흐아아악, 제발 살려줘! 살려달라고!"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황궁의 복도를 거니는 황녀의 산책길에는 불타는 황도가 조명이었고, 울부짖는 비명 소리들은 배경음이었다.


  어릴 적 자신의 물건을 건드린 시녀를 찢어죽일 때처럼 황녀는 태연했다. 그 때에 비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광기가 몰아치고 있음에도.


  그녀는 거닐었다. 황궁의 복도를.


  몇십 걸음 정도 걸었을까?


  문득, 황녀가 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이십니까?"


"셰인, 네 말을 조금 더 일찍 들을 것을 그랬구나."


  어리둥절해 하는 셰인을 뒤로 한 채 황녀가 앞에 나섰다.


"나오너라, 황도의 버러지들!"


  그 말이 끝나자, 곧 불길에 일렁이던 그림자가 꿈틀대더니, 열댓 명 정도의 검은 복면 무리가 땅에서 솟아올랐다.


  하나같이 심상찮은 분위기.


  적어도 좋은 의도로 등장한 것은 아니라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만 같았다.


  그런 그들을 예의 그 특유의 감정 없는 눈빛으로 싸늘히 바라보며 황녀가 말했다.


"네 녀석들이로군, 타국의 첩자들아. 이 반란을 주도한 것이 네놈들일 테지?"


  황녀가 말하자 복면 쓴 남자들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와 대답했다.


  그는 이번 황녀 암살을 주도한 국가에서 보낸 복면인들의 수장이었다.


"과연 황녀님이시로군. 두뇌가 보통이 아니셔라. 이곳에 우리가 있는 줄은 어찌 아셨지? 때려 맞추셨나?"


"그냥 알았지. 나는 네 녀석들 같은 놈들이 내뿜는 살기 따위에 아주 민감하거든."


"워허허. 역시 황녀신가? 역시 대 라티느 제국의 황녀껜 살해 위협 같은 건 옆집 소년이 퍼다주는 러브 레터만도 못한 일상이었나 보군."


"러브 레터라. 표현 한 번 재밌구나."


  황녀는 자신의 온몸을 손으로 짚어댔다.


  목, 명치, 겨드랑이, 머리 등.


"그 말대로다. 제국의 마지막 영애로서 권력의 아귀다툼 한가운데에 선 나는 분명 언제가 되었건 시시각각 목숨을 위협받는 처지였다. 허구한 날이면 시녀가 독을 타거나 시종이 품에 칼을 숨기고 내 명치를 향해 그 역겨운 칼날을 찔려대려 달려들어댔지."


"그 정도야 뭐 다른 나라의 왕족 나리 분들도 겪는 수준이니까. 허나, 이번에도 괜찮을까? 그 잘나신 황궁수호기사단도 지금 황제 폐하를 지키러 가느라 한 명도 없는 와중인데…."


"아까 내 말을 들었나?"


  생글생글 웃는 복면인의 말을 자르며 황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멍청한 놈들이라고 했지. 셀 수도 없이 수많았던 그 모든 살해 위협에도 불구하고, 나 같이 나뭇가지 하나 못 부러트릴 만큼 여리여리한 여식이 지금껏 살아있는 이유가 어째서였는 줄 아느냐?"


  황녀가 손짓함과 동시에 셰인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그 놈들 모두, 나의 호위 기사 한 명을 이기지 못했거든."


"괜찮을까, 단 한 명이서? 그것도 검 하나 못 휘두를 것처럼 여려보이는 저런 소년 혼자."


  황녀는 단언했다.


"걱정 말거라. 이제 그 우려의 가부를 보여줄 테니. 자아."


  곧, 황녀가 두 팔을 벌렸다.


  셰인은 자신의 주인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주인께서 저 행동을 하실 때면, 자신이 무얼 수행하면 되는지도.


  셰인의 검집에서 미끄러지듯 검이 뽑혀 나왔다.


"황녀님의 호위 기사 셰인. 베로니카 황녀님의 명을 받듭니다."


"가라."


  황녀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나의 적을 쓸어버리거라, 나의 검."


"예."


  복면인들도 다가올 셰인의 검을 대비했다.


"준비하라, 단숨에 끝내도록 하자!"


"예!"


  이제부턴 말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달려드는 셰인에 맞서 복면인들도 셰인에게 달려들었다.


  황도의 황궁에서 일어난, 아무도 모르는, 하지만 가장 격렬할 싸움이었다.





  선공은 셰인이었다.


  복면인이 채 몸을 비틀기도 전에 쇄도한 은빛의 검은 정묘하게 계산되어 복면인이 물리적으로 피할 수 없는 궤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대로 복면인의 몸에 검은 다다랐고, 셰인은 복면인의 몸에 맞닿은 검을 날을 따라 가볍게 당겨냈다.


  푸슛!


"크아악!"


  피가 솟았다. 사방에서 울렁거리는 불길을 받아 여기저기에 음영진 핏물들이 복면을 적셨다.


  검에 거침은 없었다. 비명을 지르는 복면인의 목을 마저 베어내고, 다른 복면인들도 처리하기 위해 셰인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은빛의 호선이 그어진다.


  불빛을 받아 빛나는 광채는 곧 부채꼴의 검격이 되어, 복면인들의 목을 베어가려는 치명적인 공격이 되었다.


  하지만 복면인들도 만만한 인물들은 아니었다.


  뒤이은 셰인의 검격을 복면인들의 대장이 쳐내고 복면인들은 뒤로 신형을 물렸다.


  피를 뿜고 있는 동료의 시체를 보며 복면인들의 대장이 입맛을 다셨다.


"이미 한 명 당했나."


"상관없잖나. 우리 중 한 명 빼고 모조리 죽더라도 황녀 한 명만 데려가면 그만인 것을."


"그래도 예상 외군. 아직 기사 서임도 받지 못한 애송이라고 들었는데."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고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복면인들은 셰인의 검 실력을 목도하곤 일절의 망설임도 없이 자세를 고쳐잡았다.


"사죄하지. 아까 전 너를 얕본 실례와, 네 주인의 목을 미리 가져가게 될 것을 말이야."


"필요없다. 그러지 못할 테니까."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와 그에 비해 초라할 만큼 자그마한 그림자가 발그스레 불타는 황도를 배경으로, 재충돌한다.


  셰인은 달려들었다.


  왼쪽 상단에서 짓쳐오는 복면인의 칼날.


  쳐내고 마주 베었다.


"크억!"


  목을 지나는 경동맥.


  그것을 노리고 베어낼 때 생기는 미세의 틈을 노리고 옆구리로 날아오는 것은, 후방의 복면인이 던져 온 아마도 극독이 묻어있을 투척용 단검.


  보았다.


  옆으로 피하고 잡아챈 뒤, 날아온 곳으로 도로 던졌다.


  패애액!


"그, 그에엑…."


  개거품을 물고 단검을 던진 복면인이 부르르 떨며 쓰러졌다.


  이제 남은 인원은 열둘.


  극도로 빠른 템포로 이루어진 잠깐의 혈투 간에 세 명이 죽었다.


  전투 시작 후 1분이 채 되지 않은 시간만이었다.


"벌써 세 명이 당했다고?"


  첫 사람이 죽었을 때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두 사람이 연달아 셰인의 손에 즉사하니 이젠 복면인들의 대장도 어느 정도 난감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설마 하니 이 짧은 새에 기사씩이나 되는 자 세 명을 처리할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곤란하군. 설마 아까 그 합동 공격까지 막아낼 줄이야."


"묘기는 끝인가?"


"설마. 그리고 묘기 같은 게 아니야."


  그러나 아직은 복면인 쪽이 압도적인 수적 여유가 있었다.


"기사로서 말하기 부끄럽지만, 이건 '수적 우세'라는 거지."


"상관없다."


  다시 셰인이 달려들었다.


"13이든 0이든 내겐 다를 것 없다."


"우습군. 네가 황궁수호기사단장이라도 된다는 말이더냐?"


"아니. 하지만 그만큼 강하지."


"헛소릴!"


  거미가 쏘아낸 거미줄이 펼쳐지듯, 열세 명의 복면인들이 천이 펄럭이는 것처럼 사방에서 셰인에게 돌진했다.


  불똥이 튀고 그것이 사라지기 전까지의 찰나의 시간.


  그 사이 셰인의 극도로 단련된 동체시력은 하나도 빠짐없이 복면인들 모두를 살폈다.


'우측에 넷. 좌측에 다섯. 상단에 셋, 그림자에 숨어서 하나.'


  검로를 정한다.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빠르고 가장 치명적인 궤도를 계산한다.


  셰인은 도약했다.


  가장 위에서 셰인을 짓누르려던 복면인보다도 더 높게.


"뭣?"


  당혹스러워 하는 위쪽의 복면인들은 셰인의 부츠가 자신들의 머리를 밟는 충격을 느끼며 그대로 추락했다.


  터엉! 차르륵!


  암기와 비수들이 황궁 바닥에 흩어진다. 순식간에 진형이 흐트러진 복면인들이 어수선해 하는 사이 셰인은 착실히 복면인들의 목에 검을 대고, 비틀듯 당겨냈다.


  이 감각이다. 황도의 뒷골목에서 나를 때리던 껄렁패들의 목숨을 거둬갈 때 느꼈던,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감각.


  피부, 지방, 근육, 신경, 뼈까지….


  깊게 벤다. 동맥을 벤다.


  황녀님께 주워지기 전의 나처럼, 대신 황녀님께 주워지고 난 이후의 나로서.


  흉기를 들고 누군가를 죽인다.


"크아악!"


  아아, 느껴진다.


  피부가 베어지고 근섬유가 끊어지고 하얀 지방이 비산하고 뼛속의 신경까지 팽팽한 실이 그러하듯 투둑 끊어지는 생생한 감각이 진동을 타고 검끝에서 내 손끝까지 세밀하게 와닿는다.


  나는 황녀님의 물건.


  5년 전 겨울날에 이미 죽어버린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건, 황녀님의 명을 이행하는 지금의 유일한 순간에서뿐.


  사람을 죽일 때 이런 감정을 느끼는 내가 객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결코 정상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


  괜찮다. 이미 나는 비틀렸으니까.


  나를 살려주신 황녀님의 비틀림에 맞춰서.


"죽어라."


  황녀님의 적.


  내가 살아있는 걸 느끼게 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