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이전보다는 조금 화려함이 절제된 복식이지만 여전히 그녀는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알게 모르게 그림자가 드리워 져 있는 듯 했다. 열심히 화장으로 감추려는 듯 했지만 세월은 속일 수 없었는지 내 아내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도 고생을 한 흔적이 보였다. 귀족가에서의 삶이 그닥 순탄하지만은 않았던 것인 모양이다.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표정은 오랜 친구를 보아서 기쁜 것인지 엄청나게 반가워 하는 듯 했지만 난 당황스러웠다. 그것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그녀도 내내 웃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살피다가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약간 미소가 옅어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추며 그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가씨, 오랜만입니다."


"데커트? 나야, 아르엘이라구?"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아가씨.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정말 그러기야? 우린 친구였는데...."


당연히 나는 경어를 계속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귀족인 그녀가 여성의 몸으로 혼자 이곳에 왔을리는 없었다. 분명히 주변에 그녀의 시중을 드는 자들이 있었을 것이고 평민 남자가 아무리 매관매직으로 얻은 작위라지만 귀족 집안의 여식에게 편하게 말을 놓는다면 추후에 뒤탈이 없을 수가 없을것이었다. 귀족들은 앞에서 말하는 것과 뒤에서 행동하는 것이 다른 족속들이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나와 내 가족들에게 해코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었다.


"하오나 지금의 저희는 그때와는 입장이 많이 다릅니다."


"그래....그렇게 되었지."


그렇게 얘기하는 그녀는 많이 쓸쓸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슬픔을 감추고 억지로 웃어보이는 그녀. 나는 고개를 숙인채 그녀의 반응을 간신히 눈동자만 치켜들어 살필 수 밖에 없었다.


"고개를 드세요. 데커트.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야기 정도는 할 수 있겠죠?"


"원하신다면 응하겠습니다."


"훗, 당신답지 않게 의젓해 진 것 같아요. 22년 만인가요?"


"아니요. 15년 정도일 겁니다."


"그렇던가요? 제가 이곳에서 나온건 15살에서 16살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녀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그녀가 마을을 떠난지 벌써 22년이 되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내가 그녀의 전남편인 바이츠제커의 사병으로 강제징병이 되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는 듯 하다. 분명히 몇번이나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본 기억이 있었는데...그녀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난 약간 흠짓하며 뒤로 물러났지만 그녀는 게의치 않고 내게 다가와서 아무렇지 않게 내 얼굴을 감추는 머리카락을 어루어만졌다. 그리고 내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서 고개를 들라고 명하였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난 전쟁의 상흔으로 전쟁 이전에도 볼품 없었던 외모가 더욱 별볼일 없어진 뒤였다. 얼굴에 피가 잔뜩 튀어도 마실 물을 낭비할 수 없어서 그냥 옷깃으로 스윽 닦기만 해서 그런지 한때는 얼굴 전체에 고름같은 것이 찬 적도 있었다. 이제는 그정도로 흉측하진 않지만 칼에 베인 자국과 고름들이 차 있던 자국들은 아직도 남아있었다. 그녀도 그 흔적을 보며 잠깐 흠짓 했다.


"이 상처들은 대체...."


"별 것 아닙니다. 이 놈의 상처는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그래요, 내가 떠나고도 개구장이로 살아오신 모양이죠?"


그렇게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나는 그녀가 이전에 속해있던 가문인 바이츠제커 가문에 의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잃었다. 그리고 그 가문에 속해있던 그녀에게도 악감정이 없을 순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이전에 나의 친구였고 아무것도 모른 채 바이츠제커가에 팔려오듯 시집 간 여인에 불과했으리라. 물론 그녀의 의향이 없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에 도시의 성당에서 행진을 하는 그녀의 전남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소녀 같았으니 말이다.


"네, 아가씨가 없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다곤 해도 너무했어요. 그래도 예전의 당신은 꽤 수려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나 얼굴이 상해서...."


그녀는 여전히 내 마음도 모른채 그렇게 말했다. 문득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난 그 눈동자에서 그녀의 감정을 완벽하게 읽을 순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약간은 설레인 듯하면서도 약간은 실망스러운 듯한 느낌이었다. 만약 내가 입을 열어서 그녀에게 모든 것을 고한다면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난 그녀가 절망하는 표정을 볼 수 있을까? 설사 그런다 하더라도 내가 과연 마음이 편해 질 수 있었을까? 난 갈등했다. 입술은 부들부들 떨렸고 예를 갖추기 위해 왼손으로 덮어놓은 오른손은 어린아이 마냥 꼼지락 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 자리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마치 어린시절처럼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방바닥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라고 해 봤자 내가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녀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삶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면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 주는 것이 전부였다. 집을 뛰쳐나온 뒤 그녀는 한동안 친구들과 어울려 다녔지만 그리 순탄하진 않았던 것 같다. 



본디 귀족 출신이거나 도시에서 평민의 신분으로 부를 쌓아올린 집안에서 자란 그녀의 친구들과 그녀의 가치관은 생각보다 많이 달랐다. 그들과 어울리고 그들처럼 살기 위해 뛰쳐나갔지만 정작 시간이 지나자 후회가 많이 남은 듯 하다. 한번은 그녀의 친구가 가노를 심하게 취급하기에 말리려 했지만 되려 평민 주제에 어울려 줬더니 대등하려고 한다며 그녀를 나무랐다고 한다.


이후 그녀의 근처에 남은 친구들을 많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평민 신분이었던 친구들과 그나마 생각이 조금 맞았긴 했지만 그들도 가난한 사람들에겐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것인지 때때로 불쾌한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가 수도에서 관직을 얻은 뒤에는 오히려 그녀를 안 좋게 보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났다고 한다. 허울뿐이긴 하더라도 귀족은 귀족이었기 때문에 눈에 띄는 괴롭힘은 없었지만 사람들은 뒤에서 수군거리며 그녀의 평판에 금이 가게 만들었다.


그제서야 그녀는 시골에 버려두고 온 그녀의 어머니와 가족들이 보고 싶었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고 덧붙였다. 처음엔 매 끼니를 도시에서 먹던 것과 같이 먹게 되어서 좋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아버지가 출세를 하면서 점점 생활수준이 올라가자 오히려 너무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으니 영양 공급이 좋아져서 좋아졌던 피부가 약간 망가지기도 했고 복통과 설사도 자주 했다고 한다. 여전히 다른 귀족들과 함께하는 식사가 끝나면 입은 즐거웠지만 속이 메스꺼워서 견딜 수가 없다고도 한다. 



귀부인 같은 말투로 아무렇지 않게 친구에게 얘기하듯이 서스럼없이 얘기를 하니 조금 웃겼지만 감히 웃었다가는 어떤 화를 불러올 지 몰라서 조용히 듣기만 했다. 그녀는 이야기를 하면서 내 표정을 자주 살피는 듯 했다. 난 혹시나 흠이 잡힐까봐 무표정하게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는데 그녀는 그런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서운해 하는 듯 했다. 하지만 어디서 누가 우리를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녀에게 친근하게 대하는 것도 힘들었다.


한번은 가족들을 몰래 만나기 위해 도성을 빠져나오려고 했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가문의 식솔들이 그것을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이후 그녀의 아버지에게 질책을 당하고 돌아가고 싶어도 네 어미와 형제들은 전부 죽었으니 돌아갈 곳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를 원망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하지만 난 그때 그녀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의 삶에 실증이 나서 모든것을 버리고 새출발을 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버린 것에 대해서는 적어도 아무런 감정이 없어야 할 터인데 어째서 미련이 남아있는 것일까. 



속으로 비웃었다. 한때 이런 사람을 사랑했다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버텨냈다. 주변에서의 멸시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그녀의 부군이었던 바이츠제거 가의 공자, 내가 전에 강제로 섬겼던 주군 덕분이었다. 그와 인연을 쌓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갈 수 있었던 것이었으니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
 

그녀와 바이츠제거는 그럭저럭 친분을 쌓아 갔지만 그가 그녀에게서 별로 매력을 못 느꼈던 것인지 단순한 친구 이상의 관계로는 발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굉장히 고통스러워 했다. 가끔씩은 자신의 마음도 몰라주고 다른 여성들과 붙어다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서 집에 돌아와 어린 아이처럼 울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그녀의 아버지의 출세로 인해서 혼인이 성사가 되었다. 하지만 막상 혼인을 해도 별다른 것이 없었다.


적당히 친구 관계로 있었을 때에는 그에게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격식있고 품위있는 집안에서 자랐고 외모에서부터 귀공자 같은 면모가 보이니 분명히 자신을 소중하게 대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뭐, 어느정도는 소중하게 대해주었다. 내가 처음으로 도성으로 귀환했던 때에도 그는 우리에게 보였던 태도와는 사뭇 다른 태도로 그녀를 대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에는 충족을 시켜주지 못한 것 같다. 혼인을 하면서 바이츠제거가의 마님이 되면서 그녀는 바이츠제거의 어두운 면도 보게 되었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왕명을 위조해서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마을의 사람들을 강제로 징병해 자신의 사병을 삼았던 것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그는 좋은 귀족은 아니었다. 그 어린 나이에 이미 벌인 참상들이 꽤나 잔혹하고 무자비한 것들이 많았고 그것을 알게 된 그녀는 넌지시 그에게 이러한 일들을 벌이고 있는 것에 대해서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이전과는 다르게 언성을 높이며 팔려온 벼락 귀족인 출신성분이 천한 년이 감히 바이츠제거의 장남인 자신의 일에 관여하려 하냐며 언질했다고 한다. 그녀는 충격을 받고 한동안 밥숟가락도 제대로 떠 먹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공자와 사이가 냉랭해진 그녀는 과거를 잊기로 한 것을 기억하고 다시 남편과 사랑을 이어가려고 했으나 애초에 그에게 있어서 그녀는 정략결혼의 대상인 불쌍한 여인이지만 이제는 안방마님 노릇을 하려는 건방진 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정말로 무섭게 사람이 돌변해서는 집안에서도 매번 살벌하게 날이 서 있는 조용하지만 비수같은 말들이 오갔고 심지어 그 가문의 식솔들마저 자신을 은근히 비웃는 것을 알게 되었다. 콩깍지가 벗어지니 그제서야 바이츠제거의 추악한 면모가 보인 모양이다. 그는 하인들을 물건처럼 대했고 자신의 휘하 부하들도 자신의 도구처럼 쓰고 버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진정 친구로 대하는 듯했지만 그는 어느순간부터 그들을 친구가 아닌 정치적인 수단으로 보았고 그들이 없을 때에 그들의 험담을 하곤 했었다고 한다. 그렇게 얘기하고는 그녀는 나에게 고개를 들라고 명했다. 나는 군말 없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미소짓고 있었다.


"참...바보같아요. 그제서야 나는 내가 버려온 것들이 그리워 지기 시작했어요.나의 어머니도, 내 형제들도, 그리고....당신도."


"........"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와서 그녀는 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지금에 와서 그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알아요. 나는 내 어미와 형제들을 버리고 출세에 눈이 먼 아버지와 계모에게 붙어먹은 악녀에요. 하지만...내가 원한건 이런 게 아니었어요."


그녀가 사랑한다고 믿었고 또한 사랑받는다고 믿었던 대상에게조차 버림 받았고 그녀의 아버지와 계모는 되려 그녀 자신이 실언을 했다며 그녀를 질책했다. 분명히 그녀가 바라는 인생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골의 순박했던 처녀가 가진 꿈은 그저 한낱 꿈에 불과했다. 그녀가 읽어왔던 싸구려 로멘스 소설에나 나올법한 일들은 소설이었기에 가능했고 소설이었기에 아름다웠던 것이었다.


"데커트....나와 함께 떠나요. 이곳에서 나와 함께 있었던 때가 그리워요. 이제 나에게 남은 인연이라곤 당신밖에 없어요. 곁에 있을땐 소중한 줄 몰랐는데....이제와서 정말 미안해요.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같이 지냈으면 좋겠어요. 부디...."


그녀가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 그것은 틀림 없이 그리움이 묻어나오는 눈빛이었다. 그녀는 나를 남자로써 다시 보게 된 것일까? 이전에도 볼품 없었지만 지금은 부상을 입고 더욱 볼품없어진 내 외모를 보고도 그녀는 이제서야 나를 뒤돌아 보게 된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그녀는 모든 것을 너무나도 쉽게 가지고 잃어버렸기 때문에 박탈감에 그저 과거의 내가 그리워진 것이었을까?


"아가씨, 제발 멈추어 주십시오."


"어째서 데커트....나 이제서야 알았어. 비록 내가 꿈꾸던 왕자님이 아니었지만 당신만큼 날 알아주고 날 사랑해 준 사람은 없었어."


그녀는 정신이 나가있는 것 같았다. 어느새 그녀는 과거에 친구사이었던 것 같이 나에게 말을 해 오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사무적으로 대할 수 밖에 없었다. 간신히 떨리는 마음을 정리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 말은....제가 당신을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인가요?"


"응....그때는...난 눈이 멀어서 당신의 호의를 거절했어. 당신이 나를 원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그래 미안해. 난 그런 사람이었어. 하지만 이젠 달라. 제발 부탁이야..."


그런 그녀에게 말하는 것이 너무나도 두려웠지만 나는 그녀에게 사실대로 고할 수 밖에 없었다.


"......저에겐 아내가 있습니다. 자식들도 곧있으면 장성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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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력 떨어져감. 빨리 엔딩 낼 거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