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1편



1.

아침부터, 좋지는 않았던 날씨였다.

언제고 쏟아질듯 우울하고 칙칙한 회색빛의 하늘속에서, 미처 다 품지 못하고 놓쳐버린 것이 하나, 둘 방울지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투둑, 툭.


쏴아아.


채 돌이킬수도 없는 것처럼 떨어지던 것들이, 한 순간에 와르르 쏟아지듯 거센 빗줄기가 되어 땅을 두들겼다.

처음에 맡은 것은 짙은 흙냄새. 이제는 숨을 들이 내쉬는 것만으로도 축축해지는 것 같은 물냄새가 온데 가득했다.


"하, 진짜 가지가지 한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걸까, 심상치 않은 기세의 빗줄기에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더이상 보고 싶지 않아서, 무작정 급하게 나와버린 탓에 우산 하나 챙길 생각조차 하지 못한게 컸다.

드디어 해방되었는데, 이제 그녀에게서 완전히 자유인 줄 알았는데.

고작 비 때문에, 여전히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이 참으로 우스꽝스러울 따름이다.

이렇게 좋은 날, 햇빛도 쨍쨍했으면 좀 좋냐고.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는 남자, 이정우의 생각이었다.


...금방 그칠 기세는 아니고.

어느새 물안개가 생길 정도로 비는 거세기 그지 없었다.

어느정도 잦아드는데만 삼십 분일지 몇 시간일지도 모를 상황.

무작정 기다리기에는, 머지않아 나올 정희수 그 여자 때문에 불가능했다.


정희수.

기껏해야 오 분도 채 안 지났지만, 이제는 전 아내라고 부를 사람.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옥죄듯 가슴이 답답해졌던 여자.

얼굴에 가면이라도 덧씌운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텅 비어있는 그녀의 눈을 마주하는 것은, 지칠대로 지친 정우에게는 이제 더는 하고 싶지 않는 것이었다.


"하아, 쫄딱 젖겠네."


결국 선택지가 없었던, 정우가 혼잣말과 함께 빗줄기로 뛰어들었다.

얼핏, 따갑다고 느낄정도로 빗방울이 굵었다.

옷은 수십초도 안되어 쫄딱 젖어버린채, 몸에 달라붙어 버린다.

하지만, 그 세찬 비를 맞으면서도 가슴에 진 응어리가 쓸려나가는것 같아 마음은 후련해지고 있었다.

벗어나자.

한 번의 내딛음마다 착실하게 멀어지고 있다.

끔찍했던 익숙함에서 벗어나, 새로움으로 다가간다.

그 것만으로도 정우의 입은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2.

"안녕히 가세요."


아르바이트의 형식적이고 무성의한 인사를 받으며, 편의점을 나온 정우는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지만, 방금 산 우산을 펼쳐 거리를 걸었다.

으, 찝찝해.

속옷마저 다 젖어버린듯, 다리를 움직일때마다 느껴지는 질척한 불쾌함에 아미가 절로 찌푸려진다.

일단 아무데서나 좀 쉴까.

물을 잔뜩 먹어 무거워진 옷으로 몇 십분가량 뛰고 걷다보니, 몸이 배는 피로한 느낌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날씨가 그렇게 춥지는 않다는 정도.

아무리 그래도 카페나 가게같은 곳에 젖은 채로 들어갈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계속 걸으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 여기다.

시선에서 들어오는 작은 공원.

단지 내 사람들이 이용하게끔 조성된 아담한 크기의 공원의 벤치를 보자마자 빨려들어가듯, 기대 앉았다.

이내 찾아오는 약간의 탈력감.

피곤해서 살짝 늘어지는 몸으로, 쏟아지는 비를 정우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

이제, 뭘 할까.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하고 싶은게 참 많았었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흐릿하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슬며시 찾아오는 이제는 혼자라는 감정이 참으로 오랜만이면서도 씁쓸하기만 하다.

오 년 전.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 전 때부터 이런 감상은 사치였으니 말이다.


정우는, 결혼하며 끊었던 담배가 문득 몹시 피우고 싶어졌다.


"하아."


그저 내쉬는 숨.

투명해서 보이지 않는 그 한숨의 깊이를 어느정도 연기로 시각화 시켜주는 것이 썩 좋았었기 때문이었다.

아, 아까 우산 살 때 같이 살 걸.

편의점에서 왜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하는 아쉬움으로 손을 몇번 쥐락펴락하다가, 그냥 포기했다.

이제는 끊었으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았다.

마치 암처럼 불어나던 빚더미도, 끔찍한 시선으로 나를 피말리던 정희수도 없다.

게다가 통장에는 그 여자가 약속했었던 십 억이라는 큰 돈도 있다.

혼자 먹고 살기에는 아마 평생을 걸려도 다 못 쓸 돈이다.

그러니.


"이제, 내 맘대로 살면 돼."


혼잣말 처럼, 이제는 가로막는 것들도 없이 오롯이 자신을 위해 살면 된다.

하고 싶은 거 하고, 즐기고 싶으면 즐기고.

남들 다 웃고 떠드는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러면 지금 하고 싶은 것은 뭘까.


...

다시금 마주하는 생각의 도돌이표에서 새삼, 새로운 것이 썩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끔찍했던 익숙함에서 벗어났지만, 새로움이라는 것은, 설레는 것은 물론 두려움도 함께 하는 법이니까.

사람은 언제까지고 혼자 살 수 없는 법이랬나.

누군가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친구도, 가족도, 심지어 그 정희수라는 여자도 없어진 지금의 나 자신이 바라는 것은 뭐지?

아, 그래.

정우의 머릿속에 아주 좋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복잡하고 괜히 쓸데없는 잡생각을 지워줄 아주 좋은 수단.


정우는 벤치에서 일어나, 방금 걸어왔던 거리로 다시금 되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이는 아까 우산을 샀던 편의점.

아직 점심도 안된 시간에 벌써부터 문을 열은 술집은 없을테니까.

정우는 술이 너무 먹고 싶었다.




3.

이상하게도 식사를 마치는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마주앉아 식사하던 자리의 공백은, 유독 식탁이 커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어째서지.

평소와 다름없는, 아니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긴 했지만, 그다지 큰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리만치 시간이 느리게 가는 기분이었다.


"후."


어찌저찌 겨우 식사를 끝내고, 다 먹지도 못해 남아버린 반찬들을 통에 따로 담아냈다.

다 먹을 수 있을까.

낭비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인지, 언제나 둘이 먹기 충분한 정도로만 만들었었는데, 지금 눈에 보이는 반찬들은 사흘을 족히 먹어도 남을 만큼 그 양이 수북했다.

마지막이라고, 신경 좀 썼다더니.

희수는, 머릿속의 상념을 지우며 반찬들을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달그락, 달그락.


남은 식기를 물에 씻어냈다.


우르릉...


차창을 뚫고 들어오는 우레같은 천둥소리에 뒤섞이는 그릇들이 부딪히는 불협화음은, 듣기에 썩 그리 좋지는 못한 것이었다.

접시 여러개, 국그릇 하나, 밥그릇 하나.

익숙치 않아 오래 걸릴것이라 생각했는데, 양이 얼마 되지 않아 설거지는 그녀의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손의 물기를 털어내고, 천천히 식탁에 앉았다.

차창을 때리는, 빗줄기가 제법 거세기 그지 없다.

이렇게 내려서야, 오늘 일이나 제대로 할 수 있으려나.


아, 그 사람. 우산 가져갔나?

문득 그 생각이 들어, 현관으로 가보니 역시 잊어버린듯, 두 개의 우산이 덩그러니 꽂혀있었다.

비 많이 오던데.

...괜찮겠지.

오 년의 길지 않은 시간속에서 희수의 안에서 정우라는 남자에게 할애하는 감정은 고작 그 정도 였다.

서로에게는 애초에 사랑도, 감정도, 그 어느 것 하나도 없었으니까.


쏴아아.


소파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어느 사람이건 무릇 감성적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그런 감성은, 메마른 채 텅 비어버려보이는 희수의 안에서도 분명 있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바라보는 시선이 없기에, 할 수 있는 것.

남들 없이 혼자가 되어서야지만, 떠올릴 수 있는 그녀의 감상이었다.

떨어지는 비를 보면서, 지난 날의 기억이나 추억. 비가 내리던 과거의 날들이 희수의 안에서 즈문즈문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비가 내리던 기억.


'보여주지 마라.'


어리디 어렸던 시절, 삐뚤빼뚤한 글씨로 큼지막하게 '사랑해요'라고 써놓은 그림을 보고, 그녀의 아버지가 하던 말이었다.

왜?

의문은 당연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표정을 가려라.'


감정을 도려낸듯한 차가운 얼굴의 아버지가 어딘가로 데려가며 꺼낸 말이었다.

아주 커다랗고 화려한 홀.

티비나 스마트폰으로 한 번쯤은 보았을 유명한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아버지에게 말을 건다.

그 사람들을 상대하며 언제 그랬냐는듯, 화사한 미소를 짓고있는 아버지.

근데 어째서인지, 그 미소는 가면처럼 보였다.


'진심을 숨겨라.'


아버지는 그들을 전부 적이라고 했다.

조금이나마 틈을 보이면, 게걸스레 물어뜰어버릴 놈 들.

아버지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그제서야 의미를 깨달았다.

전부 거짓이구나.

얼굴 표면에 드러난 표정들이, 전부 가면처럼 보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짜의 모습만을 보여준다.

이들은 절대로 남에게 진심을 보여주지 않는다.

심지어 아버지는 가족 앞에서조차 가면을 쓰고 있었다.

믿고 있지 않기에.

그래서, 그녀도 가면을 썼다.


"하아. 갑자기 무슨 일이래."


이래서 비가 싫어.

민낯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아,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침부터, 영 싱숭거리는 것이 이상하기 그지 없다.


'다시는 마주치지 말아요. 아뇨. 제가 잘못말했네요. 다시는 희수 씨랑 안 마주치게 할게요. 괜히 엄한 소리 나오는거 싫어하잖아요?'


그가 집을 나가기 전.

표표한 분노를 담아, 내뱉던 정우의 말이 떠오른다.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왜, 그 순간에서만.


고개를 저었다.

착각이겠지.

결국 정우도 똑같은 사람이었다.

이미 한 번 착각해서, 오 년을 허비한 것은 정우 뿐만이 아니었다.

그 때의 기억.

그 때의 환상.

비내리던 그 날, 가면을 벗고 진심을 보여주던 정우는 그녀의 옛 추억 속에서나 존재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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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는 아주 집착이 강한 편으로 쓸 예정.

정우의 진심을 알고 나서, 점차 무섭게 바뀌는 희수를 보는 맛도 꽤 있을 듯.


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