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에 가면 바람이 약해지는데


이는 바람의 힘에 의존하던 범선들한테는 치명적인 현상이었다


배들은 적도를 지나갈때마다 바람이 불게 해달라고 해신한테 기원하는 의식을 치뤘다





동력기관부 시대에 접어들어서도 적도제는 계속 이어졌는데


이제는 바람을 바라는 의식이 아니라 신참들을 골려먹으며, 지루한 함상생활에 이벤트를 주는 일종의 축제로 바뀌었다


신참 뿐만 아니라 부사관이나 장교, 심지어 배 위에서는 왕과 다름없는 함장까지 바다의 신의 분노를 달래야한다는 명목으로 조리돌림할 수 있는 몇 안되는 날이기도 했다



적도제의 내용은 함순이마다 조금씩 달랐는데 예를 들어서...





메릴랜드의 적도제는 한번도 적도를 넘어본 적없는 장교, 부사관, 승무원을 갑판에 끌어내어


연극, 노래 등 장기자랑을 시키고 파이 먹기 대회를 열며 곯려주었다


특히 계급이 높을수록 더 심하게 조리돌리는 아름다운 전통이 있었다





와스프의 적도제는 적도제 미경험자들에게 빵과 소금만을 식사로 준 다음 갑판아래 가둬두고 고참들이 해신과 그 부하들로 변장하는걸로 시작하는데


시간이 되면 초짜들을 갑판으로 끌어내고, 함장이 직접 배 위로 올라온 해신(?)에게 영토를 침범한걸 공손하게 사과하면


해신이 죄인을 심판한다는 명목으로 초짜들의 얼굴에 겨자를 뿌리고 기름 섞인 바닷물 목욕탕에서 담궜다


그리고 이제 진정한 뱃사람이 되었다는 증명서를 나눠주며 훈훈하게 마무리.





42년, 전쟁 중에 로드니도 적도제를 했는데


해신으로 분장한 승무원을 함장(James William Rivett-Carnac)이 직접 나가서 환영하다가....





부하관리를 못한 벌로 해신의 부하들에게 붙잡혀서 시원하게 수염이 밀리는 벌을 받았다


군기가 빡쎄다는 대영제국 해군에서 부하들이 함장 수염을 밀어버렸으니까 대충 이 이벤트가 어떤 느낌인지 감이 오지?





엄근진할거같은 독일해군에서도 적도제를 지냈는데


U-511이 적도를 넘었을때 당직사관과 최소한의 운영요원을 제외한 모든 승무원(함장 포함)이 갑판에 나가 바닷물을 몸에 끼얹고 알몸이 되어 춤을 췄다고 한다





전쟁이 말려가던 44년, 


트럭섬에서 탈출하여 도망치던 나가토에서도 적도제가 열렸는데


사령부의 간부들이 만담콤비로 분장하고, 여장남자들로 이루어진 미인대회, 각 부서들이 몰래 만든 인형행렬(사진),


부포반의 원숭이 흉내놀이, 위생분대의 간호사 코스프레, 전래동화 공연 등


암울한 전쟁상황과는 달리 적도제만큼은 즐겁게 보냈다고 한다





우리나라 군함은 적도를 넘는 일이 많이 없지만


양만춘함이 림팩 훈련을 하려 적도를 넘었을때 적도제를 열었는데


용왕으로 분장한 부사관이 함장과 장교들을 곤장 형틀에 눕혀서 재판을 하고


(함장 : 입항 중에 수시로 배를 들락나락거려서 하루에 12번이나 함장 승함, 하함 방송을 울리게 한 죄)


벌금을 뜯어내서 이 돈을 승무원 복지에 썼다는 일화가 있다




해전사 중에서 사람냄새가 물씬나는 훈훈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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