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가지 마 이안.... 제발... 흐으윽...."


급히 달려오느라 온 몸이 흙먼지 투성이인 어린 소녀가 코를 흘리며 내 옷깃을 붙잡는다.


멀리서 남자아이 옷을 입은 모습과 짧은 단발만 보면 남자애처럼 보이지만, 선이 가는 여성스런 얼굴과 슬슬 봉긋하게 자라기 시작한 작은 가슴은 그녀가 여자아이라는 사실을 나타냈다.


"미안해 오필리아, 하지만 난 이제 떠나야 해."


"안돼, 너 없으면 이제 누구랑 놀라고... 간식은 누구랑 같이 먹어? 놀라 아줌마한테 장난치는건? 벤 할아버지가 뒷골목에서 신기한 악기를 연주하는건 이제 누구랑 같이 구경하라는 거야?"


"헤파이아씨한테 의뢰가 와서 서쪽 도시로 가야 해. 오늘 밤 마차가 온대."


"흐으윽... 그냥, 나랑 같이 살면 안돼? 엄마 아빠랑 오빠는 내가 잘 설득할테니까 제발...."


오필리아는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애원하듯 말했지만, 절대 안될거다.


오필리아네 집은 사내아이 한명을 받아줄만큼 형편이 넉넉치 않다. 당장 여자아이인 오필리아가 오빠의 낡은 옷을 물려입으니 말 다했지.


애초에 이세계는 출신지도 부모도 모르는 고아를 받아줄만큼 형편 좋은 세상이 아니다.


오필리아도 그걸 아는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흐윽.... 너,넌, 내가 처음 사귄 친구야... 이대로 헤어지기 싫어...."


"오필리아, 그만 놔줘. 내가 떠난다고 친구가 아니게 되는건 아니잖아. 그리고 떠나는 대신 이걸 줄게."


품에서 목걸이 하나를 꺼내어 내 옷을 붙잡은 오필리아의 작은 손에 쥐어주었다.


청동 특유의 빛깔로 은은하게 빛나는 반쪽짜리 하트 모양을 한 목걸이.


"흑... 목걸이...?"


목걸이를 받은 그녀는 잠시 울음을 그치고 목걸이를 보며, 이게 뭔지 설명해달라는듯 날 물끄러미 쳐다봤다.


"내가 만든 청동 목걸이야. 네가 이걸 가지고 있는 한, 우린 아무리 멀리 떨어져도, 아무리 오래 헤어져 있어도 영원히 절친이고,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될거야."


"정..말...?"


"그럼. 언젠가 우리가 멋진 어른이 되서 다시 만나면,  그땐 이렇게 목걸이를 맞추자."


그렇게 말하며 내가 매고 있는 반쪽 목걸이를 그녀에게 준 목걸이와 맞췄다.


철컥-


아귀가 딱 들어맞으며 하트가 된 목걸이.


"정말.... 이것만 있으면, 다시 만날수 있어?"


"그럼, 당연하지."


"나 절대 잊으면 안돼...?"


목걸이를 받았지만 여전히 안절부절 못하는 오필리아를 껴안으며 대답했다.


"절대로 안잊을게, 오필리아."


그 포옹을 마지막으로 우린 헤어졌고, 난 도시를 떠났다.



오필리아. 내가 그녀를 잊다니,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이 작품의 주인공인데 말이야."


어떤 멍청이가 최애작의 주인공중 한명을 잊겠냐고.


.

.


즐겨보던 로판, 장미의 가시들.


5명의 여인에 이야기를 다루는 군상극으로, 특유의 피폐하면서도 달달한 전개 덕분에 많은 이들에게 애증받는 작품.


난 이 소설 속 세계로 환생했고, 고아로 다시 태어났다.


주인공도 조연도, 하다못해 엑스트라마저 아닌 그저 평범한 고아로.


"꼬맹아, 술 한잔 할래?"


"저 9살인데요."


"그게 내 알 바니."


"양어머니시잖아요."


"다시 고아원에 보내지기 싫으면 술이나 따라라."


정확히는, 고아였는데 원작의 배경인물이 술 김에 입양해줬다.



떠돌이 금속 공예가, 헤파이아 메이크딘.


원작에서 직접 등장한 적은 없지만, 값비싼 귀금품이나 세공된 보석이 나올때마다 이걸 만든 사람이라며 귀에 딱지가 붙도록 언급되던 인물.



술 취해서 애를 입양했다니 병신 같이 들리겠지만, 이 사람은 원래 원작에서부터 그런 캐릭터다. 술만 퍼마시면 한겨울에 벌거벗고 산책하고, 국왕 멱살도 붙잡는 미친개.



아무튼 그녀에게 입양된 후에 삶은 꽤 마음에 들었다.


최악의 부모일지언정 보호자로선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기에 나름 살만했고,

무엇보다 그녀를 따라 대륙 곳곳을 여행하는 것이 즐거웠다.


꿈꿔 왔던 소설 속 세계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하며 여행하고, 가끔은 원작의 등장인물들과 만나다니.


애독자로서 이보다 행복할수 있을까.


물론 그렇다고 좋기만 한건 아니었다.



장미의 가시들은 피폐물.

불행히도 오필리아를 비롯한 많은 인물들의 미래가 상당히 어둡다.


당장 오필리아만 해도 몇년 뒤 몬스터 떼에 마을 습격으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오빠는 전쟁터에서 사망. 그 후 기사를 꿈꾸지만 선배들의 폭언과 방해로 온갖 굴욕과 멸시를 받으며, 어떻게든 기사가 되는데 성공한 후엔 귀족 부부의 불륜에 휘말리는 바람에 인생이 다시 꼬인다.


하지만 난 이런 사실들을 그들에게 말할수도, 도와줄수도 없다.


'너희 부모님은 몇년 뒤 오크들에게 대가리가 깨질 거고 네 오빠는 전쟁 시작한지 이틀만에 죽을 거야.'


이렇게 말하면 대체 그 누가 알겠다고 할까. 들어주긴 커녕 돌팔매질을 하겠지.


그렇다고 다른 방법으로 도와주기엔 난 힘없는 어린애에 불과하다.


결국 가만히 손가락이나 빨며 지켜볼수밖에 없는 상황.


그녀에게 목걸이를 준 것도 그녀가 부디 희망을 가졌으면 하여 준것이다.


모든걸 다잃어도 아직 어린 친구 시절는 남았다는 희망.


"....내가 생각해도 병신같네."


근데 생각해보니 그닥 효과는 없을거 같네.


앞으로 인생이 고난의 연속일텐더 저딴 목걸이가 눈에 들어오겠어, 형편 어려울때 녹여서 팔겠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필리아를 비롯한 주인공들에게 하나씩 주었고, 나도 반쪽을 소중히 간직중이다.


혹시 모르지. 어쩌면 그녀들중 한명정도는 내 이름이나마 기억해줄지도.



아무튼 그렇게 많은 인물들을 만나며 여행을 계속한지 어느덧 10년.


코찔찔이 꼬맹이였던 난 이제 성인이 되었고, 헤파이아씨도 여행을 잠시 그만두고 현재는 수도에 정착한 상태.


"야, 너 아카데미 안다닐래?"


그런데 갑자기 헤파이아가 낯선 제안을 한다.


"...낮술 했어요? 왠 개소리래."


"아니 이 새끼가 하나뿐인 엄마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냐?"


"엄마는 무슨. 헤파이아씨가 보호자 역할을 해줬어도 부모 역할 못한건 본인도 잘 아시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그것 때문에 이러는 거야."


헤파이아는 해장용 맥주(병신같이 들리겠지만 이 년은 맥주로 해장을 한다)를 한모금 마시며 말을 이었다.


"어제 생각을 좀 해봤는데... 내가 그동안 너한테 너무 신경써주지 못한거 같아서. 어렸을때부터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느라 다니고 싶었던 학교도 못다니고, 친구랑도 금방 헤어지고... 마침 의뢰인 때문에 당분간 아카데미에서 일하게 됐으니, 너도 이참에 아카데미 다녀보는게 좋을거 같아서. 너 예전에 아카데미 다녀보고 싶어했잖아."


"...헤파이아씨가 이렇게 정상적이고 진지한 소리를 내뱉다니...."


"이 꼬맹이가 뒤질라고. 아무튼 갈거야 말거야?"


"저야 가면 좋죠. 새로운 경험도 해보고."


아카데미는 원작에서 가장 자주 나오던 장소중 하나.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는데 잘됐다.


.

.


아카데미에 입학한다고 해서 반가운 인물들을 만날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원작의 시작은 앞으로 2,3년 뒤니 지금 아카데미를 다니는 소설 속 등장인물이라곤 교수님들이 전부겠지.



"이안, 이안! 정말 자네인가!?"


"어? 로베르트?"


...라고 생각했는데, 입학식이 끝나자마자 반가운 얼굴이 나에게 손을 흔들며 찾아왔다.


로베르트 윌리엄.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로즈의 약혼자이자 남주라고 할수있는 인물.


얘네 가문이 헤파이아씨한테 의뢰를 한 적이 있기에 예전에 만난 적이 있다.


근데 얘가 왜 여기있지? 얘는 3년 뒤에 아카데미 입학하는데?


"아아, 나의 친우여! 이 얼마나 오랜만인가!"


"그래, 진짜 오랜만이네. 근데 네가 여긴 웬일이야? 어렸을땐 기사 훌련소 간다고 하지 않았어?"


"아아, 그것은 전부 자네 때문이지!"


"나?"


로베르트가 말하길,


어렸을적 나와 같이 도서관에서 몬스터 사전을 보며 놀다가 책에 흥미가 생겼고, 그 뒤 기사에서 학자로 꿈을 바꿨다고 한다. 


"그리하여 기사학과 대신 몬스터 연구학과에 들어갔다네. 이로써 학자의 꿈에 한발자국 더 가까워진 셈이지."


"학자라...."


이런걸 보고 나비효과라고 하던가.


아주 작은 변화가 미래를 완전히 바꿔놓다니.

설마 다른 애들도 얘처럼 확 변했을려나.


"그보다 자네 그거 들었나? 이번 기사학과 신입생중 엄청난 천재가 있다고 하던데."


"천재?"


"그래, 천재. 소문에 의하면 우리랑 같은 또래인데 벌써 소드 오러를... 아. 마침 저기 지나가는군."


"소드 오러? 우리 나이에그런게 가능한 사람은... 어라?"


로베르트가 가리킨 곳을 본 난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안...?"


"오필리아...?"


아니 네가 왜 여기 있어?


.

.


갑작스런 만남.

허나 얘기하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았고 로베르트의 도움으로 빈 교실로 향했다.


로베르트도 잠시 자리를 비켜 단 둘이 된 상황.


"이안... 정말... 보고 싶었어...!"


그녀는 둘만 있게 되자마자 날 끌어안으며 그동안의 일들을 전부 얘기했다.



"...정말? 이 목걸이 때문에?"


"응, 네가 준 목걸이 덕분에 우리 가족 모두가 목숨을 구했어."


그녀가 말하길,


숲에서 놀다가 목걸이를 잊어버려 밤새 찾은 적이 있는데, 밤 늦게까지 그녀가 돌아오지 않자 가족들도 그녀를 찾으러 숲속으로 향했고,

그 덕분에 때마침 마을을 습격한 몬스터들로부터 안절할수 있었다고 한다.


"비록 그때 오빠가 다리를 다쳐서 절름발이가 됐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전쟁터에 안갈수 있어서 다행이었어. 거기다 그것 때문에 병원 갔다가 마리나 언니랑 사귀게 되었고."


"...잠만. 마리나?"


"오빠랑 결혼하실 분이야. 내가 검술 배우는거 도와주신 분이기도 하고. 정말 좋은 분이셔."


난 마리나란 이름에 내 귀를 의심했다.


 그녀는 소설에서 오필리아가 기사훈련을 받을때 가장 앞장서서 괴롭힌 악녀다.


폭설이 내리는 한겨울에 오필리아를 발가벗기곤 눈벌판 한복판에서 밤새도록 망을 보라고 하고,

오필리아에 말에 힘줄을 자르고 검과 갑옷을 훔치며,

일부러 누명을 씌어 승진을 막는등 그야말로 최악의 인물.


근데 겨우 목걸이 하나 때문에 원수에서 언니가 되다니....


백투더퓨처에서 박사가 시간여행을 할때 그렇게 조심하라고 한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 브라운 박사 당신이 옳았어.



"아무튼, 정말 오랜만이야. 정말... 다시 만나게 되다니. 우리 목걸이 한번 맞춰볼래?"


"그럴까?"


그녀는 품속에서 낡은 목걸이를 하나 꺼냈다.


지난 몇년간 몰라보게 커진 그녀의 흉부에서 나온 목걸이는 이곳저곳 긁힌 자국이 있고 색이 탁해졌지만, 


철컥-


내 목걸이와 완벽하게 아귀가 들어맞으며 하트모양이 되었다.


"...이거 좀 부끄럽네."


서로 목걸이를 목에 맨 상태로 맞추니 자연스럽게 가슴이 닿고 숨결이 느껴질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너 많이 잘생겨졌다?"


"너도 이제 숙녀가 됐네."


기사 훈련 때문인지 여자인데도 나와 엇비슷한 키와 그에 걸맞는 완벽한 비율, 그 사이 몰래보게 성장한 미모와..


꾸욱


셔츠 단추가 비명을 지르는 머리만한 흉부까지.


소녀에서 여자가 된 그녀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베시시 웃었다.


"...목걸이가 하트모양인거, 혹시 사랑한다든지 그래서 그랬던 거야?"


"아니. 그냥 때마침 하트 모양 틀이 있어서."


"치잇. 이럴때 좀 로멘틱하게 말해주면 어디 덧나? ...앞으론 친구보다 더 가까워지고 싶은데."


"뭐?"


"아,아무것도 아냐! 난 이만 가볼게!"


어느새 얼굴이 홍당무가 된 그녀는 목걸이를 분리하고 뛰쳐나갔다.


.

.


"5252 이안, 자네 꽤 하는데? 설마 저 천재와 그렇고 그런 관계.."


"그런거 아니니까 신경꺼."


"흠.. 둘이 뭔가 있는거 같은데... 혹시 약혼?"


"'약혼은 너 같은 귀족들이 하는 거고. 내가 귀족도 아니고 약혼을 왜 해."


"하하, 그건 그렇지. 아아, 약혼 얘기가 나오니 갑자기 그녀를 보고 싶군. 아아, 나의 파르피."


"그래, 로즈... 잠만. 뭐?"


"파르피라고, 같이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 사귀게 된 아리따운 아가씨라네. 아아,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군. 이따 기숙사로 찾아가볼까. 근데 로즈라니, 자네 에르티나 가문의 로즈와 아는 사이인가?"


"그럼 넌 몰라?"


"흠... 어렸을땐 혼담이 오갔던 거 같은데, 내가 파르피와 사귀며 전부 없던 일이 됐네. 아, 그러고보니 태어났을때부터 쭉 아팠다가 최근 어느 대마법사의 치료 덕분에 건강해졌다고 들었네. 귀족들의 사교회에 나온 것도 이번이 처음이라더군."


"...."


걘 또 어쩌다가 인생이 바뀐거지.


분명 원작에선 얘랑 약혼관계 였는데?


"아, 그러고보니 그녀도 이 아카데미를 다닌다고 하더군. 우리랑 같은 1학년이라던데?"


"설마...."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얘까지 아카데미에 있..


"이안? 정말 당신이에요?"


...구나. 


.

.


'누구시죠? 저택에 조각상 때문에 오신 인부들? 그렇군요. 전 에르티나 가문의 로즈에요.'


'콜록, 콜록... 왜 그러시죠? 역시 제 모습이 이상한가요? 얼굴도 창백하고 머리도 할머니처럼 새하얗고...이상한 기계를 달고 다니고. ...네? 예뻐서 봤다고요? 무,무슨 그런 거짓말을!'


'친구하자고요? 죄송하지만 에르티나 가문은 평민과 함부로 어울리지 않습니.. 싫으면 됐다고요? 아,아니요! 싫다는건 아니에요! 친구해요! 아니, 해주세요!'


'뭐 드시나요? 아, 초콜릿이군요. 예? 한입 먹을거냐고요? 죄송하지만 전 못먹어요. 독한 약을 복용중이라 정해진 음식들만 먹어야 해요. 삶은 양배추, 가지즙, 약초로 만든 음료....'


'오늘은 왜 아무것도 안드세요? 네? 저 때문에? ...신경써줘서 고마워요. 이런건... 당신이 처음이에요.'


'왜일까요. 당신이랑 있으면... 몸은 아픈데, 마음은 너무 편해져요.'


'왜, 왜 나는 이런 걸까요. 귀족이면 뭐해요, 돈이 있으면 뭐해요. 먹고 싶은 것도 못먹고, 밖을 뛰어다니지도 못하고, 친구를 붙잡을수조차 없는데! 흑, 흐윽, 흐아아앙....'


'이 목걸이만 있으면 다시 만날수 있는 거죠? 정말... 믿어도 되나요?'


'만약 제가, 이 병을 고친다면. 아니, 나중에 다시 살아서 만날수라도 있다면. 그땐... 같이 식사하지 않으실래요? 엄청 큰 초콜릿푸딩이랑 칠면조를 배불리 먹지 않으실래요? 그래준다고요? ....정말 고마워요, 친구.'


로즈 에르티나.

원래라면 불치병 치료에 실패하고 오히려 부작용으로 수명이 더 짧아져 3년이란 시간동안 로베르트와 애뜻한 연애를 하는게 원래 스토리인데....


"대마법사님의 치료는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영약이 온 몸을 불태우는 듯한 그 고통... 진짜 끔찍했죠. 하지만, 이 목걸이를 쥐고 끝까지 버텼고, 지금은... 보이는 것과 같이 아주 건강하답니다?"


또 목걸이인가.

저 쬐끄만 청동 덩어리가 불치병을 치료하다니.

운명이 진짜 이렇게 별거없는 거였다니.


"이안, 내일 시간 되나요?"


"그건 왜?"


"왜긴 왜에요, 저랑 같이 식사하셔야죠! 우리 약속했잖아요, 기억 안나요?"


하트가 된 목걸이를 흔드는 그녀는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후후후, 디저트는, 제가 가진 것중 가장 달콤하고 소중한 걸로 드릴게요!"


.

.


로즈와 헤이지고 기숙사로 향하는 길.


머리 속이 복잡하다. 겨우 며칠 간 같이 놓고 목걸이 하나 준 거 때문에 이렇게 바뀌다니.


하아... 2명이나 만나다니... 아니, 인생이 바뀐 것도 좋고 다시 만난 것도 좋은데 하필 그 목걸이를..."



"아,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앞을... 어? 이안?"


"...성녀님!?"


.

.


헤파이아씨가 교회 샹들리에 수리를 위해 며칠간 도시에 머문 적이 있는데, 성녀하고는 그때 만났다.


'여긴 수녀님들만 올수있는 곳인데, 당신은 대체 누구인가요?'


'엣? 덤불 뒤 비밀통로?! 안돼요! 저는 예비 성녀, 절대로 허락 없이 밖에 나가서는... 에? 과자를 사주신다고요? ...이번 한번만이에요.'


'항상 멀리서 지켜보던 마을이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색다르네요. 훨씬 활기차고, 시끌벅적하고, 아름다워요!'


'이안은 좋겠어요, 이런 멋진 세상을 여행하다니. 언젠가는 저도 여행할수 있을까요?'


'저 말이죠... 이렇게 또래 아이랑 놀아본건 처음이에요. ...원래 친구랑 놀면 이렇게, 두근거리는 걸까요...'


'떠나지 마요 이안... 제발... 이안이 없으면, 자꾸 가슴이 아파요...'


'정말 이 목걸이를 지니고 있으면, 다시 만날수 있는 건가요? 그땐, 같이 여행도 해주는 건가요?'


'....언젠가! 제가 언젠가 진짜 성녀가 된다면! 당신을 꼭 찾아갈게요! 이 목걸이를 가지고, 당신을 찾을게요! 그러니 다시 만나면 그땐 꼭 같이 여행을 떠나요! 내 소중한 친구 이안!!'


샹들리에 수리가 끝나고 결국 오필리아 때와 마찬가지로 헤어졌는데...


" 정말 날 기억해? 벌써 몇년은 더 됐는데?"


"당신을 어찌 잊겠어요, 제 소중한 첫 친구인데. 그리고... 이것도 있는데 어찌 잊어버릴수 있을까요."


"...그건, 내가 준 목걸이?"


아니 얜 또 이걸 왜 가지고 있는거야.


"이안도 아직 가지고 있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전 혹시 이안이 이걸 잊어버렸으면 어쩌나하고 걱정 많이 했는데..."


"근데 대체 어떻게 아카데미에 온 거야? 성녀면 왕궁이나 교황청에 있어야 하지 않아?"


"원래라면 그게 맞지만, 아직 이 세상에 대해 배우고 경험하고 싶은게 많아 교황청에 양해를 구했어요. 처음엔 다들 반대하셨지만 다행히 마드리드라는 수녀님이 도와주셔서 졸업까지는 여기서 지내게 됐답니다."


"...."


마드리드가 도와줬다니.

저 말을 듣고 순간 어째서?라고 물을뻔 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녀는 성녀의 이야기에 매인 악역이니까.


왕궁에서 일하게 된 성녀와, 그녀를 질투하는 악녀 마드리드. 


마드리드는 자신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고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성녀를 질투하여 그녀를 함정에 빠뜨려 왕궁에서 외톨이로 만들고,


마드리드의 계략에 걸린 성녀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어, 한동안 피폐물을 찍다가 황태자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


...가 원래 흐름일텐데.


아무래도 성녀가 아카데미를 간다고 하는 바람에 스토리가 꼬인거 같다.


성녀가 왕궁에 가지만 않으면, 그녀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아도 된다.

그녀로서는 성녀와 부딫힐 일도 없고 오히려 아카데미 입학을 하면 자신의 자리를 계속 안전하게 지킬수있을테니 적극 찬성을...


겨우 어렸을적 며칠 간의 접전 때문에 스토리가 바뀌다니.


오필리아도 그렇고 로즈도 그렇고,주인공들의 스토리가 죄다 바뀌어 버렸다.



"저기 이안, 혹시 그때 그 약속 기억하나요?"


"아, 같이 여행가자고 한거?"


"아직 기억하시는군요. 정말 다행이에요, 혹시나 잊으면 어쩌나 했는데."


"그걸 어떻게 잊겠어, 어렸을적 소중한 추억인ㄷ.."


"그럼 이제 지켜주실 거죠?"


"...에?"


"당장은 힘들겠지만 방학때쯤 같이 여행이라도 가봐요, 나의 첫친구."


그녀는 하트모양이 된 목걸이를 들며 수줍게 미소지었다.


새하얀 성녀복보다 더 하얀 얼굴에 붉은빛 홍조가 있는건 분명 내 착각이 아닌거 같다.


.

.


"역시, 짐이 잘못 본게 아니구나. 정말 이곳을 다닐줄이야."


"...어째서 공주님이 이곳에..."


"짐은 아카데미의 주요 후원자이니라. 그리고 오늘부턴 학생이기도 하지."


두꺼운 바지에 비해 상의는 붕대로 대충 가슴만 가리고 황금빛 천을 외투처럼 감싼 그녀.


사막 한복판에 있는 황금의 나라 엘도란의 공주, 릴라 샤바클.


'짐은 이 나라에 지배자가 될 몸. 모든 백성들은 짐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 꿇는게 당연하니라.'


'내가 내 하녀의 옷을 벗기든, 가슴을 만지든, 가랑이 사이를 걷어차든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지, 이방인?'


'꺄아아악! 이,이거 놔라! 꺅! 꺅! 꺅! 무,무엄하다! 감히 그런 흉악한 손길로 짐의 엉덩이를 매우치다니 이런 불경... 꺄아악!'


'흑... 흑.... 아바마마한테도 맞은 적 없는데 겨우 평민 따위한테... 흑, 네 놈은 사형이니라!'


'...어째서냐. 어째서 아바마마도 네 편을 드는 거냐고오! 뭐? 철 들라고?'


'친구? 짐은 가장 고귀한 혈통. 그딴거 필요없다. ....허나 네가 간절히 원한다면 특별히 되줄수도 있느니라...'


'하하하하! 평민들의 숨바꼭질이란 것도 생각보다 재밌구나! 하하하, 이번엔 네가 날 찾아봐라!'


'꼭 떠나야만 하느냐? 도,돈이라면 얼마든지 주겠다! 호, 혹시 내 하녀가 탐난다면 네가 가져라. 이,이 왕관 예쁘지 않느냐? 한번 써보겠느냐? ...전부 싫다고?'


'난 평생 원하는건 뭐든 가졌다. 이안, 짐은 네 녀석이 가지고 싶다. 너무나, 미치도록 가지고 싶다. 황금이라면 네 몸무게에 10배, 아니 100배만큼 줄테니... 제발 가지 말아다오...'


'이 목걸이는 뭐냐, 너무 볼품없지 않느냐. ...하지만, 네가 준 물건이니 특별히 소중히 간직하마.'


'약속이다. 다시 만날때까지 내가 그대를 잊지 않는다면, 그때도 이안 너를 사... 사,사랑...한다면, 짐의 것이 되어라.'



"설마 짐과의 약속을 잊은건 아니겠지, 이안?


"고,공주님...."


"그대를 기다리며 그 어떤 사내와도 몸을 섞지 않았다. 그 어떤 사내와도 정을 나누지 않고, 오직 그대만을 봐왔단 말이다."


"어,어? 잠만, 지금 벗지 마세요!"


내가 말릴 새도 없이 가슴을 감싼 붕대를 푸는 그녀.


"후후, 걱정마라. 이런 곳에서 처음을 맞을 생각은 없다. 자, 이거 기억하느냐?"


철컥-


딱 들어맞는 목걸이.


공주는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흠, 짐을 생각해서 계속 차고 있던 건가? 아주 기특하구나. 짐도 계속 차고 다녔다."


"아니, 저, 공주님 그게.."


"오늘은 날도 늦었으니 이만 가보도록 하지. 부디 다음 번에 만날땐 이 손가락을 채워주웠으면 좋겠구나."


금반지와 값비싼 보석반지를 낀 손가락들중 유일하게 아무것도 안 낀 왼손 약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일 보자꾸나. 나의 남자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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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들에게]

[네 편지 봤다.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싶다니, 네가 미쳤구나. 네가 선택한 아카데미고, 이미 3학년 학비까지 전부 냈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렴. 그리고 퇴학해도 집에 못 와. 의뢰 때문에 당분간 동쪽 왕국에 있을거라 집 팔았어. 혹여나 아카데미 그만뒀다는 말이 내 귀에 들어오면,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서 창남촌에 버려버릴줄 알아라. 언제나 포도주만큼 사랑한단다 아들아]

[세상에 제일 새끈한 하프엘프 엄마가]


"...미친년."



목걸이를 여러명에게 준 거라는 걸 안다면 다들 날 어떻게 할지 모른다.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마음도 정리해야 한다.


"시발....."


아무리 생각해도 난 제대로 좆된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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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소꿉친구 떡밥 돌때 올리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막히는 부분도 많고 내용도 길어져서 지금 올림



오랜만에 1만자 넘게 썼다

제발 누가 가져가서 써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