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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 https://arca.live/b/regrets/50823459


 인간이란 것은, 도통 이해를 할 수 없는 종속들이었습니다.

"아니, 그런것도 못해? 우리 집안에서 일한게 몇년인데, 너따위를 키워주고 재워주고 다 해줬는데, 이딴식으로 할거야?"

 이렇게 제게 상처가 될 만한 말을, 물론, 제가 미숙한 탓도 있겠지만, 이리도 노골적으로 제게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면서,

"자, 이거 너 해. 그냥 상점가 돌아다니다가 너랑 어울릴거 같아서 산거야."

 이따금 저에게 이런 호의를 배풀어 주기도 하니까 말이죠.

 사람들은, 제게 크게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제가 이 집에 거둬질 때는 물론, 아주 어린 아기시절이었기에, 기억이 없었지만, 유아기에 접어들며 느낀 감정들과 기억들은 생생했습니다.

 그저 본인의 일만을 묵묵히 하는 머슴들과 하녀들, 늘 종이서류를 쳐다보며, 제게 잔심부름만 시키는 주인님과 사모님, 고아에 어려서부터 머슴일을 하기에 친하게 지내는 것을 꺼리는 또래 아이들까지. 제 짧은 인생에서 단 두 명을 제외하고는, 아마 저의 눈 색도 맞추지 못하겠죠.

 제가 예닐곱 살이 될 때 까지, 저를 사랑으로 키워주시던 한 노파가 있었습니다. 시골 촌동네지만, 나름이 동네의 유지였던 이 집안에서 제일가는 하녀이자, 저희들의 유모를 자처하셨던 분이었죠. 그 분이 돌아가실 땐, 저 뿐만 아니라, 집안 전체가 침울하게, 가라앉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필하고 있는 아가씨, 후순이가 있습니다. 왜 한낱 머슴 주제에, 아무리 같은 나이의 소녀라도 손윗사람인데, 말을 낮추냐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고개를 들 수 있을 때 부터 함께 있던, 인생의 대부분을 함께해온 친구로서의 관계도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저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연고도, 친분도, 그 무엇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인생에서 저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없던 것과 같았죠. 그런데 그러면서도 저에게 방을 내어주고, 할 일거리를 던져주고, 아가씨를 옆에서 보필하게 해주는 이유가 무얼까 싶었죠.

 저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영원한 별이 되어버린, 돌아가신지 벌써 육 년이 넘어 가는 그 할머님과, 제가 모시는 아가씨, 이 두명의 사례밖에 존재하지 않았고, 이 둘의 행보는 크게 차이가 나 있었기에, 저는 아직 인간이란 존재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머슴과 하녀들은 본인의 가정이 있기에, 이런 저녁이 되면 다들 돌아가, 사용인 휴게실은 저의 독방이 되어버립니다. 그저 창밖의 달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습니다.

"뭐해? 식사시간 다 되었는데, 안올거야?"

 식사시간, 식사시간 이란 것도 저에겐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것 이었습니다. 저만 그런지는 잘 모르겠으나, 인간의 본성은 정해진 시간에만 배가 고파지지는 않았고, 그저 배고플때 먹고, 배가 고프지 않으면 먹지 않는것, 이 당연한 이치에 무엇이 필요하기에, 굳이 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시간에 식사를 한단 말입니까.

세 명, 저까지 합친다면 네명 남짓되는 적은 인원들이 쓸데없이 넓고 커다란 테이블에 앉아, 빛이 비추고 있음에도 무언가 어두컴컴 해 보이는, 그런 방에 별 말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밥을 먹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게다가 유지의 집안이란 것도, 먹고싶은 것을, 먹고싶은 만큼 먹고, 그런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빵 몇조각과, 스프, 그리고 고기 몇점이 전부였죠. 그거면 충분한 것 아니냐, 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었지만, 몇 가지의 종류가 지속적으로, 돌아가며 나오는 식단따위가, 퍽이나 매력이 있겠습니까?

"지금 갈께, 후순아."

 하지만, 그런 생각은 고이 접어둔 채로, 그녀를 따라가야만 했습니다. 저번에는, 밥을 먹기 싫다고 하니, 세시간 씩이나 그녀의 설교를 들어야 했죠.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유일하다시피 제게 말을 걸어주는 그녀가, 너무나도 좋아서, 밉보이기 싫었습니다. 그녀또한 인간인지라, 출신도 불분명하고, 성격조차 소심한 제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게 말을 걸어주는 것은, 그녀가 유일했습니다.

"헤헤."

 그녀의 얼굴을 보니, 자연스레 미소가 나왔습니다. 옆 모습이 너무나도 귀여워 보였습니다. 저 날카로운 두 눈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저 오똑한 코도 보십시오. 새하얀 두 뺨이, 약간 붉게 물든 모습은 마치 인형을 보는 듯 했습니다.

"뭘 그렇게 쳐다봐? 기분나쁘게.."

 최근들어 더욱 저를 안좋게 대하는 것 같지만, 괜찮습니다. 그녀의 본성이 착하다는 것은, 한낱 머슴인 저 조차도 알고 있는 것이었으니, 그저 찰나의 변덕으로 넘기고 싶었습니다. 일이 년 전 까지만 해도 저를 보고 웃어주었거든요.

 변덕, 이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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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식사는 평소보다 더욱 처참했습니다.

 그 쓸대없이 커다란 테이블 때문에, 제가 좋아하는, 리코타 치즈가 올라간, 발사믹 소스를 곁들인 샐러드에 손이 닿지 않았기에, 맞은편에 있던 후순이에게 조금 가져다 달라고 했을 뿐인데 말이죠.

 그저 허탈한 웃음만이 나왔습니다. 제가 무얼 잘못한 걸까요. 결과적으로는 제 바로 앞에 그 샐러드가 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과정이 제게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것 이었습니다.

 화를 낸다, 라는 것은 저를 충분히 공포에 빠트리기 좋은 행동이었습니다. 온순하기 그지없는 강아지가, 사람을 잘 따르는, 동네에 귀엽기로 소문난 강아지가, 갑작스레 사람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사납게 지저대는 것 처럼, 가끔씩 화를내는 것 조차, 충분한 공포가 되는데, 일상에서 다반사로 일어나는 분노, 그것도 저를 향한 분노라는 게, 저에겐 너무나도 커다란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언젠가는 그녀도 예전처럼 제게 친근하게 대해 줄 것을 기대하며, 사용인 휴게실에 몸을 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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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그냥 아무것도 하지마, 내가 옆에서 뭘 해줘야, 그제서야 겨우 일인분을 하면서, 학교에서 눈에 뛸려는 생각은 집어치워. 알겠어?"

 아아, 그 날 저의 바램은, 언제쯤 이뤄지는 걸까요, 아니, 애초에, 저 따위가 그런 것을 바란, 저의 잘못입니다. 그러니 첫 등굣길이라는, 기분 좋을 첫 출발을 알리는, 벚꽃이 예쁘게 피어나, 마치 눈이 내리듯, 저희를 감싸안아주는 이 길거리에서까지, 제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겠죠.

"들었으면 대답을 해야지, 이런 것 까지 내가 일일히 얘기해 줘야 하는구나?"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제 더는 그녀에게 말을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리도 멍청한, 저와 마주하는 인간들에게 분노를 유발해내는, 그런 한량은, 인간 축에도 못 끼는, 미물일 뿐이니까 말입니다.

 방금전까지, 어여쁘게만 보이던 저 벚꽃은 왜저렇게 처량하게, 마치 눈물을 흘리듯 꽃잎을 떨어트리는 걸까요. 역시 저를 마주하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는 어디까지고 못난 존재였으니까요.

"너, 갑자기 왜 말을 높이고 그래..?"

"아무래도, 주인과 하인의 관계인데, 전국 각지의 높은 분들의 자제분들이 오시는 자리에, 편하게 말을 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럴듯한 거짓말 이었고,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저희같은 변방의 유지는 물론이고, 각종 높은 직위의 자제분들과, 황실의 공주왕자까지, 나이가 차면 이 곳에 올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곳 이었으니까요. 아, 황실이라 하니, 최근엔 황실에서 저희 또래의 사생아를 찾는다는 얘기가 들리었지만, 아직은 찾지 못한 듯 합니다.

 그나저나, 점점 더, 그녀와 저의 차이를 느껴갑니다. 하늘과 땅 같은, 시골이라지만, 그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그녀의 집안과, 일개 고아의 차이는, 말 그대로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저는 이걸 이제서야 깨닫는군요.

"흐응, 그래..? 후훗. 그렇구나."

 사실, 얼마 전 부터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접는 중 이었습니다. 그녀도 저를 도와주듯, 저를 더욱 가혹하게 대하더군요. 참 잘 된 일 입니다. 엇갈려버린 마음은, 하루빨리 곧게 풀어버리는게 좋으니까요.

그렇지만, 그 학교에는 사용인들을 위한, 사실, 굳이 사용인이 아니어도 입학이 가능한, 흔히 평민 전형 이란 것이 있었기에, 저는 다른, 새로운 이들을 만난다는 것에, 저를 모르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에, 설렘을 느꼈습니다. 분명, 그 설렘 뒤엔, 본래의 우매한 저를 숨길 수 있다는, 그런 추악한 마음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역시 저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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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바램을 꿈꾸면 안되는 존재인가 봅니다.

 고아 출신의 머슴이라는 것은, 나름의 프라이드가 있는 사용인들에게조차, 추잡한 존재로 보이나 봅니다. 거기에 그녀의 말 또한 한 몫 했죠.

 첫 날에는 별 말 없이 지나갔으면서, 며칠이 지나고, 서로서로 말을 트며, 조금씩 견제와 포용으로 반 내부에서 삼삼 오오 마음이 맞는 이들끼리 모이기 시작 할 때 부터였죠. 그녀가 저를 욕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가 쓸모가 없다고 했습니다. 고아출신이라 그런가, 배우는 속도가 느리다고도 했고, 힘이 좋은 것도 아닌 머슴이 어디있겠냐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저와 단 둘만 있을 때면, 본인이 없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다, 언제까지고 저는 그녀의 밑에서 있어야 한다 같은, 저를 내쫒거나 하는 그런 생각은 없다는 듯 말하는게 아니겠습니까. 역시 인간이란 것은, 참으로 어려운 존재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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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잎들이 봄비처럼 내릴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뜨거운 태양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날씨가 되었고, 저는 여전히 고립된 채, 주변의 날 선 시선과, 여러 조소들을 받으며, 지내왔습니다.

 그렇게 그저 사방이 어두운 곳에, 홀로 같힌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을 때,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아, 그렇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저를 바라봐 주는 것은, 그녀 혼자 였습니다. 천천히 손을 들어올려, 그녀에게 손을 뻗었습니다. 잡힐듯, 잡히지 않는 그녀를 애절하게 한참을 바라만 보고 있자, 옆에서 우는 소리가 들리었습니다.

 그렇게 옆을 돌려보니, 한 여자아이가 슬피 울고 있었습니다. 긴 생머리를 늘어트린, 둥그런 큰 눈에서 흘러내리는 커다란 눈물방울을, 무의식 중에, 한 손으로 슬쩍 닦아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그 큰 눈이 더욱 커지며 이리 말하는게 아니겠습니까?

"고마워.."

 처음 듣는 말 이었습니다. 온 몸 구석구석이 찌릿찌릿해지는 게, 제게는 여간 큰 일로 다가온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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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와 처음 만난 이후로, 저는 알게모르게, 그녀를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또한, 저와 같은 처지였기에, 듣기로는 수녀님께 길러졌다고 합니다. 아무튼, 저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그녀에게서, 알게모르게 동질감이 느껴졌나 봅니다. 사람들이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하려 할 때면, 저는 그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그녀에게 심부름을 시키려 할 때면, 제가 발이 더 빠르다는 이유로, 제가 다녀오기도 하고, 그녀가 다른 여인들의 손에 이끌려 갈 때면, 거짓으로 선생님이 부르신다는, 그런 이유로 그들을 떨어트리기도 했습니다.

 전혀 힘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런 일이 일어난 이후에, 고맙다는 말 한마디, 깨끗하고도 순수한 미소 한번, 그 것이면 충분 했습니다. 처음보는 유형의 인간이었고, 옛날의 그 할머니와 닮은 부분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렇게, 오늘도 학업과, 아가씨의 시중을 병행하며, 끝난 하루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야, 너 뭐냐?"

 저는 등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렇게 차가운 목소리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너, 그 평민, 후진이라 그랬나? 아무튼, 그 년이랑 무슨사이야?"

"별 특별한 사이는 아닙니다. 아가씨."

 사실입니다. 아직은 그녀와 깊은 관계는 아니었죠. 분명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것은 확실하다고 느꼈지만, 그저 저의 착각일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 것은 좋은 의미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녀는 잘 모르지만, 저는 분명히 그녀에게 이끌리고 있던 것 입니다. 이 오랫동안 이어져온, 쌉싸름한 맛이 나는 견과류와도 같은, 그런 첫사랑을 조금씩 놓을 수 있게 되었다는 얘기였죠.

"허, 그래. 그렇구나. 아 맞다, 격주 뒤에 끝내놓으라 했던거, 이번주 내로 끝내."

 아무래도, 아가씨도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 합니다. 분명 본가에 있을 때엔, 저를 제외한 사용인들과의 사이는 좋았을 텐데 말이죠.

 "예, 알겠습니다."

 솔직히, 전부 끝낼 자신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작도 전에 포기하는 것이 더욱 무서웠습니다. 별로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는 그녀를 건들이는 것 보다, 기분이 좋을 때, 혼나는 편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그녀를 기숙사로 데려다 주고, 저 또한 숙소로 향하던 중 이었습니다. 긴 생머리의 강아지같은 여성이 길바닥 구석진 곳에, 쭈그려 앉아 훌쩍 거리고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또 누군가가 그녀를 모함한게 틀림 없었습니다.

 그녀의 긴 머릿결을, 저 달빛에 비춰 푸르르게 빛나는 검푸른 머리를 한번 쓸어 주었습니다. 간질간질하고, 매끄러운 촉감을 기억하며, 그녀에게 대화를 건네었습니다.

"여기서 뭘 하고 있어?"

 마치 그때와도 같이, 둥그런 눈이 크게 떠진, 맑은 보석과도 같은 그 두 눈이,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어, 아, 여긴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네가 보이더라구. 여기서 쭈그려 앉아있길래, 걱정되어서 와 본거야."

 그 말에, 그녀는 몇초간 그 큰 눈을 껌뻑이다, 크게 함박웃음을 지어주었습니다. 그 예쁜 눈망울을 감싸고 있던, 눈물 한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고, 이 때 까지는, 분명 가슴이 콩닥콩닥거리고, 온 몸에 무언가가 감싸안는 느낌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 가녀린 두 팔을 펼쳐 저를 감싸 안는게 아니겠습니까? 사람의 따스함, 푸근함, 선선한 바람이 부는, 꽃이 왕창 펴 있는 초원에서, 커다란 나무가 저를 감싸안아 주는 듯한, 아아, 한번도 느껴본 적 없지만, 어머니의 품 속이 이런 느낌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들만한, 그런 포용성으로 제게 품을 내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떨리는 두 손으로, 그녀의 등을 살며시 감싸주었습니다. 토닥 토닥, 그 자그마한 등을 두들겨 주면서도, 제가 그녀를 다독여 주는 상황임에도, 제 두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너는, 내가 힘들 때 마다, 곁에 있어주는구나."
 
 틀렸습니다. 그녀가 제가 힘이 들 때 마다, 그 웃음을, "고마워."라는 그 한마디를, 그 따스함을, 제게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알게모르게, 아니, 확실히 알수 있게, 저는 그녀에게 구원받고 있던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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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날 이후로, 저희는 조금 더 가깝고, 조금 더 서로를 보듬어 주는 나날을 지냈습니다. 왕따, 라는 것은, 저희를 지칭하는 말인지, 저는 잘 모르겠지만, 저와 그녀는 이 학교에서 도태되어 있는 것만은 확실 했습니다.

 아가씨에 대한 마음도 어느정도 정리가 끝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꿉친구, 더듬고 더듬어 태초의 기억에까지 도달했음에도, 제 곁에 있던 소녀인 그녀와의 관계는 깨트리고 싶지 않았지만, 저의 우선순위는 조금씩, 점점 더, 소동물과 같은 그녀에게로 끌리는 것 이었습니다.

"야, 뭐냐? 너 분명 그 년이랑 별 관계는 아니라 하지 않았어?"

 그 말을 할 때 당시에는, 분명 그랬지만, 요 몇 주 사이에, 조금 더 깊고 가까워진 것을, 어쩌하겠습니까. 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요새 좀 잘 대해주니까 편한가보네? 설레발 치지마, 저년은 너 안좋아해. 그냥 본인도 따 당하니까, 너한테 뒤집어 씌우려 하는거잖아. 그런 뒷심 없이 네까짓거 한테 말 걸어주는 건 나정도가 끝이니까."

"후진이는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 아가씨."

 화가 났습니다. 화가? 제가? 눈 앞의 이 여성에게? 저 조차도 믿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분명히 저는 그녀에게 화가 난 것 입니다. 후진이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 조차 섞어본 적 없으면서. 저를 모함하는 것은, 참을 수 있겠으나, 그녀를 모함하는 것은 참을 수 없었습니다.

"..뭐? 다시 말해봐."

 머리로는 큰 일 났다고 인지하고 있었지만, 제 마음이, 이리도 미성숙한 저의 추한 마음이 더욱 셌던 거 같습니다.

"그녀에게 사과 하십시오."

"허, 어이가 없네. 걱정해 주는건데, 이걸 이렇게 갚아?"

 그녀가 실제로 저를 이용한다 하더라도 상관 없습니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면 심장에 칼이라도 찔린 듯, 푸욱, 아파오는 그런 게 있었지만, 그럼에도 괜찮았습니다. 이미 제 몸에는 수 없이 많은 칼들이 꽂혀 있었고, 그 중에서 그 상처에 약을 발라주는 사람은, 그녀가 유일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니, 그녀가 저를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조금은 냉정해 지는게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일을 더 키울 수는 없었습니다. 분명 그녀에게도 불똥이 튈 게 뻔합니다. 그건 안되는 일이었습니다. 상처에는 약이라도 발라주어야, 고름이 생기지 않는 법이니까 말이죠.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이 제가 접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녀에게 불똥이 튀게 만들 수는 없었죠. 제가 화가 치밀어 올라, 그 것을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점점 더 세상이 뒤틀려 가는 것만 같습니다. 아무도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 당연한 사실을, 후진이 덕분에 저는 잊고 있었죠. 눈물이 흘러 넘칠 것만 같은데, 흔해빠진 행복을, 저는 왜 찾지 못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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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저 저를 이용하는 것 뿐 이라도,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 것은 중요하지 않았고, 저희의 하루는 크게 바뀐 게 없었습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저 따위의 짐승에게 미소를 건네주는, 따스한 한마디를 내어주는, 그런 사람은 그녀가 유일했거든요. 그 것은 마치, 마약에 중독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마음이 울적해 질 때면, 그녀만이 생각나는 것 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담배를 끊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시도때도 없이 생각나는데, 분명 세간에선 이걸 중독으로 판별한, 그런 것일텐데, 이리도 갈망스러운 것을, 끊을 수는 없는 것 입니다.

"후붕아, 우리 졸업하면, 함께 가게나 차릴까?"

"무슨 가게?"

"차를 파는거야.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런 평온함인 것 같거든."

"차는 잘 모르는데."

"괜찮아, 나도 잘 모르는걸."

 학교 뒷편, 인적이 드문 이 구식 창고 뒷 편이, 저희의 유일한 아지트였습니다. 이 곳이라면, 괴롭힘을, 그 시선들을, 그 말들을, 모두 피할 수 있었기에, 애용하는 곳 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녀가 제 손 위에 그 작은 손을 포개었습니다.

"그렇지만, 꼭 차리자. 찻집."

 아아, 그래. 이 걸 원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 미소, 이 따스함, 그 누구도 제게 보인 적 없는 그 감정. 저는 그 것을 갈망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누구의 것도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그녀가, 눈 앞의 귀엽고도 사랑스러운 이 소녀의 표정이, 저를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신을 믿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그녀는, 제게 만큼은, 전지전능한, 마치 신과 같은 인물이었던 것 입니다.

"그래, 차리자. 찻집."

 저희는 몇 초간 서로를 응시하다,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그렇게 그녀를 화장실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온 교실엔, 수 많은 시선이 저희에게 꽂혔습니다. 검은벽과 같은 실루엣들 사이에, 똑같이 거무튀튀하게만 보이는 그녀, 아가씨가 제게로 성큼성큼 걸어왔습니다. 그리고는 제가 보는 세상은 크게 한번 돌아갔죠.

"야, 이 씨발놈아, 일로와봐."

 어째서 저는 뺨을 맞은 걸까요, 왜 저 실루엣들 사이에서, 경멸과 응큼한 시선만이 가득한 것일까요, 그 이유를 저는 곧 알 수 있었습니다.

"너 씨발, 저년이랑 창고쪽에서 뭐했냐?"

"그저 얘기를 나누다 왔습니다."

"얘기? 허, 무슨얘기?"

"나중에 졸업하면, 찻집을 차리자는, 그런 시답잖은 얘기였죠."

 저의 말이 끝나자, 다시금 제가 보는 시야가 크게 휘청였습니다. 후라이펜을 가져다 놓은 듯한, 뜨거운 감촉이 제 뺨에 느껴졌습니다.

"둘이 창고 뒤에서 존나 꽁냥대던걸 누가 봤다는데, 솔직히 말해. 니들 어디까지 했어."

 무얼 어디까지 했냐는 걸까요, 저와 그녀는 그저 벽에 기댄 채, 쭈그려 앉아, 나무 사이로 비치는 하늘을 바라보며, 얘기를 나누었을 뿐이었습니다.

"하, 아니다. 됐다. 너, 저번에 내가 하라고 한거, 아직 안끝냈지? 근데 연애질이나 쳐 하고 다녀? 넌 진짜 안돼겠다. 그냥 꺼져."

"예, 교실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아니, 짐 싸들고, 밖으로 꺼지라고, 사람을 불러 놓을테니 말이야."

 그 말은,

"해고라고, 씨발. 해고라고! 하,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부터 거두는게 아니었는데, 후."

 아, 그렇습니다. 그녀는 이미 저를 소꿉친구로조차 보고 있지 않았던 것 입니다. 그저 또래의 머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멍청한 저는 그 것을 몰랐죠. 아니, 사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된 것 이지만, 그럼에도 저의 연고를 만들어 준, 돌아갈 집을 만들어 준, 그녀를, 제 인생의 모든 부분을 함께한 이 아가씨와 함께, 그저 옆에 있기 위해 눈과 귀를 가리고 있던 것 입니다.

 그녀와 저는, 처음부터 친구조차 아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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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날은, 평소보다 기분이 좋지 않은 날 이었다.

 분명, 오늘까지 끝내야 하는 일이 있을 터였지만, 그 양은, 분명 혼자서는 못할 양이었고, 몇 시간 뒤, 눈물을 머음은 채, 나에게 의지하는 그의 모습을 생각하니, 온몸이 떨려왔다.

 점점 더 새로운 색이 칠해지는 저 산과, 나무들, 푸르른 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강물들을 창문 너머로 쳐다보았다.

 오늘은 또 어떤 귀여운 모습으로 내게 의지할까, 어떻게 해야 나만을, 그 사랑스러운 아이를 나만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였다.

 분명 처음엔 부끄러움으로 시작되었다. 너무나도 상냥한, 귀여운 듯 잘생긴 그 얼굴은, 내게는 치명타로 다가온 것 이었고, 거기에 이은 부처와도 같은 넓은 마음과 심성, 그 성격이 나를 끝장내 놓았으기에, 솔직하지 못한 나의 마음은, 그에게 틱틱, 괜시리 한번 찔러보고, 험한 말도 했다.

 그럼에도, 그가 너무나도 좋았기에, 그 누구에게도 넘겨주고 싶지 않았고, 나만이, 오직 나 뿐만이 그의 곁에서 그의 인생을 함께 걸어나가고 싶었다.

 나의 계획은, 꽤나 성공적이었다. 점점 더 나의 말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점점 더 주변에서 고립되어 갔다. 점점 더, 내게 의지하게 되었다. 그 암코양이년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모든게 수월하다 생각했다.

 그가 그녀를 챙겨주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신경을 쓰고,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그녀와 밥을 먹는 경우도 생겨났다.

 그에게 물어보았을 땐, 별 사이가 아니라 했고, 나 또한 집 안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선심써서 친구 한둘정도는 눈 감아주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지나갔다. 그 것이 상상도 못할 화를 불러들일 줄은 몰랐지만.

 예전에 쓰던, 지금은 부식이 심해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람조차 지나다니지 않는, 학교 뒤의 구석진 곳에 있는 창고 뒷편에서 그를 봤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년과 함께. 그 내용의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살이 붙고 붙어, 어디까지 굴러갈지 모르는 눈덩이와 같이 커져만 갔다.

 내가 그리도 주의를 주었을텐데. 남자란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의 동물 인가 보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라는 여자가 있으면서, 한 평생을 함께 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내가 있으면서. 이번 일탈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생각했고, 그러던 중 그가 교문을 열고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그 여자는 어디간것인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만은 확실히 눈 앞에 서 있었다.

"아니, 짐 싸들고, 밖으로 꺼지라고, 사람을 불러 놓을테니 말이야."

 감정에 휩쓸려 무턱대고 한 말 이었지만, 좋은 기회가 되리라 여겼다.

 그래, 며칠간 길바닥 생활을 하다보면, 본인이 원래 있어야 할 위치에 있다 보면, 나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겠지. 더더욱 내게 의존해 오리라, 나의 곁에 있음으로서 얻을 수 있는 평온함을 깨닫게 해 주리라, 그리 믿었다.

 사람을 불러, 그를 끌어내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기에, 그 표정이 어떠한가는 잘 보지 못했지만, 상상은 갔다. 며칠 뒤에 내게 매달려 오는 그의 표정이, 눈물을 펑펑 흘리며 제발 버리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그의 모습이, 그런 짜릿한 감정을 느끼며 돌아간 교실엔, 기사 여럿과 어딘가 높은 직위에 있는 듯한 한 사람이 있었다.

"후진, 후진이란 학생을 알고 계시는 분은 없습니까?"

 그년을 왜 찾는 것일까, 그들의 왼 어깨에 붙어있는 황실의 문양은, 그년이 그저 평범한 이유로 이름이 불리우는것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해 주었고, 일전에 들었던 그 소문이 뇌리에 스쳤다. 그 때, 뒷 문이 열리며 조심히 들어온 그녀와, 그 높아보이는, 양복을 입은 중년의 남성의 눈이 마주친 순간, 그들이 그녀를 그토록 찾는 이유를, 그 소문의 내용이, 지금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모두 알게 되었다.

"후진공주님, 후진공주님이시군요. 애타게 찾고 있었습니다."

 무언가 큰 일이 났다는 것 또한, 깨닫게 되었다.

.

 사흘 째, 학교에도, 기숙사에도 가지 못한 채, 그저 길바닥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제가 무얼 잘못한 것일까요. 분명 그때 내게 주어진 일은 힘들었지만, 그럼에도 어찌저찌 거의 다 끝내었을 만큼, 겨우, 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큼이나 해내었다는 제가 뿌듯해질만한, 그만큼 열심히, 그리고 또 고뇌하며 한 것들인데, 역시, 일을 시작한다면, 끝을 내어야만 하는군요. 오늘도 한가지 배움이 있었습니다.

 저는 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걸까요, 저는 왜 그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저는 왜, 아직까지도 그 흔한 행복이 제게는 오지 않는 것입니까.

 그 때 였습니다. 제 앞에 커다란 마차 한대가 멈춰 서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마차에 그려진 문양은, 아무리 배움이 부족한, 우매한 저라도, 그 것이 황실의 문양이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분명 하녀 한 명이 마부석의 뒷자리에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문을 열기도 전에, 벌컥 문을 열고 나온 누군가가, 저를 부르는 것 이었습니다.

"후붕아!"

 긴 생머리를 늘어트린, 둥그런 큰 눈에서, 처음 만난 날과 같이 커다란 눈물방울을 글썽이며, 내게 안겨든 그녀는, 평소와는 다른, 화려한 드레스를 입으며, 달콤쌉싸르한 냄새를 풍기었습니다.

 당혹스러웠습니다. 어째서 이 아이가, 황실의 마차에서, 이렇게 좋아보이는 옷을 입고, 어여쁘게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린 채, 내게 달려드는 것입니까.

 그저, 수녀에게 길러진, 저와 같은 아이가, 어째서 황실의 마차에서 내리는 것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눈동자에 비춰진 당신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답네요.

 여전히 밝아오지 않는 이 밤이, 자책하며 흘리던 눈물이, 당신의, 너의 그 아련한 미소에, 녹아 내리듯, 흘러가는군요.

 저의 품에 안긴 그녀를, 저도 꼭 끌어 안았습니다. 아가씨가 제게 했던 말들이, 이 가엾고도, 사랑스러운 소녀가, 저의 마음을 그저 이용하려 하는 것 뿐이라는 그 말이, 저의 눈물에 섞여들어 땅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역시 저는, 인간이란 것을 제대로 이해조차 하지 못한, 멍청한 저는, 마음 속 깊은 곳에 그 것을 숨겨두었나 봅니다. 상관 없다고 했지만, 어느정도는 예상해 두고 있었나 봅니다. 그만큼 저는 인간이란 존재에 신뢰가 없었고, 애정조차 없었다는 얘기겠죠.

"후붕아, 이젠 내가 지켜줄게."

 이 변치않는 나날에, 늘 비를 흘리며 다니던 제게, 이 소녀의 한마디, 그 밝은 미소 한번은, 우산이 되어 저를 덮어 주었죠. 이젠 진짜 상관 없습니다. 그렇게 만든 우산이, 사실 저의 내장을 엮어 만든 것 이라 하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사실, 이제는 그녀의 말 조차 신뢰가 없었습니다. 그도그럴게, 이렇게까지 저를 꼭 안아주고, 저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미소를 짓기도 하고, 감사인사와, 행복감이 섞인 말을 걸어주는 존재가, 그리 악한 마음을 품고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밤하늘에 터지는 불꽃놀이의 커다란 소음이, 마치 세상의 모든 소리를 없애버린 듯,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이 세상에 저와 소녀, 단 둘 만이 있었고, 고요한 소음 속에 울려퍼진 한마디가, 저를 다시 울렸습니다.

"좋아해."

.

 벌써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사흘째 되던 날, 나는 사용인들을 보내, 그를 찾아오라고 시켰고, 끽해야 이 학교가 있는 동네 안에 있을거라 생각한 내가 잘못 되었다는 듯, 일주일째 그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엄지 손톱에서 옅은 피가 흘렀다. 엄지손톱은 어느덧, 울퉁불퉁해진 채, 손가락과, 손톱의 결합부까지, 아니면 그 뒤까지 파먹혀 있었다.

 그 때, 문이 벌컥 열리며, 한 머슴이 찾아왔다.

"아가씨, 아가씨. 그를 찾았습니다."

 숨을 헐떡이며, 마치 무언가에 쫒기듯 뛰어들어온 그 사내는, 횡설수설하여,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래서, 찾았다며, 어디있는거야? 바로 내 앞에 데려 오라니까?"

"그게, 황실이, 황실이 그를 데려 갔습니다."

 황실. 황실이라 함은, 최근 서녀를 찾아, 그리도 기뻐 날뛰는 곳이 아니던가. 나의 불안감은, 점점 더 나를 뒤덮는 기름이 되어, 자그마한 불씨 하나로도 검붉게 타오를 만큼, 불안함과 긴장감이 엄습해왔다.

 그런 곳에 후붕이는 아무런 연고도 없었고, 서녀를 찾은거지, 서자를 찾은게, 잠깐. 서녀. 그래, 그 년, 후진이라는 그 년이 일주일 전, 그 황실의 서녀가 되지 않았던가.

 분노에 차 올랐다. 이 것은 분명한 불씨가 되어, 나를 불태우기엔 충분했다.

 그년, 이제서야 본성을 밝혔구나, 그리도 남의 남자를 탐내더니, 기어코 내게서 빼앗아 가려는 구나, 사랑싸움 중인 그를 홀라당 벗겨먹을 작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걸 사랑싸움, 이라 보기엔, 타인의 시선에선 문제가 있었으나, 십수년간의 우리 관계를 되짚어 본다면,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은 확실시한 것이었고, 내가 그 무슨 짓을 해도, 나만을 바라봐줄 사람이었으니, 나만을 바라보고, 나만을 위해 행동하는 그가 된다면, 이쪽에서 먼저 사랑을 속삭일 예정이였는데, 그 것을 그년이 빼앗아 가버렸다.

"씨발."

 나지막히 욕이 나왔다. 이번 주말이 끝이 난다면, 한낱 유지인 본인의 집안이, 황실에 무작정 찾아 갈 수는 없었지만, 이 주말이 끝나고, 다시 등교를 한다면, 그 또한 학교에 찾아오리라, 그 때를 노리는 것 이었다.

 아무리 내가 최근들어 조금 더 괴롭혔다고 해도, 이렇게 홀라당 다른 여자에게 갈 수 있을까, 그에게 감사인사를 전한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매일 매시 매초, 그에게 감사를 느끼고 있었는데, 배신당한 기분 이었다.

 나쁜 건 그였다.


 그랬던가?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다시 학교로 가게 된 지도 어언 나을째 였지만, 나는 여전히 그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그저, 웃고만 있는 그의 얼굴을 바라볼 뿐 이었다. 이 세상에서 두려울 것 없다는 그 미소, 순박하고 순진한, 하얀 백지와 같은 저 깨끗한 미소, 그 것을 본 순간, 머릿속의 누군가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의 웃는 모습을 본 적은 있어?

 없었다. 아주 어릴 적을 제외하곤, 없다시피 했고, 저런 미소는 본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섣불리 그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그의 주변엔 언제나 사람이 많을 줄 알았지만, 정확히는 그가 지금 보필하고 있는 저 서녀의 주변에. 그러나 의외로 거의 대부분의 인물은 저 둘에게 접근조차 하지 않았다. 평소의 업보가 있는 몇몇 인물들은 더더욱. 가끔, 그녀에게 사과를 하러 간 인물들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저 멋적에 웃기만 하고, 그는 이빨을 들어낸 맹견과 같이, 그들을 경계했다.

 그저 그녀와 함께 있을 때에만 웃고, 그녀 이외의 인물에겐 조금은 찡그린, 그런 표정을 지을 뿐 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간단히 그를 빼앗길 순 없었다. 며칠간의 다짐이, 오늘 실현될 예정이었고, 생각보다 손 쉽게 그 첫 단계를 밟을 수 있었다.

"방과후에 이렇게 저만 불러내신 이유를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오랜만에 보는 그의 정면 모습. 커다란 키는 아니지만, 나쁘지 않은 키와 외모, 그 순수함이 묻어나는 눈빛, 조금은 씁쓸함이 묻어나오는 얼굴의 느낌 등, 그 무엇도 너무 오랜만이라, 너무나도 좋은 절경이라 표현해도 무방했는지라, 그저 한동안 그의 얼굴을 처다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냥 몸만 와, 지금이라도 군말 없이 돌아오면 앞으로는 잘 대해 줄게."

 이미 던져진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말하자 마자 후회스러웠다. 아, 조금 더 상냥하게 말해볼걸, 조금 더 귀엽고 예쁘게 보일만한 표정과 태도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메워갔다.

 그의 미소가 보고 싶었다. 왜 내 앞에서는 그 미소를 지어주지 않는걸까,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아니, 지금에와서는 그 이유를 확실하게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깨끗한 미소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바램의 반대라 하던가, 미소는 커녕, 조금씩 일그러지는 그 표정이, 내게 깊게 박혔다. 가슴이 아려왔다. 그와의 만남이, 이걸로 끝이 날 것 만 같았고, 그와의 대화조차 끊어질 것 같았다.

"아가씨, 저의 해임을 결정 하신 것은, 다름아닌 당신이지 않습니까, 저 역시 할당량을 체운 적이 단 한번도 없었기에, 늘 아가씨에게 도움만 받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 하신 대로, 저는 당신의 집안에서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기에, 돌아가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아, 끝났다.

 그가 내세운 방패는, 나의 언변으로 이루어진 그 방패는, 그 무엇보다 단단해 보였고, 던져진 말을 주워담을 수 없다는 그 말이, 다시금 복기되는 그 말이, 이 머리 속에 각인 되었다.

"하, 하지만 후붕아. 나, 날 좋아했잖아. 제발, 다시 우리 함께 해보자, 내가 다 도와줄게, 힘든거 있으면 내가 다 해결해 줄게, 나도, 나도 너 좋아한단 말이야, 제발.."

 더 이상 챙길 자존심은 없었다. 그와의 모든 실이 끊어질 것 처럼 위태로웠다. 이제 더는 보이지도 않을만큼 가느다란 실이, 조금씩, 조금씩, 끊어져만 가는 그 실이, 나를 천천히 휘감았다.

"하지만, 그 감정을 짖밟아 버린 것 또한 당신이죠. 애시당초 저를 인간 미만 취급하지 않았습니까. 저택에서도, 이곳에서도. 당신이 저에 대한 좋은 말을 한 기억은, 적어도 제게는 없군요."

 제발, 제발.

"다신 이렇게 둘이서 얘기할 일도 없겠네요. 그럼. 후진, 아니, 황녀님께서 절 찾으실 테니까요."

 그렇게 끊어져버린 모든 실이, 역시 나를 휘감아 올라왔으며, 점점 더 세게, 점점 더 빠르게 조여오는 이 실들 때문에, 살이 파이고, 찢어져, 전신에 피가 흘러 넘치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
.
.

 오늘도 멍청하게 홀로 복도를 거닐다 발견한 그들을 그저 바라만 보며, 걸음을 멈춰 세웠다.

 어느덧 새하얀 눈이 내려와 세상을 덮어버리는, 매서운 바람이 창문을 두들겨 오는 그런 날이었지만, 저 창 밖의 저들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춥지는 않은지, 어딜 저리 즐겁게 가고 있는 것일까.

 아아, 내가 좀 더 솔직하게 그를 대하였다면, 내가 조금 더 그의 마음을 고려해 주었더라면, 내가 조금더, 조금더.

 무한히 굴러가는 이 후회스런 생각이, 저 창 밖의 눈들과 만나, 겉잡을 수 없는 눈덩이가 되어, 그대로 나를 덮쳐 오는 것만 같았다.

 어째서 이리 된 것일까, 역시 내가 그에게 사랑을 표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봐라, 결국 이렇게 돌아온다. 다 나 때문 이었다. 내가 시작이었다.

 다 나 때문이었다.

 아, 그가 웃는다. 저 귀여운 모습좀 봐봐.

 그런데, 그 건 나를 향한 미소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다시금 침울해졌다.

 아마, 이런 날이 반복되는 것이겠지. 앞으로, 평생.

 하하, 웃음이 흘러나왔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그런 미소가.

모든 것은 지나간다 하지만, 이 것 만은, 전혀 지나갈것 같지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그의 뒷 모습만을 바라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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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쓰던 가족후회물 있었는데 쓰다가 너무 뇌절치는거 같아서 그냥 소재글 쭉 보고 맘에 드는걸로 하나 휘리릭 갈겨 썼어.

평소 쓰던 문체가 아니라 잘 못 쓴거 같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