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루나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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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는 항상 여기 있구만 에이든."


"뭐 제 삶의 낙이니까요 그런데 이 시간에 여기 있어도 되는 겁니까.

술 냄새까지 풍기고 부인 분들이 기겁을 할텐데요."


"한 명도 벅찬데 두 명이 긁어대니 안 나오면 못 버티겠더라고

자네도 솔직히 안사람 때문에 여기 나와 있는 거 아닌가"


"뭐.. 확실히 한 명도 벅차긴 하죠"


시덥지 않은 결혼 생활 이야기에 남자는 웃음을 터뜨린 후 에이든이 한창 작업 중인 것에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그건 뭔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거 같다만."


"저도 처음보는 광석입니다. 어떻게 가공할지 고민하고 있었죠."

"정말로 일에 진심이구만. 내가 항상 최전선에서 싸워도 이렇게 멀쩡한 건 에이든의 장비 덕분이었지."

"오히려 용사님 일행분들이 아니었으면 제 장비도 그저 고물에 불과했죠."


크흠하고 헛기침을 하며 목을 고르는 용사를 본 에이든은 그가 진짜 여기 온 이유를 말하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고 보니 항상 자네 아버지가 말했었지. 

에이든이라는 성이 명문가에 입적하는 걸 꼭 보고 싶었다고."


"가기 전 늙은이의 노망이셨죠. 저희한테는 남작이라는 작위도 과분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그래서 생각했지. 공작 지위를 수여받은 내가 우리 자식 사이를 이어주면 그 분의 마지막 바람을 들어드릴 수 있다고."


"아이고 됐습니다. 술 마시고 못하는 소리가 없네." 


"이거 지금 내가 술김에 하는 헛소리인 줄 아나 본데.."


용사는 이내 품에서 무언가 꺼내 내용을 확인하고 만족한다는 듯이 종이를 내밀었다.


"자 여기에 서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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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사로운 햇살이 기분좋은 정오의 티타임.

나는 분명 티타임을 좋아하지만 눈 앞의 한 사람 때문에 차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가씨 그 저기.."

"왜?"

"..차 향기가 참 좋네요.."

"응."

"...."

"...."


앞에 앉아 있는 아가씨는 앨리스 루나라이트.    

벌써 만난 지 일주일째지만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차만 홀짝거린다.

신비로운 하얀 머리와 토파즈과도 같은 눈동자는 그녀의 과묵함과 더불어 마치 인형과 같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모든 일은 일주일 전 루나라이트 가에서 보낸 편지에서 시작됐다.

아버지는 처음에 편지를 보고 자신의 허벅지를 쎄게 꼬집으셨다고 한다.

아무리 가문의 사이가 좋더라도 공작가에서 남작가에 혼담을 제의하는 건 매우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조금 황당하게도 지금에서야 발견된 용사님의 종이 한 장 때문이었다고.   

아무튼 납치당하듯이 공작가로 향한 뒤로 앨리스를 만나 침묵의 티타임을 가지는 것이 하루의 일과가 되었다.


"저기."

그녀가 먼저 말을 걸다니 긴장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네. 무슨 일이시죠?"

"쿠키는 어땠어?"


일주일만의 첫 질문이 쿠키 맛의 소감이라.

그녀의 다소 뜬금없는 질문에 과연 숨겨진 의도가 무엇일지 머리를 굴리며 대답했다.


"평소보다 더 맛있었습니다."

"..그래."


만족스러운 대답을 얻은 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앨리스는 그 뒤로 말을 건네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다라는 것을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왜 그렇게 한숨을 푹푹 쉬고 그래?" 

"아 미안. 나도 모르게. 신경쓰지 마."

"너가 왜 그런지 맞춰볼까?"


나는 잠시 손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 인형 공녀와의 약혼 떄문이지?"

"마녀가 독심술에 능하다는 건 처음 듣는데."

"너랑 나랑의 세월을 생각하면 마법은 필요 없는 거 같은데?"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밝은 갈색 머리를 가진 소녀의 이름은 클로에 스텔라

과거 용사 파티의 마법사이자 현자라고도 불리는 케인 스텔라의 후손이자 나랑은 흔히 말하는 소꿉친구와 같은 관계다.

지금 나는 그녀에게 부탁받은 물건을 찾기 위해 그녀와 함께 창고를 뒤지고 있다.

그녀의 마음씀씀이에 힘입어 나는 넋두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갑자기 약혼이라니 너무 갑작스럽고 또 루나라이트 양이 도대체 뭘 생각하는지도 전혀 모르겠고.."

"저번에 말한 건 생각해 봤어?"


저번에 말한 거라니 설마 그걸 말하는 건가.


"이미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다고 하는 거? 상대는 그 루나라이트 가야. 애초에 그럴 사람도 없고.

..근데 왜 그렇게 보는 거야?"

"에휴 됐네요. 진짜 하루 종일 돌만 만져서 머리도 돌덩이가 되버린건가.."


나는 노려보는 그녀를 뒤로 한 채 겸연쩍은 마음으로 다시 상자를 뒤지기 시작했다.

사실 이 약혼이 걸리는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이유가 있다.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어릴 적 앨리스와의 마지막 기억. 그걸 다시 떠올리자 마음에 질척한 어둠이 피어 올랐지만 찾았다라는 클로에의 외침과 함께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근데 이 마정석 너무 오래되서 위험해 보이는데?"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마정석은 위험물에 가까운 하얀색을 띄고 있었다.

"설마 터지게야 하겠.."

마정석을 꺼내려던 나는 말을 끝마칠수 없었다.

어느새 내 몸이 하늘을 날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이든. 에이든! 괜찮아?"


쓰러진 나를 지켜보는 클로에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나의 의식은 깊은 어둠 속으로 빠졌다.


아 진짜 터질 줄은 몰랐네라는 생각과 함께.





다시 눈을 떳을 때는 처음 보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루크!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누구세요?"

"맙소사.. 일단 의사를 불러오마."


중년의 여성이 나간 것을 확인한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방은 벽에 걸려있는 사진으로 보아 아마 내 방인 거 같았다.

..큰일 났다.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누구인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마치 머릿속에 안개가 낀 느낌이랄까. 거기에 폭풍우까지 치는.

다행히도 머리가 깨질 듯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이내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분명 오래된 마정석을 꺼내려다가 날라가 버렸지.

다행히 스텔라는 폭발에 휘말리지 않았던 거 같았다.

그나저나 아까는 어머니보고 누구세요라고 한 건가..

꽤나 심한 짓을 해버렸네. 

여전히 심한 두통에 신음하던 사이 불현듯 어느 생각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이대로 기억을 잃은 척하면 파혼이 되지 않을까라는 불온한 발상.

공녀의 남편이 기억을 잃은 팔푼이라니 당치도 않은 일이다.

애초에 약혼의 계기도 백 여년 전의 종이 한장 때문이 아니었는가.

그 내용도 자기가 아닌 먼 후대의 숙제로 남겨도 아무 문제 없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해도 되는 걸까.

부모님도 슬퍼하실 테고 스텔라는 자기 탓이라고 심하게 자책하겠지.

고민하던 사이 왼팔의 오래된 흉터가 문득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

'다시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마.'


떠올리고 싶지 않은 추억을 떠올리고 있을 때 밖에서 소란스러운 말소리가 들렸다.


"에이든 님 괜찮은 걸까요.."

"기억상실인 것 같다니. 믿을 수가 없네요.."

"그래도 하루만에 깨어나셔서 다행이네요."


..모든 건 그녀와 나를 위해서야.

나는 결국 모두를 속이기로 결심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사흘이 지났다.

기억이 없는 척을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매우 힘든 일이었다.

다 아는 것을 모르는 척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가장 괴로운 건 주위 사람들이 내 건강을 걱정할 때마다 드는 양심의 가책이었다. 

특히 스텔라가 자신의 잘못이라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볼 때는 그녀에게만은 모든 걸 털어넣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모든 건 오늘을 위해서였다.

마차 너머로 루나라이트 저택이 보이자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계획대로만 하자.


"안녕하세요. 루나라이트님. 소문으로는 들었지만 정말로 아름다우시네요."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예전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인삿말을 건넨다.


"정말로 기억을 잃었구나.."


그 뒤 놀라는 앨리스를 개의치 않은 채 그대로 그녀의 머리에 손을 뻗는다.

그녀도 내가 그럴 줄은 몰랐는지 손을 피하지 않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아 머리에 먼지가 있어서 그만.. 죄송합니다."

물론 그녀의 머리에 먼지 따위는 없었지만 이렇게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앨리스 루나라이트. 그녀에게는 전설 같은 소문이 있다.

어느 사교 파티에서 술 취한 남자가 사람을 착각해 앨리스의 팔을 잡았다가 그녀의 시선에 졸도했다고 한다.

그것도 바지에 오줌을 지린 채로.

그 뒤로 그녀에게 말을 걸면 3보 정도 거리를 두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한다나 뭐라나.

아무튼 요지를 말하자면 그녀는 신체적 접촉을 매우 싫어한다는 것이다.


손을 거두고도 멍하니 있던 그녀는 자신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 깨달았는지 흠칫하고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약간 붉어진 그녀의 귀와 고르지 못한 숨소리를 보아하니 필사적으로 화를 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는 나를 잠시 흘겨본 뒤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아들의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공녀님. 이야기는 들으셨겠지만 아들은 기억상실을 앓고 있습니다. 

약혼에 관해서는 재고해 보시는게 어떨까요?"


나이스 어시스트입니다. 아버지.

이렇게 이용하는 건 죄송하지만 나중에 그만큼 효도할게요.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뒤 이내 침착하게 말했다.


"단 둘이서 이야기를 하게 잠시 자리를 비켜도 될까요?"





그녀와 같이 정원으로 나가 늘 차를 마시던 야외 테이블에 도착했다.

같이 가는 동안 그녀는 역시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또 침묵을 먼저 깨는 것은 나의 몫인가.


"루나라이트님. 제가 기억을 잃기 전에 저희는 어떤 사이였나요?

들은 바로는 같이 티타임을 가진 뒤 헤어지는 게 끝이었다고 들었는데."

"아리시아."

"네?"

"우리 둘만 있을 때는 아리시아라고 불러줬어."

'그런 적 없는데요.'


그녀의 쌩뚱맞은 말에 목까지 나온 트집을 다시 삼켰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의 다음 말은 부르는 애칭 따위는 상관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너랑 나는 서로 사랑했어. 그러니까 나는 이 약혼을 깰 생각은 없어."





처음으로 연재 써봅니다.

연재 주기는 몰?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