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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교회는 하나님의 집, 진리의 기둥과 터-일세~




 회개. 참회. 아버지의 안식은 죄를 마주하는 게 전부였다. 찬송가 합창은 듣기 거북했다. 아버지의 새벽은 내 새벽이기도 했다. 새벽에 죄를 돌이켜보고 아침이 밝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나는 새로운 한 주를 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적응되어버린 생활 리듬이었다.


 아버지의 안식일은 월요일이었다. 


 아버지에게 있어 일요일은 바쁜 날이었다. 안 그런 사업이 어디 있겠냐마는 요식업은 특히나 휴일일수록 더 일해야 살아남는 업계였고, 제과점이라고 별반 다를 건 없었다. 주변에 교회가 널려 있는 동네 상황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호불호가 갈리지 않은 물건이면서 너무 싸지도 아주 비싸지도 않은 신도들끼리의 선물로는 빵만큼 적절한 게 없었다. 누군가의 안식을 위해 필요할 일용할 양식을 만드는 게 아버지의 일이다. 아버지가 일요일에 쉴 틈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월요일에 쉬시는 건 단순히 일요일에 쌓인 피로 때문은 아니었다.






이 터 위에 다져진돌로 주추 놓고 세-웠으니...


 


 문틈 사이로 종교방송의 찬송가와 거실의 불빛이 들어왔다. 아버지가 일찍 나가지 않는 월요일 새벽은 항상 이랬다. 어머니가 없어진 뒤 아버지는 독실한 신자로 변해 있었다. 어머니가 나를 끌고 가지 않게 돼서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된 나와는 상반되는 태도로 변했다. 빵집을 차리기 전의, 내가 아주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분명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는 가게를 차리기 전이라 시간이 많았음에도 말이다.  


 프랜차이즈 가맹점이 지역상권을 망가뜨릴 때에도, 부동산이 미쳐돌아가 임대료가 솟구칠 때도 견뎌낸 365일 이어지던 아버지의 가게는 재작년의 겨울을 보내고 나자 쉬는 날이 생겨났다. 가까스로 안식을 찾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나는 발치에 놓인 충전된 폰을 뽑았다. 그리고 침침한 책상을 더듬었다. 오전 네 시. 구수한 음질의 브릿팝으로 새벽예배 종교방송의 찬송가를 막았다. 이어폰 끈이 실타래처럼 내 팔에 엉킨다. 구질구질하다.


 아버지의 행동을 표현하기에 후회라는 단어로는 부족하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종교는 진통제였다. 결핍을 채워 주는 도구가 아버지의 신앙이었고, 함께하지 못한 시간을 돌이키는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마음이었다. 


 사랑의 기본은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다. 존중과 배려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이해로 포장된 타협을 이끌어낸다. 인민의 아편이라는 문구는 적절하다. 의심 없는 믿음은 마약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랑과 종교는 그런 점에서 비슷하다. 이해를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안식이라는 목적으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으로.


 사회적 시선과 주변 환경 문제로 황급히 안식을 찾기 위해 결혼하신 부부가 내 부모님이셨다. 두 분이 어떻게 만났고 어떻게 여생을 함께해왔는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도 질리도록 들었고, 내가 태어난 뒤의 일도 끝없이 들어버린 것이다. 인생의 반려자, 동반자라는 개념은 으스스하다. 과거가 족쇄처럼 쌓이고, 그렇게 쌓인 족쇄는 서로를 향하는 무기가 된다. 가장 작은 닫힌 사회에서 벌어지는 알력 다툼은 치열했었다. 나는 그 두 사람을 지나치게 잘 알았다.


 비록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기는 해도 관찰자의 시선으로 관계를 바라볼 수 있었던 나와는 다르게 두 분은 서로에게 그러지 못했다. 결핍이 무서운 점은, 자신이 결핍인 것조차도 모르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무서운 점은, 자신이 결핍되었다는 걸 깨달은 사람을 만든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무서운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방법을 몰랐을 뿐이다. 자신의 부모에게서 사랑을 베푸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게 아버지의 죄였다. 어머니는 사랑받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사랑을 눈치채지 못했다. 자신의 부모에게서 사랑을 받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게 어머니의 죄였다. 업보는 확실하게 돌아왔다. 서로의 결핍을 모른 채 엮인 가정의 결말은 고리타분한 비극이었다.


 아버지의 안식일은 월요일이었다. 그건 그저 일요일에 믿음을 바치지 못 했었기 때문이다.


 




 아침으로 빵을 먹은 적은 없다. 어머니가 남긴 유언 같은 관습이었다. 재고 처리에 애를 끌어들이지 말라느니, 아침이 중요하다느니, 영양이 불균형해진다느니, 그런 게 이유였다. 그래서 나는 빵집 자식치고는 빵을 별로 싫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씩 진절머리가 나기도 했다. 앞으로 싫어지게 될 거라는 사실에. 아버지와 내 아침 준비를 위해 부엌으로 향할 때마다 종종 드는 생각이었다. 

 

 제빵을 배우게 된 건 작년의 일이었다. 겨울이 지난 뒤 말이 없어졌던 부자는 학교의 고등해진 진로상담을 계기 삼아 간신히 말문을 열게 되었다. 내 진로란에 처음으로 제빵사가 적혔고, 1학년 담임이었던 게으른 국어 교사가 그걸 아버지에게 알린 게 계기였다. 


 어머니의 세뇌에 가까운 언질이 쌓인 까닭에 나는 아버지의 직업에 관해 반항적이었다. 여러 각도로 그 시절의 나를 성찰해보면 애정결핍으로 인한 반항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중학교 때 미친 짓을 그리도 저질렀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게 변했다. 미쳐 있던 소년은 안식을 찾은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뒤늦게 알아채서였을까. 이건 뭐라 확신이 들지 않는다. 무슨 이유였든 간에 혼란스러웠던 나는 안주할 거리가 필요했다. 그렇게 소년은 머저리가 되었다.


 깨뜨리고, 떨어뜨리고, 굽고, 익고, 섞고, 덮고,  빠르게. 레시피는 이미 있으니. 그리고 정확하게. 요리에 대해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었다. 


 계약 맺는 법과 관리하는 법을 배우고, 거래처를 분석하고 상대하는 법을 배우고, 흥정과 인맥을 배우고, 서비스를 배우고, 직원과 아르바이트를 어떻게 다루는지 배우고. 나는 아버지에게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제빵은 그 수단이었다.


 제빵과 요리, 그리고  사업에 낭만은 없다. 필연만이 있을 뿐이다. 살아가는 법도 그 연장이다. 우연을 바꿔 필연으로 인생을 채우면 된다. 


 내키는 대로 해석하면 그만인 철학은 편하다. 아버지의 철학은 편했고, 내게도 잘 맞았다.


 운명을 인과관계로 해석하면 삶이 편해진다. 아버지는 종교를 택했고, 나는 과거를 택했다. 늙은이가 과거를 버리고 젊은이가 희망을 잃은 흔하디흔하게 고독한 현대 핵가족의 모습에 스스로 연민을 느껴버렸다. 아버지는 신의 섭리 아래에 과거를 맡겼고, 나는 자기 연민을 안식처로 삼아버렸다. 


 운명론이 아니다. 구성주의 속의 유물론이고, 간단한 결정론이다. 우연이 필연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평범하지 않은 일을 따분하게 여길 정도인 내가 어떻게 평범하게 굴 수 있겠는가. 진지한 정신적 상담도 받고 친구놈들의 성심성의를 다한 응원까지 받아서 간신히 정신을 차린 게 나인데. 우연이 쌓이고 쌓여 앞으로 찾아올 우연마저도 너무 뻔하게 보이는 내 미래의 모습이 운명이 아니면 뭐가 운명일까. 의지 자체가 멀쩡하지 않으니 내가 제대로 된 자유 의지를 가졌는지조차 믿을 수 없는데. 물리적으로 겪은 일은 없었지만, 내 머릿속은 이미 라플라스의 악마가 활개 치게 된 뒤였다. 과거에 맞설 수도 없게 된 머저리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를 택했다. 니체의 말이 맞긴 맞았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반쯤 죽은 덜떨어진 머저리는 체계적인 자위 행위를 시작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이기도 했고,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반죽하고, 굽고, 기다리고, 반죽하고, 굽고, 기다리고, 섞고, 꾸미고, 포장하고.


 멍하니 움직이다가 잡념을  섞게 되면 모든 게 구질구질해 보인다. 한 번 느끼면 걷잡을 수가 없다. 담백한 계란 냄새에 구역질이 치솟았다. 막아 놓은 귀 사이로 들리는 설교까지도.


 자기 혐오가 그렇다. 머리는 이미 알고 있다. 자기혐오보다 더 유익한 행위는 널려 있다는 걸. 알고 있기에 스스로 합리화를 시도하고, 합리화하는 자신을 알아가며 다시 자신을 혐오하게 된다. 

 염병할, 필연의 굴레다.  








 그러면 너는 대체 무슨 우연일까.


 내게 있어서 운명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지만 너는 운명을 우연이라고 했다. 네 말을 실천하듯, 너는 내게 다가와 우연이 되어줬다. 필연일 거라 생각했던 생활이 달라져 버렸다.


 내가 그때 왜 전화를 걸었는지는 모르겠다. 겁쟁이는 행복마저도 무서워하는 법이지만, 아직 배짱이 내 안에 추하게나마 남아있었나 보다. 그렇지만 감정선도 얄팍하고, 묘사도 빈약한 게 내 문장력이라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서둘러 끝내버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작은 사과와 뻔뻔한 자기 연민의 나열 뿐이었다. 자기혐오를 빼니 나는 내 우연에게 해줄 말이 그런 것밖에 없었다. 중요한 말은 힘을 줘서 똑바로 하질 못하고, 쓸모없는 말만 늘여놓는 게 내 인생에 걸맞아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형편없는 변명만을 말해버렸다.


 네 사랑을 못 받아들이겠다느니, 아직 감정을 정리하지도 못했다느니, 싸구려 로맨스에서도 안 쓰일 궤변 투성이의 말들을. 경험에만 갇혀서 으스대다니. 어디 엑스트라로나 나올 법한 우스운 놈이다.


 꼴사나운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게 내 성장이었다.


 무슨 우연이든 간에 인과관계와 이유가 필요하고, 나는 네 감정의 이유를 모른다, 그 따위의 사상을 설파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본 사랑의 폐해는 너무 빠르게 내게 가르침을 주었다. 사랑이 귀찮고 부질없다는 내 사상을 철회할 수는 없었지만, 너에게까지 그럴 수도 없었다. 자신에게 향하는 사랑을 모욕하는 건 누워서 침 뱉기다. 남이 바라본 자신을 모욕한 만큼 자기 자신 또한 더럽혀지는 짓거리다. 그렇기에 내가 바랄 수 있는 건 네가 나를 이해해주는 일밖에 없었다. 


아주 남 감정 가지고 노는 걸 즐기고 있구나. 기만자 녀석. 


 이해받고 싶은 사람이 뭐가 잘났다고 이해해주겠다고 달려오는 사람을 거절하고 자빠지냐고. 



 잘 모르겠다. 광대 놀음이 너무 익숙해져 버린 걸지도. 


 그게 아니라 그냥 눌러앉은 걸수도 있겠다. 지금이 최선이라고. 저게 최선일지는 또 모른다고.


 무대에 오르는 느낌이다. 관객은 하나. 독자라고 해도 좋은 너는 무엇을 좋아하는 건지. 내 모든 점을? 그럴 수도 있겠다. 네게 보여준 이번 광대짓의 주제는 내 자신을 드러내는 거였으니.


 사업은 도박이 아니다. 아버지는 말했다. 나는 필연을 버리고 싶은 걸까.


 확실한 점은, 내게 사랑은 안식이 아니었다. 너와는 다르게. 벌써부터 엇갈렸는데 더 나아갈 가치가 있을까.



 망할 녀석. 이젠 감정에까지 가치를 매기려고 하는구나. 다른 사람을 막 판단하지 말라고 떠벌렸던 훈수는 잊어버린 모양이지?


 

 머저리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관대한 법이니까. 


 그래서, 너가 어떻게 말했더라.


 내 생각보다 그럭저럭 괜찮은 인물이 나니까, 조금은 더 기 펴고 살아도 된다고 했었나.


 네 감정을 이용해서라도? 


 역시 모르겠다. 수필에는 결론조차 남지 않았다. 구질구질한 내 인생. 아버지의 안식일에 이제야 동이 텄다.






 새벽 노을을 바라보며, 나는 그저 평일이 계속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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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올리려 했지만 쓰고보니 오글거려서 오늘 좀 고치고 올려버렸다

가오만 잡은 이상한 글 읽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