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첫 화라서 설명하는 부분이(TMI) 부득이하게 많습니다. 다음 화부턴 많이 줄어들 것 같습니다



해가 떠오르는 아침, 언제나처럼 침대 옆의 자명종이 울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손을 더듬어가며 자명종을 끄고 눈을 비빈다. 항상 그랬듯 시계는 아침 7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내 이름은 아이작, 그냥저냥 평범한.. 악마다.  어디부터 말해야 하나... 그래. 내가 어떻게 인간 도시에서 살게 되었는지부터 시작하자.


원래 나는 홀로 대부분의 악마들처럼 마계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나 부동산 투기를 막는다는 이유로 정부의 주도 하에 월세가 점점 오르기 시작했고, 기어코 원래의 2배를 넘어서고 말았다. 다른 집으로 이사라도 가려고 했지만, 이미 다른 악마들이 먼저 선수쳐버린 탓에 남은 곳은 집이라 하기도 민망한 곳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참 황당하다. 그까짓 집이 뭐라고..졸지에 길바닥에서 살게 생긴 나는 황급히 방법을 찾던 중 사촌 녀석이 인간들이 사는 곳에서 집을 구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대략 4개월 전 이곳, 인간들의 도시에서 살게 된 것이다.


여기서 살아도 된다고 허락은 받았지만, 인간들은 나를 별로 환영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눈부시게 새하얀 날개와 머리 위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둥근 고리를 가진, 아름답기 그지없는 천사를 놔두고 누가 나 같은 악마를 좋아하겠는가. 가져온 돈으로 괜찮은 집은 마련했지만, 여기 오고 한 달간은 아무런 일자리도 얻지 못해 전전긍긍해야 했다.


마계에 있을 때, 어렸을 때부터 책을 좋아하던 내 직업은 도서관에서 책을 수리하는 일명 '책 수리공'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생소하고, 도서관 이용객들조차 내 존재를 모르는 게 대부분이지만, 수많은 사람이 읽으며 찢어지기도 하고, 더렵혀지기도 하는 책을 끊임없이 수리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특히 아예 마력이 담긴 채 제작되어 있는 일부 책들은 수리하는 데 상당한 기술이 필요했다. 


하루 종일 제자리에서 찢어진 종이를 붙이고, 너덜너덜해진 책 끝부분을 잘라내고 표지를 새로 만드는 일은 마냥 쉽지많은 않다. 하지만 나는 책 특유의 향기를 맡는 것도 좋아하고, 무엇보다 그렇게 새 것처럼 된 책들을 누군가 읽어준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행복해진다. 자주 너덜너덜해지는 책은 그만큼 인기가 많다는 뜻이니 말이다.


나는 이곳에 큰 도서관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아보고 왔다. 여기에도 물론 책 수리공이 있었지만, 어째 나보다는 실력이 많이 떨어지는 듯했다. 나에 대한 경계심이 조금 풀렸을 무렵, 나는 매일같이 도서관에 가서 책 수리공 일을 시켜주면 안 되겠냐고 사정했다. 처음에는 거절하던 인간들이었지만, 그들의 눈앞에서 책 하나를 말끔히 수리하는 걸 본 후로는 날 믿게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을 본다. 루비 같은 눈동자는 섬뜩하게 빛나고 있고, 뿔은 말끔하게 잘려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머리가 조금 뜬 것을 제외하면 어제와 다른 바 없는 모습이다. 나는 인간들이 무서워하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뿔을 잘라내고 있는데, 손발톱처럼 죽은 세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잘라낸다고 해서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다.


식사를 하고,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와 옷을 갈아입는다. 고동색 원목으로 된 옷장에서 꺼낸 옷들은 모두 말끔히 다려져 주름 하나 없는 상태다. 잘 손질된 구두를 신고, 확실히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한 뒤 밖으로 나선다. 손목시계를 힐끗 보니 8시 14분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그때 저 멀리 달갑지 않은 얼굴이 보인다.


"너.. 여기서 나가라고 했지!"


에일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여자는, 금빛으로 찰랑이는 머리와 푸른 눈동자를 가진 도시에서 유일한 천사다. 우체국에서 일하는 그녀는 미모와는 다르게 성격이 더럽기로 악명 높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잘못한 것도 없는데 에일린은 만날 때마다 시비를 건다. 왜 그러는지 이유를 물어봐도 알려주기는커녕 더 심하게 화를 낼 뿐이었다. 하도 마주쳐서 이 상황이 익숙해진 나는 그녀를 무시하고 갈 길을 간다.


"야! 내 말 안 들려?"


"그래. 안 들린다."


흥분한 그녀가 옆으로 달려와 애처로울 정도로 느린 주먹을 날리지만, 나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가뿐히 피한다.


"너..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어째서인지 그녀는 오늘따라 더 끈질기게 달라붙는다. 마침내 에일린이 소매를 잡아당기기 시작하자, 옷이 구겨지는 걸 놔둘 수는 없었던 내가 그녀를 노려보며 나지막히 경고한다.


"적당히 해라. 어리광 받아주는 데도 한계가 있어."


순간 그녀의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보였다. 여전히 나를 노려보면서도 에일린이 소매를 놓고 뒤로 물러난다. 사람들에게 들은 바로는, 그녀는 선천적으로 날개가 기형이라 날지 못하고 마법도 한 번도 쓴 적이 없다고 한다. 확실히 날 그렇게 적대하면서도 한 번도 마법을 사용한 적이 없는 걸 보면, 안 쓰는 게 아니라 못 쓰는 게 맞는 것 같다.


정확히 8시 28분이 되서야 도서관에 도착한다. 잠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조명을 켜자 내부의 모습이 서서히 눈에 들어온다.

천장에서 화려한 샹들리에가 빛나고, 고풍스러운 책장 안에 온갖 서적이 빼곡히 가득히 차 있는 도서관은 언제 와도 좋다.


하지만 아쉽게도 내 일터는 여기가 아니다. 사서들이 머무르는 곳 뒤쪽에 있는 문 하나를 열자, 커다란 탁자 여러 개가 놓여저 있고, 수많은 책들이 곳곳에 쌓여 있는 공간이 펼쳐진다. 방 안은 종이와 풀에서 나는 냄새로 가득하다. 이곳이 내 근무지이다.


내 자리는 그 중에서도 가장 안쪽에 있고, 가장 많은 책들이 놓여져 있는 곳이다. 옆에 놓여진 책더미에서 몇 권을 골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맨 위에 있는 것부터 조명 아래에서 찬찬히 살펴본다. 어디 보자. 제목이.. '15소년 표류기'. 정말 낯익은 이름이다.


이 책은 어린아이들에게 꽤나 인기가 많다. 그러니 자주 망가지는 건 다반사. 불과 일주일 전에 내가 말끔히 수리했던 책이다. 상태를 보니 무언가에 짓눌린 듯 정확히 반으로 갈라져 있다. 아무래도 애들이다 보니 실수든 고의든 책을 누르거나 밟기도 하고, 험하게 다뤄서 손상되는 일도 빈번하다. 


이유야 어쨌든 수리를 시작한다. 천만다행으로 사라진 페이지는 없으니 생각보다 순조롭게 끝날 듯하다.

우선 벌어진 부분에 특수 제작된 풀을 마법을 사용해 꼼꼼히 펴 바른다. 위치를 잘 맞추며 조심스럽게 책을 접고 타카심을 박아넣는다. 다시 풀을 사용해 마무리 작업을 하고, 책등까지 새로 만들어준다. 


이제 무거운 것으로 눌러놓고 말리기만 하면 되는데, 여기서 내가 인간들보다 나은 점이 또 하나 있다. 커다란 나무 합판을 위에 놓고 한 손으로 책을 누르며 건조 마법을 사용하면 단 몇 분 만에 작업을 끝낼 수 있다.


뿌듯한 마음으로 새것처럼 변한 책을 이리저리 들여다본다. 그 다음 책을 수리하는 도중 문득 아침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에일린은 왜 그토록 날 싫어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다. 3달 전 날 쫓아내겠다고 도서관 안까지 쳐들어와 난동을 피운 이후로 그녀에 대한 주변의 인식은 상당히 나빠졌다. 그래도 일은 정말 잘해서 직장에서 잘리진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