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여신을 섬기는 한 신전에는 어떤 기묘한 풍습이 있다. 



신전에 있는 누구라도, 가히 비천한 노예라 할지라도, 떡갈나무에 황금처럼 빛나는 가지를 꺾으면 신전을 다스리는 사제왕을 죽일 기회를 준다는 이야기. 



만일 사제왕과 싸워 이긴다면, 그 자는 새로운 사제왕으로 추대되어 네미 숲에 있는 신전을 자신의 것으로 다스릴 수 있었다. ‘숲의 디아나’ 는 그러한 방식으로 후계를 계승하였으며, 이어졌다.



그랬기에 전통은 종종 신전에서 일하는 노예들 사이에서 떠돌았다. 저것만 따면 나를 내려다보는 이의 콧대를 꺾을 수 있다며, 혹은 신전에 있는 모든 여자를 모두 제 발밑에 둘 수 있노라며 달콤한 꿈을 꾸었다. 



걔중에는 직접 따려한 이들도 있었다. 



대부분은 비극을 면치 못했지만. 불을 쫓는 부나방처럼 그들은 하나둘 열정에 몸을 던져 사그라들어갔다. 



한 이는 황금가지를 꺾기위해 떡갈나무를 올라가다 떨어지고, 한 이는 사제왕에 칼에 찔려 천천히 죽어갔다. 우리 노예들은 참극을 계속해서 봐왔음에도, 황금가지를 잊지 못했다.



황금가지 전승은 우리 곁을 망령처럼 떠돌며, 달콤하면서도 신 포도같은 존재로 남았다. 신전에 평생을 종속된 노예에게, 유일한 구세주 였으니. 가시가 있는 꽃임을 알더라도 거부하지 못했다.



“아르고스.”



사제왕 티투스가 내 이름을 부른다.



하얗게 센 백발, 주름진 손가락. 누가본들 초췌한 노인의 모습이었지만. 그에게 쓰인 영광스런 월계수와 자연스레 꼬나쥔 하얀 단도가 ‘숲의 왕’ 임을 가리키고 있다.



아무리 그의 눈이 퀭하고, 눈가에 주름이 깊게 패였으며, 몸에 거무스름한 검버섯이 자리잡고 있다한들. 그는 신전 ‘숲의 디아나’ 를 다스리는 사제왕이었다.



“무슨일이십니까, 티투스님.”



거목에 기대어 앉은 티투스의 두 눈은 몽롱해 졸음기가 엿보였으나. 이상하게도 허멀거진 눈동자에는 총기가 깃들어 있었다. 



“어째서 가지를 꺾지 않느냐.”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비치는 가지. 티투스는 기대앉은 떡갈나무를 올려다본다. 고목 끝 가지에는 겨우살이 풀에 엮어 빛나는 황금가지가 있었다. 



“굳이 이유랄게 있습니까.”

“모두가 원하는 가지다. 심지어 나조차도 이자리에 앉기까지 그토록 기원했던 가지인데. 네 눈에는 미련조차 보이지 않는다.”



가을바람이 분다. 떡갈나무 이파리가 나부낀다.



“목숨이 아깝습니다. 그런데에 쓰기에는.”

“노예로 살던, 죽는 것과는 피차일반 아니던가. 나였다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황금가지를 꺾었을 걸세.”



“그래서, 지금은 즐거우십니까?”



물음을 들은 티투스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의 취향에 맞았던걸까. 티투스는 주름진 손으로 입가를 쓸어올리며 물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되나?”



고개를 끄덕이자, 잠이 가득해보였던 눈동자엔 초점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엿같네. 죽고싶을만큼. 평생을 딱정벌레마냥 붙어살아야하는 운명이 달가울리 있는가?”



티투스는 일어난다. 몸은 노쇠했으나, 그를 지탱하고 있는 두 다리는 떡갈나무의 밑둥마냥 단단했다. 칼조차 흠집을 낼 뿐, 깊이 파고들수는 없을 것 처럼 보였다. 그가 기대어있는 오래된 나무처럼 묘한 생기가 뿌리를 타고 넘치는 듯 했다.



“네 생각도 그러겠지. 목 메인 왕이 될 바에야 차라리 자유로운 노예가 낫다는건가.”



***



“결심했어, 아르고스. 나 이번에야말로 도전할거야.”



니카노르는 벌떡 일어나면서 뜬금없는 말을 했다. 나는 니카노르가 실수로 친 항아리가 깨질뻔한 걸 가까스로 잡아내며 식은땀을 닦아냈다. 



하마터면 물을 뜨러가기전에 일을 그르칠 뻔 했으니. 



“후, 겨우 살았네… 그나저나, 무슨 소리야, 그거?”

“응? 그야 당연히, 황금 가지지.”



당당하게 말하는 니카노르.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노라 다짐하는듯 보였다. 



“그러면서 이번에도 도망칠거잖아. 맨날 그렇게 당해놓고서 또 하게?”



항상 말은 그럴듯했다. 말만. 처음 한두번은 그래도 혹시나하는 마음에 조마조마하며 지켜보기라도 했지. 횟수가 자그마치 몇댓번을 넘어가자, 이제는 그러려니하는 마음이다. 



“아, 아니거든! 이번에는 달라!”



니카노르가 황금가지를 꺾겠다고 말한지 벌써 여덟번째. 실상은 황금가지도 꺾으러 가지 못해, 숨어있다가 주변을 돌아다니던 처녀들에게 들켜 혼나기만 네댓번째였다. 



대체 뭐가 어느부분에서 다르다는걸까. 그건 오로지 본인만이 알 터였다. 



“뭐가 다른데.”

“글쎄, 굳이 말하자면 느낌이…?”



제 자신조차 확신하지못한 어투로 니카노르는 말한다. 



“됐고, 니카노르. 일이나 해. 저번처럼 가지 꺾겠다는 핑계로 일 땡땡이치려는 생각 말고.”

“아, 아니거든! 씨, 아르고스, 언제까지고 신전에 노예로만 살다가 죽을거야? 난, 그렇게 절대 못살아! 봐봐, 저 가지만 꺾고 늙은 사제왕만 어떻게든 하면 그 자리가 우리 자리라니까?”



“그 쉬운일 한번 해보자고 죽은 노예가 벌써 두자릿수야, 니카노르. 말처럼 일이 간단했으면, 벌써 왕이 수십번은 바뀌었겠지.”



사제왕 티투스가 아무리 늙어보인다한들, 그가 살아있다는게 증거였다. 티투스가 만일 몸으로나, 머리로나 다른 노예들에게 밀렸더라면 진작에 땅으로 모셔졌을 터였다. 



“멋대로 재단하지 마! 그런건 해보지 않고는 모르는 거거든? 인간은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는 존재니까 말야!”

“그래, 그럴수야 있겠지만. 어쩌면, 어느정도는 운명이란 미리 정해져있는게 아닐까. 가끔씩 마주하는 불가역한 숙명이란 것도 있으니까.”

“잘봐. 아르고스. 이번에야말로 너가 틀렸다는 걸 알려줄테니까.”



니카노르는 머리에 이고있던 물항아리를 내려놓는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에 차츰 미래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야, 잠깐만. 니카노르.”

“말리지마, 아르고스. 나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해보고 말테니까.”



니카노르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를 황급히 떴다. 



“아니, 너가 가버리면 물은 누가 길러… ”



결국, 오늘도 다시 가지 꺾겠다는 핑계로 도망쳐버렸구나. 아마도 저번처럼 니카노르는 황금가지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제 풀에 못이겨 다시 돌아오겠지만. 



***



숲 속에는 작은 호수가 있다. 알바 구릉에 자리잡은 그 작은 호수는 언제라도 잘 익은 곡식처럼 황금빛을 여물었기에 아름다웠다. 



네미 숲도, 이 호수의 이름인 ‘네미’ 를 따서 그리 붙여진 것이었으며, 특히 달의 여신은 이 호수를 기꺼워하여 종종 ‘디아나 여신의 거울’ 이라 부르기도 했다.



“아름답네… ”



네미 호수를 보며 넋을 읽는다. 선선한 바람이 볼을 살살 어루만지는데도, 호수는 주름 없이 잔잔했다. 



기분좋은 햇살을 받은 호수는 은은한 햇빛을 비춘다. 그 빛은 해를 머금은 이삭 마냥 과하지 안되 그것만으로 아름다운 빛이다.



“네미아.”



그리고 네미 호수에는 ‘네미아’ 라고 불리는 님프가 산다. 네미아는 내 부름 호수 밖으로 불쑥 고개를 들이내민다.



“오늘도 혼자야?”

“니카노르가 도망치는 바람에 그렇게 됐어.”

“응, 뭐. 잘됐네. 이렇게 귀여운 날 볼 수 있으니까 말야.”



네미아는 제 가슴을 퉁퉁 치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네미아는 맑은 물의 요정 에게리아의 뒷바라지를 하는 작은 요정. 네미 호수에 깃든 님프였다. 님프는 사람을 홀려 호수로 끌인다는 말처럼, 네미아 역시 아름다웠다. 



그저 물기에 젖은 갈색 머리칼을 보면 이끌리듯 눈이 갔고, 반들거리는 목덜미를 보면 피그말리온이 만든 석고상처럼 인간과 작품 사이의 경계를 오가듯 아름다웠다. 



“뭐래, 바보가.”



넋 놓고 보고있으면 차마 호수로 빠질 것 같았기에, 슬쩍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어떻게든 무마했다. 그러지않았더라면 되려 허튼 말이 나왔을 터였다.



“우씨. 내 미색에도 안넘어오다니… 너같은 놈, 복수할테다!”



내 반응이 섭했던 모양인지 네미아는 화를 냈다. 화를 내는 건 좋지만, 네미아는 화를 낼 상대를 잘못 택했다. 



내가 네미아를 위해 얼마나 나 자신을 헌신했던가. 그걸 헤아려보자면, 네미아는 내게 화를 내서는 안됐다. 물개가 인간한테 무슨 말버릇인지 단단히 알려주마.



“그래, 그래. 마음대로 하셔. 그럼 무서우니까, 오늘의 이야기는 없는걸로?”

“으, 그건 아니고… 아, 아무튼. 비겁해, 아르고스.”



쪼잔하다고 생각이 들지만. 쫀심이 밥 먹여주던가? 현명한 인간은, 찬밥이든 더운밥이든 우위를 점하기위해 가리지 않는법이다.



“그래, 나 비겁하다, 왜. 그래서 얘기 듣기 싫어?”



이 근방의 숲은 디아나의 성역, 네미 호수는 순례자가 아닌 사람의 발길은 닿지 않았다. 모두가 디아나 여신의 심기를 건드리는 걸 무서워해, 네미 호수는 되려 볼 일이 있지 않는한 찾지 않는 탓이었다. 그랬기에 심심한 네미아는, 항상 내게 이야기를 보채곤 했다. 



“그건 아냐! 내가 잘못했어, 아르고스!”



그때마다 나는 그리스에서 들었던 여러가지 이야기를 풀어주며, 네미아의 심심함을 달래주곤 했으니. 네미아 입장에서는 나를 잃는다면 유일한 낙이 사라지는 셈이다.



“뭐, 그래. 사과했으니까, 나도 어느정도는 인정을 베풀도록 하마.”



잠시 정도는 여유를 가져도 괜찮겠지. 



나는 머리에 이고있던 항아리를 옆에 내려놓고 다소곳이 앉았다. 사르르 가을꽃 냄새가 상쾌하게 코를 찔렀다. 차가운 이슬이 가슴팍을 간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얘기 듣고 싶은데?” 



네미아는 찬찬히 다가와 내가 앉아있는 뭍가에 머릴 기대었다. 은은하면서도 청초한 수련꽃 향기가 풍겼다.



네미아는 무슨 이야기를 들을지 진지하게 턱을 괴며 고민하다가 한가지를 떠올린다.



“아르고스! 이번에는 인간과 님프의 연애 이야기가 듣고 싶어!” 

“님프의 연애 이야기? 글쎄, 님프와 인간의 연애 이야기가 있었던가… 그런거 말고 다른건 없어?”



네미아는 원하는 이야기를 못들어서 그런지 얼굴을 반쯤 물에 잠근 채 볼을 부풀렸다. 보글보글 기포가 올라오는게, 아무래도 화난걸 보여주고 싶은가 본데. 그 모습이 딱히 화났다고 느껴지기는 커녕,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바보.”

“바보라니. 없는걸 어떡해.”

“그래도, 나 들었는데. 에코와 나르키소스의 이야기. 그런 얘기가 아예 없는것도 아니잖아.”



그러고보니, 굳이 생각해보면 그런 얘기가 있긴했다. 그것도 사랑 이야기라 봐야한다면, 네미아가 원하는 그런 달달한 얘기가 아닐 뿐이지.



“아, 그런 얘기가 있긴하네. 기억났어. 그런데 알고있으면서, 왜 들려달라 하는거야?”



네미아는 다시 얼굴을 드러내며, 말했다. 



“언니들한테 자세히는 못 들었는걸. 뭔지 궁금해. 그러니까 해줘, 아르고스.”



에코와 나르키소스 이야기. 안될 것도 없지만, 왠지 미래가 그려지는 느낌이었다. 네미아가 슬프다고 질질 짜는 미래가. 



그냥 해주지말까, 고민하다가. 해줄까하다가 내빼는건 그것대로 네미아가 삐질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알았어, 못들어도 다시는 안해줄거니까 잘들어.”

“응!”



네미아는 팔을 대고 뭍에 기대어 귀를 쫑긋 세웠다.



다음편


황금가지, 짝사랑 님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