촤르르르.


케이드는 집 뒷마당, 커다란 드럼통 안에 수십여 권의 노트와 CD, 그리고 갖가지 자료를 들이부었다.


지난 5년 간 아버지의 오명을 벗기기 위해 병적으로 모아 온 증거들이었다. 아버지의 옛 동료 형사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지만, 케이드 입장에선 그들도 믿을 수 없었기에, 자신이 직접 합법, 불법 가릴 것 없이 수집한 자료들만 해도 가히 1테라바이트짜리 외장 하드 한개 반을 채우고도 남았다.


하지만, 오늘로써 모든 것이 끝났고. 이 증거들은 더 이상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다. 경찰에서는 교본으로 쓸 정도의 양과 질이라며 원본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지만, 그는 요청을 무시했다. 넘겨 봤자 그걸 빌미로 체포할 수도 있으니까.


케이드는 통에 휘발유를 가득 들이붓고 성냥을 그어 안에 던져 넣었다. 5년간의 고통과 힘들었던 순간들은 모두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져 갔다.


재가 다 탄 후, 케이드는 집 안으로 들어와 안을 살폈다. 소파, 탁자, 침대 같은 기본적인 가재도구 빼곤 휑한 모습이었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바닥엔 프린트한 자료들이 돌아다니고 안방엔 10년간의 실마리를 정리한 마인드맵이 벽에 빼곡히 적혀 있었지만, 이젠 그마저도 없이 이사왔을 때 그대로 깨끗한 검정색 벽으로 다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케이드의 마음은 5년 전 처음 사건의 실마리를 파내려갈 시점처럼 공허해졌다. 진실을 밝히는 것만이 삶의 목표였고 그 때문에 모든 걸 내려놓았는데, 이젠 뭘 하면서 살아야 할지부터가 막막했다.


'아버지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운 놈들은 다 감옥에 가거나 사살됐고, 혹은 스스로 지옥 가는 길을 택했지. 근데 이제 난 복수도 끝마쳤고, 더 이상 손가락질 받는 일도 없을 텐데 왜 이렇게 공허한 걸까.'


이렇게 생각하던 찰나에, 뒤에서 부드럽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여자친구 사라가 서 있었다. 문 밖에서 비치는 자동차 헤드라이트 때문에 아름다운 붉은 머리칼이 불처럼 번쩍였다.


사라가 물었다.

"정리는 다 끝났어?"


"응, 저기 태우고 있어." 


"홀가분하겠네. 아버지 명예도 되찾았고, 더 이상 고통받으면서 살지 않아도 되니까."


홀가분하냐고? 아니, 그 반대였다. 인생에서 복수가 빠진 지금, 그의 마음은 다시 텅 빈 그릇과 같았고, 무엇을 담아야 할지 모르는 상태였다.


"왜 그래? 여전히 죽을상을 하고."


"별 일 아냐."


"별 일 아니기는, 내가 너 오랫동안 봐왔는데, 네 감정 하나 모를까 봐?"


사라가 드라마에 나온 취조실 경찰을 연상케 하는 톤으로 추궁을 시작했다.


"빨리 불어, 뭐 때문에 표정이 그렇게 썩어 있는 거지?"


"전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형사님."


케이드는 맞받아쳐 주었다. 사라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농담 한 번 못할 정도로 목석 같았던 그였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농담은 물론 감정 표현도 활발히 하게 된 그였다.


"말 안 하면, 축하 기념으로 사온 이 초콜릿 케이크 혼자 다 먹을 거야."


"알았어, 말할 테니까 케이크는 남겨 줘."


"진작 그럴 것이지."


케이크는 중대 사항이었기 때문에, 결국 케이드는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뭘 하면서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직장은 새로 구했다면서?"


"아니, 일자리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 때문에."


"자기 마음?"


"지난 5년간, 난 아버지를 죽게 만든 놈들을 내 손으로 직접 찾아내 묻어 버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살아왔어. 복수는 내가 움직일 수 있게 해 주는 연료나 다름 없었지. 근데 지금은 더 이상 복수할 상대도 없고, 이젠 뭘 원동력으로 삼아 살아가야 할지 전혀 모르겠어."


사라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잠깐 소파 와서 앉아 봐."


"갑자기 왜?"


"빨리."


케이드가 앉자, 사라는 갑자기 케이크를 박스에서 꺼냈다. 흑갈색의 달콤해 보이는 초콜릿 케이크였다.


"이 케이크, 한번 먹어봐." 사라가 포크로 일부를 떠서 주었다.


"이거 축하용으로 가져온 거 아니었-"


말을 끝맺기도 전에, 케이크가 입안에 들어왔다. 달아 보였던 외견과 다르게, 의외로 쓴맛이 조금 났다.


"초콜릿인데 쓰네."


"카카오 함유량이 높은 거거든."


그러고 나서, 사라는 다시 말을 이었다.


"방금 먹은 쌉싸름한 부분은 자기의 지난 5년이야. 슬프고, 우울하고, 분노로 가득 차서 말 그대로 인생의 모든 쓴맛을 다 느꼈겠지."


그러고 나서 슈가파우더를 뿌린 다른 부분을 떠서 한 입 주었다. 이번에는 부드럽고 달콤했다.


"하지만, 인생에서 꼭 쓴맛만 있는 건 아냐. 방금 건 달았지? 이건 행복하고, 기쁨에 가득 찬 순간이야. 모든 사람의 인생에는 달콤한 순간도, 쓴 순간이 이 케이크처럼 함께 존재해. 자기는 쓴맛을 충분히 맛 봤으니까, 이제 달콤한 맛을 느낄 자격이 있어."


"하지만, 어떻게 해야 단 맛을 느낄 수 있는지 모르겠는걸. 취미생활도 가져본 적 없고, 심지어는 여행도 가본 적 없는 난데."


"내가 도와줄게."


"어..?"


"우리가 함께 복수와 불행이 아니라, 행복과 기쁨, 사랑으로 인생을 채워 나가면 돼."


"사라.."


"우리, 이 집에서 함께 살자.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도 돼. 이 슈가파우더를 뿌린 케이크 조각처럼, 내가 자기 인생에서 설탕이 될 수 있게 해 줘."


사라의 그 말은, 케이드의 공허한 마음을 다시 채워주었다. 이제는 고통과 슬픔이 아닌, 행복과 사랑으로. 그리고, 그런 케이드의 마음에 응답하기라도 하듯, 햇빛이 창문으로 들어와 두 사람을 환하게 비춰 주었다.


"정말.. 정말 고마워."


"나도 고마워. 이제, 혼자서 고통받으면 안 돼?"


"안 그럴게."


"케이크, 이제 먹을까?"


"그래."


그러고 두 사람은 함께 달콤쌉사름한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쓴맛 보다는 오히려 단 맛이 더 강했다.


며칠 후, 사라는 자신의 차로 자기 물건들을 케이드의 집으로 가져왔다. 무채색이고 텅 빈 공간에 점차 색채가 다양한 가구들이 놓였고, 하나 둘 씩 두 사람의 추억들로 채워져 갔다. 크리스마스 트리, 아름다운 꽃이 심긴 화분, 그리고 함께 여행하며 산 기념품이 든 장식장까지. 그들의 결혼 사진이 벽에 걸리기까지는 조금 더 후의 이야기였지만, 이제 케이드의 인생은 쓴맛이 아닌, 혀가 아릴 정도로 달콤했다.





전에 쓴 이 글에서 영감 얻어서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