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지 못한 말이 있다. 서하는 술김에 중얼거렸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알코올이 입 안의 말들을 뱉어내게 만든다. 인상을 쓴 서하는 정신을 차리려 입안의 살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가 중얼거릴 때는 사고를 번번이 쳤다는 것은 그녀 스스로도 알았으므로. 이번에도 실수를 하면 사고를 치게 될 것이다. 얼굴이 붉어진 것이 술에 취한 것인지, 다른 것에 취한 것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태로.

 약한 통증이 느껴지면서, 술김이 잠시 가셨다. 탕-! 금속성의 소음이 울리도록 서하는 캔 맥주를 내려놓았다. 약간의 답답함과 기묘한 해방감이 뒤섞이면서 해방을 원하는 충동을 일으킨다.

 어떤 것의 해방을 원하는 데 그래? 그녀는 답을 알고 있었다. 진심이야? 감당은 할 수 있고?

 너는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는 멍청이이고 말이지. 준호의 목소리가 쏘아붙였다. 감당도 못할 거면 제발 닥쳐. 서하는 목소리에게 욕짓거리를 했다.

 이것은 미친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당연하고, 상관은 없었다. 그녀는 그녀의 집에 혼자 있으므로. 신경 쓸 것이 없었다.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성질 머리 탓은 아니었다. 술에 취한 채로도 그것은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전화기를 든 순간 부터는 달라진다. 어떤 번호를 누르냐에 따라. 정확히는 어떤 번호를 누르든 간에. 변화가 생기고 신경을 써야 한다. 착신음이 울리면 그것은 대면한 것과 같다. 그것이 이유고, 당연한 결론이다.

 대상이 확실한 말이 입을 맴돌았다. 서하는 전화기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것을 쥐는 순간 곧바로 전화를 연결할 것이므로. 서하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준호의 표현을 빌리자면. 뒷 일은 생각도 하지 않는 웬수인 그녀도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해야만 하거나 해야 나은 결과가 나오는 일이었다. 그녀 스스로의 기준으로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최소한 때가 될 때 까지는. 기묘한 기준을 가진 일이었다. 객관적으로는 하면 안 될 일 일지도 모르고. 다른 시점으로는 해야 할 일이었다. 이는 무언가를 당사자에게 폭로 하는 것과 같다. 그러기에 그녀는 취한 채로도 그것을 전하지 못한 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홀로 꺼내기도 힘에 벅찬 일이었기 때문에. 또한 충동적으로 전달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짧게 중얼거리는 것 정도는 괜찮을 지도 모른다. 알코올이 혈관에 흐르는 한 망설임은 줄어든다. 그렇기에 술을 마시면 후회할 만한 일을 하는 것이고. 그러나 말하면 후회할 동시에 말하지 않아도 후회할 일이었다. 답답함과 약간의 해방감이 섞이면 그것은 해방 만을 원하는 충동의 형태로 나타난다.

 서하는 입을 열었다. 한숨을 한 번 내쉬고. 서하는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좋아해, 좋아한다고 망할 놈아." 짧은 중얼거림으로 시작한 말이었다. "진짜로 좋아해. 좋아한다고! 제기랄, 빌어먹게도 좋아해! 장난도 아니고 그냥 한 말도 아니고 좋아한다고!" 결국은 외침으로 끝나버린 말이었고.

 외침으로 끝날 것은 입을 열었을 때 알았다. 그것을 깨달은 동시에. 먹이를 먹은 충동이 몸집을 불렸다. 목줄은 느슨해졌다. 5년도 넘게 지나면 끈들은 낡아 끊어지곤 하므로. 목줄에서 풀려난 것은 거리낌 따위가 없었다.

 -그냥 그대로 말해버리자. 머뭇거리는 이유는 바보같으면서도. 마냥 바보같다고는 할 수 없었다. 소꿉 친구를. 그것도 객관적으로 보면 상당히 까칠한 녀석에게 이성적으로 호감을 느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힘들었다. 여러가지로 복잡했던 사춘기였고. 한창 호르몬이 날뛰어 대느라 충동의 대명사던 시절이었다. 확실할 것도 딱히 없던 때였던 동시에 미친 것 같아도 좋아한다는 것 하나 만큼은 확실했다.

 부정기니 뭐니 할 것도 다 지나갈 쯤 까지 머뭇거리는 이유는 단순했다. 거절당하면 어떻게 하지? 그런 고민도 그녀가 겪을 수 있다는 점에서 놀라울 따름이었다. 선머슴애 취급을 얼마나 당했던지. 그녀 스스로도 자각하고 있었다. 남들 다 가져보는 연애 감정을. 그녀는 가져보지 못할 것이라고. 솔직히 소녀스럽네 뭐네 하는 것들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하는 고백하는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색해지거나 거리가 멀어지는 것 따위를 바랄 리가 없는 것의 탓이다. 스무 살 까지의 유예기간은 끝났고. 써먹기 좋은 변명은 쓸모를 잃었다. 약간의 부유감이 들었다. 어딘가 발 닿지 않는 곳에 떠있는 불안한 감각이.

 그것은 미량으로도 불안함을 선사했다. 영영 때를 놓쳐버릴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상이 몸집을 키워 충동을 일으킨다.

 그것은 바라고 있지 않았다. 고백을 한 번도 하지 못하고 끝나는 것은. 악몽으로도 꾸기 싫었다. 준호의 옆에 이성이 있을 때는 얼마나 그녀가 멍청해지던가. 고백도 못한 주제에 멍청이 같은 짓은 얼마나 저질렀나. 서하는 불안해 하고 있었다. 캔 맥주를 하나 더 따서 한 번에 다 마셨다. 허용치 이상의 알코올이 혈관에 흘렀다.

 소꿉친구가 대학생이 되어서도 여전히 친한 경우는 대중적인 견해 보다도 적었다. 고등학교까지 같이 지낸 것도 그녀에게는 일종의 기적이었다. 집이 길 하나 정도만을 끼고 있는 사이가 아닌 한 붙어다닐 이유도 마땅치 않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지닌 이점은. 같이 다닌 시간이 많다는 것. 그것 외에 또 있겠는가.

 서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더이상 미룰 수는 없다. 확신이 들었다면 거짓말이라는 비난을 받을까. 상관없었다.

 뻔뻔하다 생각해 변명조로 말해보자면. 어차피 준호는 최악의 경우에도 술에 취한 헛소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가 거절을 한다면. 술은 면죄부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삐. 삑. 삐삑. 삑. 번호가 눌렸고. 그녀는 더이상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러나 되돌려지는 것이 더 무서웠다면 믿겠는가. 결과가 어떻게 되든 전해야 하는 말은 있는 법이다. 취객의 말은 횡설수설하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처음의 주장과 결론이 반대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므로 그녀는 전화를 걸었고. 변명이 쓸모를 읺더라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짧은 착신음이 울렸다.


"밤 10시에 전화하는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냐?"


 퉁명스러운 말이었다. 익숙함을 이유로. 서하는 낄낄 웃었다. 그가 어디 친절하게 말한 적은 있던가. 그의 기준으로는 최대한 노력했다는 것을 아는 그녀는. 그것에 웃을 뿐이다.


"나도 모르징. 생각 안 하고 산다는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살면서어... 새삼스럽게도 말하네에."

"뭐 때문에 전화 한 거냐? 밤에는 전화할 일도 없으니까 뭔가 일이 있겠지. 술에 취해서 전화한 건 처음이라 신기하긴 한데. 뭐 내일 어디 가자는 거요? 그냥 생각나서?"

"어디 가자는 거? ...마쟈. 근데 오늘이지. 공원으로 나왕."

"됐다. 그냥 자라. 지금의 너는 나오다가는 취한 채로 길바닥에 뻗어 있을 거다."


 그런가. 술에 취해 있으니 공원까지 나오는 길에서도 뻗어버릴 수 있었다. 공원에서 만나고 싶은 것은 얼굴도 보고 싶었기 때문이고. 술기운이 심하게 도는 지 혀가 풀렸다. 또한 졸음도 몰려왔다.


"...하고 싶은 말...있는 데에. 대답은... 못 듣겠다. 나아 졸려."

"그러면 그냥 이대로 말해라."

"...내애가 아주 미쳤지이. 까칠한 노옴 뭐어가 좋다고오."

"연애 상담은 안 해줄 테니까 당사자한테나 가서 말하라지."

"조아해! ...조아한다고오! 망할 준호 내가 조아한다고!"


 짧막하게 정적이 흘렀다. 망했나. 확실하게 망했다.


"가서 잠이나 자라. 많이 취했다."

"진짜로오 조아해애. ...진짜로오. 그러니까아 고배기인거 믿어주라아. 히잉. ...망했다. 준호야아. 나 시렁?"

"안 싫어."


 긴장이 풀리면서 졸음이 밀려왔다. 싫다진 않다니까 다행인가. 다행이었다.


"나 너 조아해. ...진짜야. 내애가 너르 중학생 때 부터 조아해다고. 버얼써 오년째 조아한다고."


 말이 끝나자마자. 서하는 바닥에 쓰러졌다. 시곗바늘 돌아가는 소리조차도 흐릿하게 들렸다. 물에 빠져서. 제대로 들리는 게 없다는. 착각이 들었다.

 들리는 소리는 없었고. 전화가 끊어졌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용했다.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는 것 만큼이나.


"나도 좋아한다."


 그러나 한 마디는 선명히 들렸다. 잠결에도 꿈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정도로. 분명히 들렸다.

 왜냐하면 거짓말은 또렷히 들리지 않으니까. 진담은 못 들을 수가 없는 거라고. 찰나에 서하는 간단한 근거로 결론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