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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슬으슬하네…”


소름이 끼칠 정도의 냉기에, 그녀는 양쪽 어깨의 아래를 문지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에 걸려 있는 꺼진 횃불들을 본 그녀는 불을 살짝 뿜어 횃불들에 불을 붙였고, 횃불들이 밝혀지자 영묘의 안은 조금 더 밝아져 그 모습을 더욱 확실히 그녀의 앞에 드러내었다.


원형의 벽으로 둘러싸인 영묘의 안에 놓여 있는 것은 일반적인 사람이 들어가기에는 너무나도 큰 석관이었다.


“이 안에는 누가 들어있는 걸까? 크기를 봐서는 거인족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추위를 애써 참으며, 그녀는 석관을 살펴보다 이내 석관의 하단에 새겨진 고대문자를 발견했다.


시간에 의해 훼손되어 일부를 알아볼 수가 없게 된 고대 문자를 그녀는 손으로 더듬어가며 읽기 시작했다.


“태양…왕…자…잠들다? 뭐야, 읽을 수가 없잖아…”


‘태양’, ‘잠들다’ 라는 단어밖에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문장을 읽는 것을 포기하며, 그녀는 석관의 뚜껑을 살펴보기 위해 날개를 펼치고 살짝 날아올라 그 위에 착지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어라, 뚜껑도 상태가 영 좋지 않네.”


관의 뚜껑에는 누군가의 그림이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는데, 그 그림 또한 풍화되어 그 원형을 거의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피르피나가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그 그림이 왕관을 쓰고서 대검을 든 누군가를 그린 것이라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그림을 보며 왠지 그를 떠올린 피르피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왠지 그 신을 닮았네…가족인가? 아니면 자신을 위해 예비해 놓은 관일까?”


관 안에 있을 수도 있는 고인에게 실례가 되기 전에 뚜껑에서 내려가며, 피르피나는 석관이 아닌 영묘의 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영묘의 벽에는 석관의 사면과 마주보는 곳마다 인물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그 그림들 또한 세월에 풍화되어 그 흔적만 남아있는 수준이었지만 피르피나는 그들이 각자 손에 다른 종류의 무기를 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검, 창, 활, 그리고…쌍검?”


벽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을 확인하며 돌아다니던 그녀는 이내 영묘의 커다란 창 밑에 있는 제단 위에 놓인 낡은 두루마리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호기심에 그것을 집어 들어 펼쳐본 그녀는 그것이 무엇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가족 그림?”


잘 그린 솜씨는 아니지만, 조악하지도 않은 어중간한 솜씨로 그린 그림이 두루마리에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은 한 가족을 묘사한 듯한 그림이었는데, 의자에 앉아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버지의 주변을 그의 세 자녀가 둘러싸고 서 있었다.


아버지의 뒤에 서 있는 덩치 큰 아들이 누구인지 그녀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신의 가족이구나.”


아버지의 뒤에 검창을 들고서 서 있는 아들은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의자에 앉은 아버지의 양옆에는 두 딸이 보였다.


마치 태양을 형상화한 것 같은 가면을 쓴 작은 딸은 하반신이 여러 개의 뱀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런 작은딸을 보며 피르피나는 왠지 남자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반면 아버지의 왼편에 서 있는 큰딸은 얇은 천 옷만을 입은, 마치 사막의 무희 같은 옷차림이었음에도 그런 무희들이 흩뿌리는 색기와는 다른, 마치 태양과도 같이 온화한 느낌을 주는 인상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색이 많이 바랬지만, 따뜻했을 가족의 모습을 보며 피르피나는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를 띄웠다.







...어째서 그 아이를 영묘 안으로 들여보냈느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모르는 체하지 말거라. 그 아이의 호기심이라면 곧바로 영묘를 살펴볼 것임을 알고 있지 않았느냐?


“글쎄요.”


그 아이라면 어렴풋이 알아챌 수도 있다, 그 영묘 안에 묻혀 있는 것이 누구인지 말이다.


“알면 어떻습니까?”


그 아이가 어떤 존재의 환생인지를 알고 있긴 한 것이냐?


“당연히 알고 있죠. 전 장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그 영묘 안에 묻힌 것이 누군지 알면 도대체 뭐가 문젭니까, 예?”


네가 나의 뒤를 잇는 자라는 걸 그 아이가 알게 되겠지. 그렇게 된다면-


“제가 당신에게 물려받은 신격을 잃기라도 까 봐 걱정하시는 겁니까? 죽은 지 오래 지나신 분이 말이 많으시군요.”


언제나 말투가 참 건방지구나.


“그리고 전 제 말투를 고칠 생각이 없죠. 이만 사라지세요, 솔직히 이렇게 말을 걸어오시는 것도 성불 못한 망령이 말을 거는 것 같아서 영 소름이 돋으니까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머릿속에서 속삭이던 목소리가 없어지자, 남자는 신세를 한탄하듯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미친 건지, 아니면 진짜로 아직 내 안에 남아 있으신 건지, 도통 모르겠단 말이지…”


한숨과 함께, 남자의 숨은 입김이 되어 허공으로 퍼졌다.


이내 자신의 뒤에서 발소리를 들은 남자는 뒤를 돌아보았고, 그곳에는 피르피나가 서 있었다.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두루마리를 본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한참동안 찾던 물건인데, 어디 있었느냐?”


“저기, 영묘의 제단 위에서요.”


“그곳에 놓아두었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기억을 못 했던 건가…이리 다오.”


피르피나는 순순히 두루마리를 그에게 건넸고, 그는 그 두루마리를 펼쳐보더니 그립다는 듯한 누빛으로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그 눈빛은 씁쓸함으로 바뀌더니, 이내 그는 두루마리를 다시 말아 품 속에 집어넣었다.


“찾아주어서 고맙구나.”


“뭘요, 그나저나, 그건 당신의 가족을 그린 게 맞죠?”


“그래.”


“아버지랑…딸들이랑 당신만 있네요.”


“그건 내가 직접 그린 물건이고, 난 어머니의 얼굴을 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아, 그렇군요…”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어 그녀가 사과의 말을 건네려던 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슬슬 산 밑으로 바래다주마. 네 어머니, 데오노라가 많이 걱정하고 있을 거다.”


“그렇기는 하지만…”


“걱정하지 말거라, 내 한번 그 아이에게 잘 말해 볼 터이니.”


“…뭐라고 말씀하실 건데요?”


오랜 세월을 살아온 드래곤인 데오노라를 ‘아이’라고 호칭하는 데에서 새삼 그가 고대의 신임을 다시 실감하며, 그녀는 그에게 물었다.


“글쎄, 널 가두지 말라고 해야 할까?”


“그것보단 당신이 어머니를 설득 좀 해주세요, 전 혼자서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이예요.”


“너희의 가정사에 내가 끼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느냐.”


“어머니는 따듯한 분이지만, 이런 부분에서 제게 양보하실 분은 아니에요.”


“내 가정사도 그리 밝은 편은 아니다만은, 개인적인 조언을 해주자면 남의 개입으로 마무리된 가정의 불화는 끝이 좋지 않더구나.”


“가정의 불화를 겪으셨다구요?”


너무나도 화목해 보였던 두루마리의 그림 속 가족의 모습을 떠올리며, 피르피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럴 만한 일이 있었다. 아버지의 친우들이 끼어들어 어떻게든 나와 아버지 간의 싸움을 말리기는 했지만, 결국 난 아버지를 등지고 가족을 떠났고…다시는 아버지를 보지 못했지.”


도대체 그 인자해 보이는 아버지와 그가 싸운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피르피나는 궁금했다.


“…왜 아버지와 싸우셨나요?”


“의견이 맞지 않았다는 것 말고는 알려줄 수 있는 것이 없구나.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지금 네가 네 어머니를 직접 대면하고서 대화하는 일 없이 등지고 떠나버린다면, 너희 둘이 화해하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릴지는 아무도 모른단다.”


진심이 담긴 그의 충고에, 피르피나는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뒤를 돌아보지 않겠다고 그리 다짐했건만, 어째서 그의 충고 하나에 마음이 흔들리는 건지, 그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을 한없이 따듯한 마음으로 품고 키워 주었던 어머니인 데오노라와 다시는 만날 수도 없고, 화해조차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한없이 아파오는 것을 느낀 피르피나의 눈에서는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피르피나는 다급히 자신의 눈가를 훔치며 눈물을 닦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고서 계속해서 흐르기만 했다.


결국 울음보가 터져 제자리에 주저앉아 흐느끼기 시작한 피르피나를 바라보던 남자는 이내 그녀를 안아주며 말했다.


“울어도 좋다. 울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감정이 정리된 뒤에 생각을 정리하거라. 그리고 생각이 정리된 뒤에는 함께 내려가자꾸나.”


그렇게 피르피나는 그의 품 안에 안겨 한참을 울었고, 어느 정도 피르피나가 진정된 듯하자 그는 그녀에게서 물러나며 말했다.


“이제 좀 진정이 됐느냐?”


“조금은요.”


소매로 코를 훔치며, 그녀는 말했다.


“…왜 오늘 처음 본 저한테 이리 친절하게 대해주세요?”


“네가 이 산꼭대기에서 마주치는 사람 하나 없이 홀로 살아보렴. 얼마나 외로운지.”


“겨우 그런 이유에서요?”


“이유야 많지만, 말할 여백이 부족하구나.”


“…여백이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피르피나의 머리를 커다란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그는 말했다.


“널 보면 누군가가 생각난단다. 소중했던 존재가 말이지.”


“소중한 존재요?”


“누군지는 말해줄 수가 없단다. 하지만 넌 그녀와 무척이나 닮았어.”


“얼굴이요?”


“아니, 영혼이 닮았지, 무척이나…”


그가 그렇게 아련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때, 결계의 푸른 하늘이 무척이나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반동으로 수도원 전체가 흔들리자 남자와 피르피나는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 무슨 일인가요?”


“…누군가가 결계 채로 이 공간을 날려버리려고 시도하고 있나 보구나.”


검창을 들며, 남자는 비장한 눈빛으로 결계의 흔들리는 하늘을 보더니, 이내 화톳불에 꽂혀 있던 나선검을 뽑으며 말했다.


“이곳을 떠날 때가 되었구나.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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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제목, 폭풍의 왕은 피르피나를 가리키는 것이다. 피르피나의 이름은 고대어(다크 소울 언어)로 폭풍의 왕을 뜻한다.


*또한, 이름 없는 왕이 타고 다니는 용의 이름 또한 폭풍의 왕이며 피르피나와 같은 깃털 달린 고룡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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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그림은 내가 그린 거 아님.


오늘도 부족한 글 읽어줘서 고마워, 몬붕이들아.


댓글과 피드백은 언제나 환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