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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음은 이해한다만... 다시 생각해 보는 건 어떠냐. 그렇게 쉽게 결정하는 건..."

"걱정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이미 마음을 굳혔습니다."

"휴우... 그래, 개인의 결정은 존중해줘야겠지. 지금까지 수고 많았다."

"지금까지 신세 많이 졌습니다, 부디 앞으로도 평안하시길..."


아쉬운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 이철만을 향해 허리를 숙인 모라는 인사를 마치고 사무실을 나갔다.

이제는 살짝 정이 들어버린 곳이지만 떠나는 것이 아쉽지는 않았다. 오히려 떠나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녀의 의지였다.

아주 조금이나마 남아있는 주인의, 이제는 전 주인이 되어버린 그 남자의 흔적을 볼 때마다 모라는 가슴 안쪽이 거칠게 찢겨나간 듯 괴로워했다.

마지막으로 보게 될 이 거리의 풍경을 모라의 눈은 최선을 다해 담았고, 기억하기 위해 애썼다.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모라는 뒤를 돌아보았고 그녀의 뒤에는 쇼그가 서 있었다.


"이제 떠날 생각입니까?"

"그래요. 마지막 작별 인사는 당신에게 해 주고 싶네요."

"다시 생각해볼 의향은 없습니까? 여기에서 기다리다 보면 분명 주인님께서도..."


주인이라는 말이 나오자 모라는 얼굴을 숙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본 쇼그는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주인이 사라진 것으로 가장 상처를 받은 것은 다름아닌 그녀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주인 이야기를 꺼낼 수 없었다.


"주인님께서는 떠나셨어요. 아마 다시는 이 곳에 돌아오지 않으실 테죠. 이대로 이곳에서 돌아오실 때를 기다리기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마음도 이해합니다. 저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 뛰쳐나가 주인님을 찾고 싶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아직 주인님께서 내려주신 마지막 임무가 있습니다. 저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작은 주인님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쇼그는 전 주인이 사라진 후 며칠도 되지 않아서 형체를 유지하는 것조차 포기했었다.

그저 바닥에 달라붙어 찐득거릴 뿐인 보랏빛 액체가 되어버리기 직전, 쇼그는 마지막으로 그가 자신에게 준 삶의 이유를 되새겼다.

두 메이드는 서로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 그리고 서로의 심정을 가장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선택을 이해했다.


"언젠가 저희가 다시 만날 기회가 있을까요?"

"당연히 있을 겁니다, 다시 주인님을 모실 기회가."


인사를 마친 두 메이드는 서로 뒤를 돌아보고 걷기 시작했다.

둘 다 알고 있었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그들이 다시 만나는 일은 쉽지 않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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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에 누워있는 덩어리에게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을 느끼며 몸을 일으킨 덩어리는 주위를 둘러보았고 떨리는 다리를 움직이며 방의 문을 열었다.

오랜만이였다. 검은 방 밖의 풍경은 그리웠지만 마주할 때 마다 소년을 아프게 만들었다.

소년이 동생을 잃은 그 순간부터 그는 인간이 아니였다. 그저 창문을 닫은 검은 방의 구석에서 숨을 쉬기만 할 뿐인 살덩어리였다.

하지만 끝내 모든 것을 받아들인 소년은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두렵지도 않았고, 떨지도 않았다.


"주.. 주인님, 괜찮으신가요? 어서 다시 들어가세요! 이렇게 무리하지 않으셔도..."

"저는 괜찮아요. 일단 배고픈데... 혹시 먹을 것 좀 있나요?"

"지금 당장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쇼그는 방 밖으로 나온 소년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잠도 자지 않고 방 안에서 끊임없이 중얼거리던 소년을 보다 못한 배달부들이 강제로 끌고 나왔을 때는 정말 끔찍했었으니까.

소년의 어린 몸에 절대로 돌이키지 못할 흉터만 남겨버리고 끝나버린 그 일 이후로 배달부들도 소년에 대해서는 반쯤 손을 놓아버린 상황이였지만, 오늘 소년은 본인의 의지로 방을 나와버렸다.

쇼그 입장에서는 소년이 자살이라도 하지 않을까 심장이 내려앉을 정도로 걱정되는 상황이였다.


"휴우... 작은 주인님이 방 밖으로 마지막으로 나온 게 언제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군요. 여기, 스프를 끓여왔습니다. 입맛에 맞으실지..."

"고마워요, 예전의 그 맛이네요. 여동생이 보고 싶을 정도로."


소년의 입에서 여동생의 이야기가 나오자 쇼그는 한껏 긴장한 채 언제라도 소년을 식기와 떨어뜨릴 수 있도록 대비했다.

반쯤 미쳐버렸던 소년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몰랐고 아직 진짜로 멀쩡한지, 아니면 겉으로만 그런 척 하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쇼그의 걱정과는 다르게 소년은 그릇 하나를 싹싹 비우고는 미소를 지었고, 오랜만에 보는 소년의 미소에 쇼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이제... 괜찮으신가요?"

"괜찮다... 하하, 어렵네요. 아직도 여동생 얼굴이 눈 앞에 아른거려요. 도와달라고 뻗었던 그 작은 손도, 기어들어갈 것 같은 작은 목소리도. 괜찮은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미소가 거둬진 소년의 얼굴은 사뭇 진지했고 쇼그는 입의 미소를 유지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방 이곳저곳을 살피던 소년의 눈은 그가 이철만에게서 받았던 송곳에서 멈췄고 일어나서 송곳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쇼그는 소년을 향해 촉수를 넓게 펼쳤지만 몇 달 동안 방 안에 쳐박혀 있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년의 몸놀림은 민첩했다.

순간이지만 쇼그의 촉수가 잡아내지 못할 정도로 움직인 소년은 보관대에 꽂혀있는 송곳을 뽑더니 이리저리 돌려보기 시작했다.


"이거, 관리를 안 해줘서 그런가... 죄다 녹슬어 버렸네요."

"그 물건은 위험합니다, 당장 내려놓으세요."

"왜요. 제가 이걸로 찌르기라도 할 것 같았나요? 걱정은 필요없어요. 이제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거니까."

"도망가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처음에는 부정했거든요. 전부 거짓말이라고. 이 모든 게 시답잖은 장난일 거라고. 부정이 안 통할 때 쯤에는 망상에 빠졌죠. 이건 전부 현실이 아니고, 지금 나는 고아원 구석에서 자고 있는 거다... 전부 꿈이다. 뭐 대충 그랬어요."


소년은 천천히 더러운 옷을 벗기 시작했다. 말랐지만 균형잡힌 근육이 자리잡은 그의 피부에는 이곳저곳 흉터가 나 있었고 쇼그는 그 모습에서 눈을 돌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옷장으로 소년이 다가가자 옷을 갈아입는 소리가 들려왔고 쇼그는 뒤를 돌아본 채 소리가 멈출 때 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소리가 멈추자 그제서야 쇼그는 다시 앞을 볼 수 있었고 쇼그의 눈에 들어온 건 검은 옷으로 온 몸을 둘둘 감싸다시피 입은 소년의 모습이였다.


"누나. 제 여동생 소식, 뭐라도 들으신 게 있나요?"

"... 아뇨. 아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 됐어요. 저는 동생을 버렸어요. 그 자리에 놔두고 그냥 도망쳐버렸죠. 놀랐다, 무서웠다, 그런 말로는 변명거리도 안 될 거에요. 그 어떤 변명도 소용없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쇼그와 소년의 얼굴에는 동시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허리의 벨트에 송곳을 넣은 소년은 냉장고를 열었고 구석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초코바에 붙어있던 건드리지 말라는 귀여운 위협이 적힌 쪽지를 떼어낸 소년은 품 안에 초코바를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직접 만나서 사과하고 올게요. 이거라면 괜찮을 거에요, 그 애는 옛날부터 초콜릿을 좋아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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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독면을 쓰고... 코트를 입은 사람? 글쎄요, 기억이 잘...'

'아, 저쪽으로 갔어요. 식수 몇 병을 사가서 기억하고 있죠.'

'그 불길한 사람이요? 어휴, 어딜 그렇게 가는지 물어봤다고 무슨 죽일 듯이 노려보는데...'


"주인님... 어디로 가신 건가요..."


모라는 한때 차였던 고철덩어리 위에 걸터앉아 시큰거리는 무릎을 두드렸다.

주인의 발자취를 쫓아 서울에 도착한지 벌써 몇 달이 지났지만 이렇다 할 단서조차 잡지 못했다.

그는 향하는 곳 없이 언제는 동쪽으로, 언제는 북쪽으로, 북동쪽, 서남쪽... 말 그대로 어딘가를 방황하고 있었다.

점점 지쳐가던 모라는 마지막으로 주인을 봤다는 증언이 있었던 서울 외곽의 거주구역에 도착했지만 이 곳에서 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휴... 여기도 아니라면 대체 어디로..."

"이 버러지같은 것들아! 우리 말이 말 같지가 않아?"


고함과 함께 소란스러운 웅성거림이 퍼지자 모라는 무심코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자신이 다녀갔던 식료품 상점 앞에서 상점 주인이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져 있었고 쓰러진 남자를 한 무리가 둘러싸더니 거칠게 짓밟았다.


"보호비라니... 우리는 보호가 필요없어! 여기는 지금까지 주민들끼리 잘... 커흑!"

"글쎄, 지금 서울 상황을 아는 놈이라면 앞으로도 잘 지낼거라는 생각은 관두는 게 좋을 거야. 우리가 기껏 선심써서 도와준다는데 사람 마음을 이렇게 짓밟아서야 쓰겠어?"

"말도 안 되는 금액이 아닙니까! 저희는 만져볼 수도 없는 큰 돈을 갑자기 내라고 하시면..."

"그래서 지금 당장 달랬어? 너희들이 우리에게 빌린 걸로 치자고. 이자는 싸게 해줄게, 이정도면 거저다 거저."


이 장면은 모라가 서울 이곳저곳 돌면서 봐온 흔한 수법이였다.

주민들에게 빚을 지게 해놓고, 계약서 귀퉁이에 써넣은 작은 조항으로 주민 전체를 노예로 만드는 수작질.

모라는 갈 길이 바빴기에 눈을 돌리며 이 곳을 떠나려고 했지만 양아치들이 주민들에게 총을 겨누자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보았다.

진지한 모라의 눈이 바라보고 있는 건 겁먹어서 떨고 있는 주민들 따위가 아니였다.

양아치들의 손에 들린 총기.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AKM을 본 순간 모라는 양아치들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래뵈도 착하고 관대하거든. 기회를 줄게. 지금 보호 계약서를 쓰던가, 아니면 머리에 총알 한 발씩 맞고... 으아악!"

"мусорные ублюдки, 쓰레기 새끼들아. 서울 물 먹은 놈들이라고 해서 기대했더니만, 이런 곳에서 코묻은 돈이나 뜯고 있냐?"

"뭐.. 뭐야! 마물...? 이 새끼, 죽여버린다!"


갑작스럽게 뒤에서 등장한 모라가 한 놈의 팔을 꺾어버리자 양아치들은 당황했지만 곧바로 칼을 뽑고 총을 겨눴다.

모라는 빠른 손놀림으로 어설프게 칼을 휘두른 한 놈의 팔을 바깥으로 굽게 만들었고 그러자 불꽃과 함께 총성이 울려퍼졌다.

수십 발의 총성이 이어지자 주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드렸다. 하지만 모라에게는 단 한 발의 총알도 닿지 못했다.

꺾이고, 부러지고, 깨지는 소리가 몇 분 동안 이어졌고 잠시 뒤 양아치들은 모두 엎드려뻗쳐 자세로 바닥에 머리를 박는 꼴이 되어 있었다.


"저희가 몰라봤습니다 누님... 용서해주십쇼..."

"옷이 다 찢어졌잖아, глупые ублюдки."

"죄송합니다, 변상해드리겠습니다..."

"야, 너희들 이 총 전부 어디서 났냐?"

"군인들이... 탄약이랑 같이 주고 갔습니다... 어떻게 쓸지는 너희들이 정하라면서..."


한때 애지중지했던 메이드복은 싸움의 여파로 찢어지고 더러워졌고 모라는 빼앗은 담배를 태우며 찢어진 메이드복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긴 모라는 잠시 후 눈을 뜨더니 입고 있던 메이드복을 찢어버렸다.

몸을 감싼 옷이 찢겨나가자 스포츠 브래지어를 낀 그녀의 맨살이 드러났고 사람들은 황급히 그녀에게서 시선을 치웠다.

주민들은 그저 그녀의 살갗이 드러났기 때문에 고개를 돌린 게 아니였다.

모라의 몸 구석구석에는 크고 깊은 흉터가 나 있었고 그녀의 등에 새겨진 검은 거미 문신과 등허리까지 뒤덮은 거미줄 문신은 사람들이 눈을 저절로 돌리게 만들었다.


"어이, 찌질이들. 기상."

"예!"

"너희 말이야... 이 누님이랑 작은 사업 하나 해볼 생각 없냐?"


번개같이 기상한 양아치들은 의아한 눈길로 서로 눈빛만 교환할 뿐이였다.

모라는 예전이라면 절대로 짓지 않았을 썩은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 한 입을 빨았다.

담배가 타들어가자 모라는 폐 속에서 연기를 뿜어내며 바닥에 담배꽁초를 지져 껐고, 한 곳에 모아놓은 총 쪽으로 다가갔다.

쌓여있는 총기들을 보며 흡족한 웃음을 지은 모라는 다시 양아치들 쪽을 돌아보았다.


"니들 대가리가 누구냐?"

"그게... 황 사장님이라고 계시는데..."

"안내해."


모라는 쌓여있던 총 더미에서 한 자루를 집어들고는 총신을 어깨에 걸치며 고개를 까딱였다.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던 양아치들은 서로 무언가를 의논하더니 모라를 어딘가로 안내했고 모라는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물며 불을 붙었다.

무언가를 지키거나, 빼앗긴 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그저 튼튼한 총 하나, 충분한 탄환, 그리고 깡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서울의 법칙을 모라는 지금 배워가고 있을 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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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컥... 꺼걱... 끅..."

"... 옷이 더러워졌잖아."


칼이 박힌 목에서부터 왈칵 쏟아져나온 피가 내 코트를 더럽히자 나는 칼을 뽑아내며 시체를 발로 차서 밀어냈다.

아마 망을 보던 녀석이였을 것이다. 코를 적시는 피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그냥 지나가려던 길이였다. 말 그대로 그냥 지나가기만 하려고 했는데 이 녀석이 덤벼들었다.

내가 이 놈의 배를 칼로 가르고, 목에 칼을 박아넣은 이 모든 것은 정당방위였고 불가항력이였다.

서울에 온 이후 몇 달 동안 몇 번이나 나 자신에게 말했던 자기합리화였지만 오늘따라 머리가 더 아파왔다.

시체 위에 걸터앉은 나는 이미 피에 절어서 딱딱하게 굳어버린 헝겊을 꺼냈고 옷과 칼에 묻은 피를 닦으려던 순간 어디선가 비명이 울려퍼졌다.


"살고 싶으면 당장 그 리어카 내려놓고 꺼져. 아, 옷 안에 들어있는 지갑같은 것도 두고 가라. 뒤져서 나오면 목숨은 없는 거 알지?"

"버러지같은 새끼들, 이 분이 누구신 줄 알고..."


리어카를 둘러싼 강도들은 손에 날카로운 흉기나 둔기를 들고있었고 선두에 선 리더로 보이는 녀석은 조잡한 석궁을 들고 있었다.

얼핏 봐도 짐이 가득 실린 리어카라니. 서울에서 저런 걸 끌고 다닌다는 건 죽고싶어 안달이 난 놈들이라는 소리였다.

강도들이 둘러싼 리어카의 주인으로 보이는 사티로스는 팔짱을 끼고 서 있었고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었지만 놀랍도록 여유로운 태도를 유지했다.

이미 바닥에는 경호원으로 보이는 시체 하나가 머리에 화살을 맞고 누워있었고 나머지 경호원 하나는 사티로스의 앞을 지키며 이를 갈았다.

흔한 강도였기에 슬쩍 모른 척 지나가려 했지만 주위를 둘러보던 사티로스와 내 눈이 마주쳐버렸고 나를 향해 웃은 사티로스는 큰 소리로 내 쪽을 바라보며 외치기 시작했다.


"어이, 거기 경호원! 빨리 여기 안 오고 뭐해? 네 고용주 팬티까지 싹 다 털리게 생겼다!"

"뭐야. 너도 한패야? 너도 와서 꿇어, 뒤지기 싫으면."

"아... 이런 빌어먹을..."


한숨을 내쉰 나는 메고 있던 가방 두 개를 내려놓았다.

쩔그렁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온 가방이 바닥에 쓰러지자 안에서부터 귀금속과 지폐 다발이 바닥에 쏟아졌다.

그 모습을 본 강도들은 순식간에 눈이 돌아갔고 리더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무기도 내팽개친 채 내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돈... 돈이다... 돈이야!"

"금? 저거 금반지야? 저건 내 거야, 내가 먼저 가져간다!"

"멈춰! 멈추라고, 이 멍청이들아!"


나는 재빨리 코트 안에서 총을 꺼냈고 당황하며 강도들을 말리는 리더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었다.

그 다음부터는 사격 연습일 뿐이였다. 불길에 몰려드는 불나방들을 향해 날아든 탄환은 깔끔하게 두개골을 꿰뚫으며 바닥에 더러운 자국을 남겼다.

탄창 두 개를 써서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한 나는 다시 가방을 들어올렸고 사티로스와 경호원 쪽을 노려보았다.


"어머~ 젊은 사람이 실력도 좋아~ 이거 고마워서 어째? 덕분에 신세졌어."

"저 자가 무슨 짓을 할 지 모릅니다, 제 뒤로 오십시오."

"화살맞고 뒈질 놈을 살려줬더니,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고? 머리에 숨구멍이 하나 더 생겨야 그 꽉 막힌 생각이 뚫리겠나?"

"에이, 젊은 사람들끼리 그렇게 열 내지 말어~ 거기 청년. 혹시 돈 벌 생각 있어? 일자리 하나 소개시켜 줄까?"

"생각 없습니다. 일 다 보셨으면 빨리 꺼지시죠."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바닥에 쪼그려 앉아서 피 묻은 지폐를 챙기던 내 곁에 언제 왔는지 모를 사티로스가 얼굴을 들이밀자 나는 놀란 나머지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발소리도, 인기척도, 아무런 징조도 없이 내 곁에 다가온 건 이 사티로스가 처음이였다.

놀란 가슴을 침착하게 가라앉힌 나는 이상하게도 흥미를 느꼈다.

방금 죽을 수도 있었다는 공포 때문이라고 이성은 나를 설득했지만, 이상하게도 가슴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무슨 일인지 들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있다니까! 작은 요식업을 해보려고 하는데. 어떨 것 같니? 계속 사람고기 먹으면서 살고 싶지는 않지?"


요식업이라는 말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뒤에 온 말을 듣자 내 얼굴은 굳어졌다.

서울이라는 작은 땅덩이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는지 두 눈으로 봤었으니까.

소고기 간판을 달아놓은 고깃집에서 육포를 사고 돌아가는 길에 힐끔 봤었던 고깃집 쓰레기통의 광경은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이미 식량이 부족한 몇몇 지역에서는 현실을 부정하고 소나 돼지라고 자신을 속여가며 사람을 먹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서울 사람들은 먹는 것도 인색하단 말이야. 술이라고 말하며 공업용 알코올에 물을 타서 팔고, 소나 돼지라고 하면서 파는 고기가 쥐고기면 차라리 나은 수준이지. 계속 이런 것들만 먹다가 총이나 칼 맞고 죽는것도 아니고, 배아파서 죽고 싶지는 않지?"

"좋습니다. 한번 해보죠. 다만, 마음에 안 들면 저는 바로 떠나겠습니다."

"좋아, 구두계약이긴 하지만 계약 성립! 근데 자금이 조금 모자라서 그런데... 돈 좀 빌려줄 수 있니?"

"... 떼먹으면 국물도 없을 줄 아십쇼."


나는 의심의 눈길을 담으며 돈가방을 내밀었고 사티로스는 빙그레 웃으며 돈가방을 리어카에 실었다.

경호원이 끄는 리어카 위에 올라탄 사티로스는 길을 가는 동안 시도때도 없이 여러 질문을 했고 도통 입을 다물지 않았다.

대충 눈을 떠 보니 자신이 다른 세계에 있었고, 여기 사람들은 참 이상한 음식을 먹는다며 웃는 걸 보니 머리가 약간 이상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어머, 내 정신 좀 봐. 우리 통성명을 안 했었지? 우리 청년은 이름이 뭘까?"

"없어요. 편하신 대로 부르시죠. 그쪽은 어떻게 부르면 되나요?"

"글쎄다... 내 이름은 이쪽 언어로 번역하기 어려워서... 그래. 내가 여기에 온 이후로 작은 식당을 했었거든, 손님들이 나를 모두 이모라고 부르던데. 너도 그렇게 불러줄래? 어감이 좋아서 나름 마음에 들었거든!"

"그렇게 하죠, 이모."

"아유, 싹싹해라. 우리 이쁜 조카가 이모 호강시켜주겠네~ 덕분에 자본금도 두둑하게 생기고 말이야."

"너무 좋아하지는 마세요. 빚은 동전 한 푼까지 전부 받아낼 테니까."


리어카의 바퀴가 끼릭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황에 묶여 있던 내 삶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빚을 받아내겠다는 말은 거짓말이였다. 나는 언제라도 이 돈을 그저 놓아버리고 싶었다.

홀린 듯 눈에 보이는 돈을 챙기긴 했지만, 이 돈은 마치 깊은 늪처럼 나를 가라앉게 하고 있었다.


"그냥 가지실래요? 이 돈, 저는 필요없거든요."

"어머, 무슨 말이니? 이렇게 큰 돈을. 걱정 마, 우리 조카. 이모가 돈 떼먹고 하는 사람은 아니거든~"

"아뇨. 정말로 필요 없어요. 그냥 가져가세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다시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이모는 잠시 경호원에게 손짓해서 리어카를 멈추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젊고 아름다워 보이는 그녀의 외모 사이에는 언륜과 경험이 묻어나왔고 이모는 모든 것 안다는 듯한 눈동자로 내 눈을 응시했다.

잠시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던 이모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고 다시 리어카를 출발시켰다.


"요즘 보기 드문 젊은이네. 요즘은 다들 놓아주려 하지를 않거든. 그래도 돈은 안 받을게, 장사는 신용이 가장 중요하니까, 출처 모를 돈 따위는 절대로 안 돼! 대출이면 몰라도 이런 돈을 장사 밑천으로 쓴다니, 큰일 날 소리."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다시 시작한다고 했지? 그럼 이 말 정도는 기억해 둬. 다시 시작하는 건 어렵지 않아, 놓아주는 것이 어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