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기다리는 순간은 언제나 초조함이 함께한다. 상대가 자신을 반겨줄지, 그 사람을 만나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실제로 만나기 전까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초조함은 상대의 얼굴을 보면 의례 사라지기 마련이다. 지금까지의 불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반가움만이 남는다. 그렇기에 초조함조차도 버틸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만홍 씨!”


오늘도 힘겹게 업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만홍을 오늘 휴일일 린세가 반겨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일이기 때문에 만홍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쉬고 계시는 거 아니셨습니까?”


만홍은 그렇게 말하고 뒤늦게 린세가 장바구니를 들고 있음을 발견했다. 식사준비를 위해 나왔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챈 만홍은 그대로 인사를 하고 돌아가고자 하였다. 


“실은 만홍 씨한테 부탁드릴 게 있어요.”


린세의 말을 들은 만홍은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저 제안에 따르면 뭔가 귀찮은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만홍은 좋은 말로 거절하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좀 지쳐서 곤란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손님이 계시는 것 아니셨습니까?”


만홍은 낮에 한 남성을 봤던 것이 기억났다. 린세의 집에 간다고 했으니 이렇게 금방 떠났을 것 같지는 않았다. 


“다름 아니라 바로 그 손님 분께서 만홍 씨를 만나고 싶어 하셔서요. 그리고 딱히 뭘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설명 조금 드리는 거라 얼마 안 걸릴 거예요. 별로 안 달가우실 지는 몰라도 제가 식사 대접을 좀 해드릴 거고요.”


린세는 횡설수설 말을 끝마치고 뭔가 이상하게 말한 것 같다고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황해선 아무 말이나 한 것 같았다. 


“아닙니다. 번거롭게 안 그러셔도 됩니다. 혹시 시간이 된다면 제가 나중에 봬도 되겠습니까? 내일도 괜찮다면 내일로 하고 싶습니다.”


만홍은 결코 두 번으로는 수긍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린세는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느끼며 주늑들었다. 


“역시 이렇게 급하게는 좀 그렇죠? 죄송해요. 제가 경황이 없었네요. 그래도 저 요리 잘하긴 하는데……. 아,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럼 들어가서 쉬세요.”


린세는 그렇게 말하고 침울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지금까지 무슨 일들이 있었는데 만홍이 자신을 피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빨리 끝나는 거라면 가겠습니다. 지금 당장 시간이 없는 건 아니니 말입니다.”


하지만 만홍이 뒤늦게 수락 의사를 보이자 린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반색하며 뒤로 돌았다. 


“정말요? 분명 일찍 끝날 거니까 걱정 마세요.”


린세는 싱글벙글 웃으며 만홍의 양 손을 잡고 위 아래로 흔들었다. 


“아으아으아으. 어으서으 가으죠으.”


그러는 와중에도 만홍이 말한 결과 괴상한 소리가 나왔으나 린세는 대강 의미를 알아들었다. 


“네. 어서 가요.”


린세의 빌라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 위용을 보고 만홍은 새삼스럽게 린세가 귀족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편하게 들어와요.”


“실례하겠습니다.”


둘은 리안이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그러나 응접실의 문을 열기 전에 린세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응당 방에 있어야 하는 리안의 인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리안 씨? 주무시나요?”


린세는 다소 긴장된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응접실엔 아무도 없었다. 


“리안 씨? 장난 치지 말고 나와주세요.”


린세는 당황해서 감각을 더 날카롭게 했다. 그러자 곧 집 어디에서도 리안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리안 씨?”


린세는 이제 의심에서 확신으로 결심을 굳혔다. 리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 그건 틀림 없는 사실로 보였다. 


“잠깐 장난 칠 생각이었는데 분위기가 영 아니네요.”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둘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벽 근처에서 별안간 리안이 나타났다. 


“힉!”


“흡!”


린세와 만홍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화들짝 놀라서 리안을 바라보았다. 둘의 반응에 리안은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깜짝 놀랐어요. 신기한 재주가 있으시네요.”


“흠흠, 살면서 한가지 재주는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요.”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린세는 주제를 바꾸기로 했다. 


“아, 이분이 제가 말씀 드린 동료분이세요. 서로 구면이시죠?”


“만나서 반갑습니다. 고만홍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리안입니다.”


둘은 가볍게 악수했다. 


“잠깐 앉아계시겠어요? 식사할 거리를 만들어 올게요.”


린세는 잽싸게 장봐온 것을 들고 주방으로 달려갔다. 둘 다 지쳐있었기 때문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어디보자? 간은 약하게. 가볍게 기름에 볶아서. 양념에 재울 시간은 없으니까 옷을 입혀서 튀김으로. 채소도 볶고, 육수 기반으로 소스를 만들고, 그리고…….”


린세의 손에서 재료들은 빠르게 요리로 변화하였다. 머지 않아 먹음직스러운 볶음밥과 탕수육, 채소볶음과 혹시 음식이 입에 맞지 않을 리안을 위한 간단한 스테이크가 준비되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다들 편하게 드세요.”


누가 봐도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고급스러운 식기에 담겨 나왔다. 지금까지 별 생각 없었더라도 음식을 보는 순간 입맛이 확 돌기 시작했다. 


“와. 다 직접 만드신 건가요? 이렇게 만드는데 그정도밖에 안걸리신 겁니까?”


“마법을 썼거든요. 아, 혹시 꺼림찍하시면 안 드셔도 돼요. 이쪽 스테이크는 마법 안 썼어요.”


“아뇨아뇨. 잊으셨나요? 저 마리 씨랑 사귀고 있다고요?”


“만홍 씨는요?”


대화의 화살이 자기에게 향하자 만홍은 부담스러워졌다. 그러지 않아도 리안과 얘기를 하느라 지쳐있던 만홍에겐 좋지 않은 일이었다. 


“저도 신경 안 씁니다.”


만홍은 그저 빠르게 지나가길 빌며 적당히 선택했다. 


늦은 만찬이 시작되었다. 배 안에 먹을 게 들어가자 이제야 한시름 덜었다는 실감이 들었다. 


“음! 맛있어요!”


“정말요? 입에 맞으시다니 다행이네요.”


“이쪽으로 가셔도 괜찮겠는데요?”


리안은 걸신 들린 마냥 음식을 흡입했다. 만홍은 그 기세에 밀려 먹는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음식들을 먹어치운 리안은 만족스럽게 배를 두드리며 의자에 늘어졌다. 


“저혼자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네요.”


아직 일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그런 걸 잊어버릴 만큼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후훗. 만든 보람이 있네요.”


“혼자 너무 빨리 먹어버렸네요. 뭔가 죄송하네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식사는 상대와 속도를 맞추는 게 예의인 법이다. 다만 만홍은 그런 것에 크게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니었다. 


“아닙니다. 저도 잘 먹고 있습니다.”


만홍은 리안과 속도를 맞추기 위해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다.상대가 빨리 먹었으니 자기도 빨리 먹으면 된다는 마음가짐이었다. 그러나 그러다가 사래에 들려 기침을 하는 등 상당히 요란스러운 식사가 되었다. 


“괜찮으세요? 편히 드셔도 되는데요.”


린세는 급한대로 옷 소매로 만홍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만홍은 순간 린세의 손길을 거절하려 하다가 새로이 터져 나오는 기침에, 차마 상급자의 손을 쳐낼 수 없다는 저항감에 그러지 못했다. 


“콜록! 아, 이제 괜찮습니다.”


모두의 걱정 어린 시선 속에서 만홍은 무사히 식사를 마쳤다. 뭔가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묘한 기분이라 만홍은 얼굴을 붉혔다. 


“흠흠. 식사도 다 하셨으니 이만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린세는 순식간에 식탁을 치우고 차를 내왔다. 리안은 가볍게 눈인사를 한 후 이야기에 들어갔다. 


“만홍 씨께서 해주실 일이 있습니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위험한 일도 아닙니다. 그저 잠깐 눈을 감는 정도의 일입니다.”


아무리 둔한 만홍이라고 할지라도 뭔가 불법적인 일이라는 것쯤은 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저는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만홍은 실례라는 건 알아도 곧장 일어나 자리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자기 같은 소시민은 이런 일에 연류돼서도 참견해서도 안되는 법이었다. 만홍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만홍 씨, 잠시만요.”


가문의 업, 백호, 현무, 만홍, 리안, 마리. 수 많은 생각들이 린세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 일은 누군가의 목숨이 걸린 일이고, 인생이 걸린 일이고, 긍지가 걸린 일이었다. 


린세는 어느새 진흙탕 깊은 곳까지 몸을 담그고 말았다. 린세는 이제 자력으론 이 진흙탕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만홍은 아직 근처에만 있을 뿐 발 끝에 조금 얼룩이 묻었을 뿐이었다. 이대로 발길 돌려 간다면 약간의 찝찝함은 남을 수 있어도 크게 번질 위험은 없었다. 


하지만 린세의 권유는 거기서 한걸음 더, 진흙탕에 발을 완전히 담가 주길 원하는 부탁이었다. 만홍은 더 이상 무관한 사람이 될 수 없었다. 


만홍에겐 아무런 이득이 없다. 청렴한 외교관으로서의 임무를 져버리는 행동이고, 이로 인한 결과가 어떻게 만홍에게 날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니에요. 역시 무리한 부탁이었네요.”


린세는 새삼 자신이 얼마나 만홍을 편하게 여기고 있었는가 통감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부탁은 보통 거절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친한 사이여도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은 한계가 있는 법이고, 그것이 불법적인 일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네. 무리하지 마십시오.”


만홍은 그렇게 말하고 방을 떠났다. 린세는 입은 웃고 있었으나 눈은 전혀 웃지 못했다. 


“서류 작업은 제 일이 아니긴 하지만, 제가 못하는 건 아니니 제가 해보도록 할게요. 잔업 있는 날 하면 될 거에요.”


린세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굳이 무리 안 하셔도 됩니다. 어디까지나 보험이 필요한 거였으니까요. 어차피 한스와의 협상을 위해서는 탄트라 구역 밖으로 나가야 할 겁니다.”


“그런가요?”


“네. 한스가 마리 씨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한스도 제가 다시 돌아오리라는 걸 알고 있을 거기 때문이죠.”


리안의 말엔 강한 확신이 담겨있었다. 리안에겐 이 모든 일의 결말이 보이는 것 같았다. 


“리안 씨…….”


린세가 무언가 말을 하기 위해 운을 떼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문이 열리며 만홍이 상기된 얼굴로 들어왔다. 


“그냥 제가 하겠습니다.”


만홍의 갑작스런 등장에 두 사람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만홍이 이렇게 돌아오리라곤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괜찮으시겠어요?”


린세는 반가움에 달려가서 있는 힘껏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말했다. 


“어차피 제가 처리한 서류엔 관심도 안 줄 겁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거로 인해 문제가 발생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부분은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그래선 안 되는 일이지만, 리안은 이런 일에 있어 전문가였다. 믿을 수 있었다. 


“만홍 씨가 해주실 일은 간단합니다. 저는 내일 이곳으로 전입신고를 하러 온 한 사람입니다. 서류에 문제는 없을 것이고, 만홍 씨는 도장을 찍습니다. 서류는 문제 없이 처리되어 저는 정식으로 전입을 완료합니다. 다만 불행한 사고로 인하여 며칠 뒤 그 서류가 사라질 뿐이죠. 그 사실을 아는 건 도장을 찍은 만홍 씨 뿐입니다.”


정말 이거면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간단한 공작이었다. 설령 만홍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만홍이 선택된 이유는 간단했다. 만홍이라면 발설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 뿐이라면 알겠습니다. 어렵지 않군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만홍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다시 방을 나섰다. 이번엔 꽤 괜찮은 분위기였다.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셨을까요?”


리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잘 모르겠네요.”


린세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리안을 뒤따라 어깨를 으쓱했다. 


“뒷정리는 제가 할테니 이만 쉬세요. 혹시 다른 분들이 오시면 깨워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솔직히 이제 한계라서요.”


“괜찮아요. 푹 쉬세요.”


리안은 손님용 방에서 잠을 청하고 린세는 그동안 뒷정리를 했다. 그러다 문득 소매에 묻은 얼룩을 보자 린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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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사람 다루는데 다들 거리낌이 없구만


간만에 복귀하니 바쁘네


장마에 폭염에 정신 없는데 몬붕이들 건강 잘 챙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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