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피가 김이 피어나는 하얀 머그잔을 양 날개에 한잔씩 들고 탁자에 내려놓으며 소리가 나게 우리쪽으로 밀며 입을 열었다.

만약 날개발톱이 있다는걸 몰랐다면 그 연두색의 푹신해보이는 날개가 어떻게 컵을 쥐고 있는지 궁금했을거고 알고 있다해도 장난스레 물어봤을것이다.

하지만 이 목의 메이는 감과 컵이 떨어져있는 거리만큼 입을 열기 어려울뿐이다.


"...나부터 할게"


나와 약간은 거리를 두고 소파에 앉아있던 쇼거스가 옷짓과 가죽이 스치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그녀는 약간 외향적이라 할 수 있다

화가 나면 몸의 곳곳에서 촉수가 자라나서 어지럽게 흔들려 난 그걸 보고 그녀의 기분을 대강은 알아 맞추고는 했다.

거실 천장에 켜진 형광등이 그녀의 촉수에 간간히 겹쳐 가리다보니 그 반짝임이 약간은 보라색 효과를 준 조명처럼 보인다


"난 그저 얘가 힘을 냈으면 좋겠어서, 내가 걔는 아니지만 이미 떠난 걔를 생각한다고 자기 모든 일을 내팽겨진채 폐인이 되어가는 얘 모습을 더 이상 보기 싫어서 나서서 잠깐의 꿈처럼 연극을 한거 뿐이었어"


그녀는 김이나는 머그잔의 손잡이를 쥐어 올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 볼 자신이 없어 자세히 보진 못했지만 눈으로 그녀의 등을 흘겨봤을때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컵을 자기 턱 위치까지 들어올리며 그보다 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이윽고 약간의 물이 호수에 섞이는듯한 소리가 난 뒤 약간은 진정된 목소리로 그녀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난 걔가 아니었어 아니라서 내가 생각 할 수 있는 가장 얘를 위한 행동을 한거야 근데 그걸로 이렇게 관계가 망가질 줄 알았다면 그냥 하지 말걸, 그냥 폐인이 되게 내버려두고 나까지 떠났어야 한다고 생각까지 한다고!"


어느새 약간 진정된 그녀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처음보다 더 떨리는, 아주 불안정한 목소리를 내며 약간은 소리지르듯 호소하고있었다.

하피는 약간 곤란하다는듯 깃털이 살짝 날릴정도로 날개를 펄럭이며 그녀를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어어 잠깐 잠깐 여기 공동주택이야 소리 조금만 낮춰"


"너도 그걸 알고 있을거 아냐 키키모라 걘 이제 이세상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난 걔가 아니라고!"


쇼거스는 하피의 진정시키려는 노력은 안중에도 없는지 흥분한 목소리를 나에게 돌리며 소리쳤다.


"...알고있어"


무겁게 입을 연 나의 첫마디였다.


그녀는 약간은 헛웃음을 짓는 소리를 내며 나에게 무엇이라 소리를 질러댔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그 날의 기억에 사로잡혀 주변의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와 키키모라는 시장터에서 만났다

사람이 부대끼고 물건을 사고파는 소리가 오가는 그 혼잡한 바닥에서 나는 목적지 없이, 그저 좀 걷고 싶다는 생각으로 떠돌고 있었다.

그러다 약 내댓명의 사람이 모여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듯 해서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무언가 해결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약간 흥미가 생겼을 뿐이었다.


그 장소엔 술에 취한듯한 서너명의 남정네들이 양손에 짐을 잔뜩 들고있던 키키모라 하나의 앞을 가로막으며 혀가 꼬인듯한 발음으로 무어라 윽박지르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본 내가 처음으로 한 생각은 '특이하네' 였다.

당시 인간과 아인, 마물은 적응의 과도기라 부를 수 있는 시기여서 왠만하면 서로 피하는 분위기였기에 인간이 아닌 그녀가 인간이 모이는 이런 시장바닥에서 물건을 산다는것 자체가 약간은 어색한 때였다.


그녀는 주변에 도움을 줄 사람이라도 찾는듯 주변을 둘러 보았지만 그 주변엔 무관심하게 지나가는 행인들만이 있었다.

나를 제외하고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어색하게 마주친 갈 곳 잃은 눈이 신경 쓰였지만 당시 나는 귀찮은 일에 엮이기 싫다는 이유로 빠르게 이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그녀가 나를 보고 뻐끔거리던 입모양이 도와달라는것 처럼 보여 그럴 수 없었을 뿐이었다.


"여기서 뭐 해? 살거 다 샀으면 이제 돌아가자니까 왜 그러고 있어?"


눈을 감고 일부로 갈 곳 잃은 목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최대한 여유로운 척 하며 그녀의 옆에 서서 짐을 하나 빼앗아 들어 당장이라도 터질것같은 심장이 고동치는 가슴으로 끌어안았다.

살짝 심호흡을 한 뒤 난 눈을 천천히 뜨고 그제서야 그 무리를 발견한 듯 연기를 시작했다.


"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 얘가 길을 가는데 꼬리로 당신들을 밀치고 갔다고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얘 말 교육을 아직 시키는 중이라 아마 말을 못알아 들어서 사과를 못했나봐요. 가서 잘 타이르겠습니다."


그들의 말은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뜸을 들인 덕분인지 약간은 술이 깬 일행중 한명과 대화가 통해 어렵사리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사과하는 사람에게 뭐라 더 할 수 없었는지 그들은 우리를 흘겨보며 자리를 떠났고 나는 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하기 위해 일부로 사람이 없는 장소까지 키키모라와 동행하며 지인인 척 연기했다.


이윽고 사람이 뜸한 어둑한 골목에 다다르자 어색했던 연기와 다리의 힘이 한꺼번에 풀려 그 자리에 꼴사납게 주저앉아 버렸다.

내 옆에서 연기에 어울려주던 키키모라는 갑자기 주저앉은 나를 보며 약간 당황한듯 안절부절 못하더니 이내 무언가 반짝 스치기라도 한듯 나에게 90도로 인사를 하며 목소리를 들려줬다.


"...고...고마버용"


그 발음을 듣고 난 내가 아주 멍청하게 말한건 아니구나 하고 안도의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일으켜달라고 손을 건냈다.

그녀는 그런 나의 손을 잡아주며 나를 일으켜주었고 나와 그녀는 연기가 아닌 진짜 알게 된 사람처럼 자연스레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녀는 내가 그때 변명했던거 처럼 인간의 말에 익숙해지고 있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혀가 꼬인 발음으로 말을 걸고 소리를 지르니 알아 들을 수 없어서 당황했었다고

자기는 딸같이 챙기는 하피 동생이 있다고

그리고 만약 괜찮으면 저녁 시간도 됐는데 같이 밥이나 먹자고 집에 초대까지 받았다.


난 그 초대에 응해 집에 전화를 걸어 집에 분명히 뒹굴거리고있을 쇼거스에게 전화해 이런저런일이 있어 저녁을 거기서 먹을거니 준비하고 우리가 있는곳으로 오라 시킨 뒤 다시 그녀와 쓸데없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쇼거스가 도착했고 난 그녀에게 키키모라가 들고 있는 짐 하나를 강제로 안겨준뒤 키키모라를 따라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근처 주택가에 위치한 공동주택에서 살고있었으며 그녀의 집 문을 열자 갑자기 달려나와 안기는 하피에 밀려 휘청거리는 키키모라에게 밀려 짐이 쏟아 질 뻔 했지만 그 외엔 별 탈 없이 집을 구경하다 기억나지 않는 메뉴의 저녁을 대접받으며 즐거운 대화를 나눴다.


오늘 당장 먹고 싶은 메뉴만 살려고 인터넷은 너무 대량이고 내일 도착해서 시장에 나갔었다는둥, 내가 이 게으른 쇼거스랑 둘이서 사는걸 알고 그럼 가끔 들러서 집안일을 해주게다는둥 어느새 저녁을 얻어먹으러 온 의미가 퇴색되게 빈 접시만 앞에두고 시간 가는 줄 모른채 대화에 전념했었다.


그 날 이후 키키모라는 자기가 한 말을 지키려는지 간간히 집에 찾아와 집안일을 해주고 식사거리를 만들어주는등 우리의 일상에 녹아내려왔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며 친구 이상의 감정이 있었고 쇼거스는 내가 그런 눈으로 키키모라를 보는게 아니꼬운지 가끔 질투섞인 장난을 치며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이 일은 모두 과거가 되었다.


키키모라는 비오는 날엔 전같은 음식이 먹고싶다는데 자기 동생이 전이나 부침을 그리 달가워 하지 않아서 같이 먹어달라며 먼저 전화를 걸어왔었다.

평소 오던 길이라 안일했던 탓일까 나는 그냥 자리를 준비하겠다고 하며 그녀의 전화를 끊고 버너따위가 있는지 찾아보고 쇼거스에겐 신문지따위를 안젖게 해서 가져와달라고 부탁하며 준비를 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날은 무언가 이상했다.

물론 꽤나 거리가 있었기에 30분 정도로 왕래가 오래 걸리는 일이었지만 그 날은 거의 1시간이 되도록 연락도 없이 오지 않는것이었다.


무언가 좀 이상하다 생각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받는건 그녀가 아니었다.


사인은 두부손상, 빗길에 미끄러진 트럭에 부딪혀 난간에서 튕겨져 나와 약 12미터 아래로 추락했는데 하필이면 머리부터 떨어져 비교적 낮은 높이임에도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고

신속히 신고한 운전자에 의해 급히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너무 늦었다 라는 소식만 들려왔다고


그 날 모든 세상에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색깔이 보였지만 모든 색에 회색에 겹쳐보여 평소라면 하지 않을 실수를 자주 하고 그로 인해 기존에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당하기까지 했다.

해고 당한건 애초에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전화를 걸어도 그녀가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녀가 다신 우리집 문을 두드릴 수 없다는 사실에 더 눈물이 나왔다.

그렇게 나는 몇날 며칠을 잠들고 눈물을 쏟기만 반복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가끔 성질섞인 쇼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 요구에 맞춰 행동했지만 그 날 뿐이었다.

다시 이전처럼 울다 잠들고 다시 깨어나서 울기만을 반복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방황하고 있던 어느 날

이상하리만치 밝은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고 들릴 리 없는 목소리가 내 귀에 꽂혀들어왔다.


"좋은 아침, 방이 좀 어두워서 치우고 있었어"


키키모라, 그녀의 목소리다.

그 따스함과 편안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역설적이게도 나는 잠이 달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눈이 온전히 뜨였을때 내 옆에 있던건 그 일이 있기 전의 평소와 같던 그녀가 종량제 봉투의 입구를 펼치며 쓰레기를 눌러담는 모습이었다.


"애초에 난 걔 연기하는것도 싫었다고 난 널 위해 걔 처럼 행동할려고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걔가 뭘 입을지 고민하고 걔라면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하고 조금 실수하면 그 키키모라년이 아니라하고 그 실수 바로 잡을려고 잠깐 내 몸 좀 쓰면 또 키키모라가 아니라고 이젠 나 자신도 내가 뭔지 모르겠다고 니가 그 완벽한 우상을 만들어낸다고 나에게 적용한거때문에!"


다시 정신이 들었을때 쇼거스는 아직 더 뱉어낼게 남아있는지 그 흔들리는 촉수를 더욱 늘리며 나에게 열변을 토하고있었다.

그리고 난 이때 정신이 돌아온걸 사무치게 원망한다.


"애초에 그 닭대가리년이랑 엮이면 안됐어"


그 말을 들은 내 머릿속에서 아주 중요한 무언가가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후 정확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흩날리던 연두색 깃털과 나와 쇼거스가 서로를 향해 소리지르던 장면, 내가 너무 이기적인데 익숙해져서 이기적인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거같다는 쇼거스의 말과 내 손에 닿았던 뺨이라는 이름의 급류


정신을 차렸을래 그녀의 몸에 촉수는 더이상 없었다.

그저 원망스러운 눈빛을 품은 그녀가 있었을 뿐이었다.


"...이제 니가 원하는게 뭔지 알거같네요 그동안 신세 많이졌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집 밖의 어둠으로 빨려들어갔다.


"...대체 왜 그런거야"


하피도 살짝은 역겹다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언니를 봐서라도 오늘 내치진 않을게 서로 시간도 필요하고 날도 늦었으니 자고 가"


그 말을 마치며 하피는 나에게 배게로 보이는 쿠션을 하나 던지며 자기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그렇게 난 전례없이 완전히 혼자가 되었다.





념글 편승해서 써옴



근데 스크롤 그렇게 안길어보이는데 존나 오래 걸리네 씨발 아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