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비아강 전투는 제 2차 포에니 전쟁 중 한니발의 군대와 로마의 군대가 처음으로 대규모로 싸운 전투로써 이 전투에서 한니발은 로마군을 상대로 크게 이기게 된다. 지금부터 지형, 날씨, 장비, 심리 등 전술의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해가면서 한니발의 승리 요인들을 분석해보도록 하겠다. 

•트레비아강 전투 배경과 전투 양상 

한니발과 로마군이 트레비아강 전투에서 처음 만난것은 아니였다. 이전에도 로마군은 몇번 한니발의 군대와 상대를 해본적이 있었고 당시에 한니발에게 크게 패했던 적이 있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는 당시 집정관이자 트레비아 전투에서 한니발과 전투를 벌이는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에게 한니발의 기병을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겨울이 아닌 봄에 한니발의 군대를 상대하라고 조언한다 (겨울이 아닌 봄에 싸우라는 말은 봄까지 아무것도 하지말고 기다리라는 의미보다는 북이탈리아에 위치해있는 트레비아강의 위치와 12월 중순이라는 당시 날짜를 고려했을 때 좀 더 날씨가 풀렸을 때 싸우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하지만 롱구스는 스키피오의 조언을 모종의 이유로 대충 흘러들어버리고 한니발과 트레비아강에서 상대하게 된다. 왜 롱구스가 조바심을 내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한니발의 승리 요인 분석 파트에서 후술하도록 하겠다. 


<트레비아강 전투 당시 한니발의 카르타고 군대와 로마군의 전투 상황도>

전투가 일어나기 하루 전 한니발은 자신의 동생에게 보병과 기병 일부를 주어 숲 속에 매복하게 하였고 자신들의 군사에게 충분한 휴식을 제공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기병들에게 로마군을 급습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롱구스는 즉각 자신들의 기병과 보병들에게 카르타고의 기병을 격퇴하라고 명령을 내리게 된다. 그렇게 강을 건너간 로마군은 중앙에 중무장보병을 배치시키고 양익에 기병을 배치시키면서 카르타고군을 상대하게 된다. 한니발의 카르타고 군 역시 양익에 누미디아 기병을 배치시키고 중앙에는 로마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떨어지는 갈리아 보병을 배치시키면서 로마군을 상대하게 된다.  로마군에 비해 카르타고 측의 중앙 보병이 상대적으로 약했기에 중앙이 거의 뚫릴 것 같던 찰나 상대적 우세였던 카르타고 기병이 로마군의 기병을 밀어내고 매복해 있던 카르타고의 포위대가 로마군의 후방을 거의 포위하면서 로마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게 된다. 당시 로마군 기병 4천에 보병 3만 6천~8천, 총합 4만 정도의 병사 중 2만명 정도의 병사가 사망하면서 로마군은 이 전투에서 절반 가량의 병사를 잃게 된다. 


•한니발은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승리 요인 분석)

1. 한니발의 전술의 핵, 누미디아 기병

이번 트레비아강 전투도 그렇고 이후 칸나이 전투에서도 한니발 전술의 큰 틀은 누미디아 기병을 양익에 배치시키고 상대 기병의 수보다 상대적으로 수적 우위로 배치하면서 양익 포위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였다. 여기서 왜 한니발은 자신의 본국이였던 카르타고 출신으로 기병을 구성하지 않고 누미디아 기병을 다수 기용했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이를 설명할려면 당시 카르타고와 누미디아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 지도는 포에니 전쟁이 일어나기 전 카르타고와 영토(주황색)와 로마의 옅로(초록색)을 나타낸 지도이다. 당시 카르타고는 지중해를 따라 항구도시를 건설하고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척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국의 상선이나 어선 등을 보호하고 지중해에서 영향권을 넓히기 위해서는 거대 함선과 함선에 올릴 무기 등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는 자연스럽게 보병이나 기병 등 육군 전력보다 해군 전력으로의 발전이 중시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예로부터 카르타고는 자국민들을 육군으로 훈련시켜 전투에 배치시키기 보다 해상무역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용병들을 고용하는 경우가 대다수였는데 누미디아 기병 또한 그런 용병 중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누미디아가 승마술에 능통했던 이유는 누미디아를 구성하고 있던 베르베르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베르베르인들은 예로부터 유목 생활을 하는 민족이였기에 평소 말을 타며 생활하던 문화가 자연스럽게 기병 용병 부대를 운용하는데 일조를 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누미디아 기병의 특징은 높은 기동력에 있었는데 이들은 빠르게 적들에게 돌격하여 적에게 창을 던지고 적의 보병이나 기병이 대응하기 전에 빠지는 전략을 구사했다고 알려져있다. 이러한 누미디아 기병의 움직임은 기동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기초적인 보호구 마저 일부 포기한 결과로 보여진다. 한니발은 이런 누미디아 기병의 특성을 살려 양익에 이들을 배치시킴으로써 적들을 교란하고 보다 효과적으로 적들을 포위 하는 방향으로 이들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트레비아강 전투에서 일부 누미디아 기병을 적진으로 보내 로마군을 도발함으로써 로마군으로 하여금 한니발이 의도했던 방향대로 움직이게 유도하고 매복 해있던 보병과 기병을 통해 빠르게 로마군의 후방을 포위해버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한니발이 전술을 펼침에 있어 이들은 찐빵에서 팥소 같은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2. 매복 작전을 펼치기 좋았던 한니발의 지형 선택

아래 사진은 위의 트레비아강 전투의 상황도를 바탕으로 실제 전쟁이 펼쳐졌을것으로 유추되는 지역의 위성사진이다. 

빨간색으로 동그라미 친 부분을 좀 더 확대하면

위성 사진을 보면 중앙에 트레비아 강이 지나가고 한니발이 자리잡았던 강의 왼쪽 부근(사진 기준)에 꽤 넓은 숲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숲은 한니발이 매복 작전을 펼친다면 좋은 지리직 이점으로 작용했을 것이고 실제로 한니발은 자신의 동생에게 일부 병력을 주어 매복 작전을 펼쳐 로마병을 궁지로 몰아넣게 된다. 그리고 숲은 병사들이 휴식을 취할 때 적에게 쉽게 들키지 않게 일종의 은신처 역활을 하여 휴식을 취하는 병사들로 하여금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제공하여 보다 효율적으로 휴식을 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한니발은 자신과 로마군 사이에 흐르는 트레비아 강 또한 로마군의 사기를 꺽어 전투를 유리하게 이끄는 요소로서 활용하였는데 강을 어떤 식으로 활용하였는지 다음 단락에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3. 강을 건넌 로마군에겐 너무 추웠던 12월의 날씨

당시 전투가 일어났던 트레비아강은 이탈리아(당시 기준 로마 공화정)에서도 꽤나 북쪽에 위치해 있는 강이다. 더군다나 전투가 벌어졌던 12월 중순에 그것도 강을 건넌 상태였던 로마군 입장에서는 상당히 추운 상태였을 것으로 예상된다. 

위 사진은 당시 트레비아강 전투가 펼쳐졌던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피이첸차라는 도시의 12월 기온을 보여준다. 물론 그때의 날씨를 정확히 알수는 없겠지만 최저온도를 보면 영하도 넘나나는 등 꽤나 추운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 로마군의 경우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신발이나 옷 일부가 물에 젖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체감 온도는 더 떨어졌을 것이다. 거기에 추가로 당시 로마군이 입고 있었던 갑옷 역시 안그래도 추운 로마군에게 추위를 더 가중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로마군은 로리카 하마타라고 불리는 철로 만든 고리를 엮어서 만든 갑옷을 입었는데 이렇게 철로 만든 갑옷은 당연히 추위에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 밖에 없다. 또한 이와는 별개로 아침부터 밥도 제대로 못먹고 적 기병을 추격하라는 명령을 받은 로마군 입장에서는 배고프고 추운 상태에서 적을 상대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분명 로마군이 전력을 다해서 싸우지 못하게 만드는 일종의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4. 지휘관이 이성이 아닌 감정적으로 행동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준 롱구스

한니발은 평소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가 다소 성급하고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의도적으로 스키피오가 아닌 롱구스와의 전투를 준비했다고 보여진다. 또한 위에서 상술했듯이 롱구스가 스키피오의 조언을 사실상 묵인한 이유가 스키피오와 롱구스 간의 사이가 좋지 않아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둘 간 사이는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파벌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깨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이런 롱구스를 도발하여 본인에게 불리한 전투에 휘말리도록 만들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볼 수 있을까?

필자는 그 원인으로 크게 세 가지 정도가 있다고 분석하였다. 첫째, 트레비아강의 지리적 위치 특성 상 한니발 군대에게 패배하거나 기세가 밀리면 한니발의 군대가 계속해서 남하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롱구스 입장에서는 한시라도 자신이 한니발의 군대를 막지 못한다면 한니발이 계속해서 남부쪽으로 진출하여 공세를 이어나갈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롱구스 입장에서 심리적 압박으로 다가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둘째, 자신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가 트레비아강 전투 이전의 한니발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던 사건이 롱구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분석하였다. 물론 전쟁을 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분노와 복수심은 때론 필요한 법이지만 적어도 전투에서 수 많은 병사들을 지휘하는 지휘관에게까지 해당되서는 안된다. 지휘관에게 이러한 감정은 판단력을 흐리게 만드는 사족에 불과하다. 하지만 스키피오와 친밀한 관계였던 롱구스 입장에서 이는 한니발에게 무조건 복수를 하겠다는 일종의 복수 심리로 작용하였고, 이 또한 한니발과의 불리한 전투를 하도록 부추긴 원인 중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보병 전력을 과대평가 하는 과정에서 다른 전략적 요소를 고려했어도 무시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당시 로마군은 지상군의 강자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한 보병 전력이 그들의 자랑이자 주요 전략 요소였다. 롱구스도 당시 집정관까지 올라갈 정도의 인물이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형, 날씨, 훈련 정도, 심리 등 상술한 전술적 요소를 아에 몰랐을 것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전술적 요소를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자랑이였던 보병이 카르타고의 상대적 약점이였던 중앙을 뚫어줄 것이라고 판단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비록 전투 초기 전술 목표로 삼았던 중앙 돌파를 수행하지 못하고 전투 막바지에 절반 가량의 병력이 카르타고에 의해 괴멸당하고 남은 병력마저 포위 당할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결국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약했던 갈리아 보병 쪽을 뚫고 후퇴에 성공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아에 틀린 애기는 아니였을지도 모른다. 


•마치며 

트레비아강 전투는 카르타고 군과 로마 군 사이를 가로지르는 강이 흐르는 지리적 특성과 12월 중순 눈이 내리는 북부 이탈리아의 날씨, 누미디아 기병의 등장 배경, 한니발과 롱구스, 두 지휘관의 심리 등 여러가지 부분을 고려해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전투였던 것 같다. 이번에 처음으로 각 잡고 글을 쓰긴 했지만 이런 분석 글을 써본 경험이 많지 않기에 미쳐 생각하지 못하고 넘어가거나 잘못 생각하고 있는 부분도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소 부족할 수도 있지만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칸나이 전투나 자마 전투에 대해서도 써보도록 하겠다는 말과 함께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다. 

  

참고 문헌 및 이미지 출처

명장, 그들은 이기는 전쟁만 한다. 임용환 저.


세계사, 전쟁사_포에니 전쟁(https://notsunmoon.tistory.com/223)


트레비아강 인근 위성사진(구글 어스)


피에첸차 12월 일기표(https://weather.com/ko-KR/weather/monthly/l/3501bd901eca7b42c6e43394498003f9400cb3801b2f7c4c8d88faad8c124856)


트레비아강 전투 진행도(wikipedia)


누미디아 기병 사진(https://www.pinterest.co.uk/pin/592856738417127960/)


스키피오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롱구스의 관계(H. H. Scullard, 『Roman politics, 220-150 B. C.』, Clarendon Press(1951)) 

번역&해석(http://egloos.zum.com/shaw/v/3626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