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에서 살아남기

 

 

“길이 험하니 조심하시오!”

 

마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마차가 험하게 흔들렸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나는 조심할 새도 없이 그대로 엉덩이를 쿵 찧을 수밖에 없었다. 

 

“켁!”

 

주변에서 내 꼴을 보던 전우 몇 명이 날 보더니 키득키득 웃었다.

씹, 존나 쪽팔리네.

 

“쯧쯧.”

 

얼얼한 엉덩이를 쓰다듬고 사이 들리는 혀 차는 소리.

고개를 돌리자 옆에 앉아 있던 게일 아저씨가 한심하다는 듯 나를 훑어보고 있었다.

 

“촌놈도 아니고 무슨 우마차에 엉덩방아를 찧고 있나, 자네는.”

“실제로 타보는 건 처음인데요.”

“촌놈 맞았군 그래.”

 

믿었던 아저씨마저…….

 

민망한 기분에 나는 고개를 돌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 강하지 않은 햇살에 산들바람이 솔솔 불며 내 뺨을 간지럽히는 게 느껴졌다.

 

‘날씨는 더럽게 좋네…….’

 

고개를 젖히고 주변을 둘러보니 보이는 황금빛 벌판.

추수 시기라 그런지 농부들이 나와 밝은 얼굴로 농작물을 수확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랜만에 느끼는 평화로운 풍경이로군,

 

‘평소 같았으면 부대장이 일광건조라도 하랍시고 두들겨 깨울 턴데.’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에 고개를 홱홱 저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 악마를 왜 생각하는 건데.

 

그래도 막상 그 지랄 맞던 부대장도 없으니 조금은 허전한 기분이 드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그래도 얼굴은 봐줄 만 했는데.”

“흠. 부대장님이 아름다운 분이시긴 하지.”

 

향수에 빠져 중얼거리는 내 말을 들은 것일까, 내 말을 들은 게일 아저씨가 훅 끼어들었다.

고작 한 마디로 누구 얘기인지도 눈치 채다니.

 

“자네가 이렇게 퇴직하니 참 아쉬운 눈치였어.”

“그 여자가요? 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요, 아저씨.”

“무슨 소린가. 자네도 부대장한테 영입 제안도 몇 번 받았다 했으면서.”

“나만큼 부려먹기 쉬운 놈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랬겠죠. 지보다 젊은 놈이 나 하나뿐이었으니.”

“평민 입장에서 부관 영입을 받는 일이 흔한 줄 아나? 나였다면 평생 먹을 걱정 없다고 좋아했을 터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난 이해가 안 가는군 그래.”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 게일 아저씨의 모습에도 내 결심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런 땀내 나는 곳에서 말뚝?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런 경험은 지구에서 군 복무 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가뜩이나 군 생활 두 번 한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쯧쯧.”

 

대답 없는 날 유심히 보던 게일 아저씨가 다시 한 번 혀를 찼다.

 

“자네도 참 어리군 그래.”

“갑자기 나이가 왜 나옵니까.”

“알만할 텐데 철없는 소릴 하니까 그러는 거 아닌가. 잘 보게, 부대장님만큼 일반 병사들 이렇게 챙겨주는 사람이 있던가? 누가 평민 출신 병사들 퇴직하는 데 이렇게 고향 가는 길까지 챙겨주던가?”

 

게일 아저씨의 말에 주변의 전우들이 동조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맞지. 심지어 노잣돈도 챙겨주시고.”

“적어도 고향 가서 아내한테 할 말은 있어서 다행이란 말이지.”

“하, 벌써 제이미가 그립군……. 돌아가면 이 돈 가지고 제이미한테 청혼해야지.”

“자네 복무하는 동안 이미 다른 남자가 채 갔대도 그러네.”

“뭐? 이 새끼가 그딴 농을 치고 있어!”

 

다시금 달구지 위가 이전처럼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병사로 살았던 남자들이 열 명 넘게 타고 가는데 왜 이리 조용하나 했다.

 

소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게일 아저씨가 말을 이었다.

 

“고되긴 했어도 결국 다 우리 살리자고 했던 거 아닌가. 죽은 녀석들만 생각하면 참…….”

“좋은 날에 우울해질 소린 하지 맙시다, 아저씨.”

“그래. 아무튼 부대장 그 양반, 사람은 참 좋은 분이야.”

“그 사람 좋은 인간이 왜 나한테는 그렇게 악마 짓을 하는지 전 도통 모르겠어서 말이죠.”

“……정말로 모르겠나?”

“예. 그 여자 얼굴 보면서 거기 있을 바엔 혀 깨물고 죽고 말죠.”

“허 참. 젊은 사람이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내 말에 게일 아저씨가 나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데.

 

“뭐, 부대장은 둘째 치고라도 나도 개인적으로 아쉬운 건 사실일세. 자네 실력이면 백인대장도 충분히 노려볼 만했는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는 게일 아저씨의 말에 나는 속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사실 조금 고민하긴 했지.

아마 영입 제안을 받아들이고 계속 병사로 지냈더라면 적어도 한 자리 차지하긴 했을 것 같고.

 

하지만 역시 다시 생각해도 싫은 건 싫은 거다.

 

이 세계로 넘어온 지도 벌써 3년 가량.

21세기 지구에서 살던 것과 달리, 이곳의 삶은 하루하루가 생존의 연속이다.

 

겨우 겨우 살아가는 것만도 벅찬 이 세상에서,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를 그런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내 인생의 무대 중 하나로 장식하고 싶진 않았다.

처음에도 노예병이라 어쩔 수 없이 복무한 거지.

 

백만금을 주든, 백 명이 넘는 병사를 부리든, 하물며 ‘베르든의 투사’라는 명성을 얻든.

돈도 권력도 명예도 거기에서는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래서 자네는 앞으로 어쩔 생각인가?”

 

오지랖 넓은 게일 아저씨답게 여유가 되자 다시금 질문을 퍼붓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아저씨를 향해 적당히 대답했다.

 

“말했잖아요. 아저씨 사는 도시로 가서 살 거라고. 거기 자유도시라면서요.”

“자네도 이젠 노예 신분도 아니지 않나. 어디 가서 살든 상관없을 텐데.”

“그렇다고 영주 밑에서 농사짓고 사는 건 제 성격에 안 맞아서요.”

“용병이라도 할 생각인가?”

“비슷할 걸요? 일단은 길드에 등록할 생각이니까.”

“길드?”

“거기 그런 거 많다면서요. 뭐, 마법사 길드니 여행자 길드니. 그러면 자질구레한 일들 처리하는 길드도 있겠죠.”

“그렇다면 굶어죽을 일은 없겠군 그래. 그 정도 칼질은 할 줄 아니까.”

 

다행이라는 듯 흐뭇하게 웃는 게일 아저씨의 모습에 마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미안하지만 길드에 들어간다고 해서 칼 쓰는 일을 하라는 보장은 없는데 말이지.

 

애초에 나로서는 꼭 써야 될 일이 아닌 이상 칼을 뽑을 생각은 없다.

이제 피 냄새 맡는 건 지긋지긋하니까.

 

기왕이면 애완동물 찾기 같은 자잘한 일이나 하면서 살 거다.

아니면 적당히 여관에서 시종으로 살아가던가.

 

우리가 잡담을 하는 사이 벼가 익은 들판을 벗어나 다시 한참을 움직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점차 느려지는 달구지를 보며 게일 아저씨가 다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상태를 보아하니 오늘은 여기까지 달릴 듯하구만.”

 

아저씨의 말이 신호탄이 된 것일까.

슬슬 주변에서도 볼멘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마부 양반!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그래! 이러다 허리 부러지겠어!”

 

슬쩍 뒤를 본 마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삐를 들었다.

 

“훠이, 훠이!”

 

요란하게 흔들렸던 달구지가 마침내 속도가 느려지더니 멈춰 섰다.

달구지가 멈추기 무섭게 나와 게일 아저씨를 비롯한 모두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땅에 발을 내디뎠다. 

 

“으아, 죽겠다!”

“아이고!”

“후우, 타기만 하는데도 지치는군.”

“그러게요.”

 

고무 달린 바퀴는 커녕 바퀴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세상이니 뭐, 어쩔 수 없나.

과학 대신 마법이 있다고는 하지만, 높으신 양반들이 이런 병사들 고향 가는 길까지 쓰기엔 여러모로 아까우신 모양이니. 

 

이럴 때면 참 원래 살던 세상이 그리워지는 기분이다.

 

푸르릉!

 

격한 숨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마부가 소, 아니 코윈 두 마리를 살살 달래는 모습이 보였다. 

뭐, 뿔이 하나 달렸고 덩치는 거의 두 배에 달하는 것만 빼면 사실 소랑 다를 바 없긴 하지만.

 

나와 함께 얼얼한 허리를 주무르던 게일 아저씨가 말했다.

 

“끄응. 오늘이 3일째던가? 이제 내일 반나절만 더 가면 도착이겠어.”

“웬일로 도적 떼 한 번 안 마주쳤네요.”

“그러게 말일세. 병사 시절엔 그렇게나 달려들던 놈들인데. 그래도 이제 슬슬 마을도 있고 대도시 근처니 나타날 일은 없겠지.”

“그래도 불침번은 서야죠.”

“하루 정도야 괜찮지 않겠나? 말했다시피 도시 근처고…….”

“마지막이라고 은근슬쩍 빠지려고 하네. 오늘 아저씨 순번인 거 모를 줄 알았어요?”

“에잉, 쯧쯧. 평소엔 둔한 주제에 이럴 땐 눈치 한 번 빠르단 말이야.”

 

툴툴거리며 불침번 준비를 하는 게일 아저씨를 보며 나도 몸을 움직였다.

 

며칠 째 이동하는 것에 익숙해진 동료들도 모두 적당히 잔가지와 잠자리 준비 등을 척척 준비해 나갔다.

미리 정해두었던 불침번 순서와 잘 사람을 정하고, 가볍게 취식을 마친 우리는 곧이어 잠자리에 들었다.

나도 준비해둔 짚더미에 털썩 누워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

 

이 세계에 와서 몇 안 되는 좋은 점 중 하나.

셀 수 있을 정도의 별빛만이 보이는 지구의 밤하늘과 다르게, 이곳의 하늘은 두 개의 달과 함께 언제나 은하수와 별빛이 가득 차 있다는 거다.

 

앞으로 바깥에서 밤하늘 보면서 자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지 않을까.

약 2년간의 노예병 생활도 오늘로써 마지막일 테고.

 

……어째 오늘따라 특히 더 감상적인 기분이네.

 

묘한 감각과 함께 나는 눈을 감았다.

 

“잘 자게나. 지스.”

 

근처에서 불침번을 서던 게일 아저씨가 날 향해 말하는 게 들렸다.

거 지스가 아니라 지수라니까.






이후에 대충 게일 아재 딸내미 키잡해서 야스하고 길드 카운터 여자랑 야스하고 부대장이랑 야스할 예정

물론 예정이고 더 쓴다고는 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