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를 꿈과 동심, 낭만으로 읽으려는 시도들은 충분히 있어왔다. 그러한 시도 때문에 생택쥐베리의 생각이 훼손당했을지도 모른다. B612는 카메라어플뿐만 아니라 지금껏 낭만의 공간으로 각종 카페에 이름이 붙어있다. 하지만 이런 시도가 과연 <어린왕자>를 사랑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있다. 


 <어린 왕자>는 정신분석학적 은유가 가득한 작품이며, 순수를 가장한 포르노로 읽힐 때도 있다. 이러한 위선적 작법이 우리를 속이면서도 어딘가 불편하게 만든다. <사랑손님과 어머니>도 박형서 작가에 의해 "하드코어 포르노"로 읽힌 뒤에야 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어린 왕자>를 SM의 관점에서 다시 본다면 시사해볼 지점이 있다.


 어린왕자에는 "친구가 된다는 건, 길들인다는 일이야."라는 사막여우의 대사가 있다. 서로의 시간에 익숙해진다는 의미에 가깝지만 굳이 그들은 "길들인다"라는 용어를 쓴다. 우리는 이 길들인다는 단어선택에 의혹을 가질 수밖에 없다.


 여우의 대사는 어린왕자와 장미의 관계를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관계로 치부한다. 어린왕자가 장미에게 쏟아부은 시간이 그들 간 눈으로 보이지 않는 중요한 것을 보게 만든다. 그제야 그들은 서로에게 길들여진다. 서로의 체계에 서로가 스며드는 일, 이것은 다른 말로 권력관계를 형성한다는 말과 같다. 즉, 그들은 친구로 "길들여지기"에 S와 M의 관계를 형성한다. 


 여기서 "눈으로 보이지 않는 중요한 것"의 의미가 의미심장하다. 여우가 비밀이라 말해준 이것은 결국 "세상의 눈"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기이한 성애가 아닐까? 장미는 가시가 난 존재이며, 어린왕자는 끝없이 그것에 찔리면서도 그녀를 돌봐준다. 꽃이 인간이라 생각한다면 어린왕자는 항상 M의 포지션에 서있는 셈이다.


 여우가 "오후 4시에 네가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라며 의례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이 SM의 준비과정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이 길들이다를 이해할 수 없다. 어린왕자에는 이런 성적인 알레고리들이 숨어있다.


 어린왕자를 둘러싼 이런 과격한 독해에는 그 맥락이 있다.



 바로 상자에 담긴 양이다. 


 라캉학파 정신분석학에서는 인간의 욕망을 언어나 그림으로 포착할 수 없는 것이라 봤다. 어린왕자가 조종사에게 계속 양을 그려달라하지만 그런 시도는 계속 실패하고 만다. 어린왕자가 언어로 포착불가능한 욕망인 쥬이상스를 직시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라캉은 이런 쥬이상스가 언어의 범위에 포착되어있기에 우리가 "신경증자"로의 일반인일 수 있다고 봤다. 다시 말하자면 언어로 정형화할 수 없는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정신병자의 부류에 속한다고 본다.


 어린왕자가 대충 양을 보면 되었지 왜 그 상자에 만족했을까? 하는 생각이 여기에서 해결된다. 어린왕자의 양 상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그의 변태성욕이 담긴 상자다.


 그는 온갖 유형의 어른들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 어른들을 만나러 다니는 이유에는 무언가를 증명하고픈 증명욕구가 있다는 사실이다. 질서를 부정하면서 질서를 계속 소환하려는 마조히즘적 욕구가 있기에 그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별을 찾아나선다. 


 반면 장미는 그를 위협하는 상대가 없기에 어린왕자를 괴롭히며 사디즘적 욕망을 충족시킨다. 결국 장미와 어린왕자는 SM의 관계에서 서로를 포착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