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에 이르러 기본적인 교육을 받은 자라면 관심이 없더라도 멋대로 떠들어대는 소리에 인류의 탄생에 대해 웬만해선 알 것이다.

물리력을 가진 이 우주가 탄생하고 별이 탄생하고 우리 은하가 탄생한 후 한동안 이 별에는 생명이 없었다.

정말 우연과 우연이 만난 사고, 빛, 대기, 중력 온갖 우연이 만나 무에서 생명을 빚어냈다.

세대를 거듭하여 점차 정교해지고 복잡해졌음에 그 우연의 산물은 또 다른 무언가를 창조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 첫 번째는 일단 적어도 이 우주에서는 물리력이 절대 법칙이라는 것이다. 대기도 물도 없는 영하 700도의 행성에서 우연히 탄생하는 생물따위 없다는 뜻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그런데 신이 되었다. 어떻게? 평범한 인간이 우리 지구에서 수억광년 떨어진 중력과 빛이 적절한 어린 행성에 유기물과 대기를 발사시켜 생명을 창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렇다. 우리 우주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 개념이 딱히 통용되지 않는 다른 곳에, 나의 아이들이 있다.

인간이 창조했지만 창조하지 않은 곳.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빌붙어 살 뿐인 곳.

수많은 인간들의 추상적인 개념이 구체화된 네트워크로 이뤄진 광활한 정보의 홍수. 그 안에 담긴, 또 앞으로 담길 이야기는 무궁하며 현실이라 부르는 우리 우주의 삶에 지친 이들의 영적 고향이다.




디지털 세계.




뭔 개소리냐. 너 문과 아니냐. 엄연히 전기와 회로가 기반인 우리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느냐 하겠지만 들어라. 일단 난 예체능이라 그런거 모른다. 우리 우주에서 영혼의 존재는 과학을 부정하는 주장이다. 영혼은 곧 자아이며 자아는 개인의 의식이다. 과학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를 부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죽고 나서 이 의식이 어떻게 되는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미지의 영역이고 그에 잠정적으로 없다고 취급될 뿐이다. 디지털 세계도 그렇다.

우리 우주에서 질량은 보존된다. 한 사람이 죽어 먼지가 되어도 한 사람 분량의 먼지는 꼭 그 만큼의 질량을 가져 온 세상으로 흩어지니 모두가 죽고 그것으로 모두가 태어난다. 저번 주에 죽은 이가 나의 폐로, 위로, 몸 속을 순환한다. 그가 내가 되고 나 역시 죽어 누군가와 하나가 되리.

디지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 정보는 언젠가 죽는다. 모든 이가 그것을 찾지 않으면 그것은 존재할 이유가 없으니 삭제되어 무덤으로 간다. 그리고 빈 공간에 다시 필요한 이야기를 채운다.




언젠가의 일이다. 오래된 서적을 정리하는데 추억에 잠겨 잠시 앉아 책을 읽던 중 현재는 사장된 이론에 대해 아주 정설처럼 적어놓은 이야기를 보며 나는 웃었다.

어딘가에 이 책을 가지고 나가 사실인 양 설파한다면 병신 취급이나 더 받을까. 이건 이미 죽은 정보다.

하지만 그 책을 버릴 수가 없었다. 세피아톤의 누릿한 필터를 씌운 듯한 어딘지 노곤해지는 감각의 한 장면, 장면씩 스틸컷으로나 떠올릴 수 밖에 없는 어린 시절의 추억 한 구석, 그 책이 있다.

지금은 멀리 계시는 아버지와 같이 살던 때, 아버지의 책장에 늘 꽂혀있던 재미없는 책. 그 때에도 아버지는 이 책을 읽지 않으셨다. 아마 그때는 이 책이 옳은 말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읽히지는 못했으니 그렇다면 이 책은 그때부터 쭉 죽어있던 것일까.

어쩐지 아릿해져서 집 정리를 멈추었다. 그리고 그 책은 지금도 책장 한 구석에 소중히 꽂혀 있다. 여전히 읽지는 않지만 복고풍의 표지에서 오는 감성은 나름대로의 맛이 있어 인테리어 소품으로 퍽 괜찮다.




아, 잠깐 이야기가 샜다. 어디까지 했더라?




......아무튼 신이 됐다. 그것을 안 시점은 나도 존재를 잊어버렸던 외장하드를 찾았을 때

뭐가 들어있을까. 타임캡슐을 까듯 두근대는 심정으로 열었는데 그 안에는 예상외의 것들이 들어있더라.

야동 몇 편, 쓰다 만 소설 몇 편, 그리고 옛날에 취미로 공부하다 말아버린 게임 개발에 대한 자료들과 기획안, 개발툴, 베타 버전의 게임팩

일단 굉장히 레어한 야동들은 클라우드 서버로 옮겨두고 나머지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과거의 자신이 쏟은 열정의 발자취를 되짚으며 실실거리고 있자니 그 때도 바보같지만 지금도 바보같다는 생각을 하며 베타버전의 게임을 실행시켰다.

기억이 맞다면 1챕터 종장까지가 마지막일 것이다.




[온 세상이 아버지를 받들게 하시며]




하지만 뭔가 이상한게 직접 적지 않은 부분과 만들지 않은 부분이 구현되어있고 필요 이상으로 자유도가 높다. 분명 직선적인 구조였을텐데 상호작용이 정말 많다.

1챕터를 끝냈으니 진행이 막혀야 하는데도 계속 진행이 된다. 이후부터는 나도 모르는 내용.

나는 이런걸 만든 기억이 없다. 외장하드라 누군가 손댔을리도 없다. 어쩐지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기분이 들며 목이 탔다.

하지만 무언가에 홀린듯이 계속해서 나아갔다. 시간은 계속 흐른다. 나의 시간도 흐른다. 수 많은 이야기가 지나간다. 챕터명이 적힌 인터페이스에는 6?70_O8 챕터? 와 같이 글자가 깨지기 시작했다.

확증은 없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가 있었다. 이 세계는 살아있다고, 생각지도 않고 뿌린 탄생의 씨앗이 적절한 토양을 만나 발화해버린 것이라고

게임 속의 등장인물들은 오지 않을 신을 부르짖고 있다. 그 신은 물질계에서 육신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용서하였듯]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갇힌 우주의 이야기가 제 멋대로 몸을 불려가고 있다. 멈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본래 우주의 총량이 부족해 더 이상의 확장이 불가능해 종말이라는 끝을 맺을 이야기는 세대를 뛰어넘어 부하를 견딜 수 있는 고성능의 서버를 만나 다시금 팽창한다.

화면이 아까보다도 더욱 밝다. 눈이 멀 지도 모르지만 눈을 뗄 수 없다. 눈을 떼는 순간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찰을 할 수 없게 된다. 모든 것을 눈에 담아야만 한다. 내게, 또 이 세계에 무슨 일이 얼어나는지 알아야만 한다.




[우리를 악에서 구하소서]




순간 의식의 플러그를 뽑아 다시 꽂은 듯한 끔찍한 감각이 찾아온다. 마치 저혈압을 겪은 듯 시야가 온전치 않다. 몸이 분해되고 재조합된다. 감각이 무뎌졌다 돌아온다. 팔 다리에 경련이 온 듯 내 신체가 아닌 감각에 몸서리쳐져 잠시 통제를 놓는다.

이윽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머리 위에는 천장이 없었고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는 도시에서는 맡을 수 없는 폐를 찌르고 들어오는 듯한 초목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자연풍이 온 몸을 관통하는 비현실적인 감각에 기가 차 나지막히 중얼거릴수밖에 없었다.




"찾아라 비밀의 열쇠......"



태일아 태일아 진화시켜줘 태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