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녀님, 늦은 시간까지 고생하셨어요."


매년 1월 1일. 레헨나에서는 새해를 축복하고 복을 비는 연례행사인 불꽃축제가 열린다. 황제와 황후, 신성 기사단까지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인 만큼 그 규모도 실로 어마어마했다.

 

하늘을 수놓는 형형색색의 폭죽들로 축제가 성대하게 마무리된 그날 밤, 나는 올해로 21살을 맞이한 엘레나 성녀와 잠옷 차림으로 담소를 나누었다. 


"천만에요. 뒷정리까지 도와주셔서 얼마나 편했는지 몰라요."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내 품에서 잠든 어린아이이자 미래의 성녀, 셀렌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까 피곤하다더니 그새 잠들었네요. 제가 눕힐 테니까 이리 주세요"


"괜찮습니다. 제가 하죠, 뭐."


누가 업어가도 모를 만큼 곤히 잠든 소녀를 침대에 눕혀주었다. 


"마왕님은 참 다정하셔서 좋아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쭉 그랬잖아요?"


지금으로부터 9년 전, 어김없이 초대받아 축제에 참석한 나는 수많은 인파에 밀려 길을 잃은 성녀를 만났다. 외모 때문인지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를 달래며 안내해준 것이 첫 만남이었다.


"사실 처음엔 엄청 무서웠어요. 선대 마왕이 전 대륙을 멸망시킬 뻔했다는 얘기를 책에서 읽었거든요."


커다란 침대에 털썩 주저앉으며 내가 말했다.


"혹시 그분에 대해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성녀가 흥미를 보이자, 나는 그녀 옆으로 자리를 옮겨 부모님께 전해들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 전. 마계의 지도자로 내 선조인 아스타로트가 즉위했다.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압도적인 강함과 뛰어난 리더쉽, 유능한 인재를 보는 눈까지 완벽했던 그는 전 대륙을 마족의 영토로 삼으려는 야망을 불태웠다.


그는 전장에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냈다. 검술이면 검술, 마력이면 마력. 마왕의 야망에 맞서 내로라하는 국가들이 연합했음에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불과 5년도 지나지 않아 대륙의 7할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두려울 것 하나 없던 마왕을 좌절시킨 것은 다름 아닌 정령들이었다. 비, 바람, 대지, 초목을 돌보는 신의 피조물인 정령들은 인간을 포함한 종족들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였다.


"마왕의 행태에 분노한 정령들이 뭘 했는지 아십니까?"


"음.. 폭풍이나 홍수를 일으켰나요?"


"아무것도. 정령들은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았어요."


대륙을 피바다로 만든 마왕에게 분노한 정령들은 규율을 깨고 본분을 수행하지 않았다. 그가 소유한 영토에는 몇 달, 몇 년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고, 더위를 식혀줄 바람이나 태양을 가려줄 구름도 없었다.


농사지을 수 있던 땅도 점차 메마른 사막으로 변했고, 풀과 나무들은 하나둘 말라죽었다. 마왕이 쟁취해 낸 광활한 영토가 아무데도 쓸모없는 불모지로 변해버린 것이다.


백성들이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자 당황한 마왕은 정령들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당장 본분을 수행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하지만 정령은 죽어도 다시 태어나는 불멸의 존재. 아무리 겁주고 고문해도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는 사이 4분의 1에 달하는 마족이 목숨을 잃자 절박해진 마왕은 영토를 돌려주며 잘못을 빌기 시작했다. 두려울 것 없던 마왕이 고작 하찮고 약한 정령들에게 무릎을 꿇은 것이다.


심지어 바다의 물고기들조차 떠나버렸고, 이미 모두를 적으로 돌린 탓에 교역으로 충당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결국 아내와 자식을 포함한 모든 백성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상황이 오자 마왕은 최후의 방법을 택했다. 


"아스타로트는 결국 수많은 정령들이 보는 앞에서 제 배를 갈랐어요. 그렇게나마 분노가 풀리길 빌면서."


무적의 군주로 불리던 대악마는 그렇게 허망한 최후를 맞이했다. 아주 먼 시간이 흐른 뒤에야 천신과 마신, 두 신들과 그들을 섬기는 우리들도 화합의 장을 이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