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우 왕국 수도, 왕성 크리우 성의 대회의실은 멍청한 보고에 침묵 속으로 잠겼다. 대마왕 붉은망치가 믿었던 부하들의 배신으로 몰락하며 인류를 위협하던 대마왕의 군세가 조각난지 32년만에 이루어진 마왕군의 침공에 이 왕국이 버틸 수 있을런지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건만, 개전 2주가 지나고 보니 전쟁은 전쟁과 무력, 질서와 패권의 신 아리카메조차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대마왕의 군세가 무너지며 정복당했던 열두 왕국이 해방되고, 그 대가로 아비규환의 인외마경이 되어있던 마계에서 마족 피난민이 무수하게 발생하기를 10여 년, 대마왕의 후예를 자처하는 대머리 마왕이 즉위해 형편없이 무너져있던 마왕군을 다시금 그러모아 공포스러운 무력으로 벼려내는 것을 보며 긴장한 것이 8년, 마침내 쥬리아 왕국을 침공한 마왕군이 왕국 영토의 절반을 순식간에 병탄하고 쥬리아 왕국군을 갈아버리는 참극에 온 세상이 기겁하며 마왕 틴푸가 대마왕의 재림이노라 두려워한 지 14년, 크라우 왕국으로 마왕군이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왕과 신하들이 얼마나 긴장했던가.


온 세계는 마왕의 재림을 두려워했지만, 동시에 마왕의 외침에 대항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너무나 적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전과 달리 세상은 마족과 두루 교류하고 있었던 탓이다. 당장 레이어스 대륙의 수많은 마도기구들을 작동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마도석들부터가 마족령에서 상당량 수입되는 자원이 아니었던가. 


그리하여 세상은 틴푸가 쥬리아를 파괴하는 것을 방관했다. 마침 당대 쥬리아왕 사키스빌레가 아직도 해방되지 못한 왕국 북부를 마족에게서 해방시키겠다며 선제공격을 해 벌어진 전쟁이었으니, 모든 것은 성급한 사키스빌레의 잘못이라고 떠넘기기도 어지간히 편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번 크리우 왕국 대침공은 경우가 달랐다. 8년여 전, 크리우의 유서깊은 항구도시 세바스티앙이 내부의 배신자들로 인해 마왕군에 넘어갈때부터 어제까지 친마족파 민병대와 친마족 인사들을 내세워 세바스티앙을 '자발적 투표'형식으로 병합한 틴푸가 전격적으로 전 왕국령에 대한 침곡을 개시할 것이라는 예측을 한 이들은 극히 적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쥬리아 왕국을 때렸을 때는 적당한 핑계라도 있었다. 헌데, 이번 크리우 왕국 침공은 누가 봐도 어떤 핑계도 없었다. 심지어 마왕군은 공격할 상태조차 아니었다. 그렇기에 아리카메 신전의 사제들이 왕을 찾아와 곧 마왕군이 왕국을 전격적으로 침공하리라는 신탁이 내렸다 고할 때 왕은 이렇게 말했었다.


"대사제."


"예, 폐하."


"정말 신탁이 내린 것이 맞소?"


대사제가 공손히 고개를 조아리며 답하자 그의 왼편에 시립해 있던 추기경도 고개를 숙였다.


"그렇사옵니다, 폐하. 지난 10월 25일, 아리카메께서 마왕군이 다가오는 2월에 왕국을 범하려 할 것이니 대비하라는 말씀을 내리셨나이다."


"이는 성도 바싱돈과 성부 시아와 성자 와이든의 이름으로 보증되었나이다."


두 고위성직자의 진심을 담은 말에 왕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가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두 분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나로서는 그 말을 믿지 않을 도리가 없소이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든 성직자들의 얼굴에 의아함이 서리자 왕이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현실과 신탁이 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이 일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하다 결국 이 강대한 신의 성직자들에게 진실을 말하기로 결정했다. 


"왕국 정보부는 지난 12월부터 왕국 국경선에 집합한 마왕군을 염탐하고 있었소."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말에 두 성직자의 얼굴에 만족감이 깃들었다. 그들의 신은 그렇게 성실한 자들을 총애했다. 추기경이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왕의 업적을 찬양했다.


"아아, 아리카메께서 폐하의 빈틈없는 경계에 흡족해하실 것이옵니다.."


"고맙소, 키사츠 추기경, 하지만 내가 진정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다음이외다."


"예..?"


"정보국장의 보고에 따르면 우리 국경선에 집결한 마왕군의 상태가 실로 처참하다고 하오. 보급이 나오지 않아 밥을 굶고, 월동용 천막이 충분히 지급되지 않아 폐건물에 들어가 난로를 피우고 서로 뭉쳐 추위를 난다고 하더군."


두 성직자의 얼굴에 혼란스러움이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왕이 말을 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오. 정보부 요원 몇몇이 민간인으로 위장하고 마왕군 병력에 접근했는데, 마왕군에게 치즈와 빵을 주니 눈에 띄게 고마워하며 각종 마왕군의 무기들과 보급물자들을 답례로 준다고 하더군. 경들이 보기에는 틴푸같은 사악하고 교활한 자가 그런 군대로 우리를 침공하겠소?"


잠시 고민하던 대주교가 답했다.


"저라고 하여도 그러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허나 신께서 기도하는 저희에게 말씀하신 바, 폐하께오서는 부디 아리카메 신의 말씀을 쉬이 넘기시지 않고 경계를 기울이시기를 감히 이 늙은이가 바라옵나이다."


잠시 탐탁치 않은 얼굴로 팔걸이를 두드리던 왕이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휴..그래, 알고 보면 저 병신들은 위장일 수도 있겠지. 고맙소, 대주교, 그리고 추기경. 내 경들의 말을 받들어 물샐틈없이 국경을 지키라 왕국군에 명하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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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일어났다. 틴푸는 기어이 그 병신같은 군대로 왕국을 전격적으로 침공했고, 국왕은 도망가라는 인류연합의 권유에도 나는 수도에서 죽을 것이라며 수도에 남았고, 멍청하게 쭐래쭐래 쳐들어온 마왕군은 그 위세가 무색하게 왕국군에게 처참하게 얻어맞는 중이었다. 


아무리 크리우가 구 대마왕령이라 마족혼혈이 많고 강대한 마왕군의 무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지만 그것도 30년 전 이야기였다. 상식적으로, 그 거대한 마왕군이 겨우 크리우를 삼키지 못해 저렇게 추태를 보이는 행동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상식외의 일이 분명했다.


헌데 상식의 죽음은 그곳에서 끝나지 않았으니, 크라우 왕국으로 쳐들어온 마왕군들이 벌이는 행동은 국왕과 신하들의 머리에서 어이라는 놈을 빼앗아갈 작정이 분명했다.  


"예."


"마을을 불태우고, 여자를 범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까지는 알겠습니다. 마왕군은 늘 그런 놈들이었으니. 헌데, 냉장고를 훔쳐요?"


"예. 이외에도 마왕군 병사 하나가 메드렌 마을 상점가 문을 창으로 부수다 못 부수고 돌아갔다는 소식이 있습니다"


"..."


"그리고 그 옆 마을에서는 마왕군 용기사들이 다크 드레이크 먹일 고기가 없다고 경비대에 고기를 요구하다 포로로 잡혔다고요."


"예.."


"추가 보고입니다. 마왕군 일부가 죽음의 숲에 진지를 꾸렸다 독기에 노출되어 마왕령으로 긴급 후송되었다고 합니다."


"죽음의 숲에? 대체 왜?"


"그..지도가 40년 전 거였답니다."


"정말?"


끄덕끄덕. 황망한 얼굴의 전령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침내 왕의 분노가 폭발했다. 


"마왕 그새끼 대체 왜 우릴 침략한 거야?!"


"그.."


"그?"


"탈라취를 시키겠다던데요.."


"야! 라취 그 미친 네크로맨서 새끼는 우리나라 사람도 아니고 뒈진 지가 700년이잖아! 그리고 우리가 걔들이랑 같은 게 뭔데? 우리가 사령술을 쓰길 했냐, 아니면 민간인 대학살을 했냐, 아니면 전시강간을 벌였냐, 그것도 아니면 인종학살을 돌리길 했냐, 마족은 열등인종이니까 절멸시켜야 한다고 왜곡된 교육을 시키기를 했냐? 대체 우리가 뭐가 라취인데?"


분노하는 국왕 앞에서 떨떠름한 표정의 재상이 대답했다. 


"국왕 폐하."


"마탑주! 찐푸인가 좆인가 하는 자칭 대마왕새끼 당장 통신연결해! 대체 이 새끼는 뭐하는 미친새끼길래 동네 개새끼도 멍멍 시발 이건아니죠 폐하라고 할 지랄판을 벌이는데?! 어?!"


"폐하."


"..?"


"말씀하신 모든 행위 중 조직적 인종대학살만 뺀 모든 전쟁범죄는 현재 대마왕군의 손으로 왕국민들에게 자행되는 중입니다."


잠시 멍청하게 재상을 바라보던 국왕이 뒷목에 손을 잡더니 기어코 뒤로 넘어갔다. 그로부터 수 일 후, 아리카메가 직접 크리우 왕국 왕도 크리우에 강림하여 왕에게 신탁을 내리시었으니 그 말씀이 이러하였다.


[마족들이 교화되기를 바래었던 나의 소망은 이것으로 부수어졌도다. 너희 크리우는 지금부터 나의 대전사가 될지인저, 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너희의 땅으로 향하는 보급물자와 무기와 의용병의 물길이 마왕군을 너희의 땅에서 몰아낼 때까지 도도하게 이어지리라.]


[내 너희를 어엿비 여겨 너희의 전후지원을 축복할 것이니, 나의 아이 마셜의 이름으로 너희의 나라가 전쟁이 끝난 후 전쟁이 시작되기 전보다 매우 풍족하고 풍요로워지리라.]


[틴푸는 들어라. 내 너를 단죄하리라. 너희 마족은 금일부로 나의 신도들과 그 어떤 거래도 할 수 없을 것이며, 그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해 앉은 채 썩어가리라. 동방의 사악한 신 핑핑이 너희를 무한정 도울 것이라 헛된 희망을 가지지 말지어다. 핑핑은 언제나 사람들의 등골을 부수어 그 뼈를 빨아먹는 것을 즐겼으니, 그가 너희를 도운 뒤에는 필시 추악한 욕망이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