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냄새가 진득하다,


이미 무뎌진 단검으로 계속해 그어내고, 멍울져 흘러내리는 그리움을 그저 바라만 볼 뿐이다.



그어낼 때면, 머릿속에 안개가 차올라, 슬프고 어두운 기억을 가린다.


그것은 절대로 어디로 가는 법이 없고,


팔에 이 상처와 달리, 금방 아무는 법이 없다.



그저 기억 저편에 밀어내고 꾹 닫아 걸어잠궈,


사라졌다, 없어졌다, 그렇게 믿을 뿐이다.



그러다 가끔 행복한 나날들에 갑작스레 기어나와


아프지 않아? 하고 물어온다.



아프다, 네가 삶에 깊게 박혀든 만큼,


억지로 뽑혀 나간 네 빈 자리가 아프다.


네 실루엣이라도, 뒷모습이라도, 환상이라도 보면 나을 것 같은데,


그러며 스스로 잠근 자물쇠를 풀어낸다.



"저희 그냥 가요."


"잠깐만, 복채만 내고."


"악담만 퍼부었는데 무슨 복채에요!"



그녀가 기어코 복채를 건넨 나를 끌고 천막 밖으로 나선다.


축제의 왁자지껄한 분위기와 평화로운 일상,


끔찍한 기억이다.


무엇보다 싫은 점은,


그녀가 싫어했던 그 점쟁이 말처럼 되었다는 것이겠다,


나는 절대, 행복할 수 없네.



"있잖아요, 혹시나."


제발 부탁이야.


"제가 죽어도."


말하지 마.


"잊지 말아 줄래요?"


왜,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왜 나를 힘들게 만들고, 혼자 떠나는 거야?



"그래."



그러면.



"죽을 때까지, 잊지 않을게."


곧이어 의자가 바닥에 나뒹굴고, 밧줄이 조여와 목을 졸랐다.




"허억, 허어억."



기억 속에서 숨이 막히는 동안 현실에서 몰아쉰 숨으로 과호흡이 되어 머리가 멍했다.



손이 떨려오고, 아직도 그은 상처의 감각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서,


"씨발, 선배."


문을 박차고 나와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어, 끝났냐."


"제가 자살 사건은, 안 하겠다고, 말했잖아요."



이를 악물고 분노를 씹어 넘기며 말했으나,


따르는 반응은 지극히 차분하다.



"그래, 자살 사건 맞구나."


"자살 사건 맞구나?"



떨리는 손을 선배의 눈앞에 들이밀고 묻는다,


"형 자살 해 봤어요?"


극한에 밀려나 자신마저 해하는 그 기분을 아냐고.



"그 감촉, 밧줄의 거침, 저산소와 즉시 느껴지는 후회감."


"미안하다."


"걸짝처럼 찢어진 마음, 이내 축 늘어지는 그 지독한 느낌, 느껴봤냐고."


"그만 해라."


"그럴 리 없죠, 항상 좆같은 일은 내 차지니까."



선배는 잠깐 있다가 표정을 숨겨주던 서류철을 바닥에 집어 던지고 말을 받아친다.



"그럼 씨발!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냐? 위에선 돈 많은 새끼들 비위 맞춘다고 이런 일만 던지는 거, 쳐내고 쳐내다가 실적 떨어져 가는데."



잡히지 않은 미해결 범죄의 종착지라고 불리는 이곳에서 받는 일은,


결국 돈 많고 간절한 자들의 최종 도피처였다.


살인사건, 강도 사건이 요즘 세상에 잡히지 않을 리 없으니, 결국 우리에게 떨어지는 일은 고작 이런 게 전부였다.



"내가 그러다 짤리면 내 아내는, 내 자식들은? 그 씨발 음흉한 새끼들한테 가서 자살이라고 말하고 물어뜯겨야 하는 기분, 니는 아냐고, 내가 몰라서 들고 왔겠냐? 내가 니 좆 되보라고 골라왔겠어?"


선배는 조소했다, 나와 내 어투와 이 상황과 그 간절한 사람들, 그리고 아무것도 못 하는 자신을.


"퍽이나."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서류철을, 처량히 집어 든 후 내게 꺼지라는 듯 손짓했다.


"한 2주 쉬고 다시 와라, 휴가는 내가 알아서 처리해 놓을 테니까."


"하, 좆 같은 직장."


문을 때려 부술 듯 때려 닫곤, 오늘 같은 힘든 날에 항상 찾는 그곳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꽃과 풀, 흙내음과, 흙이 조금 묻은 앞치마를 매고 행주로 잎을 닦는 키 작고 귀여운 그녀.


풍경의 청명한 종소리가 그녀의 시선을 끌어내고,


그녀의 미소가 날 반긴다.


"안녕하세요! 기다렸어요."


"오늘도 왔어요."


"편하게 계세요, 아 마실 게 있었는데."



그녀는 그녀에게 어울리는 차 음료의 뚜껑을 따서 내게 건넸다.



"고마워요, 받아도 되나 모르겠네요."



약간 씁쓸하다 상큼하고 달콤한, 이곳을 자주 찾는 이유가 생각나는 뒤가 좋은 맛이었다.

 

도시와 나뉘어진 듯, 정원을 닮은 꽃가게 속 평온한 음악과, 작은 몸집으로 발발대며 부산히 가꾸고 정리하는 모습을 보면,


그러면 상처 나고 흉진 생각 속에서도, 편안한 한 구석이 생긴 것만 같아서 자꾸 찾게 되었다.



가만히 앉아서 그녀가 어수선 대는걸 보고 있다가 물었다.

 

"좀 도와드릴까요?"


"아, 아니, 뭘 잃어버려서요, 금방 찾을 거예요."


"사양하지 말아요, 제가 이런 거 잘 찾거든요."



나는 그녀가 가꾸던 천장에 있는 덩굴식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붙잡자, 물건의 기억이 흘러들어온다.



그녀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식물을 가꾸는 모습이 보이고,


무언가를 떨어트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 찾았어요, 어?"


그리고, 음료의 뚜껑을 따더니 찬장에서 무슨 가루 같은 걸 타 넣고,


얼마 지나 내가 들어오자, 자연스레 건넨다.


"뭐, 뭐야."


머리가 멍해진다, 과호흡과는 다른 느낌.



"아, 찾았다."



그녀가 품에 동전을 품고 쪼르르 달려와선,


멍하고 초점 풀린 내 앞에 흔든다.



"자, 잠, 잠들어라!"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한 채,


잠에 들었다.



"허억."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


내 옆에 손을 잡은 채, 그녀가 잠들어있다.


나는 조심히 몸을 일으켰다.



당장 도망쳐야 정상이지만,


배신감과 충격으로 얼룩진 평화로운 기억의 마지막 한편이, 오늘 일어난 일을 알기를 갈구했다.



붙잡힌 그녀의 손에,


다시 능력을 사용했다.



"...잠드셨나요?"


그녀는 내 눈앞에 손바닥을 휘적인다.


내가 반응이 없는 걸 확인하자, 창문의 커튼을 내리고 문을 잠근다.


그러곤 다시 내 앞에 다가와 말한다.


"일어나세요."


그러니 놀랍게도, 내 몸이 일어난다.


그녀가 잠깐 있다 붉어진 얼굴로 명령한다.


"절 꼭 안아주세요."


꾸욱.



내가 그 모습을 보곤 나도 모르게 손을 조금 더 세게 쥐었나 보다.


그녀가 부스스 일어난다.


그러더니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붙잡은 손을 떼어내고 사과한다.



"미, 미안해요."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주시겠어요?"


"이번 한번 만 용서해주시면, 아, 아이는 잘 기를게요, 정말 미안해요."


"예? 아이요?"


"그, 손잡고 잤으니까, 아이가.."


"잠깐만, 잠깐만요."



나는 침대 시트에 다시 손을 대었고, 기억이 흘러들어온다.


"여기 누워요."


그녀의 얼굴은 터질 듯이 빨갛게 물들었고,


"소, 손 잡아요."


손을 붙잡고, 눈을 꾹 감곤 천천히 양을 센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


"양 스물, 두, 마.."


곧이어 쌕쌕대며 그녀는 잠이 들었다.



그게 다였다.



"손 잡는 걸로는, 아이 안 생기는데요."


"네에..?"


그녀는 정말로 충격받은 모양이다.


"그, 그럴 리가 없어요, 부모님이.."


"진짜에요."


"거, 거짓말, 진실을 말하세요!"


"아이의 탄생은 난자와 정자가 만나 난관에 착상하게 되면, 세포분열을 통해서 약 10개월의 기간 후에 출산합니."


"그 난자와 정자는 어딨는데요?"


"난자는 여성에게, 정자는 남성에게 있습니다."


"그게 어떻."


"잠깐."


나는 그녀가 명령하기 전에 말을 가로막았다,


저 순수한 얼굴에 더 이상 말하면 자괴감으로 더 이상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이상은 안 돼요."


"에, 그럼, 아기는 뭘 해야 생기는데요?"



이럴 때 쓰는 비장의 수가 있었다.



"...손 잡고 열흘 자면 생겨요."


"그래서 결혼해야 아기가 생기는구나."



으아, 죄책감이.


이 순수함을 보고 어떻게 성교육을 진행하겠나,


그녀 부모님의 심정도 조금 이해가 되었다.



"그, 그럼, 저랑 아기 만들기 해 주실래요?"


그녀가 새빨간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물어왔다.



"...저희 서로 이름도 모르는데요."


"아, 전 한 솔이에요, 외자, 솔."


"강성훈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너무 늦은 거 아닌가요."



그러곤 헤헤, 하고 헤실거리는 그녀에게 물었다.



"애초에 왜 저랑 아기를.."


"아기가 생기면 결혼해야 한댔는데요?"


"...누가요?"


"엄마가요! 엄마도 그렇게 아빠랑 결혼했댔는데."



이쪽도 경찰의 조사가 필요해 보이는데.



"저랑 결혼하고 싶어요?"


그녀는 밝게 웃으며 답했다.


"네!"


"왜요?"


"키도 크구요, 착하고, 남을 잘 도와요, 그리고.. 완전 멋져요."


"그럼 그냥 그렇게 명령하면.."


"결혼은 서로 합의 하에 해야죠!"



나는 한숨을 깊게 쉬었다.


가정교육은 무섭구나.



"알겠어요, 같이 열 밤 자요."


"지, 진짜요?"


"대신, 아무한테도 이러면 안 돼요."


"당연하죠!"


"그리고, 무슨 약을 탄 거예요?"


"모르겠어요,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하니까 엄마가 줬어요."



이쪽은 정말 경찰 조사가 필요해 보였다.



"아.."


앞으로 열흘 안에, 무슨 변명이든 준비해서 도망쳐야겠다.


"나중에라도 혹시 말 바꾸면 안 되니까요."


"네?"


"아홉 밤 후까지, 아이 만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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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쓰면서 재미는 있었네요.


소재로 올리려던 거 조금 수정하고 내용 덧붙여서 만들어봤는데 부족함이 많이 느껴집니다.


재밌었다면 댓글 달아주세요, 별로면 비추 박아주십쇼.


관심 받고 싶슴다.


일단 여기까지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 인사 드리겠슴다.


감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