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꺄아악! 뭐하는 거야!"


갓 출발한 여느 초보 모험가들처럼  슬라임 퇴치를 의뢰받았지만, 잘라도 잘라도 끊임없이 재생하는 특성 앞에 무릎 꿇고 말았다.

옷이 녹기 시작했지만 주위에 아무도 없는 숲이라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영창이 너무 느려."


물컹한 몸뚱이에서 이목구비가 튀어나온 슬라임이 말했다.


"시끄러워, 변태야! 여자 몸이 그렇게 보고 싶어?"


"여자 말고 남자 옷도 녹이거든?"


서로 공격을 멈추고 별 시덥잖은 이야기로 싸우던 그때, 무시무시한 포효와 함께 울창한 수풀 사이로 오우거가 나타났다.


"인간...!"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환희에 찬 미소를 띠었다. 인간은 보통 먹이로 삼지만, 마음에 드는 여성은 성욕 해소용으로 쓴다고 들었다.


"눈 감아. 당장."


"어, 응?"


뭐라 말하기도 전에 슬라임이 몸을 길게 뻗으며 눈을 가렸다. 시야가 어둠으로 뒤덮이기 직전 녀석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커지는 것을 보았다.

살점이 타는 매캐한 냄새와 함께 오우거의 울음소리가 불현득 끊겼다.


슬라임이 눈에서 떨어지자, 오우거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잿가루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리고 슬라임, 아니 슬라임이었던 것의 모습은...


"레기온...?"


8m도 넘는 반투명한 근육질의 거체. 현 마왕의 5대 간부 중 한 명인 레기온이었다. 슬라임과 비슷한 육체 덕분에 어떤 형태나 색으로든 변하고 높은 수준의 마법까지 구사한다는 대륙의 강자. 


"뭐야. 날 아네?"


"모, 모를 리가 없잖아요..."


방금은 숨통을 끊기 전 최후의 유흥이었을까. 다리에 힘이 풀려 도망갈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 오늘 일은 비밀로 해 주면 안 될까? 이게 내 직업이거든. 정체가 들키면 곤란해서."


다시 친숙한 슬라임 형태로 돌아가며 그가 말했다.


"직업.. 이요?"


"성 리모델링으로 마왕님 지갑 사정이 나빠졌거든. 돈 좀 벌어오라는데 마땅히 할 게 없더라? 그러다 모험가 길드한테서 이 숲을 관리하고 초보 모험가들을 테스트해달라는 제의가 들어왔어."


그는 방금처럼 마을 근처 숲에 들어오는 위험한 몬스터들을 퇴치하고, 약한 슬라임인 척 모험가들의 역량을 지켜보다 충분하면 죽은 척 연기, 아니면 옷만 녹여 쫓아내는 게 일과라고 했다.,


"처음엔 쪽팔렸지. 야설 속 촉수괴물도 아니고.. 한 달쯤 지나니까 익숙해지더라. 시급도 나름 짭짤하고 말이야."


"확실히 그렇겠네요... 몰라봬서 죄송해요."


"내 잘못이지, 뭐. 아무튼 주문 영창하는 속도랑 명중률만 보완하면 되겠다. 그 나이에 이 정도면 재능은 충분해."


언제든 기다릴 테니 실력을 기르고 오라고, 숲에서의 일은 비밀로 해 달라는 마지막 신신당부와 함께 그가 옷값을 쥐어주고 떠났다. '옷만 녹이는 슬라임' 의 진실은 생각과는 영 다른 것이었다.


업무 때문에 옷만 적당히 녹이고 성관념에 전혀 문제없는 건전한 슬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