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마왕만 처치하면 된다.
여기까지 오는데 정말 많은 고생을 겪었다.

수차례 죽음의 위기를 겪었지만 빚이 가장 무섭다.
소규모 용사 파티로 마왕을 처치하려면 장비라도 좋아야 하니까.
유지보수비용으로 하루에 100만 파운드가 소모되는 게 말이 되나.
포션과 스크롤 값도 꽤 나가서 아무리 지원을 받아도 빚쟁이가 될 수 밖에 없다.

물론 빚을 갚기 위해 안 해본 일은 없었다.
하지만 파생상품 하나 잘못 투자하는 바람에...
에휴, 더 말해서 뭐 하나.

그래도 마왕을 처치하면 모든 게 끝나겠지.
빚이야 토벌 보상과 마왕성에 있는 보물로 어떻게든 메꾸면 되고.

마왕은 소녀 뱀파이어로 옥좌에 앉아서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알현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오직 나 혼자 마왕과 대적했다.

성검을 단단히 쥐고 마왕에게 겨누면서 말했다.

"죽어라, 마왕. 너를 처치하고 평화를 이루겠다."

"아하하, 말투 꼬라지 봐. 날 죽이겠다고? 네 주제에?"

검기를 날려 알현실을 반으로 쪼개버렸다.
마왕은 그걸 보더니 덜덜 떨면서 말했다.

"그... 보물이라면 다 줄게. 그러니 한 번만 봐줘라. 응?"

"널 죽이면 토벌 보상까지 들어오는데 내가 왜?"

"나 내조 잘하니까 메이드로 삼아줘. 야한 짓도 시키면 잘 할 자신 있어!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널 죽이면 너보다 예쁘고 섹시한 여자들이 줄을 설텐데 내가 왜?"

"그, 그러니까... 나랑 같이 세계정복 하자. 네 무력과 내 재력이 합쳐지면 무적이라고!"

"내 목적은 세계평화고 널 죽이면 평화가 이루어지는데 내가 왜? 얌전히 칼을 받아라, 마왕."

혀가 긴 걸 보니까 상당히 두려운 모양이다.
하긴 마왕은 의외로 전투력이 약하다는 첩보가 있었지.
마왕성까지 오는 게 힘들어서 그렇지 마왕 자체는 손 쉽게 처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마왕은 바로 고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쯤 해서 그만 뒀으면 좋았을텐데. 협상이 안 되니까 협박을 해야겠네."

"허튼 짓 마라. 넌 이미 죽은 목숨이다."

"그래서? 날 죽인다고 네가 진 빚 모두 청산 되는 건 아니잖아."

빚? 여기서 왜?
지금 내가 진 빚 총액이 20억 파운드긴 하지.
하지만 마왕만 처치하면...

잠깐만, 이거 갚을 수 있는 거 맞나?

"널 죽이고 보물로 갚으면 되잖아."

"그 보물 다 장물이니까 주인 돌려줘야지. 네가 꿀꺽 하게? 그 고결하고 선한 용사님이?"

장물이라고?
그래, 얜 마왕이니까 보물들 모두 약탈한 걸 거야.
난 용사니까 그 보물들 모두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줘야 하고.

그래도 얘가 원래 갖고 있던 재산은 있을텐데.
처음부터 그걸 빼앗아서 빚을 갚을 계획이었다.

"여기에 장물만 있는 건 아니잖아. 네 돈 다 어디 있는데?"

"귀중품, 부동산, 나머지는 선물 투자. 현금을 쌓아두는 스타일은 아니라서."

"내놓지 않으면 널 죽이겠다."

"어차피 날 죽이려고 했으면서. 그리고 정말 괜찮겠어? 현금으로 바꾸려면 최소 한 달인데 너 빚 상환까지 일주일 남았잖아."

이 미친 년은 왜 현금을 안 갖고 있는데!
얘에게서 부동산과 금융 계좌를 압수해도 이거 언제 현금으로 돌려받냐고.
마왕이 소유했던 부동산을 사려는 자는 당연히 없겠지.
귀중품은 가치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언제 경매에 붙여.

"야이 개년아. 네 돈 다 어디 있어? 네 말대로 일주일 안에 빚 못 갚으면 난 좆된다고!"

"큭, 내 알 바야? 재밌네. 내 현금이 어디에 쓰였는지 알고 싶어?"

"빨리 말하지 않으면 죽여버릴 거야."

"네 채권 사는데 전부 투자 했어! 이거 봐봐!"

마왕이 수 십 장이 되는 종이를 염동력으로 움직여 내게 보여줬다.
전부 차용증으로 채권자 이름은 모두 달랐지만 채무자 이름에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모두 내가 서명한 빚문서였다.

"흐으, 너 빚 짜짜 많더라. 천하의 용사님이 사실은 파산 직전의 빚쟁이였다니 조금은 놀라긴 했어."

종이를 잡으려고 했지만 마왕은 종이를 모두 회수했다.
눈 앞이 아찔했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대체 어떻게 갖고 있는 거야? 악마에게서 돈 빌린 적은 없는데?"

"채권은 사고 팔 수 있는 거 알지? 소문을 퍼트려 네 신용등급을 떨어트렸어. 용사님은 사실 먹튀 하려고 한다, 마왕성에는 의외로 보물이 많이 없다더라. 뭐 이런 거."

"그래서 채권자들에게 내 빚문서를 팔도록 했다?"

"응. 프리미엄 많이 붙어서 비싸긴 했지만. 그러니 이제 빚을 갚아야겠지?"

성검을 굳게 쥐었다.
저 마왕을 토벌해야 내가 산다.
지금 시점에서 20억 파운드를 갚을 수 있는 길은 그것 말고는 없었다.

"빛으로 널 태우고 빚을 모두 태우겠어. 각오해라."

"아쉽지만 내가 죽으면 빚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아. 게다가 위대한 용사님이 마왕과 금전거래를 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왜 안 사라져? 토벌이 끝나면 마왕의 재산은 모두 제국이 몰수하기로 결정 했는데. 내 전리품은 제외하고."

원래는 마왕의 재산 모두 내 차지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빚이 하도 많아서 탕감하기 위해 황제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미래에 얻을 마왕의 재산을 황제에게 주고 대신 현금을 받기로.

다만 전리품으로 몇 개 챙기는 건 괜찮다.
마왕성에는 3000억 파운드에 달하는 보물이 묻혔다는 정보가 있으니 그 중 1%만 챙겨도 빚을 갚을 수 있으니까.

"바로 그거야. 채권도 자산이니까 고스란히 제국으로 귀속되겠지. 빚문서 원본은 제국 우체국 안에 넣어뒀고 이걸 제국 쪽이 빠르게 입수하겠지? 넌 제국과 황제의 노예가 되어 죽을 때까지 부려 먹힐테고."

처음부터 이걸 노렸구나.
이렇게 날 옭아매다니 정말 쉽지 않네.
안 그래도 지금 황제는 날 토사구팽 하려고 안달 났는데 황제가 내 빚 가지고 협박하면 난 꼼짝 없이 당해야 한다.

하아, 내가 제국 상대로 전쟁해서 이길 수 있나.
황제에 비하면 마왕은 정말 귀여운 수준인데.

"어떻게든 빚을 무기로 나를 괴롭히겠다는 거네. 망할 년이."

"하지만 내가 안 죽으려면 이것 밖에 없는 걸. 모든 재산에는 나만 접근할 수 있는 인증 마법을 걸어뒀고 이건 내가 죽어야 풀리거든. 그래서 황제가 용사님을 고용해서 날 죽이려는 거 아니겠어?"

"그걸 알려주는 이유가 뭐야? 티배깅?

"나랑 계약 하나 하자고. 네 빚에서 더 이상 이자를 받지 않고 만기일을 연장하는 조건으로. 어때?"

귀가 솔깃 했다.
지금은 찬밥 더운밥 챙길 처지가 아니었다.

"뭘 원하는데?"

"일단 가진 장비 모두 내놔. 그러면 10%를 탕감해줄게."

손 쉽게 2억 파운드를 벌 수 있는데 어떻게 안 벗어.
비무장 상태가 되겠지만 맨주먹으로도 어떻게든 도망 갈 수 있을 것이다.

얌전히 가진 장비를 전부 벗었다.
마왕은 그걸 받고 싱글벙글 웃었다.

"이젠 뭘 시킬까. 용사님에게 목줄 채우고 멍멍 짖게 할까?"

"이 개년이!"

"짖으면 100만 파운드 탕감."

"멍! 멍!"

수치스럽다.
과연 이게 최선이었을까.
하아, 빚만 아니었어요.

마왕은 가학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용사님 귀엽네. 역시 돈이 최고야."

"이러려고 내 빚을 산 거야?"

"뭐 이건 작은 즐거움이고. 내겐 용사님이 필요하거든."

"대체 왜?"

마왕이 다른 종이를 꺼내서 내게 보여줬다.
그걸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용사 파티 꾸려서 생긴 빚 갚는다고 세 달 전에 파생상품 하나 투자한 적 있지? 미스릴 인버스 2X ETN이었나."

"그렇지? 그거 손절 쳤는데 어떻게 알아?"

"미스릴 인버스 2X ETN은 미스릴 가격이 떨어지는 만큼 두 배의 수익을 얻는 파생상품이잖아. 지수가 1% 떨어지면 수익률이 2% 증가하는 거. 미스릴 자체는 새 광산이 생겨서 가격이 떨어지는 추세였고 유심히 보고 있었어."

"하지만 광산이 터져서 폭등했어. 순식간에 휴지조각이 되더라. 그래서 빚이 20억 파운드가 되었지."

"포트폴리오 자체는 괜찮았어. 그 누구도 거들떠도 안 보는 파생상품에 투자하고 황제를 꼬드겨서 일부러 미스릴 광산 개발하도록 했잖아. 한 달 간은 수익 꽤 나기도 했고. 그거 보고 금융 투자 감각은 꽤 좋다고 생각했어."

"에휴, 광산이 터지지만 않았어도. 그런데 그건 어떻게 알아?"

"그거, 내가 테러 했거든. 유언비어도 퍼트려서 하락 중인 미스릴 가격을 열심히 올렸지. 뭐 5배로 뛸 줄은 몰랐지만."

이 개새끼가.
정말 어안이 벙벙하다.
이래놓고 내 빚을 사겠다고?

"씨발년아. 진짜 죽여버린다.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생 했는 줄 알아?"

"그러게 누가 선물 하래? 그리고 일부러 한 거거든? 그동안 금융 투자로 돈 불린 거 다 알고 있어."

"샹년아. 너 때문에 내가 잃은 돈이 얼마야! 용사 파티 마왕 레이드팟 꾸리는데 얼마나 드는 줄 알아?"

"그래서 널 고용하려고. 내 펀드 매니저로."

뭐라고? 대체 왜?
그작 나를 펀드 매니저로 영입하려고 내 지갑을 피폐하게 만든 거야?

"싫다면?"

"순이익의 절반은 네가 가져가는 조건인데도 싫어? 네 무력과 지위와 내 재력이 있으면 무적이라고 생각 했는데."

파격적인 조건이다.
마왕은 돈이 많으니까 잘만 굴리면 떼돈을 벌 수 있겠다.
게다가 내 빚은 마왕에게 묶여 있으니 마왕과 함께 일하는 한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다.

용사가 마왕과 손을 잡으면 안되긴 한데...
얘가 채권을 황제에게 팔아넘기면 난 좆되니까 얌전히 받아들여야 한다.

무엇보다도 황제도 내가 들었던 펀드에 날 따라서 투자했다가 거액을 잃었다.
황제가 날 싫어하는 이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겠지.
내가 살려면 별다른 방법은 없다.

일단은 돈부터 벌어볼까.

"알겠어. 그런데 여기 있는 보물들 모두 장물이라서 처치 곤란하다면서?"

"응. 어디 전당포나 경매에 내는 순간 추적 당할텐데."

"세탁하자. 너 은행 하나 갖고 있지 않아?"

"그렇지? 바지사장을 내세워서 자금 동결은 면했지만 간섭은 못해."

"내 빚의 일부를 네 은행에다가 넘기는 거야. 나는 전리품으로 보물을 챙겨서 경매에 붙이는 거지. 용사가 보증하는 물건을 누가 의심하겠어? 그 현금을 은행에 납부해 빚을 갚으면 깨끗해지는 거지."

마왕이 손뼉을 치면서 말했다.

"그런 세탁 방법이 있는 줄 몰랐어. 왼쪽에 있는 걸 오른쪽으로 옮기는 거지만 장물은 고스란히 현금으로 바뀌는 거네!"

뭔가 용사가 할만한 발상은 아니지만 뭐 어때.
우선은 신용을 얻어서 빚을 갚고 탈출해야 한다.

지금 내가 가진 빚이 17억 9900파운드.
다 갚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