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미아

...히익...


롤랑

또 왔어?


라미아

으으, 왼쪽 뒤에...


롤랑

일단 몸을 숨기자.


롤랑과 라미아는 두 사람의 몸을 완전히 덮을 수 있는 담벼락을 가까이에서 찾아냈고, 이어 완전히 나타나지 않은 아침 햇살 아래 그 뒤의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


롤랑의 예상대로, 몇 개의 침식체가 방금 그들이 향했던 왼쪽 후방에 나타났다.


수가 많지 않고, 걸음걸이가 어수선하여, 언뜻 보기에 일반적인 침식체였다.


몇 시간 전, 구체적으로 말하면 동이 튼 뒤였다. 롤랑 자신은 아직 별 생각이 없지만 '알고 있는 단서를 따라 찾아라'는 논리로 롤랑과 라미아는 길을 나서기로 결정했었다.


그리고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 뒤부터 일정 시간마다 방랑하는 이상한 침식체들이 그들의 동선을 찾아 나섰다.


이런 어슬렁거리는 침식체가 하나둘  롤랑과 라미아의 경로에서, 침식될 만한 여지가 없는 구역에서 등장했다.


이전에도 수없이 했던 것처럼 단 한방에 해결 가능한 양이지만, 이로 인해 롤랑은 미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되었다.


탐색 및 퇴치의 목적으로 롤랑은 그들에게 손을 쓰며 선두의 침식체를 제어하고 떠나보내려 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롤랑

(어떻게 된 거야? 이 몸의 문제인가? 아니면..)


라미아

침식체 몇 마리만 돌아다닐 뿐인데…직접 해결할 순 없을까?


롤랑

그 후에는?


라미아

...


롤랑

이상하지 않아? 이런 침식체들이 간헐적으로 우리를 찾아다니며 습격해 왔다고.


롤랑

침식체가 출현할 수 없는 지역이든, 우리가 의도적으로 여러 차례 바꾼 동선이든지 간에 말이야.


라미아

(어? 전에... 그건 길을 잃어버린 게 아니었어?)


라미아

으으ㅡㅡ!


롤랑

상대방이 뭘 하고 싶은지...순수하게 떠보기만 하는 건가?


롤랑

(모르겠어. 떠보기라면 더 강한 놈들을 보내야지. 처음에는 우리가 피신할 것을 선택해서 우리의 동선을 바꾸게 하려는 의도였을까?)


롤랑

(이따가 다시 나타나면, 라미아에게 통제를 부탁해야겠어. 지금 당장 내가 침식체를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을 그녀에게 알릴 수 없으니까 말야.)


롤랑

그럼, 이번에도 그놈들을 해치우자!


라미아

?


상대방이 굳이 이 조무래기를 보내 떠보려 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롤랑은 얼빠진 빈껍데기를 가지고 노는 데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라미아를 데리고, 롤랑은 숨어 있던 벽에서 뛰쳐나왔고,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침식체

ㅡㅡ!


롤랑과 라미아의 연합 공격으로 목적 없이 떠돌던 침식체들은 곧 소멸되었다


또다시 발치에 쓰러진 침식체 잔해 앞에서 롤랑은 승리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나 순조로웠다.



롤랑

(...이상해.)


롤랑?

왜?


롤랑

(이런 부질없는 떠보기는 도대체 무슨 결과를 원해서 그런 걸까?)


롤랑

(우리를 없애려고 하든, 떠나게 하려고 하든, 상대방이 원하는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어.)


롤랑?

승격자에게 소모전은 무의미해. 상대방이 침식체를 다룰 수 있는 이상 그들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롤랑?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연료를 넣는 방식이 우리에게 위협이 되지 않고, 우리가 함께 간다면 여전히 기회가 있다는 것을 상대방이 알고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겠지.


롤랑

(그 말인 즉 어떤 목적으로 이런 짓을 했다는 건가?)


롤랑?

그렇다면...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


롤랑

...재미있군.



라미아

으...도대체 뭘 중얼거리는 거야? 내가 따라올 수 있는 말을 해봐.


그들이 너무 오래 머물러있던 탓이었을까. 롤랑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 또 다른 침식체들이 길 건너편에서 비틀거리며 롤랑과 라미아를 향해 다가왔다.


라미아

으으...


롤랑

...또야?


롤랑

(이전과 같은 지점에서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반 바퀴를 돌았으니 틀림 없을 거야.)


황무지 가장자리에서 이쪽으로 비틀거리며 오는 침식체를 보면서 롤랑의 마음 속에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롤랑

라미아, 그들의 행동을 멈추게 해봐.


라미아

?


롤랑은 왜 자기 손으로 하지 않는지 모르겠지만, 라미아는 일단 그대로 했다.


그러나 침식체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즉 침식체의 움직임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라미아

...어라?


롤랑

...역시 그랬던 걸까.


라미아는 승격자의 수단으로 역제어를 할 수 없었다. 상대방이 승격자와 같은 수법, 혹은 그 이상의 것을 사용한다는 뜻이다.



롤랑

(확인해 보니 이 녀석들은 상대방이 던진 '모종의 메시지'로밖에 이해할 수 밖에 없겠군.)


롤랑?

통제 불능의 자동 공장에서 온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롤랑

그것은 왜 승격자인 라미아와 내가 침식체의 행동에 간섭하지 못하는지 설명해주지 않아.


롤랑?

보니까 이미 자신만의 판단이 있는 것 같은데.


롤랑

어쩌면 그럴지도


롤랑?

그런데 왜 안 하는 거지? 너에게 보다 더 상기시켜줘야 할 게 뭐가 있는지 잘 모르겠는데 말이야.


롤랑

(...아마도 네가 나에게 알려준 것이 필요할지도 몰라.)


롤랑?

이게 바로 너의 결점이야.


롤랑

(...쳇.)



롤랑

그렇다면 우리——상대방의 함정 속으로 들어가 보자고.


라미아

...?


롤랑

우리가 찾는 것은, 황무지나 공중정원의 사람이 우리에게 알릴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롤랑

물론 가장 직접적인 것은 가브리엘에게 물어보는 것이지만... 그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앞서 자비로운 자와의 대화에서 롤랑은 알파가 그 전투에서 살아남았다는 소식을 접했었고…. 그렇다면 가브리엘은 죽은 게 분명했다.


롤랑

기왕 이렇게 된 이상... '연극' 뒤에 있는 놈들을 찾아봐야지.


라미아

어...찾아가야 돼?


롤랑

하지만 운 좋게도 우리가 그들에게 가기 전에 그들이 우리를 찾고있는 것 같아. 이 침식체들이 바로 그 증거지.


롤랑

난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을 거야.


라미아

...알았어.


라미아도 롤랑의 생각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롤랑

그렇다면, 그들이 오는 방향을 따라 이 침식체의 실타래가 도대체 어느 곳을 향하고 있는지 찾아보자고.


롤랑

결국 '행운의 여신은 용기있는 자를 돕는 법'이니까(Fortis Fortuna Adiuvat)



황무지와 폐허 사이에서 롤랑과 라미아는 침식체가 온 방향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침식체는 여전히 산발적으로 계속 출현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나아감에 따라 빈도는 여전히 증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는 롤랑의 생각이 적어도 '침식체가 한 곳에서 의도적으로 이동했다'는 측면에서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롤랑

그러면 그 다음에...무슨 일이 일어날까?


라미아

(누군가 선두에 서서 명령을 내리는게 왠지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 들어...)


라미아

(그렇다면 살아갈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것이겠지....으....)


롤랑과 라미아는 한참을 계속 전진했지만, 원래 나타나야 할 침식체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오백 미터, 천 미터, 이천 미터…


하지만 영원히 정해진 주파수에서 나타나는 산발적인 침식체는 확실히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이것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롤랑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침식체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방의 플랜이 단계적으로 달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바로 그때, 하늘 위에서 휙휙거리는 엔진 소리가 롤랑의 생각을 끊어버렸는데, 혹시...


롤랑

...바로 이건가?



롤랑과 라미아는 엔진소리가 들리는 특정 방향을 향해 그 소리가 멎어질 때까지 쫓아갔다.


그 방향을 따라 롤랑과 라미아는 무너진 건물 두세 채를 계속 넘어 소리가 마지막으로 사라진 장소에 도착했다.


건물이 무너진 공간 사이에 공중정원 표식을 한 수송기가 멈춰 서 있다



라미아

어...이거 공중정원 수송기 맞지? 왜 여기에 혼자 있는 거야?


롤랑

단독으로 출현한 이상 거기에 탑재된 건 분명 물자나 설비가 아닐 거야, 아마...


세 사람의 그림자가 수송기가 있는 먼 길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롤랑

임무를 수행하러 온 집행부대의 일원이겠지.



베라

무슨 짓이야?


고요함을 깨고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베라는 단말기의 홀로그램 영상을 끄고 두 팀원을 맞이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베라

멀쩡한 문이 있는데 굳이 이렇게 해야 되는 거야?


녹티

아, 바로 열 수 있었구나, 눈치채지 못했어.


베라

장비를 내리고 작업을 준비해.


21호

알았어.


몇 명의 구조체들이 짐을 내리기 시작하고, 들고 있는 상자에서 원격 링크를 강화하는 데 사용하는 노드 장치를 옮겼다.


라미아

공중정원의 집행부대? 이 황무지에 뛰어들어서 뭘 하려고?


롤랑

'그녀' 때문인가… 아니, 그럴리 없어.


그 여성의 상태를 생각하자, 롤랑은 곧 머릿속의 이런 생각을 단념했다.


롤랑

'그녀'는 공중정원의 주의를 끄는 그런 대행자처럼 보이지는 않았어.


롤랑

우리때문인가…. 그것도 아닐 거야.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녀'가 외부에 행적이 드러낸 적도 없었고….


이성적 생각해보면 집행부대원들은 자신들의 이해와는 전혀 무관하며, 주요 임무가 당분간 진행되지 않을 것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들을 멀리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곳에 뜬금없이 집행부대가 나타났는데 그 뒤에 숨겨진 것들이 자신이 알고 싶어하는 부분과 연결돼 있을지도 모른다.


롤랑

(정면접촉의 필요성은 크지 않고 '몇몇 사람' 외에는 내 말을 들어줄 기분도 아니겠지만)


롤랑

(적어도, 이놈들 뱃속에서 무슨 약을 팔고 있는지 들어볼만은 하겠지.)


롤랑

라미아? 너의 시간이야. 그 사람들이 무슨 목적으로 여기에 왔는지 들어 봐줘.


라미아

어...내가?


롤랑

난 은신할 줄 몰라.


라미아

으으...알았어.



베라

아마 상부에서 모리를 헬하운드 소대로 배정시켰을 수도 있어. 어찌됐건 그들은 당신보단 나은 녀석들이니까.


베라는 재빨리 반응하여 그녀의 일관된 어조를 회복하고 조롱하였다.


녹티

뭐!? 난 반대야. 절대 안 돼! 너 지금 나를 속이고 있는 거지?


베라

하아...이젠 헛소리까지 하는구나. 불평은 그만두라고 말했잖아, 이 분은 그레이 레이븐 소대의 지휘관이야.


21호

나 싫어.


베라

21번, 이건 임무야. 싫다고 하면 나밖에 할 수 없잖니.


21호

아, 알았어.


라미아는 잠시 말을 계속 들었지만, 케르베로스 소대의 말에는 이번 지휘관이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이라는 것 외에는 들을 만한 정보가 없었다.


케르베로스가 가야 할 곳의 방향과 거리를 대략 확보한 뒤 라미아는 케르베로스 소대에서 멀어졌다.



라미아

(...뭔가를 위해 왔나 보네...)


라미아

(그렇다면 돌아가서 롤랑에게 알려야겠다...)


라미아

(만약, 롤랑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그곳'에 가는 일도….)


라미아

(읏...그럼, 이제, 롤랑을 따라 움직이자.)



롤랑

ㅡㅡ그렇군.


케르베로스 소대, 그레이 레이븐 지휘관.


과거에 접한 인상을 보면 거의 완전히 다른 두 가지 타입이 이렇게 합쳐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 기괴한 조합은 롤랑에게 미묘한 연상을 불러일으켰다.


롤랑

...루나 아가씨를 위해 온 건가?


그들이 무엇을 발견했든 간에, 이번 작전은 모두 루나와 관계가 없다.


처음부터 등장했던 침식체들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유도 이해했다.


그들은 이미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되었기 때문이다.


롤랑

재밌군...


이 배후에서 누가 모든 것을 조종하고 있든 간에, 모두 끝까지 캐낼 가치가 있다.


특히 그가 거의 방향을 잃으려 할 때 눈앞에서 갑자기 찾아온 기회다. 우연의 일치, 위험의 일치, 보기에 따라서는 번쩍번쩍하는 함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롤랑은 함정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익숙해졌다.


이 단서가 그를 어디로 이끄는지 보자.


그렇다면 유일한 문제는….



롤랑

양측의 속도 문제겠지.


라미아

?


아무리 구조체도, 승격자도 지칠 줄 모르고 먼 길을 갈 수 있지만, 이 모두 결국 인간의 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라미아는 더 빠른 발길로 일찍 도착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라미아에 대한 신뢰가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면...



30분 뒤...


라미아

히익ㅡㅡ! 무거워! 힘들어! 괴로워!


롤랑

이 속도로 어림잡아보면 공중정원보다 2시간 일찍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건 너와 나에게 모두 윈윈하는 국면이겠지.


라미아

이게 무슨 윈윈이야! 히익ㅡㅡ! 돌덩이다!


허리에 고삐를 두르고 있어도 라미아는 불가사의한 민첩함으로 길 위의 돌멩이 하나를 뛰어넘었다.


그러나 라미아 뒤로 끌려가는 낡은 마차는 운이 없었다. 마차는 그 위에 앉은 롤랑과 함께 비스듬히 10센티미터 날아올라 땅에 겹겹이 떨어졌다.


롤랑

라미아! 조심 좀 해! 요건 오래된 물건이라고. 두 번째 마차는 찾을 수 없어.


라미아

그럼 끌게 하지 말라고오오오!



그와 동시에, 반대쪽에선...


회언

연락 주세요.


???

...항상 그렇듯이 순항 감시중.


???

6500미터, 이 몸은 이 고도에서 가장 상쾌하지. 비록 이전에 목표를 잘못 잡았지만, 이것 때문에 그만큼 더 멀리 날아가긴 했었지.


???

그런데 '로키'는 날개같은 것을 싫어하는데… 이해할 수 없군.


회언

...


회언

임무와 무관한 목표를 더 이상 추적하지 마세요.


???

조금만 더 '로키'가 나와서 놀게 해줘.


???

이전의 그것 역시 선생이 밝힌 드높은 가치의 목표다. 비록 그녀는 자신이 비록 그 물건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회언

음.


회언

계획대로 하세요.


회언

집중력을 유지하세요. 당신의 의식의 바다는 외부 요인에 쉽게 영향을 받잖아요.


???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