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다."
조금씩 눈송이가 내려오고 있었다.
본래 이 세계는 눈이 오지 않는 땅이었다.
그럼에도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별빛처럼 쏟아지는 눈. 눈이 나리는 까마득한 하늘의 꼭대기에서, 성좌들이 내 이야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간접 메시지도 도착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조금 씩 모은 개연성이 하눌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한수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내 수식언 목걸이를 쥔 한수영이 웃었다.
"이제 너 [구원]도 [마왕]도 아니네. 수식언 새로 받아야 하는 거 아냐?"
나는 한수영의 말을 들으며 내가 '구원의 마왕'이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간들.
그럼에도 내 생에 가장 빛났던 시간들.
어룽거리는 시야 속에서 한수영이 키득대고 웃었다.
"이참에 내가 새로 지어 줄까? 음......뭐가 좋으려나. '툭하면 기절맨' 어떠냐? 아니면 '기적의 주둥아리'...... 어? 야, 너...... 울어?"
놀란 녀석의 눈동자 위에 내 얼굴이 비친다.
작가인 녀석에게 묻고 싶었다.
이야기를 쓰는 너라면, 혹시 알겠느냐고.
나는 지금까지 잘해 온 것인지.
잘못된 선택을 하지는 않았는지.
이 모든 이야기의 끝에 도달하면, 나는 내가 원하는 결말을 볼 수 있을지.
"야, 뭘 울고 그래, 알았어, 알았어. 뚝."
혼자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수영은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입속에 무언가 달콤하고 시큼한 것이 쑥 들어왔다.
"이렇게 좋은 날 왜 울어. 모처럼 눈도 내리는데...... 내가 나중에 더 좋은 수식언 지어줄게."
그렇게 말하는 한수영은 내 시선을 피한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은 2월15일
스마트폰의 날짜는 그랬다. 이곳의 시간과 지구의 시간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표기는 그저 '오류'일 뿐일 것이다. 아무 의미도 없는, 그저 우연히 매겨진 날짜.
그럼에도 만약, 어떤 기적이 일어나 저 날짜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오늘은, 나의 생일이었다.
"생일 선물 고마워, 수영아"
"응?...... 어? 너 오늘 생일이였어?"
"응"
"아니, 그럼 왜 미리 말 안했어?"
"어차피 '오류'일 뿐인 표기일 테니까."
내 말을 듣고 약간 우려스러운 표정을 지은 한수영은 내게 말을 했다.
"오류고 뭐고 간에 아무튼 네 생일이 맞긴 하다는 거 아냐"
"그렇지...?"
"그런 중요한 날을 나랑 같이 보내도 괜찮겠어.....?"
"당연하지, 너랑 나 사귀는 사이잖아."
우리가 사귀기 시작한 것은 벌써 오래전 일이다. 과거 내가 3번째로 살아났던 날의 일이니까......
"응? 너 그거 진심이였어?"
한수영은 자신의 말을 듣고 더욱 울적해진 내 표정을 보았는지 다급하게 말을 잇기 시작했다.
"아, 아니 내가 거짓이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너 나한테 고백한 이후로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이나 좋아한다는 말도 안해줬었고......"
"서운했었어?"
"그것 뿐만이 아니라 너...... 나 혼자 두고 내 곁을 몇 번 떠났었는데......"
"미안......"
내가 일행들을 살린다고 독단적으로 행해 왔던 그 행동들이, 그 다짐들이 그녀에게 상처가 될 것이란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젠가 유상아에게 말했던 것 처럼 독자에겐 독자의 삶이 있는 법이니깐...... 그러한 행동을. 다짐을 내가 아닌 다른 이에게 맡길 수는 없었으니깐......
"아무튼 너, 그게 진심은 맞았다는 거지?"
"당연하지, 수영아"
"......그럼 사랑한다고 해줘..."
"사랑해, 수영아. 이 세상 무엇보다도"
"니도......"
"너, 이래놓고 또 나 혼자 두고 어디가는거 아니지?"
"당연하지."
"흠...... 진짜지?"
"그렇다니깐"
"믿을 수가 있어야지......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너 한 번만 더 그래봐 진짜"
"절대 안그러겠다고 약속할게"
......
그녀도 어렴풋이나마 알고있었을 것이다. 그 약속이 지켜질 일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