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지금 당장이라도 재앙이 내릴 것처럼 짙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사위는 어두웠고 머리 위로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비는 머리를 적시고 어깨를 타고 흐르며 온몸을 차갑게 식혀주었다.

싸늘한 공기.

자신의 것이 아닌 이 몸을, 제 색으로 칠해주는 비가 좋았다.


「왜 혼자 있어?」


이런 인적이 드문 곳에서 사람을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예외는 있는 법.

이런 곳에서 한참을 우산도 없이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걷고 있는 자신이 이상했던 것일까.

멀리서 낡은 우산을 쓴 허름한 차림의 소녀가 말을 걸었다.

자신과 키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작은 아이.

아마 제 또래로 생각하여 말을 건 것일지도 모른다.

확실히 이런 작은 몸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좀 불편할지도, 라고 그땐 생각했었다.

하지만 굳이 외형을 바꾸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안 추워?」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 수영이 의아했던 것인지 소녀는 재차 고개를 갸우뚱 하며 물었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도 위험하다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혹은 비슷한 또래의 동성이라 안심한 것일까.

수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그래도 비 오는데...」


수영이 대꾸하지 않자 소녀는 제 우산을 수영에게 씌워주며 발을 동동 굴렀다.

물에 빠진 것 처럼 온몸이 젖은 수영과 어깨가 맞닿았지만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더 가까이 붙어왔다.


「그럼, 우선 우리 집 가자!」


맞잡은 소녀의 손은 따뜻했다.

수영은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멍하니 저를 이끄는 소녀를 따라 어딘가로 향했다.

걸음을 뗄 때마다 찰박거리며 물이 튀겼고 고인 웅덩이에선 파문이 일었다.

웃으며 저를 돌아보는 소녀의 눈은 자신의 것과 달리 찬란한 빛깔이었다.

그 눈동자가, 그 찬란함이 수영의 시선에 가득 들어왔다.



"...흐악!"



눈이 번쩍 뜨였다.

제기랄, 왜 이제 와서 이딴 꿈을.

수영이 제정신을 찾기 위해 두손으로 얼굴을 덮고 눈을 굴렸다.

붕 떠있던 정신이 점차 제자리를 찾아가고 현실 감각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래, 내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더라. 아, 맞다. 유중혁. 그 놈 동생은 어떻게 됐지? 나는? 여긴 어디지?

중혁의 동생에게 내밀었던 오른팔이 따끔거렸고 온몸은 땀에 젖은 듯 끈적거렸다.


"일어나셨어요?"


옆에서 들려온 상냥한 목소리에, 수영은 손을 내리고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새하얀 얼굴에 걸려있는 사람좋은 미소.

수영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유상아?"


본부에 오고 나서 가장 처음 마주친 헌터이자,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중혁과 수영에게 먼저 인사를 건냈던 헌터, 유상아였다.


"네가 왜 여깄어? 유중혁은?"


"중혁 씨는 지금 설화 씨랑 같이 있어요. 아, 설화 씨는 본부 소속인데 의료계 능력자라서, 지금 미아의 상태를 살피고 있어요. 수영 씨가 누워계신건 세 시간 쯤 됐고, 설화 씨 말대로라면 몸은 정상이래요. 걱정 마세요."


그러고보니 그 꼬맹이 이름이 미아였던가.

아무래도 일은 잘 풀린 듯 싶었다.

눈 앞에서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상아만 없었더라면 말이다.

이러다간 말이 끝나지가 않겠다 싶어 수영은 눈을 감았다.


"모르겠고, 코코아는?"


"그보다 어떻게 감염된 사람이 다시 돌아.... 네?"


"코코아. 유중혁 그놈이 아무 말 안 했어?"


"아, 맞다. 잠시만요?"


상아가 그제서야 생각이 난 듯 침대 아래에서 보온병을 꺼내 머그잔에 따랐다.

하얗게 김이 나는 초콜렛 색 액체가 검은 컵에 담겼고, 상아는 웃으며 머그잔을 내밀었다.


"자, 여기요. 중혁 씨가 좀 달게 준비하라 하셔서 조금 달아요."


"상관 없어."


수영은 상아가 내민 잔을 받아들고 곧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입술에 닿은 코코아는 생각보다 뜨겁지 않았다.

코끝을 스치는 달콤한 냄새는 저가 원하던, 그 날 중혁의 앞에서 마셨던 그것의 당도와 상당히 흡사했다.


"읍, 큽, 푸핫, 쿨럭!"


하지만 입에 담긴 코코아는 목으로 넘어가지 못했고, 수영은 그대로 사레 들린 사람처럼 짙은 갈색 액체를 침상 위로 흩뿌렸다.


"어머, 괜찮아요?"


"..."


"많이 뜨거웠나요? 괜찮으세요?"


상아가 놀란 듯 다급히 티슈를 뽑아들어 수영의 입가와 손, 상의 등 흩뿌려진 코코아를 닦았다.

하지만 수영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사레 따위를 들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단순히 뜨거워서 혀를 데인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마치 이물질이 들어오는 것을 몸이 거부하는 듯 한, 기묘한 이 느낌.

입 안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에 수영은 설마, 하며 혓바닥을 굴려 제 위아래 치아를 훑었다.


"미, 친..."


만일 수영에게도 인간과 같은 심장이 있었다면, 수영은 오늘 코코아에 이어 펄떡거리는 제 붉은 심장을 입 밖으로 내뱉는 진귀한 경험을 겪었을 것이라고 수영은 자부할 수 있었다.

공기가 싸늘해졌다.

아니, 싸늘해진 것은 공기가 아닌 수영 자신의 몸이었다.

쏟아지는 폭우 속 제 몸 하나 지킬 것 없이 홀로 찬 비를 받아내며 서있는 듯 한 느낌.

수영은 허겁지겁 손을 뻗어 제 입가로 가져갔고, 그대로 손가락을 넣어 다시 치아를 훑었다.

그녀의 감각은 틀리지 않았다.

수영의 손가락 끝에서 느껴지는 유달리 날카롭고 뾰족한 감각은, 분명 송곳니였다.


.


쌕쌕거리며 곤히 잠든 미아를 내려다보던 중혁은 수영이 정신을 차렸다는 상아의 연락을 받고 그녀의 병실을 찾았다.

그녀의 정체가 무엇이든 이미 수영은 중혁의 은인이었고,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답례를 표해야했다.

하지만 중혁이 병실의 문을 열자 펼쳐진 풍경은, 그가 생각하던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아, 왔냐."


상아는 자리를 비운건지 방 안쪽엔 수영 혼자뿐이었다.

수영은, 침대에 앉아 팔짱을 끼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살짝 찡그려진 눈썹이, 내 천 자를 그린 그녀의 미간이 방금 전까지 그녀가 인상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동생은?"


수영은 팔짱을 풀며 중혁에게 물었다.


"...덕분에 멀쩡해졌다. 지금은 자고 있다. 이설화의 말 대로라면 단순히 오랜 시간 흡혈귀로 갇혀 있었기에 충분한 요양이 필요하다 하더군."


"잘 됐네. 그보다 너, 아까 대표 이사 그놈한테 나 뭐라고 했어?"


"아직 말하지 않았다. 모든 일이 끝나면 제대로 소개하려 했건만."


"그래, 그나마 다행이네. 일단 너한테 해둘 말이 있는데."


"말해라. 뭐든 들어주마."


"오, 새끼. 근데 웃으면서 할 얘기가 아니야. 좀 심각해. 아닌가? 하여튼."


상당히 진중해진 수영의 표정에, 중혁은 저도모르게 덩달아 살짝 긴장했다.

이러나 저러나 수영이 그의 은인이긴 해도, 결국은 흡혈귀다.

그것도 그 경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상당히 강한.

수영이 바라는 것이 그의 목숨 뿐이라면 충분히 내어줄 수 있지만, 심각한 일이라면, 혹은 그의 동료들에게까지 피해가 가는 일이라면 제 몸을 바쳐서라도 막아야 했다.

하지만 수영의 입에서 나온 말은, 잔뜩 긴장한 그의 근육들이 힘을 잃고 중혁의 입에서 허탈한 한숨이 빠져나오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 아무래도 당분간 피 좀 빨아야 할 것 같다."


"..."


"아니, 씨발.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말고. 너 하루 이틀도 아니고, 거의 10년을 흡혈귀로 살아왔던 인간을 다시 원상태로 돌리는게 존나 쉬운줄 아냐?"


"그러니까, 그건..."


"피를 너무 많이 빨렸어. 피가 부족해. 코코아도 사탕도 뭣도 못먹겠다고. 씨발, 어쨌든 한동안은 피만 빨면서 살아야 좀 괜찮아 질 것 같다."


"...나 때문인가. 미안하군."


"뭐, 사과할 일은 아니고. 그냥, 뭐 당분간은 여기 박혀서 소설이나 쓰려고."


담담히 말하는 수영이었지만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평소에 피 좀 빨아둘걸 그랬나?"


"...필요하다면, 내어주지. 그저 미아에게 줄 피가 너에게로 옮겨가는 것 뿐이니."


"에휴, 시발. 살면서 또 인간의 피를 빨게 될 줄은 몰랐네."


"몸은 좀 괜찮나?"


"응, 뭐. 좀 약해지긴 했는데 멀쩡해."


그렇게 대답한 수영은 침대에서 일어나 팔을 길게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수영은 뭔가 불편한지 계속해서 입 안에서 혀를 굴렸다.


"아, 송곳니 존나 어색하네. 야, 일단 그 대표라는 놈 좀 만나보자. 내가 직접 말할게."


"...지금 당장 말이냐?"


"쇠뿔도 단김에 빼래잖아. 그 놈 대표 이사면 뭐든 존나 빵빵하겠지? 어떻게든 돈 존나 뜯어내서 어디 박힌 다음에 소설만 주구장창 써야지."


왜 은혜를 갚아야 할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 돈을 뜯어내려 하는 건지.

중혁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입을 열었다.

굳이 답례를 저에게 받지 않겠다면 자신에겐 좋은 일이 아닌가.


"그 놈이랑 잘 맞겠군. 허구한 날 제 방에 박혀 소설만 읽어대는 놈이니, 어쩌면 너를 환영할지도 모르지."


"오, 개꿀."


수영이 마침 잘됐다며 살짝 웃었고, 그 입가 사이로 유난히 뾰족한 송곳니가 보였다.


-



뭔가 쓰고 싶은건 많은데 능력이 딸리니 풀어내기가 쉽지 않다

이래서 시리즈물은 쓰기 힘들어

대충 중혁이 시점은 끝났나 싶기도 한데 다음편 쓸땐 또 어떻게 써야 하나 모르겠네

그때그때 생각나는대로 쓰는거라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커플링은 없을 예정

중수드리프트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