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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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에서 두 남녀가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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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저물고 달이 떠오르는 한밤중, 어둠이 지천으로 깔렸음에도 도시 속에는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들로 한창이다. 밤에 기습적으로 나타나는 괴수들을 막기 위해 바리게이트를 치는 소리였다.
원래 같으면 이현성과 이지혜를 포함한 몇 명만으로도 안전한 방책을 세울 수 있겠지만, 도시안쪽에 곤충종과 소형종 괴수들이 지하에서 매복한 상황이라 함부로 움직이긴 힘들었다.
허나 녀석들을 자극하지 않고 안전한 그린존을 만들기는 버거운 상황, 하는 수 없이 전투조와 건설조를 나누어 부지런히 토벌을 진행했고, 거의 완성이 되가는 참이었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두 쌍의 눈.
버려진 도시가 속 그나마 멀쩡한 모텔 안에서, 그들은 성좌처럼 화신들의 고군분투를 구경했다.
꺾어진 가로등과 아스팔트 잔해로 더렵혀진 도로를 내려다보던 그 둘은 몇 십 명의 화신들이 단 하룻밤만이라도 평안하게 보내려는 수고를 돕지 않았다. 아니, 돕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들이 나서는 걸 꺼려했고, 모두 지쳐있었지만 누구도 그 둘에게 일하라고 종용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한명은 그들을 이끄는 선지자였고, 나머지 한명은 인간을 위해 희생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드르륵.
창문이 남성의 큼직한 손에 의해 닫혔다. 어차피 저들은 알아서 할 것이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이미 수많은 시나리오를 거쳐 왔는데 방벽하나 못 만들어서 되겠나.
아니, 코인으로 사서 세우는 방책이니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관리국에게 태클을 걸면 된다. 그 뜻을 용케도 알아들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피곤했는지 몰라도 여성은 남성의 곁에 앉았다.
빅사이즈 침대를 의자처럼 나란히 앉은 둘 중 한명이 오랜 침묵 끝에 말을 꺼냈다.
“유중혁.”
“뭐냐.”
제 입술을 깨물었는지 입가에 혈향이 난다.
“모두 제 탓이에요.”
언제나처럼 훅 들어오는군. 평소 같아서 다행이라 해야 될지. 유중혁이라 칭해진 남자는 눈을 감고 지금의 상황을 되짚어봤다.
이제 남아있는 지구인은 후반부 시나리오를 겪은 화신들 뿐. 그 수는 대륙과 섬들을 지배했던 생명체들이었다고 볼 수 없을 만큼 쇠락된 수준이다. 이제 전 세계에 남아있는 사람들을 모아 지구의 패권이 달린 거대한 전쟁을 대비해야만 한다.
그러나 며칠간 그녀 탓이라 불릴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그렇기에 부정한다.
“그렇지 않다.”
“아니에요. 만약 그때, 혹부리의 계약에 응했다면-”
“이계의 존재 따윈 무시해라. 그들과 언약을 맺는 것보다 차라리 지금 남아있는 사람 절반이 죽는 게 나을 것이다.”
“...지금 제정신인가요?”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군.”
그녀는 순간적으로 패왕이 정말 미쳤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허나 얼굴을 포함한 유중혁의 상반신은 어둠에 집어삼켜져 보이지 않았다. 그건 그녀역시 마찬가지.
서로가 지금 어떤지 알 수 없는 상황.
물론 스킬을 사용해 심장소리를 듣거나 밤눈을 열거나 뇌속의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허나 굳이 그러고 싶진 않다. 최강의 화신 앞에서 그런 짓을 했다간 죽을 수도 있고, 피로를 풀기위해 왔는데 여기서 기싸움이나 할 수 없는 노릇.
한쪽 눈을 비빈 그녀가 먼저 침대에 누웠다. 초라한 패배자의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생각은 멈추지 않는다.
괴수종들에게 유린된 건물 중 침대와 방안이 멀쩡한 곳이 단 한군데라니. 우연에 맞추기 위해 일부로 부수기라도 한 것처럼 어색한 상황이지만 증명할 방법은 없다. 뭐 누가 고작 이런 일에 개연성을 쓰겠나만은.
강인해진 육체레벨은 거친 길바닥에서도 잘 수야 있고 강철위장은 몬스터를 먹어도 소화할 수 있음에도 사람들이 거부했다. 오늘도 전투도 있었고 자신들의 위상이 상한다나 어쩐다나. 특히 이지혜와 김남운, 고등학생때 시나리오를 입문한 어린 자식들이 뭐라 큰소리나 치는지... 유중혁은 모르겠지만 대장을 위해 헌신하려는 둘의 이야기가 얼마나 웃겼는지 모르겠다.
전투가 끝난 뒤임에도 그렇게 웃을 수 있을 줄이야.
눈을 감자 그나마 비치던 빛이 사라졌다. 조금 전은 한순간에 오늘을 건너 어제와 며칠전이 되었다.
그래, 전투는 며칠 전 여명이 밝아오자 시작되었지.
정말 끔찍했다. 갑작스런 이계의 존재들의 침공 속에서 인류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인류 측에는 수백회차를 건너온 괴물과 미래를 알고 있는 화신이 있었음에도 타 회차와 판이하게 다른 양상으로 흘려간, 너무나 이른 공세에 화력과 물자는 턱없이 부족했다. 누구도 그 존재들은 절대 막을 수 없었다.
그때 일어난 피해역시 말이다.
그나마 [시나리오: 재앙] 이었기에 클리어 조건은 존재했고 최종적으로는 버틸 수 있었다. 인류의 70%가 전멸했지만 희망은 남아있었다. 반대로 쓸모없는 존재들 중 선별된 인원들만 살아남았으며 그들이 강제로 규합될 명분이 주어진 셈이니까.
실제로 고등급 화신들과 거대성운과 계약한 화신들은 대륙이 갈라지고 태평양이 불타오르는 그런 대난전속에서도 살아남았다. 유중혁과 그의 동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의 안나 크로프트나 일본의 이즈미, 중국의 페이후, 인도의 란비르 칸이나 러시아의 이리스 블라블라 등은 끝까지 자신들의 수도와 국민들까지 지켜내는 위염을 보였다. 그건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문제는 바로 이 다음부터.
재앙이 끝나면 필연적으로 오는 재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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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의 침공은 작은 멸망에 불과했다.
기간토마키아(거인과 신), 라그라로크(신들의 황혼), 제 3차 세계대전(귀환자와 이계인)의 시나리오를 겪은 지구인들에겐 그에 걸맞는 시련이 필요했으며 관리국은 이계의 존재들이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그 끝은 무조건적으로 이계침식을 도래했다.
이제 지구 전체가 겪은 시험보다 더 위험한 멸망의 때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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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다음날부터 시작될 일이다.
유중혁의 계속된 핀잔에 그녀는 자책을 멈추기로 했다. 눈을 열고 방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어두워서 본래의 색도 보이지 않지만 그곳에 걸린 전등에서 희미한 색이 떠오른다. 딱히 무어라 정의하기 힘든 색.
어둠속에도 빛이 있는가.
헛소리다.
우주의 별들은 사람들이 심연속에 빠져 허우적대는 꼴을 즐기니까.
그렇게 한 남자는 가만히 침대 끝에 앉은 채로, 그 옆의 여인은 누운 채 시간은 정체 없이 흘려만 간다.
•••
크로노스가 세 번 넘어졌을 때 즈음 이었다.(3분지났단 이야기다.)
“...저는 잊을 거에요.”
한참 뒤에 안나 크로프트가 중얼거렸다. 그녀가 잠들기를 기다리던 유중혁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잠꼬대가 아니라 맨정신으로 대화를 원하니 빨리 쉬고 싶은 유중혁에겐 머리 아픈 일이었다.
허나 둘 다 그 말에 깊은 의미를 담진 않았다. 이미 서로가 많은 것을 주고받았기에.
“나약하군. 회귀하기 좋은 꼴이다.”
“당신이 회귀해야 저도 회귀하죠. 뭐, 제가 능력이 부족한 탓이죠.”
지지 않으려고 대꾸하는 건 차라투스트라의 수장으로써 대답한 건 아닐 테지.
“넌 노력했다. 다만 충분하지 않았을 뿐.”
“그럼 얼마나 더 했어야 하죠?”
“내가 한 것보다 더 많이.”
“불가능하네요.”
“...”
뭐가 그리 신났는지 입가에 호선을 그린 채 침대 위를 뒹굴거리기 시작한다. 여태 숨겨온 본성이라기엔 너무 어색해 보였다.
그 모습은 어쩐지 분통에 가득 차 부들부들거렸던 그때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때 달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췄다. 혹부리의 제안을 거절해 대악마의 눈이 사라졌음에도 천진난만한 그녀를 보니 미안함이 느껴진다.
안나 크로프트는 금색 고양이처럼 기지재를 피고서 자신을 보는 패왕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때 달빛은 예언자와 패왕을 동시에 비췄다. 우월한 외모에 감탄하며 그녀는 솜으로 가득찬 베개를 안고선 야릇하게 웃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아직도 눈이 신경 쓰여요?”
“그럴리가. 과거의 너를 생각하고 있었다.”
“왜요?”
“그때도 너처럼 약해빠진 이유였는지 생각중이다.”
“하. 1000회차 즈음 기억을 포기했다는 그거 말이죠? 그거 추측해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그때 당신에 제게 잘해줘서 그런 게-”
“닥쳐라.”
말은 저렇게 해도 몇백회차나 보며 싸웠는데 뜻을 못 알아듣겠는가. 인간성이 깎이고 마음은 무뎌졌지만 그의 귓가는 붉게 물들어져 있었다. 지금이 바로 전회차였다면 정말 어이없어 할 일이다.
바깥에 간간이 들리던 작업소리도 어느덧 들리지 않는다. 너무나 조용해 태풍의 눈 안으로 들어온 것만 같다. 이 고요함은 내일부터 시작될 재앙의 전조인가. 그리고 그 악몽 속에서 난 이 남자의 곁에 있겠지.
어쩌다 이렇게 동료가 되었는지. 동시에 지금 자신이 상대하는 게 천회차가 넘어가는 괴물이었다니. 또 이 사실을 몇백회차가 넘어간 자신조차 알아채지 못하게 했는지.
“당신은 정말 상냥하네요.”
“...”
“제가 중간에 인류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감춰주었잖아요.”
유중혁은 대답도 않고 이불을 집었다.
그 모든 일들은 그녀 혼자서 결정한 일이 아니다. 확실히 자신의 영향이 컸다. 999회차에 죽은 이들은 거의 없다. 그녀가 만들 수 없던 세계를 그가 만들었기에 999회차를 겪은 안나 크로프트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바란 밤은 오로지 유중혁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그것뿐이라면 유중혁은 편하게 그녀를 원망했을 것이다. 회차가 바뀌어도 라스베이거스 시절 이전부터 고집이 센 여자와 싸워야만 했으니까.
999회차 이후 안나 크로프트는 유중혁과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함께했고, 언제나 참혹한 실패로 끝을 맺었다.
그녀는 유중혁을 해치는 계략에 집중할 수 없었다. 매정한 지도자에게 정이 생겨버린 것이다.
화신을 가차 없이 버리던 그녀는 유중혁이 초창기에 맞이한 고통을 견디질 못했다. 동료의 죽음에 진절머리가 난 것이다.
스스로가 희생하기엔 오로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었고, 결국 타인을 희생양으로 바쳤지만 슬펐다. 너무 미안하다고 화신에게 직접 사과할 정도로.
죄책감은 양심을 끌어올렸고 1000회차 넘게 쌓인 울분이 그제야 터졌다. 인지하지 못한 혐오감은 시도때도없이 그녀를 덮쳐왔고, 굳센 정신력이 분쇄기에 갈리듯 급속도로 마모되었다.
고작 한 회차에 있었던 자비에 그녀는 행복했지만, 999회차의 결말처럼 절망했다. 더 이상 예언자는 시나리오를 진행할 수 있는 화신이 아니게 된 것이다.
세상을 구해내려 노력한 기계에 인간성이 걸려 도저히 움직이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그럼 기계를 새로 돌리는 수밖에.
그렇다. 안나 크로프트의 자살엔 유중혁이 가담했다. 그녀가 악착같이 쌓아놓은 모든 걸 무너트린 건 딱 한번 내보인 패왕의 구원이었다. 그리고 참담한 결말을 맞이했기에.
그녀에게 알릴 수 없었다. 여전히 유중혁에겐 증오할 상대가 필요했다.
곁에서 우는 기억상실증 예비자가 아니라.
•••
유중혁은 대화를 거부했다. 침대에 누운 채 안나에게 등근육으로 강력히 주장했다. 그걸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알아먹은(어쩌면 그렇게 듣고 싶었던) 그녀는 유중혁의 어깨에 난 상처들을 쓰다듬어 내렸다.
이미 아물고 형태만 남았지만 그건 오로지 외면의 이야기일 뿐, 손가락이 닿을 때마다 그때의 기억들이 되살아나는지 유중혁의 매끈한 눈가매 일그러졌다. 어둠속에서 근육의 떨림으로 용케 그걸 알아챈 안나 크로프트는 곧바로 손을 뗀 채 유중혁의 우람한 이두근과 삼두근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암묵의 선을 넘자 유중혁이 잠자리를 박차고 으르렁거렸다.
“죽고싶나 보군.”
“네. 당장이라도 벽에 머리박고 자살하고 싶어요. 어때요? 대신 박아주실래요?”
“......”
그녀답지 않은 발랄한 말에 유중혁은 입을 다물었다. 그나마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애써 숨기던 거였나. 어째 감성이 넘치는 건가 싶더니 죽기 전의 회광반조와 다를 바 없는 꼴이었다.
발악한다, 살고 싶다고, 처절하게 세상에 몸부림친 그녀가 유일하게 호소할 수 있는 상대는 가장 가까웠던 셀레나 킴이나 유능한 부하인 이리스보다 평생의 숙적이었던 유중혁 뿐.
불안감속에서 증폭된 광기가 고독한 순례자에게 매달렸다. 지난 몇백회차 동안 그녀가 겪은 절망은 1000회차 가까이 넘긴 '사라진 안나 크로프트'보다 심했다. 초창기부터 유중혁의 이유모를 증오를 감당해야 했고, 46 시나리오에서 그에게 별을 빼앗겼고, 왕좌의 게임에서 절대왕좌도 없는 그에게 남아메리카의 지배권을 바쳐야 할 신세로 몰락하기도 했다.
예언자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노괴의 게임 판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 시련을 버틴 안나 크로프트는 '사라진 1000회차의 안나 크로프트'보다 훌륭히 싸워주었다.
그렇기에 미래를 알고 있는 화신, 유중혁이 수백회차를 기억을 전승하며 건너온 괴물에게 해 줄 말은 별로 없었다.
“입 닥치고 자기나 해라. 난 피곤해 죽겠다.”
어떤 위로도 그녀를 고칠 수 없다. 할 수 있어도 하지 않는 게 오히려 최선일수도 있다. 어정쩡한 도움보다 무관심이 더 옳을 때가 있고, 괜한 희망을 주는 게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나락으로 빠트리는 일이 되기도 한다.
“마음독하게 먹어라. 내일은 어차피 마지막이다.”
이미 그런 일을 수없이 겪었기에 내버려두는 것을 택했다. 이래야 울고 불며 밤을 지새우느니 다음날까진 악으로 버틸 것 아닌가.
시간을 공들여 설득하기보단 현실을 마주보아야 한다. 그래야 진정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보고 떠나야 하지 않겠나. 지난 몇 시간동안 그러지 못한 그녀를 강제로 침대에 끌어당긴 유중혁은 다시 잠자리에 누웠다. 조용한 정적이 흐른다.
“...그래요. 그쪽도 죽고 싶어 난리네요.”
역시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성흔과 스킬을 사용했을지 모르겠다. 이 건물에 들어오기 전 둘은 하나의 약조를 했다. 서로 능력을 사용하지 말자고. 손가락으로 대충 한 약속이지만 말이다.
다시 잔잔해진 목소리.
“당신 말이 맞아요. 이제 세상의 끝이 오긴 했나 봐요.”
수백번이나 지구의 멸망을 지켜본 사람끼리 할 수 있는 농담. 그들은 아직도 이 시나리오의 끝자락조차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든든한 사내에게 기대는 걸지도 모른다. 심장이 뛴다. 입에 침이 고이고 아랫배가 뜨거워진다. 방금 전처럼 내일의 불안이나 미래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오로지 지금만을 위한 나를 위해 살고 싶다.
“깨어있는 거 알아요. 그러니 말할게요. 지금까지 살려주셔서 고마워요. 지금도 당신덕분에 여기까지 왔네요.”
허나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그걸 채워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이제 다 잊어버릴 건데요. 내일이면 후회도, 미련도, 고통도, 죄악도 모두 떨쳐버린 채 떠나버릴 텐데, 그 사이에 뭐라도 해봐야겠어요.”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선 자그만 일탈이 필요하다.
“그래서.. 제 마지막 기억에게 추억을 주지 않겠어요...”
유중혁의 왼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ㅡㅡㅡ
독자는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
덜컹거리는 지하철의 흔들림에 맞춰 독자의 시선이 굴려간다.
오늘 따라 지하철을 탄 사람은 없기에 독자와 시선을 마주치는 사람은 없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상처투성이인 고등학생조차 신경써주지 않는 사회가 미울 수도 있겠지만, 독자역시 세상을 외면하고서 자신의 휴대폰을 들어올렸다. 옆에 떨어져 앉은 여고생과 맞은편의 중년 남성이 좀 거슬리지만 거리가 있으니 보이진 않겠지.
독자는 동년배들에게 얻어맞은 눈가를 누르며 잘보이지 않는 시선을 바로잡고 읽기에 집중한다.
당연히 유중혁은 이불을 덮고 대답을 회피하려 했다.
[등장인물 ‘유중혁’이 ‘삼인(三忍) Lv.???’을 발동중입니다!]
당연한 결과다. 지금 유중혁의 상황은 좋지 않을 뿐더러 바로 다음날 시나리오에 들어가야 한다. 충분한 휴식을 취해도 모자랄 판에 체력낭비를 해선 안 된다.
그때 이불속에 무언가가 들어온다. 뱀같은 손이 옆구리를 스치고 유중혁의 배를 감쌌다.
그리고 귓가를 살짝 깨문다.
유중혁이 눈을 질끈 감는다. 제 아무리 목인석심木人石心이라 하더라도 피하기 힘든 순간이 있다. 억지로라도 잠에 들려고 스킬을 사용하려던 찰나, 예언자의 손이 무언가를 움켜쥐었다.
종말 속에서도 라스베이거스의 여신이라는 이름은 헛되지 않은 것을 증명하듯 유중혁의 그것을 화려한 손놀림으로 유린했다. 암흑단층을 넘어선 초월자조차 감탄을 금치 못해 침음성을 쏟아낸다.
그런 수컷의 신음소리에 맞춰 여신은 달달한 말로 양심을 뒤흔든다. 지금 이 주변에는 양산형 제작자에게 주문한 방음막이 설치되었으며, 미리 특수한 방법을 써놨기에 타 화신들과 도깨비조차 접근하지 못한다고. 단 둘의 비밀로 남겨두면 끝이라고 말이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유중혁은 입안의 볼살을 깨문다. 자신에게는 이미 연인이 있었다. 지금의 자신은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비록 세계선이 무너지고 몇 세기 전 기억속에 매몰되었다 하더라도...
그때 혼란스러운 그에게로 그녀가 속삭인다. 혹시 아직도 이번 회차에 죽은 독선을 잊지 못했냐고....
유중혁의 정신은 그대로 매몰된다.
뜨거워진 분위기, 아픔을 다른 상처로라도 덮고 싶었던 유중혁이 먼저 선을 넘는다. 역시 고고한 늑대 씨답게 먹잇감을 제대로 포획하는 방법을 아는 듯 했다. 안나의 옷을 거침없이 벗기고 과실을 마음껏 탐하자 신음이 쉽게 교성으로 변모했다.
먼저 유혹한 것은 안나이기에 더 고통스럽게 쾌락이 빠지는 것도 그녀였다. 남녀의 살결이 뒤섞이는 장면에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코를 부여잡았다. 다행히 저번처럼 코피가 나는 일은 없었다.
이어 목덜미부터 어깨까지 내려온 혀가 다시 솟구차 목을 젖힌 안나 크로프트의 입술을 빼앗았다. 그러면서 배아래로 낙하한 큼직한 손이 여성의 생식기를 장난감 다루듯 거칠게 휘젓기 시작했다.
붉게 달아오른 여성의 다리사이로 주둥이를 가져다대고 키스를 하자 여인은 인어라도 되는 것처럼 팔딱거린다. 갓 낚은 활어가 몸부림치는 것처럼 발버둥치며 유중혁의 품에서 도망치려던 걸 거친 상처로 가득한 팔뚝이 붙잡았다. 싱싱한 인어를 붙잡은 패왕은 다시 탐닉하기 시작한다.
골반이 붙잡힌 안나 크로프트는 주도권을 포기하고 유중혁의 하반신으로 머리를 숙였다. 서로의 생식기를 턱이 얼얼할 정도로 물고 빨다보니 둘의 얼굴에는 뿌연 물로 가득했다. 이불로 서둘러 점액을 닦아낸 둘은 다시 서로를 덮쳤다.
사실 소설의 필력은 좋지 않은 편이었다. 진성 멸실법 빠돌이인 독자가 느끼기에도 오늘 소설에서는 정말 문체가 어색했다. 특히 몇몇 군데에서 단어를 설명하는 장면이 나와 집중을 깨트릴 텐데도 독자의 손은 자신의 것을 마구 흔들어 자위하듯 오직 스크롤을 내리는 데만 열중했다.
다른 야설들과 비교할 수 없이 엉망이다. 하지만 차원이 다른 쾌감, 그 멸살법에 이런 장면이 나왔다는 사실자체에 전율하고 흥분한다.
그 고고한 유중혁이 언제나 그를 지켜보던 이설화가 아닌 숙적이자 라이벌인 안나 크로프트와 몸을 섞는다는 사실에 배덕감마저 느끼며, 뜨겁고 딱딱해진 아랫배를 가리기 위해 상의를 끌어내리곤 다시 휴대폰으로 시선을 옮겼다.
[화신, '안나 크로프트'의 ■■은...]
[ 쾌락의 밤 입니다.]
우와. 개쩐다.
열차안의 사람들은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신음을 내며 벌겋게 타오른 독자에게서 멀어졌다. 몇몇은 중간에 내리기까지 해 열차안엔 둘, 셋 남짓한 사람들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신이 성숙한 '가장 오래된 꿈'은 슬슬 패왕이 안나에게 육중한 봉을 꽂으려는 장광을 상상하려던 찰나
[안내: 마지막 화입니다.]
“...”
끝나버렸다.
아...
이미 뜨거움으로 가득찬 뇌가 다음화를 원하고 있다. 자극으로 성욕이 자극받은 남교생은 분노, 절망, 슬픔, 타협의 과정을 거쳐 결국 끝은 받아들었다. 내일 나오겠지... 역시 시간은 답이다.
김독자는 멍하니 댓글창에 남은 정기를 가득 채워 작가 아니면 아무도 안볼 글을 썼다. 개중에는 당연히 다음편이 시급하다는 내용도 담겨있었다.
휴대폰을 내려놓은 그의 얼굴은 초탈한 석존의 것보다 우월했다. 그리고 점차 그의 얼굴이 구운 오징어마냥 짜그라든다. 식어버린 열정은 이성을 불러 들어왔고, 자신이 소설을 보면서 뭘 했는지 상상한 것이다. 특히 자기도 모르게 숨소리를 키웠다는 생각에 혹여 누가 들었을까, 서둘러 다음 정거장에서 하차했다.
새빨개진 얼굴을 가리며 급히 달려 나가는 남고생. 그 옆자리에 앉았던 미인 여고생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