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평화로운 오후 시간

김독자는 금방 유중혁이 차려준 적당한 점심을 맛있게 먹고

따스한 햇살에 취해 쇼파에 누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는 나지막히

이 평화로운 시간이 끝나지 않기를 가볍게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김독자가 쌓은 업보가 많은 탓인지,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띠링 띠링


김독자는 자신의 핸드폰을 들어 발신인을 확인했다.

'지역번호가.. 070? 스팸인가..'


"여보세요? 네, 네 제가 김독자입니다. 네, 네.. 네... 아 네.. 알겠습니다. 금방가겠습니다. 네.. 죄송합니다..."


"뭐야 뭔 전화야?"

전화를 받은 김독자의 안색이 급격하게 안좋아지는 것을 눈치 챈 한수영이 김독자에게 물었다.


"그 길영이 학교인데, 길영이가 싸웠다고 지금 교무실로 오라고.."

"씨X 뭐?"


김독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는 이길영 때문이 아니었다.


2주 전, 정희원은 퇴원하는 김독자에게 말을 건넸다.

"독자 씨, 앞으로 한달 간은 어떤 일이 있어도 외출하지 마요. 제 허락없이 밖으로 나가면, 진짜 죽여버리는 수가 있어요."


김독자는 단호하게 말하던 정희원의 눈동자에서

심판자의 불꽃이 아찔하게 튀기던 그 모습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정희원은 지금 출근했고, 정희원에게 허락을 구하고 외출을 하기엔 늦을 것 같았다.

유상아 또한 정부 일로 오늘 하루 바빠서 부탁할 겨를이 없었다.

김독자는 자연스레 유중혁은 선택사항에서 배제하고 한수영을 바라보았다.


"뭐. 왜. 뭘 봐?"

"안돼, 안된다 했어 나 오늘 레몬맛 사탕의 추억 32화 연재해야 돼."




"아 씨X!! 이길영 진짜!!"


한수영은 씩씩 거리며 입고있던 눅눅한 후드티를 벗고 그녀가 한참 강의를 뛸 때 자주 입었던

터틀넥과 셔츠를 입고 집을 나섰다.



*



"야 진짜 말 안할거야?"

"...."

"니가 말을 해야 내가 쟤를 더 패주던 대신 변호를 해주던 할거 아냐!"

"...."

"아 시X 뒤질래?"

"....흑.."


이길영이 계속 물음에 답하지 않자 그의 담임선생님은 같이 사는 신유승이 도움이 될까 싶어 그녀를 불렀다.

신유승도 점심시간 이길영이 옆 반 남학생을 때리는 장면을 보고 당황스러웠던 터라

이길영에게 계속 사건의 경황을 물어보았지만

이길영은 계속해서 묵묵부답이었다.


"그래.. 일단 수업 시작하니까 유승이는 교실로 올라가고."
"네.."


점심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어느 때보다 무겁게 울렸다.


신유승은 이길영의 볼에 가볍게 딱밤을 날린 뒤, 한숨을 쉬곤 상담실 문을 열었다.

"어, 언니?"

문을 연 신유승 앞에 있던 건 

뛰어왔는지 땀을 흘리고 숨을 고르고 있던 한수영의 모습이었다.



*



한수영은 이따금씩 쌍욕을 뱉어가며 거리를 걸었다.

그러다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가장 오래된 꿈인 김독자가 돌아온 뒤로, 현 세계선의 스타스트림 시스템의 붕괴는 안정화되어갔다.

이에 따라 일행들이 가진 설화의 힘, 능력치의 힘, 스킬의 힘들은

시나리오때 수준만큼이나 복구되었다.


그렇다면 한 상황을 가정해보자.

학생이 전문 격투기를 배우지 않은 이상 성인 남성과의 싸움에서 이길 확률은 극히 적다.

당연히 성인 남성의 완력이 학생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또한 힘 능력치가 한 자리수에서의 격차가 나더라도

이는 성인 남성의 몇 배에 달하는 힘을 낼 수있다.


이길영은 시나리오에서 '결'을 본 시나리오 유공자다.

그의 능력치들은 더 이상 코인을 사용해서 성장시키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이미 많은 성장이 이루어져 있다.

그 예시로, 이길영이 힘을 조금만 들여 콘크리트 외벽을 가격하면

콘크리트 외벽에는 큰 균열이 생길 것이다.


이길영은 현재 같은 학교 학우랑 싸웠다.

상대도 이길영을 가격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이길영도 상대를 가격했을 것이다.

'싸웠다.'라는 것은 상호 간에 이성이 마비되는 흥분 상태가 지속되었다는 의미이고,

성인과 비견했을 때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이길영은

힘조절을 잘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수영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져갔다.

12월 한 겨울의 날씨였지만

그녀의 등에는 식은 땀이 흘렀다.

그녀는 예상표절을 사용해 현재 상황을 예측해보려 했지만

무슨 일인지 예상표절이 잘 사용되지 않았다.


'단순히 싸운거면 충분히 합의할 수 있어. 돈이야 차고 넘치니까.

근데 만약, 진짜 만약 상대방이 어떻게 됐다면..?'


"좆됐다!!"


한수영의 발걸음은 김독자의 병실을 향해 달려갔을 때 보다 더 가볍고 빨랐다.



*



"김독자..씨?"

"아 걔는 일이 있어서 못왔고, 저는 한수영입니다. 저도 법적으로 길영이의 보호자에요."


한수영은 흐르는 땀을 닦으며

의자에 앉아있는 피해학생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좀 벌겋게 달아오르며 부었지만 예상했던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그.. 상황을 일단 먼저 설명 드리면, 점심시간에 갑자기 길영이가 저 친구의 얼굴을 때리고,

그 친구가 넘어지자 그 위에 올라타 계속해서 폭행을 했..거든요."

"길영이가 평소 행실도 바르고 해서 이유없이 저러진 않았을 것 같은데, 아무리 물어봐도 아무 말도 안해서..

뭘 알아야 저희도 처리를 하든 말든 할텐데 묵묵부답이네요.."


"아 저 새끼가 저 싫어해서 팬거라니까요? 저 새끼 퇴학 안시켜요? 아니 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는데?"

"너 조용히 안해!!"

선생님의 외침에 피해학생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띄며 고개를 저었다.


한수영은 피해학생의 거들먹거리는 태도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아이는 명백히 피해를 입은 학생이었고, 가해는 이길영이 저질렀다.

그녀는 반대편 의자에 앉아있는 이길영에게 가 물었다.


"왜 때렸어."

"왜.. 누나가 왔어요.."


'이 시X새끼가?'

한수영은 이길영의 머리에 태권당수를 꽃아넣을 뻔한 욕구를 간신히 참아낸 채 대화를 이어갔다.


"독자 바뻐. 그리고 나도 바뻐 이 시꺄 왜 때렸냐고."


이길영은 고개를 들어 한수영을 쳐다보았다.

그가 좋아하던 독자형도 아니었고,

유상아처럼 믿음가는 어른도 아니었다.

하지만 왜인지 이길영은 한수영한테라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을 느꼈다.


"저 새끼가.. 나보고.. 시나리오 때 사람죽인 새끼라고.. 사람 죽일 때 어땠냐고.."


이길영의 말을 들은 한수영의 눈끝이 흔들렸다.

언제나 짜증과 장난스러움이 가득히 묻어나던 한수영의 얼굴이

조금씩 그 감정을 잃어갔다.


저 우매한 어린새끼가, 마지막 시나리오가 끝나고, 재건된 세계에서 태어나

대가도 없이 먹고 싸고 자고 놀며 죽음의 위협조차 받아본 적 없는 저 새끼가,

온몸에 뼈가 아스라지고, 성좌들의 진언에 골통이 울려본 적 없는 저 시X새끼가


김독자의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 이 엄숙한 세계의 근본을 모욕한 것을 그녀는 참을 수가 없었다.


어느샌가 그녀의 오른팔에는 흑염이 피어올랐다.

그 어느것도 태우지 않을 정도의 저온의 흑염.

하지만 그 흑염을 통해 한수영이 느끼고 있는 분노가

그 자리에 있던 모두에게 전해졌다.

이윽고 흑염은 피어오르고 더 피어올라

정말 잠깐이라도 그녀를 건들면

이 일대를 흔적도 없이 불태울정도로

아찔한 경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수영은 빈 의자를 걷어차고 긴 책상위로 올라섰다.

그리곤 피해학생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렸다.


[넌 뭐지?]

한수영은 섬세하게 그 위력을 정해 자신이 할 수 있을 정도로 가장 약하게 진언을 발했다.

그럼에도 피해학생의 코에서 코피가 흘렀고 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 니가 말했듯이 우리는 살인자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동물, 괴수, 다른 세계의 무고한 존재들, 이계의 존재들. 심지어는 별들까지"

"한 생명, 한 생명을 꺼뜨릴 때 마다 내 정신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

지금도 내가 죽인 존재들이 나를 향해 기어오는 그런 꿈을 꾸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죽인 이유는 우리가 살기 위함이 아니야."

"우리의 살인이, 저들의 희생이, 멸망한 세계를 구원할 하나의 수단이라고 믿었고,

실제로 세계는 우리에 의해 재건됐다."

"이 세계는 시나리오에서 죽은 모든 이들의 희생을 짓밟고서 그 위에 세워졌다.

근데, 넌 뭐지?"

"생각도 없이 대가조차 내지 않고 잘도 숨을 쉬고, 먹고 싸고 자고

살기 좋았을 거야 그치?"

"근데 넌 왜 우리의 희생을 무시하지? 희생은 우리도 했어. 소중한 것을 잃었었고, 일상을 잃었다."

"내가 잠깐이라도 진심으로 힘을 다하면 이 학교는 물론이고, 이 주변 일대를 초토화시켜 버릴 수 있어.

나 뿐만이 아니라 니가 욕한 이길영이 그저 진심으로 너를 한대 때리기만 해도 너의 얼굴은

형체조차 알아챌 수 없게 으스러질거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매일 3번 세계정부에게 우리의 사생활을 보고해야 하고 서울 밖을 나가기 위해서는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한다."

"우리는 세계의 안정을 위해 스스로 우리의 일상을 반납했다."

"근데 넌 대체 뭐지? 거룩하고 숭고한 희생을 무시한 채 다른 사람들의 시체를 짓밟고서 이 자리에 서있는 너는

우리와 뭐가 다르지?"


한수영의 떨리는 음성이 한 문장 한 문장을 읊을때 마다 피해학생의 울음소리는 커져갔다.

피와 눈물로 엉망진창이 된 피해학생을 벽으로 가볍게 내던지고 한수영은 이길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 잘못한 거 없어. 기죽지마."


그리곤 구석에 몸을 웅크려 숨어있던 선생님께 다가가 명함을 건넸다.

"이거.. 김독자 명함인데 합의나 그런거 관련해서 물어보면 이쪽 번호 알려주세요."

"그리고 길영이 저 상태로는 수업 못 들을 것 같은데 조퇴처리 시켜주세요. 기왕이면 유승이도 같이."


선생은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야 이길영 유승이 몇 반이야?"

"4반이요.."

"너 교문밖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 유승이 데리고 갈게."

"네.."


한수영은 상담실을 나서고, 학교를 돌아다니며 2학년 4반을 찾아 해멨다.

수업중이던 신유승의 모습을 까치발을 들어 창문을 통해 확인하고,

수업중이던 선생님께 양해를 구해 신유승을 데리고 학교 밖을 나섰다.


"언니, 어떻게 됐어요. 이길영 왜 그런거래요?"

"있어 그런게."

"아 왜요 뭔데요?"

"묻지마. 이따가 길영이 만나서도 묻지말고, 집가서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 얘기 하지마. 알면 다쳐."


한수영은 툴툴거리는 신유승을 올려다보았다.


그 작던 꼬맹이 둘이 그 험한 세상 속에서 버티고 버텨

이렇게 나보다 크게 자라났다는 사실이 괜히 뭉클하면서도

어른의 입장에서 아이들에게 멸망한 세계를 겪게 했다는 

작가로서의 죄책감도 함께 밀려왔다.


한수영과 신유승은 교문에서 이길영과 만나 같이 길을 걸었다.

"떡볶이 사줄까?"

"헐, 네!"

"아니.. 난 별로 안 땡기는데.."

"뒤질래?"

"먹을게"

투닥거리는 두 아이를 보고 한수영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입을 열었다.


"비유. 여기있지? 나와."

[바앗!]

크고 몽실몽실한 털로 뒤덮인 도깨비 상태의 비유가

작은 스파크와 함께 튀어나왔다.


"바앗은 지X이고. 너가 뭐 길영이한테 뭐 걸었지?"

비유는 금방 인간 상태로 변한 뒤 한수영의 물음에 답했다.

"너네는 몰라도 애들은 잘 싸우니까, 원래 평소에도 계속 보고 있었지.

근데 아까보니까 싸울 것 같더라고. 그래서 급하게 이길영 능력치에 제한을 걸어서

다 1로 바꿔놨지. 나 잘했징?"

"그래 잘했다.. 깜짝 놀라서 뛰어왔어. 너도 떡볶이 사줄테니까 가자."

"아싸!!"





비유는 춤을 추듯이 앞으로 달려나가다 문득 갑자기 멈춰섰다.

"근데.. 수영아. 이제 내가 너 엄마라고 불러야 될 것 같은데. 너랑 아빠랑 어젯밤에 뭘 그렇게 열심히 한거야?"

"야이 씨X X같은 년아 그걸 보고 있었냐?"

한수영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이와 동시에 한수영의 오른팔은 아까와 다르게 모든 것을 불태울 정도로 뜨거운 흑염에 물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