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히 장난이었을 텐데.
독자 씨가 말했다.
'장난'이라고.
"어째서, 너희는 이설화를 지키지 못했지?"
그런데, 중혁 씨의 반응이 이상했다.
너무나 철저하게 속인 탓일까, 내 분장이 너무나 사실적이었던 탓일까.
중혁 씨가 결국 흑천마도를 뽑아든 순간, 그 때 내가 일어났어야 했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아니, 정확히는 알 필요도 없는 거지만.
*
누워 있는 이설화의 침대를 밀고 나온 건 김독자였다.
낭만적이게,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숲 속에서 김독자는 이설화에게 말했다.
"설화 씨, 눈 좀 떠 봐요. 자는 거 아니죠?"
"안 자요. 그나저나 독자 씨,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일을 벌렸어요?"
".. 저도 모르겠습니다."
김독자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뻔뻔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체념에 더 가까워 보이는 듯한 태도였다.
잠시 침묵을 지킨 김독자는 입을 열었다.
"다만,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건 하나였습니다. 유중혁을 기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 놈의 진심을 한낱 여흥으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 하나가 아니라 둘이네요, 참."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시게요? 중혁 씨 지금 식사도 안 하시고 연무장에서 훈련만 하고 계시는 건 아시죠? 반응을 보아하니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PTSD) 같은데.."
이설화는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사실 유중혁은 그 날 이후로 훈련 빼고는 그 어떠한 것도 하지 않았다.
식사나 수면같은 생리적인 활동을 포함해서, 그저 힘에 미친 사람처럼 계속 훈련만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설화는 그런 유중혁이 안타까웠다.
비록 유체이탈 스킬을 사용해 그리 갑갑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옛 애인이 망가지는 모습은 그녀로서도 참기 어려울 만한 것이었다.
".."
김독자는 대답이 없었다.
순간 참지 못한 이설화는 언성을 높였다.
"독자 씨! 설마 대책도 없이 일을 벌려놓으신 건 아니시죠?"
"대책은 있습니다. 두 가지 방법이 존재하는데, 첫 번째는 매우 쉬운 방법입니다. 두 번째는 엄청나게 어렵고, 힘든 방법이죠. 어떤 걸 택하시겠습니까?"
이설화는 잠시 고민했다.
김독자가 이런 식으로 말했을 때는 무조건 두 번째 방법이 유일하게 상황을 제대로 타개할 수 있는 최선책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던 그녀였기에, 주저없이 두 번째를 택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두 번째요."
".. 정말, 후회 안 하시겠습니까?"
"네."
김독자는 잠시 죄책감을 느끼는 듯 눈을 아래로 내리깔더니, 다시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 방법은, 저희도 힘들지만 설화 씨가 가장 힘들 겁니다. 솔직히 말하면, 두 번째 방법은 그닥 추천드리고 싶진 않은 방법입니다. 그래도 마음을 바꾸지 않으시겠습니까."
이설화는 부드럽지만 굳건한 의지가 담긴 눈으로 김독자를 응시했다.
그런 그녀에게 졌다는 듯 김독자는 두 번째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설화 씨. 이제부터 설화 씨는 정말로 죽어야 합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죽는다기보단 혼수 상태에 빠지는 것에 가깝죠. 우린 이 가짜 이야기를, 진짜 이야기로 만들 겁니다."
"독자 씨. 그것도 중혁 씨를 속이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요? 정말 제대로 된 해결책은, 없는 걸까요."
"이게 최선입니다."
숲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검은 코트를 입은 회귀자가 흑천마도를 손에 쥔 채 걸어나왔다.
"최선이라고 했나, 김독자?"
".. 유중혁?"
유중혁이, 검은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그 곳에 서 있었다.
온 몸에서 끓어오르는 살기는 김독자로 하여금 '마왕화'를 발동할 정도의 위기감을 느끼게 했다.
흑천마도를 쥔 손이 부르르 떨려왔고, 바로 다음 순간 유중혁은 김독자를 향해 돌진했다.
"김독자. 네놈은, 다시 한 번 나를 기만했다."
"미안하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유중혁의 검은 '흑천마도'와 김독자의 흰 '부러지지 않는 신념'이 허공을 갈랐다.
한 점에서 만난 두 검격의 궤적은 이내 방향을 바꿔 서로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
그러나 김독자의 '부러지지 않는 신념'은 유중혁을 향해 움직이다 이내 궤도를 이탈했고, 바로 다음 순간 유중혁의 흑천마도가 김독자의 목을 갈랐다.
쉬익 -
"중혁 씨..?"
유중혁은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믿을 수가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피가 묻은 흑천마도의 칼날과 자신의 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여지껏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는 그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혼돈에 빠져 흔들리고 있었다.
짧고도 긴 침묵 끝에, 유중혁은 겨우 한 마디를 주워섬겼다.
".. 김독자?"
유중혁은 검을 놓쳤다.
사실 알고 있었다.
이설화가 살아있다는 것은.
그렇기에, 흔쾌히 연기를 하며 그들의 장단에 맞춰주었을 뿐이다.
"중혁 씨.. 지금.. 독자 씨.."
"아니다. 분명히 김독자는 살아날 방법을 찾고 있을 거다. 그 놈이 그렇게 죽을 놈이 아니라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러나 유중혁은 보지 못한 것이 있었다.
마지막 순간, 유중혁의 칼날이 목에 닿기 전 김독자가 지은 표정.
아닐 거다.
그럴 리가 없다.
그럴 수도 없고, 나는.. 나는.. 내가 한 것이 아니다.
놈이 약해서..
그래, 김독자가 너무나 약해서..
아니, 내가 한 짓이다.
이제 와 누굴 탓한단 말인가.
유중혁은 혼란스러웠다.
여러 가지 의문이 한꺼번에 그의 머릿속에서 몰아치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것은 '죄책감'이었다.
"이설화.. 이설화.. 대답해라.. 내가, 내가 죽인 건가? 내가 김독자를 내 손으로 죽인 건가?"
유중혁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고독해 보였다.
자신의 유일한 이해자이자 이 이야기의 끝까지 이끌어준 항해사를 잃은 그의 표정은, 이 여정에서 본 그 어떤 표정보다도 처연해 보였다.
"중혁 씨.."
이설화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날 이후, 김독자는 없어졌다.
어느 누구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알고 있는 이가 있었다.
"저만 알고 있어요."
"나만 알고 있다."
자 피폐를! 들고 왔단다맨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