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arca.live/b/reader/38728943?p=2
한수영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차도로 멋모르고 뛰어들어간 어린 김독자, 그를 향해 무감정하게 달려오는 커다란 트럭.
모든 것이 생생했다.
그녀의 체세포 뉴런 하나하나가 그 때의 감각을 한수영의 뇌에 생생히 재현하고 있었다.
뻗었지만 닿지 못한 손, 온 몸의 뼈를 으깨는 트럭의 충격, 차가워진 체온.. 땅에 닿은 머리 쪽에 느껴지는 뜨거운 피웅덩이까지.
"아.. 안 돼.. 안 돼애애애애애!!!"
한수영은 눈물을 글썽이며 머리칼을 부여잡았다.
거추장스럽게 팔뚝에 박힌 링거를 잡아뜯고, 새하얀 병원 복도를 붉은 피로 물들이며.
성하지 않은 정신 상태에, 무언가에 쫓기는 듯 비틀거리는 발걸음이었지만 그녀가 향하려는 곳은 명백했다.
20년 전, 사고가 났던 바로 그 날 그 도로.
"환자분! 진정하세요!! 지금은 20년 후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으시겠지만, 꽤 많은 세월이 흘렀다구요!"
간호사들이 그녀를 진정시키려 필사적으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수영은 발작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리는 것이 없었고, 그 날 그 광경 외에는 아무것도 눈에 비치지 않았다.
자신 혼자만이 그저 그 시간에 영원히 갇혀 있었다.
평생 그랬다.
병원으로 이송되어 냉동인간이 되었을 그 당시에도, 냉동인간으로 지냈던 그 20년의 세월도 전부, 그 허상으로 점철된 것이었음을 그 누가 알 수 있었겠는가.
"으아아아아아!! 제발!! 안 돼.. 오 제발.. 살려줘.. 아무나 제발.. 아무나 살려줘.. 나 좀.. 제발 좀 구해줘어어어어!!!"
그렇기에 그녀는, 그저 그런 포효를 내지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 필요 없었다.
그저 김독자가 다시 한 번 보고 싶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 김독자가 아직까지 살아있을지 아닐지 모른다는 의심만이 그녀의 뇌를 뒤덮었던 것이다.
"제발.."
푹-
보안 요원이 그녀의 등허리 언저리에 마취 주사를 놓자, 그제서야 눈물을 떨구며 힘없이 한수영은 쓰러졌다.
*
어딘가 불길한 느낌과 동시에 안심한 김독자는, 일어나 머리맡에 놓여 있는 물 한 컵을 마셨다.
피로한 눈을 북북 문지르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오랜만에 외출을 결심했다.
옷걸이에 걸려 있는 흰 코트를 걸치고 천천히 병실 문을 열고 김독자는 바깥으로 향했다.
".. 따듯하네."
병원 뒤편에 조성되어 있는 인공 정원을 거닐며 김독자는 오랜만에 마음이 따듯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국화, 수국, 민들레, 튤립 같은 아름다운 꽃들 사이에서, 이름 없는 검고 조그마한 꽃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게 몸을 숙여 그 꽃을 잡아채려는 김독자의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독자 씨, 기운 차리셨어요?"
유상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 들리는 야옹- 하는 소리.
잊고 있었던 것의 정체를 드디어 알아낸 김독자는, 기쁜 얼굴로 유상아의 품에 편안하다는 듯 안겨 있는 고양이를 향해 팔을 뻗었다.
"이리 오련."
미야아옹 -
하품을 한 번 하고, 제 입가를 한 번 핥은 고양이가 유상아의 품에서 뛰어내려 도도도도- 하는 발걸음으로 김독자의 품으로 향했다.
고양이가 제대로 올라올 수 있게 한 쪽 무릎을 꿇은 김독자를, 한명오가 멀리서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미리 병원장에게서 한수영의 상태를 들은 바.
이것을 말하는 것이 좋을지, 그러지 않는 것이 좋을 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였다.
".. 유상아 씨. 잠시 이 쪽으로."
갈등 끝에 유상아를 부른 한명오는 사정을 설명했고, 잠시 고민하던 유상아는 일단 사실을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명오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고양이와 놀아주던 김독자에게, 유상아가 한수영이 깨어났다는 사실을 귀띔해 주었다.
"독자 씨.. 드릴 말씀이.."
".. 뭔데요."
오랜만에 말을 꺼낸 김독자였지만, 그가 말을 했다는 것에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유상아는 말했다.
"놀라지 말고 들어요. 한수영 씨가 깨어났어요. 다행히 몸은 건강한데, 정신이 그렇지 못해요. 독자 씨 이름만 부르면서 계속 절규한다나 봐요.."
".. 수영 누나가요? 가 볼게요, 가 봐아죠. 당연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김독자는 명쾌하게 답을 내놓았다.
다른 건 다 상관 없었다.
그저, 살아있는 한수영을 다시 한 번만 볼 수 있다면.. 그래서 자신 또한 구원받을 수 있었으면.
".. 독자 씨! 같이.."
저 멀리서 유상아가 같이 가자고 말하며 그를 향해 달려왔지만, 이미 김독자는 병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VVIP 병실의 문 앞에 도착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려던 김독자가 일순 행동을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