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가 끝난 후 내가 돌아오고 나서 시간이 흘러, 세상은 언제나 그랬듯 새롭게 생겨난 힘에 적응하였고, 그 힘들을 이용하여 오히려 전보다 발전해나갔다.


"아휴.....아니, 사람들은 스킬도 쓸 줄 알면서 뻔한 소설을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거야?"

"왜? 그거로 돈도 많이 벌고 있잖아."

"재촉이랑 악플이 너무 심하잖아.....스트레스 없애는 스킬은 없나?"


시나리오를 끝내고 사라진 스킬들이 내가 돌아옴과 함께 돌아오자, 일행들은 저마다의 일을 하거나 쉬면서 일상을 즐기는 중이었다.


"....스트레스 많이 받아?"

"장난 아니지."


한수영은 전에도 그랬듯이, 웹소설 작가로 일을 하고 있었다.

시나리오가 끝나고서 이미 현실이 판타지가 되었기에 더이상 독자들은 판타지를 원하지 않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판타지와 다른 여러 장르를 섞어 쓰는 소설이 나오면서 판타지 장르는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었다.


"아니....로맨스랑 판타지의 비율을 적당히 섞어서 쓰는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 로판같은 장르가 아니라 판타지에 로맨스를 따로 가미해야 하는 거잖아."

"그러게....."


그리고 오늘은 한수영이 연재를 시작하던 작품 '돌아온 세계의 연인'은 한수영의 필력이 잘 드러나는 작품으로 역시나 큰 인기를 끌었다.


"이제 슬슬 나가자."

"하....귀찮은데."

"너가 작가인데, 너가 안 갈 수는 없잖아."


오늘은 그런 한수영 작가의 완결기념 싸인회를 가지게 되었다.

시나리오 시절의 영웅이기도 하고 어려보여서 그렇지 사실 엄청난 미인이었기에 팬들은 더더욱 그런 한수영 작가를 좋아했다.


"하....아무튼 다른 애들은 뭐래?"

"아이들은 학교 끝나고 지혜가 데리고 올거고, 상아 씨나 희원 씨는 불참."

"흐음....."

"유중혁은 알테고, 설화 씨도 병원 일로 불참."

"뭐 다 불참이야?"

"그래도 공필두 아저씨랑 장하영하고 성좌분들이랑 스승님 일행도 올 걸?"

"일단 오키."


한수영은 잠깐 표정에 불만을 보이더니 바로 어쩔 수 없다는 듯 표정 지으며 겉옷을 챙기고 안경을 썼다.


"안경은 또 왜?"

"있어보여야 하잖아."

"....."


음....안경이 문제일까....?


"무슨 말이든 마음 속으로만 생각해라. 입 밖으로 꺼내면 뒤져."

"넵."


나는 돌아오고 나서부터 일행들의 반강제적인 권유로 집에서 쉬거나 일행들의 일을 조금씩 도와주는 백수로 지내고 있었다.


"너는 어떻게 할 건데?"

"나? 나도 곧바로 갈게."

"그래? 너무 늦지않게 와. 자리 없을 수도 있어."

"알았어. 이따 보자."


탁.


간단한 인사를 마치자마자 한수영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16:30]


싸인회는 6시부터 시작이기에 한수영은 미리 준비를 하러 지금 집에서 나갔고 결국 집에는 나만 남게 됐다.


.....아무래도 역시 그런 것 같네.


지하철에서 홀로 있으며 수많은 이야기를 읽었고, 결국에는 한수영이 써준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그렇기에 이런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한 거야. 그렇지. 내가 이상한게 아니라고.


사건의 발단은 며칠 전이었다.


「그날에는 정말 우연에 우연이 겹쳤었다.

내가 소파에 앉아서 티비를 보며 커피를 마시고 있을때였다.


"저....독자 씨."

"네?"

"저기....때마침 없어서 여쭤보는 건데요."

".....네."


내게 다가온 유상아가 어쩐지 평소랑 묘하게 다른 분위기를 풍기자, 나는 자연스레 커피를 내려놓고 유상아의 말에 집중했다.


"요즘 저희들끼리 조금 얘기를 하다가 우연히 나오게 된 얘기인데."


.....뭐지? 무슨 얘기길래 상아 씨가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거지?


그리고 뒤이어 나온 유상아의 그 말은 잔잔한 수면같던 내 마음에 작을 돌을 던진 것 같았다.


"혹시, 독자 씨 수영이 좋아하세요?"

".....에?"


내가? 한수영을?


"갑자기요?"

"그게, 정학한 뭔가가 있는 건 아닌데, 여자의 감이라고 할까요? 요즘에 저랑 설화 씨랑 희원 씨랑 얘기를 하는데 다들 같은 생각이었어서...."


나는 그 순간 몸이 잠깐이지만 굳고 말았다.


내가 한수영을 좋아한다고....?


"음.....아니라면 죄송하지만, 방금 반응까지도 생각하면 할수록 좋아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제가 한수영을요?"


내가?」


그때, 우연히 집에 한수영이 없었고, 우연히 다른 일행조차 없었으며, 우연히 나와 유상아만이 같이 있었다.


그래도, 무려 3명의 여자한테서 같은 말이 나왔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여자의 감에 미루어볼 때, 그리고 내 마음에 물어볼 때.

답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하....."


나 진짜 좋아하나 봐.....


안 그래도 [제 4의 벽]이 없는 이제, 얼굴이 드러나면서 감정같은 것도 '포커페이스'를 사용하지 않으면 감추기 힘들었고, 그 속에서도 모르던 내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던 것 같다.


"다른 여성분들이 알아도 한수영은 모르겠지....?"


[아바앗!]


그때, 언제부터 있던 건지, 솜뭉치 모양을 한 비유가 쑥 하고 튀어나왔다.


"비유?"


[바앗!]


"무슨 일이야?"


갑자기 나타난 비유에게 의문을 가지자 비유는 바로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아빠."

"응?"

"정말 모를거라 생각해요?"

".....어?"

"한수영이 진짜 모를 것 같아요?"

"......"

"물론 아직 확신은 안 하겠죠. 근데 한수영의 얼굴을 봐봐요. 아빠도 인정하죠? 엄청 예쁜거."

".....그렇지."


좋아하는 감정을 인정하기 전까지는 그저 예쁜 얼굴이라고만 여겼지, 이성적으로 판단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주저없이 말할 수 있었다.


"그 얼굴에 한수영을 좋아해본 사람이 한 명도 없었을까요?"

"......"

"물론 한수영이 연애를 해본적은 없지만."

"어?"


나도 모르게 그 말에 화색이 돌며 들뜬 기분이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힘들고 그랬는데, 아빠도 그래서 연애 안했잖아요."

"....내가 그래서 연애를 안 했던 건가?"

"고백받은 적 있죠?"

"그치?"

"받아줬어요?"

"아니?"

"왜요?"


왜냐니 그야.....


"연애 생각이 없었으니까....?"

"똑같잖아요."


그런가.....?


나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솔직히 나와 비교하기엔 한수영이 너무 예뻤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예쁜 한수영을 좋아해본 사람이 한 두 명도 아니었을테고, 누가 자신을 좋아하는지도 못 알아볼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좋아하는 마음을 자각하고 나서의 내 행동이 생각났다.


"하....."

"뭔가 기억나요?"

"어....빌어먹게도 그러네."


말투부터가 너무 달랐다. 미묘하게 말하는 느낌이나, 목소리도 다른 것 같다.


"한수영이 아빠 살리려고 아빠에 대해서 얼마나 기억하고 생각했을텐데, 아빠의 마음이나 태도정도는 분명 누구보다 빠르게 눈치챘겠죠"


만약 저 말이 사실이라면.....


나는 지금 이미 차인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럼 나 차인 건가.....?"

"갑자기 그렇게 가요?"

"그야 내가 좋아한다는 걸 안다면, 걔도 생각해보고 좋다면 뭔가 티를 내거나 하지 않았을까?"

".... 음?"


내 말이 불만스러운지, 비유는 인상을 쓰며 짝다리를 하고는 말했다.


"이쪽이 문제였군....."

"어?"

"아니에요."

"아무튼, 그리고 요즘에 어째선지 한수영이 나랑 둘이 있을 상황도 피하는 것 같더라고."

"허."


그 말을 듣자마자 비유는 왜인지 숨을 짧게 내쉬더니 다시 솜뭉치의 모양으로 변했다.


[난 잘 모르겠다. 알아서 잘 해봐요.]


".....알았어."


한 번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서인지, 쉽사리 좋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어쩐지, 요즘 한수영이 나를 갑자기 피하는 일이 많아졌어.


분명 저번만해도.....


거실애서 뒹굴면서 핸드폰 하길래 말거니까.


「"미안! 나 지금 원고 마무리해야해서."」


그러고 방으로 뛰어갔지.....그 외에도.


「"아! 지금 바빠서 다음에."」

「"잠시만....아, 됐다. 휴.....미안 나 잠시 눈 좀 붙일게."」

「"몰라, 지금 말 걸지마."」


단지 말 거는 것조차 여러 이유로 거듭 거부 당했었다.

오늘이 되어서야, 조금 대화를 나눴었지....


비유와 한 대화를 듣고 어쩌면, 한수영은 내 바뀐 태도를 진작에 눈치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라고 한수영에 대한 내 태도가 변한 시기와 나를 피하던 시기가 얼추 들어맞았다.


"시발....."


헛웃음이 절로 터져나왔다. 병신같이 모두의 곁으로 돌아와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안일해졌나 보다.


"지랄났네."


가슴이 아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이상 잔잔한 마음으로 있을 수가 없었다.


'제 4의 벽'이 없는 나는 이렇게 내 감정도 어찌할 줄 모르는 애구나.....


나는 조용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한수영에게 문자로 싸인회에 가지 못할 것 같다고 문자를 하려했다.


그때, 핸드폰의 화면이 바뀌었다.


[수신 전화 - 유중혁]


"응?"


예상치 못했던 이름에 당황한 나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니가 무슨 일이냐?"

-정말 귀찮군.

"어? 갑자기?"

-한수영의 싸인회는 언제지?

"....6시. 그건 왜?"


유중혁이 한수영에 대해 묻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경계를 했다.


-알았다.

"갑자기 그건 왜?"

-왜겠나. 참여하려 그런다.

"갑자기? 너 못 온다며?"

-.....가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나?

"아니, 그건 아닌데....."


젠장, 한심하다. 나 뭐하는 거지?


아마 나도 모르게 질투하며, 경계했던 것 같다.

유중혁은 나와는 다르게 여성에게 인기가 많은 남자니까.


-끊는다.


뚝.


지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은 유중혁을 보며 나는 아까보다 더 요동치는 마음에 가슴을 부여잡고 작게 불평했다.


"지 말만 하고 끊냐."


전화가 종료되고 다시 화면이 돌아와 한수영과의 채팅 내역이 떴다.


-야, 나 레몬사탕 좀 사주라.

-너가 사라.

-좀 사주면 덧나냐?


[입력중: 미안. 나 오늘 못 갈 것_ (전송)]


"....."


나는 아까 유중혁과의 대화 내용을 생각하고는 급히 전송 중이려던 내용을 지웠다.


확인만 하는 거야. 확인만.


*


한수영은 요즘 잠도 설치게 만드는 고민거리가 생겼다.


'그 자식 설마.....'


그 이유는 최근에 김독자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 것이다.

주변에서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 하지만, 자신에게 취하는 태도의 변화였기에,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한수영은 가만히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서 김독자의 행동을 회상했다.


「"한수영, 이거 먹어라."」


평소처럼 장난으로 레몬 사탕을 사오라고 했지만, 항상 무시하던 녀석이 어느날 갑자기 사왔다면서 자신에게 레몬 사탕 무더기를 주었다.


「"내일 춥대. '추위 내성' 있어도 따뜻하게 입어라."」


갑자기 물어보지도 않은 정보를 알려주며 챙겨주려 들었다.


'이거 설마.....진짜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으며, 김독자의 태도에 대한 의심을 지우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그녀는 핸드폰으로 '사랑하는 남자가 하는 행동'등을 검색하였고, 김독자가 갑자기 말을 걸어오자, 핸드폰을 가리며 급히 자리를 피했다.


어째선지, 김독자의 얼굴을 보기 힘든 것도 있었다.


'미치겠네.....'


이외에도 여러가지 행동이 인터넷에서 찾아본 정보와 일치하였고, 의심이 어느정도 확신으로 변한 한수영은 여자 모임에 참여해 자연스레 화두를 꺼내며 김독자 얘기를 했다.


'아니, 요즘에 김독자가.....'

'어머, 진짜요?'

'그렇다니까? 저번에는.....'


말을 하면서 어째서인지, 들뜬 기분이 되었지만 가볍게 무시하며 여자의 감이라는 것으로 무려 3명에게 확인 받았다.


"이건 확실하네....."


김독자가 자신을 좋아한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한수영은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김독자를 어떻게든 만나기 위해 소설을 쓴 것이었고, 자신의 아바타도 그렇게 해서 김독자를 무려 두 번이나 구해냈으니까.


그 모든 일은 좋아하니까 가능했던 일이니까.


"크흠....."


한수영은 행복한 마음에 작게 목을 가다듬고는 작게 웃음지었다.


"그렇지, 당연히 날 좋아해야지. 이 천재 미소녀 작가님게서 친히 마음을 줬는데."


그렇게 말한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잠들 수 있었고, 방금 집에서 싸인회를 위한 장소로 가는 길이었다.


'얼른 보고싶네. 그래도, 이제야 좋아하게 된 게 괘씸하니까 좀 놀려줘야지.'


아이같은 장난을 꾸민 한수영은 웃으며 싸인회장에 도착했다.


"아, 수영 씨 오셨어요."

"네, 준비는 얼마나 되가요?"

"금방 될 겁니다. 하하. 오늘도 여전히 빛나시네요."

"아.....네, 뭐 감사합니다."


항상 보던 연재처 직원중 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김독자를 생각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이 지어졌다.


'보고싶다~ 김독자~'


*


"아저씨!"

"형!"

"구원의 마왕!"


[17:30]


약속 시간이 되자, 미리 정해둔 장소에서 오늘 싸인회에 참여 가능한 일행들이 하나둘 모였다.


"어서와."

"다들 온 거에요?"

"아직 한 명 안 왔어."


조금 더 시간이 지나고, 뒤늦게 결정된 유중혁이 합류했다.


[17:48]


"들어가자."

"이 시꺼먼 놈은 왜 왔어?"


일행들과 모두 만나서 싸인회장 안으로 들어가자 깨끗한 실내와 이미 들어와있는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인기 작가는 인기 작가네.....


싸인회는 아직 시작도 안했지만 사람들이 이미 많이 들어와있었다.


"사람 많네요....."

"그러게...."


나는 일행들을 데리고 자리로 가서 미리 줄을 서고 있었다.


[네,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사회자의 멘트가 들리고 줄의 앞쪽의 탁자에 깔끔히 꾸민 한수영이 자리했다.


와.....예쁘다....


나도 모르게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자, 유중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시작인가."

"....어, 그런가봐."


사회자의 멘트가 끝나자, 한수영은 팬들을 한 명, 한 명씩 상대하며 능숙하게 싸인을 해주기 시작했다.


뭐가 저리 재밌길래 웃냐....


한수영이 다른 남자의 말에 폭소를 하는 것을 보며 기분 나빠하기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한수영을 보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게 팬이자, 좋아하는 상대로써 기분 좋기도 했다.


하....이래서 사랑이 힘들다고 하는 거구나....


그때였다.

남매로 보이는 사람들이 한수영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자 쪽에서 한수영과 가볍게 포옹을 하자, 남자도 한수영에게 포옹을 요청했지만 악수로 넘어갔다.


한수영은 그다지 반기지 않는 듯 보였지만, 일단은 그녀의 팬이기에 그저 악수도 가볍게 하며 꺼려하눈 눈치였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그리 기분 좋지는 않았다.


아니 저 새끼가.....?


"와.....수영 언니 인기 많네."

"그러게요. 지혜 언니랑은 양 반대네."

"이 꼬맹이가 혼날래?"


옆에서 투닥거리는 아이들을 외면하고 나는 주먹을 꽉 쥐며 침음을 삼켰다.


"닥치고 앞으로 이동이나 해라."

".....어."


그 이후로 다른 팬들도 그 모습을 봤는지 악수를 자주 요청했고, 한수영은 그것들을 예의상 받아주었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뭐라 말하지?"

"그냥 싸인 해달라 하자. 어차피 집에서 말하면 되잖아."

"이런 장소에서가 의미가 있는 거짆아."


그리고 몇 번의 사람이 더 지나가고 마침내 우리 차례가 되었다.


"다음 분 오세요."

"안녕하세요."


한수영은 우리의 얼굴도 보지 않고, 종이에다 싸인을 하며 이름을 물었다.


"이지혜요!"

"네, 이지....어?"


그제서야 얼굴을 든 한수영은 우리의 모습을 보고는 잡게 웃음 지었다.


"진짜 왔네?"

"그럼요! 언니 싸인회인데."

"그래, 고마워."


한수영은 신유승에게 작게 웃어주며 우리 일행들의 이름을 하나씩 적어두며 각자 한 장씩의 싸인을 주었다.


그리고 나도 받으려 하자, 한수영은 내 얼굴을 보다 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싸인을 한 종이를 얼굴도 보지 않고 내게 넘겼다.


.....그렇게 싫냐.


나는 그런 한수영의 모습에 이를 꽉 깨물고는 싸인을 받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제대로 인사도 안 하나?"

".....어?"


그러나 유중혁이 내 어깨를 잡고는 한수영에게 몸짓했다.


"뭐, 집에서도 보잖아."

"그런가."


유중혁은 그런 내 얼굴을 무표정하게 보더니 손을 놓고 다른 일행들과 함께 한수영과 짧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한수영이 해준 싸인을 한 번 확인하고는 싸인을 쥐지 않은 손을 꽉 쥐었다.


To.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았다.

다른 일행들의 싸인에는 'To. 이지혜' 처럼 저마다의 이름을 적어줬었다.


심지어 유중혁마저도. 그러나 자신은 이름조차 적혀있지 않았다.


"하. 진짜....."


짧게 헛웃음을 하고는 그대로 그 자리에서 나왔다.


뒤에서 일행들이 한수영의 말에 놀란 것인지, 소리를 지르기도 했지만 듣지도, 의식하지도 않았다.


가슴이 너무 아팠으니까.


*


'와....독자다.'


한수영은 이지혜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어 일행들을 확인하고는 작게 웃음 짓다가 김독자의 얼굴을 보았다.


"진짜 왔네?"

"그럼요! 언니 싸인회인데."


신유승이 밝게 웃으며 그녀에게 신기하다는 눈빛을 하자, 한수영은 그 모습에 작게 웃으며 싸인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래, 고마워."


그리고 김독자의 싸인을 해주어야 할 때, 자신을 바라보는 김독자의 얼굴을 마주봤다.


'여전히 잘생겼.....헉!'


한수영은 잠시 김독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 얼굴을 숙이고는 얼른 싸인을 하고 고개도 들지 않고서 급히 싸인을 건냈다.


김독자가 별다른 말 없이 싸인을 받고 돌아서자,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김독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때, 유중혁이 김독자의 어깨를 잡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 손을 놓고 그녀에게 돌아왔다.


".....그래서, 언제 사귈거지?"

".....뭐, 뭐?!"


그리고 순간 훅 들어온 질문에 한수영은 고개를 돌려 김독자 쪽을 봤다.

김독자는 싸인 종이를 내려다보더니 그대로 떠나버렸다.


'뭐....안 좋은 일 있나?'


평소라면 말 한 마디라도 더 하려 하던 김독자지만, 어째선지 이번에는 그저 멀리 걸어가기만 했다.


"무슨 소리야? 사귀다니?"


그리고 그제서야 유중혁의 질문에 의아함을 느낀 아이들이 질문 폭탄을 던졌고, 뒷사람 순서도 있기에 어쩔 수 없이 폭탄 발언을 던졌다.


"나....김독자 좋아해."

"ㄴ, 네?!"

"언니, 그게 무슨.....!"

"아무튼! 이제 가, 다른 사람 사인도 해주게."


아직 정신을 못 차리는 이지혜와 이길영을 유중혁과 신유승이 끌고 갔다.


'어떡하지.....말해버렸다.'


충동적이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오히려 후련한 기분이었다.


"다음 분 오세요."


그녀는 다음 사람과 잠깐 대화를 나누고 싸인을 해주다 이름 부분에서 잠시 멈칫했다.


'그러도 보니.....나 김독자 싸인에이름 써줬었나?'


안 써준 것 같기도 했다.


'뭐, 나중에 확인하고 써주면 되겠지.'


*


"아저씨! 이따가 뒤풀이 한데! 기다리자!"


천천히 밖으로 걸어가던 나를 향해 달려온 아이들이 나를 끌고 싸인회장의 구석으로 끌고 갔다.


"왜 그래 아저씨?"

"아저씨, 뭐 안 좋은 일 있어요?"

"어? 아니야."


나는 최대한의 힘으로 작게 웃으며 신유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피곤해서 그런가."

"으.....저 다 컸거든요."

"그래.....그러네."


나는 머리에서 그 손을 치우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고 핸드폰에 비치는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걸까.....무엇을 기대하고 또 무엇을 원했던 걸까.


눈치채지 못할만큼 작은 한숨을 내쉬며 일행들과 대충 대화를 하며 기다리자, 싸인회는 금방 마무리 되었다.


[네, 감사합니다 여러분. 한수영 작가님에게 모두 박수주시고, 다음 싸인회는 2주 후에 이곳에서 후속작 발표도 함께 하신다고 하십니다!]


"와아아아아!"


사회자의 마무리 멘트와 함께 사람들이 천천히 전부 빠져나가자, 스태프로 보이는 사람들이 신속히 움직이며 자리를 정리했다.


애초에 이 장소 자체의 도움도 있었기에 정리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고 끝이 났고, 뒤풀이로는 근처의 고깃집에 가서 고기를 먹기로 했다.


"자, 이번에도 큰 성공을 거두며 좋은 작품을 만드신 한수영 작가님의 차기작 성공을 위해 건배!"

"건배!"


차를 타고 오지 않았기에 유중혁과 미성년자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가 고기랑 같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수영하고는 떨어져 앉았네.....


저 멀리 보이는 한수영은 여자도 있지만 남자들과 같이 술을 마시고 있었고, 그중 누가봐도 의도가 있어보이는 남자에게 술잔을 받으며 술을 마셨다.


술도 약하면서.....


"걱정되나?"


그리고 그때, 유중혁이 나를 보며 말을 걸었다.


이 녀석은 아까부터 이런다.

사실 진작에 아까 전화가 왔을 때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미안하다. 피해줘서."

"....."

"언제부터 알았냐? 스스로 안 거야? 아님 비유?"

"스스로 알았다."

"그러냐."


나는 유중혁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역시 안심이 되지가 않았다.


이 녀석에게는 설화 씨가 있다고 몇 번을 되뇌이면서도 약간의 알콜이 들어가서 그런지 더욱 뚜렷해진 집중력은 한수영과 유중혁의 알콩달콩한 이런저런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시발.....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한수영을 봤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크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부터 술을 마시던 남자가 한수영이 거절하자, 어깨를 잡으며 잔을 강요했던 것이다.


나는 바로 한수영에게 다가갔다.


몰라, 알콜의 힘이라도 빌리지 뭐.


"야, 나가자."


*


한수영은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던 직원이 자신에게 자꾸 술을 권하자, 짜증나는 기분을 숨기며 거부했다.


그러자, 그 남자가 갑자기 자신의 어깨를 잡았다.


"에이, 수영 씨. 그러지 말고 한 잔만 더 합시다. 술은 미녀가 따라줘야 맛있잖아요."

"아하하.....죄송해요. 너무 마시기 싫어서."


'시발 이런 개같은 새끼가 어디에 손을 대.'


한수영은 가볍게 몸을 돌려 손을 떼어냈다.


그러자, 그 손이 어깨에서 점점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하....너무 거부하신다."


참다못해 한수영이 화를 내려던 순간.


"야, 나가자."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한수영의 눈이 커졌다.


"가자고. 여기 더 있지 말고."


김독자.....?


김독자의 표정이 날카롭게 한수영을 노려보고 그 목소리에 약간의 분노가 느껴지자 옆의 직원이 등까지 내려갔던 손을 급히 치우고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뭐해, 일어나."


한수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그 말을 하는 김독자에게 억울한 감정과 함께 짜증이 났다.


'아니, 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왜 그런 표정으로 나한테 화를 내는거야? 누가봐도 내가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그리고 그런 마음에 한수영은 괜히 한 번 튕기기로 했다.


"....네가 뭔 상관이야?"


그리고 그 말에 김독자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비통의 표정이 생겼다 사라졌다.


".....뭐?"


*


".....뭐?"


김독자는 순간 들려온 한수영의 대답에 무의식적으로 대답하고는 가슴 깊숙히서 솟아나오는 짜증남과 답답함에 말을 이었다.


"일단 가자고. 너 지금 무슨 상황인지 아직도 모르겠어?"

"모르긴 뭘 몰라, 그니까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야 한수영!"

"갑자기 왜 화를 내?! 네가 뭔 상관인데!"

"그거야....!"


.....당연히 상관있지. 내가....내가 널 좋아하니까.


"....."

"....거봐! 너도 생각해보니 상관없지?"

"그래, 알았으니까. 일단 가자고."

"상관 말고 꺼져."

"너 지금 저 남자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고 하는 말이냐?"


결국 직접 지적하는 나의 말에 그 직원이 흠칫하며 어깨를 떨었다.


저 새끼가.....넌 진짜 좀만 더 했음 가만안두려 했다.


이쯤이면 됐겠지? 싶었던 나였지만 대답은 내 예상에서 벗어난 대답이었다.


"네가 내 남친이냐? 왜 남친도 아니면서 난리야....."


말끝을 흐리며 내뱉다가 만 한수영의 그 말이 내 귀에 들려온 순간, 이 자리의 모두는 거짓말처럼 가만히 멈추었다.


"....그래. 알았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뒤에 한수영이 몇 마디를 더 하며 내게 손을 뻗은 것 같았지만, 이미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아저씨! 잠깐만요!"


보다못한 신유승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달려왔지만 조금 늦었다.


그대로 신유승과 한수영의 팔을 뿌리치고 가게 밖으로 나온 나는 하늘을 바라보고는.


['마왕화'를 발동합니다.]


파아아악!


등 뒤에서 자라난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한순간에 밤하늘의 한가운데로 날아올랐다.


.....시발.


알고 있었다. 좋아하지만, 좋아하는 감정만으로는 너를 지키지도 못하고, 나에게 너는 과분하고 너에게 나는 부족하다는 거.


아니지, 지킨다는 표현도 나한테만 해당하나....너에게는 오히려 내가 방해인 거였겠지.


-야! 김독자! 내가.....

-김독자, 우선 돌아와라.


한수영과 유중혁에게서 동시에 [한낮의 밀회]로 메시지가 왔다.


둘이서 잘 맞네.....


메시지를 꺼버리고 그대로 밤하늘을 비행하던 나는 주변의 눈을 피해, 골목길에 내려서는 잠시 시내를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곳곳에서 선남선녀 커플들이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지나가고 자신은 그 한복판에서 혼자서 서있었다.


"참, 잠들기 힘든 밤이네요. 달도 너무 예쁘고, 이런 밤에 감성 터지는 노래 하나 불러드릴게요. 10cm의 Perfect. 들려드리겠습니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 사이에서 가장 빛나는 달이 동그랗게 모양 짓고서, 태양에게 받는 그 작은 빛으로도 힘껏 몸을 빛내며 우리를 비추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감성 터지는 밤이다.


버스킹 공연자도 그걸 아는지, 감성적인 멜로디가 흘러나오며 노래를 하이라이트로 흘러갔다.


"내가 널 괴롭혔지 나 땜에 짜증 났지? 내 주제를 알았을 때쯤 영화는 끝났네."

"....."


젠장, 가사가 너무 몰입되잖아.....


"쓰잘데 없는 나를 제때 버리질 않았으니까 멀쩡한 너의 모든 게 엉망이 됐지 내가 없는 너는 이제야 모든 게 다 완벽해 내가 눈치가 빨랐다면 좀 나았을 텐데."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았었는데, 겨우 노래를 들으면서 이런 감정이 솟아나리라고는 전혀 생각치도 못했다.


"끄읍....."


억누르려 해봐도, 억눌리지 않는 감정이, 잔잔한 물결이, 거센 흔들림에 지쳐 범람하기 시작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들려오는 버스킹 노래의 흐름을 방해하듯,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이 내 신경을 바꾸어주었다.


[수신 전화 - 한수영]


"......"


그 이름을 보자마자, 심장이 다시 말을 듣지 않기 시작하는 것을 보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나 뭐하냐....."


어째서 앞뒤 가리지도 않고 뛰쳐나간 걸까, 집에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것도 아니면서.....


"부질없네. 내가 뭐라고."


내가 뭐라고....한수영은 내게 너무 과분한 존재다. 나를 위해 몇십 년을 버티고 희생해온 그녀에게 내가 무슨 자격으로 화를 내고, 무슨 자격으로 마음을 강요했던 걸까?


"그러게다....눈치가 조금만 더 빠르지."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버스킹이 들려오지 않을 때까지 그저 걷다가 만난 것은 누군가에게 상처난 마음을 달래줄 정도로 보는 것만으로 절로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