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각, 3번째 마계.


바사고의 성에 모인 마왕 연합 <레메게톤>은 골머리를 썩히고 있었다.


[오로성이라니. 그곳은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의 거처가 아니오?]


여타 마왕이 오로성에 갔다면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겠지만, 초대받은 마왕의 수식언을 듣고도 그렇게 생각할 마왕은 적어도 이 자리에 없었다.


지옥 동부의 지배자.


며칠 전 레메게톤의 제안을 거절한 최강의 마왕.


그가 아몬, <게티아>의 마수가 뻗친 영토로 향했다는 정보에 <레메게톤>은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지옥 동부의 지배자는 기어코 게티아의 손을 들어 줄 셈인가?!]

 

[우리의 쪽수가 아무리 많아도 게티아와 지옥 동부의 지배자를 동시에 상대하는 건 무리요.]


[그 미친년이 우리보다 먼저 접촉한 게 틀림없어. 순탄히 승리하긴 글렀군, 쯧쯧.]


마왕들이 연신 한탄할 때, 상석에 앉은 자가 입을 열었다.


[다들 진정하게나.]


차분한 어조지만 그 안에 깃든 위압감은 숨길래야 숨길 수 없었다.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 침묵에 만족하며 3번째 마계의 주인, 바사고가 입을 열었다.


[나는 오히려 기회라고 생각하네.]


[기회라고?]


[잘 생각해 보게. 우리나 저쪽이나 아가레스라는 패는 양날의 검이야.]


[왜 그렇게 생각하지?]


사자 갈기의 마왕, 마르바스의 물음에 바사고는 가볍게 답했다.


[어차피 이 시나리오의 승자는 한명뿐이거든. 아가레스도, 게티아도, 하다못해 우리도 언젠가 하나뿐인 왕좌를 놓고 분열하겠지.]


바사고의 문장은 저마다의 마음속에 고이 묻어둔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하나의 마계. 그것을 다스릴 하나의 마왕. 마계 역사상 다시는 없을 영광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누구도 쉽게 포기하지 않으리라.


[크흠, 그렇다면 자네 말은 게티아와 지옥 동부의 지배자가 서로의 등에 칼을 겨누고 있다, 이 말인가?]


[정확히는 격노와 정욕의 마신과 지옥 동부의 지배자라고 하는 게 맞지. 게티아는 그 미친년의 똘마니일 뿐이니까.]


[허허, 게티아를 너무 과소평가 하는군. 순위를 따지면 격노와 정욕의 마신은 그들 중 하위권이야. 자존심 강한 마왕들이 저보다 약한 년의 말을 듣겠나?]


[순위가 모든 걸 말하주진 않지.]


[뭐?]


바사고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나는 게티아를 무시하지 않아. 격노와 정욕의 마신을 높이 쳐주는 거지. 오히려 그대들이 순위가 낮다는 이유로 그녀를 업신여기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


바사고가 들은 바에 의하면 아스모데우스는 마왕 넷을 상대로 분전하여 승리했다. 그렇다고 네 명이 전부 하위권 마왕이라 하면 그렇지 않았다.


당장 엘레고스만 해도 아스모데우스와 순위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으니, 그녀의 저력은 어쩌면 10위권 내 마왕들에 비견될지도 모른다. 


[승급전을 벌이지 않았을 뿐 격노와 정욕의 마신은 충분히 위험한 상대다. 방심해서 천국으로 가는 일이 없도록 하게나.]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내 유념에 두겠네.]


[이야기가 딴 길로 셌군. 그래서 지옥 동부의 지배자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바사고?]


바사고는 성유액을 들이키며 생각을 정리했다. 아스모데우스는 예전부터 싹수가 노란, 뒤가 없는 마왕이다. 아마 아가레스의 뒤통수를 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겠지.


물론 아가레스가 이 사실을 모를리 없다. 수만 년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린 마왕은 그 자리를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을 터.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다.


[내분을 일으킨다.]


[무슨 수로?]


[게티아와 잠시 화친을 맺고 아가레스를 함께 치는 거다. 거기다 중립 세력을 반으로 갈라먹자고 권유해 보지.]


<게티아>가 아가레스를 끌어들인 이유는 순전히 적이 많아서다. 게티아 자신들을 제외하면 남은 마왕들은 대략 50여명 정도. 이들이 아가레스를 중심으로 뭉치면 게티아로서도 답이 없으니 사전에 회유한 것이렷다.


하지만 여기에 레메게톤이 아군으로 합류한다면?


10위권 내 마왕들이 하나의 조직으로 뭉치게 된다. 중하위권 마왕들이야 쓸어 버리면 그만. 제 밥그릇 챙길려는 상위권 마왕들은 시간을 들여 천천히 회유하면 그만이니, 견제용으로 아가레스를 쓸 이유가 없어진다.


그렇다면 진작부터 눈엣가시였던 마계의 중추를 뿌리뽑고 싶어질 터. 바사고가 생각하기에 아스모데우스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대다수의 마왕들이 현 시류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언뜻 보기에 바사고의 논리에는 허점이 없었다. 그때 가만히 경청하던 발레포르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지옥동부의 지배자'를 죽인다면 . . . 훗날 있을 성마대전은 어떻게 감당하려고?]


[. . .]


[여기서 '하늘의 서기관'을 상대할 자가 있소?]


마왕들이 일제히 숨을 멈췄다. 성마대전. 비록 근래 '하나의 마계' 시나리오에 잠시 밀려났다지만 그 이름값과 위상은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바사고가 반박했다.


[여기 있는 자들은 신화의 벽에 막혔을 뿐, 어지간한 설화급 성좌를 먹을 수 있는 마왕들이지. 그런 우리가 마계 역사상 유례없는 거대 설화를 손에 넣는다면, 그깟 천사들이 대수겠나?]


[그러니까 전부 상상일 뿐이군.]


바사고의 미간이 좁혀졌다. 입가에 걸린 은은한 미소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위압적인 시선을 눈치 못챈 발레포르가 이때다 싶어 계속 떠들어댔다.


[내가 봤을 때 귀공은 시나리오가 아니라 '지옥 동부의 지배자'를 살해하는 데 초점을 둔 것 같소. 혹시 바알의 총애를 뺐긴 걸 아직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 ]


[발레포르.]


츠츠츳!!


놀란 발레포르의 눈이 동그레졌다. 허나 당황한 것도 잠시, 6위의 마왕은 곧바로 격을 드러냈다.


[내가 틀린 말을 했나, 바사고?]


격렬한 스파크가 휘몰아쳤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마왕들이 격을 드러내며 촉각을 곤두세웠다. 순위가 딸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용과 악취의 대공자, 아스타로트가 뒷목을 잡았다. 이래서야 이쪽이 먼저 분열하게 생겼자.


마르바스가 중재에 나섰다.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오. 그러니 귀공들 모두 격을 가라앉히시오.]


[ . . . ]


[ . . . ]


잠깐의 눈싸움 끝에 바사고가 한숨을 쉬며 먼저 자리에 착석했다. 동시에 발레포르도 격을 거두었다.


바사고가 입을 열었다.


[내가 과거에 연연할 종자면 이 자리가 열리지도 않았겠지. 안 그런가, 대공작?]


[ . . . 방금 발언을 한 것은 사과하리다. 내가 경솔했군.]


[사과할 것 없다. 어쩌면 은연중에 내가 그런 마음을 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다오. 지금 아가레스를 죽이지 않으면 마계의 정점에 설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만다.]


[ . . . ]


다시 일어선 바사고가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아가레스는 너무 오래 해먹었어.]


이 자리에 모인 마왕들 모두가 그 말엔 동의했다.

바사고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격노와 정욕의 마신에게 밀서를 보내지. 함께 새로운 마계를 열어 보자고.]


밤이 깊어오고 악의가 피어난다.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


[아까부터 귀가 간지럽네요.]


[안 씻은 거 아니냐?]


[제가 당신인 줄 아나요?]


핀잔을 먹은 흑염룡이 툴툴거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


[쳇, 나도 깨끗하거든.]


[일주일에 목욕 몇 번이나 하는데요?]


흑염룡이 자랑스럽게 오른손을 쫘악 펼쳐 내밀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많이 하네 라고 생각한 순간, 도미노처럼 촤르륵 접힌 손가락에 나는 뒷목을 잡았다.


[두 번? 두우 버어언?!]


[아니 왜?!]


[충격적이군요 . . . ]


[아니 . . . 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무슨 눈이요?]


[마치 이계의 신격을 보는 듯한 - ]


[그럼 그런가 보죠.]


[애초에 용의 비늘은 언제나 깨끗하다고!]


내가 '청룡에게 정말이냐?' 라는 눈빛을 쏘아보내자 한숨과 함께 답변이 돌아왔다.


[맞다.]


[이게 왜 진짜죠?]


[거 봐.]


바로 의기양양해진 모습이 뭔가 꿀밤이 마려웠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악의를 뿌리치며 나는 오로성에서 흑운까지 온 이유를 되집어 봤다.


[그러니까 후드 쓴 화신이 충무로 역 본진을 노리고 있다고요?]


[옆에 선지자라고 하는 놈들도 붙어 있더라.]


비형 채널에 접속하자 진씨 형제들의 학살에서 생존한 선지자들과 접촉한 김독자가 보였다. 현재 김독자는 유중혁의 이름을 팔고 있는 상황. 선지자 무리는 원작처럼 동시작전을 펼쳐 충무로역을 장악, 유중혁(김독자)을 회유할 속셈이었다.   


문제는 진짜 유중혁이 원작보다 빠르게 충무로 역을 떠났다는 것. 자칫하다간 선지자들의 급습에 충무로역이 함락당할 수도 있었다.


물론 포탑에 내가 투자한 코인을 잔뜩 처바른 공필두가 쉽게 뚫리지는 않겠지만, 한수영 아바타가 가진 마력폭탄의 위력은 무시할 수 없었다. 


여기에 대해선 따로 조취를 취할 예정이다. 그래도 안전자산은 많으면 좋으니, 이번 기회에 유중혁에게 한몫 단단히 챙겨주겠다는 생각으로 한수영과 그 아바타에게 현상금 시나리오를 걸었다. 



- "이건 . . . "



그리고 유중혁의 주머니에 소량의 코인을 찔러 주며 현상금 걸린 놈이 지금 김독자의 본진을 털러 갔다고 귀띔도 해줬다. 이렇게 까지 했는데도 유중혁은 특유의 의심병이 발동했는지 내 진의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 "왜 처음부터 알려주지 않았지?"


-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그편이 더 재밌지 않냐고 되묻습니다.]


- "빌어먹을 놈."


-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유중혁에게 너무 의존한다면 다른 화신들이 성장할 기회가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 " . . . 네 딴엔 적당한 시련을 줬다고 말하는 건가?"


-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알아서 판단하라고 말합니다.]


옆에서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흑염룡이 혀를 내둘렀다.


[참 애쓴다.]


[후후, 나름 보람차다고요.]


[코인은 안 아깝냐?]


[아껴서 뭐합니까. 쓸땐 써야죠. ]


그리고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생색내보겠나. 성장새가 빠른 김독자 컴퍼니는 '구원튀'라는 희대의 배짱장사로 고작 4년 만에 대기업이 된다. 그런 대단한 포텐셜을 가진 회사의 주식을 10만 코인으로 저점매수할 수 있다는 데 누가 망설이겠냐고.


나는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을 내렸을 뿐이다. 절대 덕질 때문은 아니다.


[그나저나 샐리맨더, 언제까지 제 어깨에 붙어 있을 건가요?]


[그렇지만 . . . 아스모의 어깨가 제일 좋은 걸?]


흑운에 입성하자 에덴에서의 무모함을 꾸짖던 도마뱀은 이제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떨어질 기미를 보이질 않았다. 억지로 떼어내고 싶어도 올망졸망한 눈동자를 보면 또 마음이 약해지니, 이럴 때마다 내 전생이 악마가 아니었음을 자각하곤 한다.


[암튼 아스모 탓임.]


[그 말투는 또 뭡니까? 라파엘도 아니고.]


여러모로 곤란할 따름이다. 허벅지 상처는 안 들켜서 다행이네. 최근 마계 침공에서 얻은 부상까지 들켰다면 저 어리광이 얼마나 극성으로 변할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간호도 마찬가지고. 죽은 너무 많이 먹어서 이제 질린다.


등이 따끈따끈한 탓일까. 눈이 서서히 감겨 왔다.


[하아암, 피곤하네요 . . .]


[눈 좀 붙여. 최근에 많이 바빴잖아.]


[그래도 하이라이트를 놓칠 순 없죠.]


나는 서서히 몰려오는 졸음을 참으며 화면을 바라봤다. 재앙의 알을 깨우는 하차자들의 몹쓸 짓에 예비 가장 오래된 꿈께서 경악을 금치 못하신다.


인간들은 책 한 권만 읽은 놈이 그렇게 무섭다고 말하지. 헌데 내가 봤을 땐 읽다만 놈들이 더 무섭다.


- [다섯 번째 메인 시나리오의 징조가 나타납니다.]


- "엉? 뭐야, 이거? 갑자기 메인 시나리오가 왜 . . . "


남자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알이 부화하는 순간,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간 빛이 남자의 머리를 관통했기 때문이다.


그때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샐리맨더가 내 옆에 털썩 주저앉더니 표정을 찌푸렸다. 청룡도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화룡종이군.]


[관리국 자식들. 또 용을 부려 먹네.]


공분하는 두 용가리와는 다르게 흑염룡은 딱히 별 생각이 없어보였다. 오히려 격변하는 시나리오에 흥미진진한 표정이었다. 대신 난이도에 대한 불만이 조금 섞여 있었다.


[저거 어떻게 잡냐? 아직 해츨링이라 해도 무리잖아.]


[난이도가 비정상적으로 설정됐으니 관리국이 개입하겠죠.]


- [일부 성좌들이 비정상적인 시나리오 난이도에 항의합니다.]


과연 황금빛 스파크와 함께 중급 도깨비 바울이 등장했다. 


- [흐음, 이거 곤란한데. 몇몇 성좌 님들이 유독 아끼는 화신들이 있어서 이대로 둘 수는 없고 . . . 그렇다고 난이도를 하향해드릴 수도 없고 . . . 제 재량으로 시나리오 내용을 살짝 . . . 음?]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 츠츠츳!


[저건 . . .]


바울의 안테나로 막대한 개연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도깨비의 표정이 이내 짙은 미소로 돌변했다. 


- [이것 참, 일이 재밌게 흘러가는군요.]


바울이 손가락을 튀기자 히든 시나리오가 갱신되었다.


+


<히든 시나리오 - 뭉쳐도 죽고 흩어져도 죽는다>


분류 : 히든

난이도 : A

클리어 조건 : 제한 시간 내에 '소재앙 레서 드래곤 이그니르'를 사냥하거나. 녀석의 공격 속에서 살아남으시오.

제한 시간 : 1시간

보상 : 3000코인

실패 시 : 사망


+


시간이 연장됐다. 그리고 히든 피스가 없다.


나는 막대한 개연성을 움직인 성운을 노려봤다.


[<올림포스>가 격노와 정욕의 마신을 향해 적의를 드러냅니다.]

[<올림포스>가 화신 신유승의 죽음을 원합니다.]


- "저, 저요?!"


하여튼 산채로 갈아마셔도 시원찮을 놈들. 나중에 생포하면 홍등가에 팔아넘겨야지. 


나는 날뛰는 화룡종을 어떻게 처리할까 생각하다가 문득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친애하는 화신에게 새로운 펫이나 만들어 줘야겠군요.] 


이거 잘하면 각성 이벤트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


[성좌, 강철의 주인이 자신의 화신을 바라봅니다.]





와, 벌써 40화네 . . . 갈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