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https://arca.live/b/regrets/22581703

2편: https://arca.live/b/regrets/22731934

3편: https://arca.live/b/regrets/22797029

4편: https://arca.live/b/regrets/22954718

-------------------------------------------------------------------------------------


-난 아닌데.


매니저의 무미건조한 목소리.

아무 감정 없는 듯한 표정.

그 모습들이 나를 무너지게 한다.


오빠는 내 모습을 보고 비웃지조차 않았다.

그럴 가치조차 없다는 듯.


- 앞으로,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


병원에서 건강 검진을 받았다.

폐활량이 개복치 수준이니, 지금 당장 담배를 끊고 운동하라는 호통을 듣고 나왔다.

정신과에 갔을 때에도, 담배가 항우울제와 향정신성 약물의 혈중 농도를 낮춰서 효과를 떨어뜨려 버린다는 소리를 들었다.

담배라도 없었다면, 진작 자살했겠지.

웃기지도 않는다.


그래도 폐암 걸리기는 싫은지라, 새로 산 담배를 꺼내 쓰레기통에 넣었다. 

니코틴 대신 카페인이라도 섭취하기 위해 카페에 들어섰는데,

어떻게 알고 온 건일까.

그곳에는 손을 흔들고 있는 검사 나리가 보인다. 


- 잘 지냈어, 멍멍아?


- 네. 앞으로도 계속 잘 지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 앉아.


- 넵.


이제 나아진 줄 알았는데, 오늘따라 말투가 거칠다.

화도 나 있고.

이유야 너무나도 많다.

더는 나로부터 향수 선물을 받지 못하는 것, 

남의 발등을 짓밟는 취미를 포기한 대가로 얻은 욕구 불만.

그리고 흘러가는 야속한 세월에 대한 원망, 

화이트데이에 대한 솔로의 분노 등등. 


- 너 속으로 나 놀리고 있지?


- 아닙니다.


그녀는 예전보다,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예전처럼 내게 선물과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이힐은 여전히 좋아하지만, 내 발등을 짓밟지는 않는다.


아마도 이유라면, 전에 그 사건 때문이겠지.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데 말을 안 듣는다.


******


검사 양반에게 USB를 전달하고 난 후.

몇 주 동안 집에서 고민한 끝에, 자살을 결심했다.

살아갈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면 좋을지도 알 수 없었다.

살아가봤자 내게 돌아올 것은 안 좋은 것들뿐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목을 매달 멀티탭 5m짜리와 번개탄, 그리고 전동 드릴과 공업용 커터칼을 사서 집에 돌아갈 무렵,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여자가 찾아왔다.

검은 정장과 하이힐을 유난히 사랑하는 그녀가.


- 여기 있었네.


검사 나리는 오래 전 잃어버렸던 도구를 되찾은 주인의 표정을 지으며, 멱살을 잡는다.


- 도망칠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 개라면 모름지기 주인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앙?


역시나. 같이 일하자는 협박 섞인 부탁을 받았다. 

윗선에 보고했더니 정부에서 이번 정권 목표로 연예계 비리 청산으로 정했다나 뭐라나.

그래서 나 같은 인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느 정도 업계에 인맥이 있으면서, 뒷사정에 대해 아는 사람.

거절할 명분도, 힘도 없었던지라 받아들였다.

삶의 목표를 잃은 내게 필요한 것은, 이런 악질 상사의 채찍질이었는지도 모른다.


겉으로 연예 기획사 직원으로 일하면서, 

밤에는 인맥을 이용해 연예계에서 돌아가고 구린 일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접근하여 검찰 측에 넘겼다. 

때로는 검사 나리가 일하고 계신 검찰청 건물로 숨어 들어가서 업무를 도와주기도 했다.

....솔직히 왜 내가 9급 공무원들하고 같이 서류 뒤지는 일을 같이 했던 건지 모르겠지만, 

도와주지 않으면 킬링 필드 고문 도구처럼 하이힐로 내 뒤통수를 뚫어버리겠다는 협박을 해서 도와주게 되었다.

돈과 향수에 찌들어 있던 검사 나리가 진지한 모습으로 수사를 진행해나가는 모습에 반한 건지도.


얼마 후.

성 상납 폭로로 인해 은퇴를 당한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마약 유통과 성인물 제작을 하고 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내가 당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자들에게 마약 투여를 해서 혼수상태로 만들고 그걸 성인물로 찍는다는 것.

경찰까지 매수되었는지 제보만 있을 뿐, 물증이 없다며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그 말에....클럽 대표직을 맡은는 인간들에게 접근하여 자료를 수집하여 넘겼다.


정의감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겪어 봤으니까.

당하게 놔두고 싶지 않았다.


검사 나리에게 자료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

주차장에서 날 기다리고 있던 괴한들에게 습격당해 죽기 직전까지 갔다.

날 감시하고 있던 검찰 측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쯤 인천 앞바다에 드럼통 안에 담겨 가라앉아 있을 거다.


병원에서 내 몸을 붙잡고 우는 검사 양반의 얼굴, 

아주 가관이었지.

손가락 누를 힘만 있었으면 콧물 흘리며 우는 사진 찍어 놓는 건데.


******


- 그래서 또 찾아온 이유는 뭡니까, 검사 나리? 나 좀 쉬자고.


아직도 내게서 단물을 쪽쪽 빨고 가는 여자이긴 하지만, 그녀에게는 감사하고 있다.

다 풀려버린 내 태엽을 다시 감아준 사람.

살아갈 목표를 잃던 나에게 손을 내민 사람.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 먹고 있는 피칸 파이가 맛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겠지.


- 넌 내가 기르는 개잖아.


그러네.

버려질 사냥개에서 죽기 전까지 길러줄 애완견으로 승진한 멍멍이. 

출세했네. 


검사 나리가 가지고 온 가방에서 두꺼운 책들을 내려놓는다.

형법, 형사소송법, 행정학 개론 등.

공무원 관련 책들이다.

뭐지 이거. 당근마켓에 팔라는 건가?


- 내일부터, 이거 공부해. 그리고 내일부터 영어단어 400개씩. 

   7급 검찰 공무원, 내년 시험 꼭 붙어라. 안 그러면 죽인다? 농담 아니다. 


-저기, 1년도 안 남았거든요? 11개월 남았어.


- 그니까 하라고.


황당해하는 내 표정을 바라보면서 씨익 웃는다.


- 넌 영원히 개가 되어서, 내 밑에서 일을 하고 사는 거야.


- 뭔가 고백 멘트 같이 들리는데요?


- 맞는데?


- 푸웁


커피를 마시다가 그대로 입에서 뱉어내었다.

커피가 기도로 넘어가서, 폐렴 걸릴 것 같은 기분이다.


- 대답은?


- 거절합니다.


- 왜?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시선으로 날 바라본다.


- 그야...난 당신에게...


- 반성하고 있어. 과거의 나라면. 지금 여기에서 무릎을 꿇을 수도, 머리를 박을 수도 있어. 


검사 양반이 고개를 숙인다. 


 - 그게 아니고. 나 망가졌거든요.


내 말에, 고개를 들어 올리며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는다.


- 저, 아직도 PTSD 앓고 있거든요. 미안하지만 사실...검사 나리 당신이랑 술 마시는 것도 사실 두려웠어요.  

  같이 드라이브를 할 때도 그랬고, 당신이 가끔 장난스럽게 내 뺨 쓰다듬는 거조차도 소름 돋을 때가 있었어요.


- 그리고?


- 나, 성병 걸렸을지도 몰라.


- 그리고?


- ....발기 부전입니다.


- 이제 끝?


그러더니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다. 

뭐야. 난 심각하게 말하는 건데.

검사 양반이 내 발등을 밟는다. 

하이힐은 벗은 채, 스타킹 신은 발로 살며시.


- 그럼 주사 맞으면 돼. 병이 걸린 거 같으면 약 먹고 주사 맞으면 되잖아?

    망가졌으면 고치면 되는 거고, 더러우면 씻기면 되는 거지 뭐 말이 많아. 

   자, 해결. 고민 끝. 가자.


- 어디를요?


그녀가 내 팔을 잡아당겨 일으켜 세우더니, 팔짱을 낀다.


- 정말 안 서는지, 나하고 한번 해보자고.


******


꿈을 꾸었다.

언제나 같은 내용의 꿈이다.


매니저 오빠와 함께한 소중한 추억들이 파노라마 영화처럼 스쳐 지나가는, 그런 꿈들.


같이 버스킹 하면서 싸구려 커피를 나눠 마시던 기억.

둘이서 좁은 사무실에서 같이 CD를 포장하던 일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처음으로 스테이크를 먹었던 것.

첫 방송 출연.

첫 무대 공연.

첫 라이브.

소속사 건물을 이사하던 일들.


하지만 언제나 꿈의 끝은, 

방송국에서 들었던 매니저의 말로 끝난다.


[앞으로,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꿈에서 멀어져 가는 매니저의 다리를 필사적으로 붙잡는다. 

하지만 절대 잡히지 않는다.


그렇게 매일 아침, 비명을 지르면서 꿈에서 깼다.

말이라는 칼로 깊게 새겨진 가슴의 흉터는 지워지지 않았다.


추하게도,

용서를 받고 싶다는 내 독단적인 마음은,

 곁에 있고 싶다는 감정으로 변해 갔다.

목소리라도, 숨결이라도 느끼고 싶다는 감정은,

이제 그를 가지고 싶다는 소유욕으로 변해갔다.


피투성이가 되어버린 마음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마음의 피는,

어느새 끈적거리는, 추하디 추한 집착이 되어 있었다.


*******


오늘도 거울 앞에 서서, 모습을 꾸민다.

매니저는 순진했던 사람이었다.

내가 어떤 화장을 하더라도 어울린다며 칭찬을 해주던 사람.

그래서 과하게 화장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목선이 아름답다며, V넥 셔츠가 어울린다고 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내가 그런 상의를 입으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었다.

오프 숄더 룩을 입었을 때는 아예 촬영장 밖에서 기다렸었다.


몸단장을 깨끗이 한 후, 하얗게 탈색된 머리카락을 모자로 가린다.

그리고 오늘도 매니저가 있는 회사 사무실로 향했다.


그가 좋아하던 모습 그대로 꾸몄으니까,

다시 날 봐줄 거라는 그런 헛된 기대를 하면서.


매니저가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사무실 건너편에 위치한 카페에 앉아,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가 움직이면,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언제나 그는 대중교통을 선호했다.

급행이 있는 지하철이 있다면서, 

서울 시내는 차라리 운전 안 하고 다니는 것이 더 빠르다고 했던 그였다.

역시, 매니저는 변하지 않았다.


지하철에서 졸면서 가고 있는 그의 사진을 멀리서나마 찍었다.

그의 체온을 느끼고 싶어서, 그가 꼭 쥐고 있던 손잡이를 손으로 만지고 내렸다.


온종일 그를 따라다니다가, 나는 따라 들어갈 수 없는 기업의 건물로 들어가면 '다녀오세요'라고 속삭였다.

야근이 잦은 걸까. 사무실에서 깊은 밤까지 나오지 않을 때면 '안녕히 주무세요'라고 속으로 말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허용량이 넘은 내 집착을 달래기 위해서 몰래 찍은 그의 얼굴들을 보며 마음을 달랬다.

사진을 보며, 그리고 그의 체온이 남아 있는 손을 혀로 핥는다.

그리고는 잠이 들 때까지 손으로 자기 위로를 하였다.

내가 이렇게나 욕망에 충실한, 음란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자각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 


날씨가 제법 쌀쌀해진 어느 날.

매니저를 이렇게 따라다닌 지도 반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오늘도 공원 벤치에 앉아 기획사 사무소에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오빠가 날 알아봐 주길 바랬기에, 오늘도 난 얇은 V넥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오빠가 내려온다.

핸드폰 액정이 아닌, 실물의 얼굴을 바라보니 황홀감에 젖어 든다.

하지만.

그의 곁에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여자가 있다.

...한 눈에 누군지 알아봤다.

둘은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더니, 곧 팔짱을 낀다.

둘의 손을 바라본다.

...왼손 약지에는, 똑같은 모양에 반지가 존재했다. 


저 검사 년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들끓어 오른다.


저기는....

저기는 원래 내 자리여야 한단 말이야.

아니, 아니야.

매니저 오빠의 손도, 팔도, 목소리도, 눈동자도. 

마음속에서, 소중했던 무언가에 금이 가는 게 느껴졌다.


이건 배신이잖아, 오빠.

내가 이렇게 아파하고 있는데, 그사이에 다른 년을 끼고 놀고 있는 거였어?

난 오빠를 잊지 못해서, 너무나 소중한 오빠에게 미쳐 있는데.

내가 오빠를 버릴 수는 있어도 당신, 내 매니저잖아.

오빠는 날 버리면 안 되는 거야.

오빠 옆은 내 거야. 

원래, 원래 내 자리였어.


마음이 금이 가던 것이, 결국 부서져 내렸다.


- 오, 빠.

들리지 않는 걸까.

등 뒤에서 말한 거지만, 날 알아보지 못한 채 둘은 웃으면서 대화를 이어갔다.


- 매니저 오빠...오빠.

신에게 간청하는 듯한 목소리로, 간절히 내뱉는다.


매니저가, 고개를 돌린다.

아아.

나의 매니저가 날 바라본다.

드디어 -

드디어, 날 봐줬구나. 오빠.


- 뭐야, 후순씨? 나 참. 웃긴 년이네.

그년이다.

매니저 오빠를 강아지라고 막말하는 그년.

검사라는 지위로 오빠를 가지고 노는 년일 거야.

맞아, 분명해.


- 오빠오빠오빠오빠. 저년한테 협박당하고 있는 거지? 응? 그렇지?

   원래 오빠 괴롭히는 년들 다 높으신 분들이었잖아. 그렇지?
   저년도 그런 거지? 내가 지금 당장 구해줄게 오빠. 


원래라면 매니저의 앞에서 내 진심을 보이며 사과하기 위해 쓰려고 했던 칼을 꺼내 들었다.


- 후순아,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칼을 휘두르려는 순간, 오빠가 내 칼을 손으로 붙잡는다.

붉은색 따뜻한 액체가, 내 손에 흐른다.


아.

오빠의 피다.

오빠의 피가, 내 손에 흐르고 있어.

그리고.

오빠가 날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다.


짝 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진다.

오빠가 내 뺨을, 어루만져 주었어.

오랜만이야.

너무 행복하다.

행복해서, 그만 살짝 젖어버렸다.


아하하....

하하....


오빠의 소중한 피가 묻은 칼로, 내 손목을 그었다.

오빠의 피가 내 몸에 흐르게 되는 거야.

내 죄를 씻겨주기 위해 직접 피를 묻혀주다니 오빠는 너무 상냥해.


오빠에게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매니저 오빠, 날 봐줘.

여기, 내 손목을 봐줘.

나 지금 오빠의 피로 나의 더러움을 씻어주고 있어.


오빠의 옆에 있던 년에게 복부를 얻어맞고 자리에서 쓰러졌다.

생각보다 큰 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진다.


오빠, 나의 오빠.

사랑하는 나의 매니저.


******


- 오늘도...가는 거야? 하아, 정말이지 넌...


아내가 입술을 씹으며 인상을 구겼고, 나는 애써 그녀의 얼굴을 외면한다. 


-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멍멍아. 그년이 잘못된 거지. 넌 책임감 느낄 필요 없다니까?


-  ...죄송해요.


아내의 시선을 뒤로하고, 호출한 택시에 몸을 실었다.

그 병원을 다녀오면 몰려드는 피로로 인해, 운전의 제대로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내는 이런 내 모습에 환멸을 느끼겠지.

그게 내 죗값일 거고.


********


이름을 대고, 후순이가 있는 면회실로 안내 되었다.


- 요즘 어때? 식사는 했어?


-....


유리창 건너편에 있는 후순이에게 말을 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그녀는 손목에 붕대를 감은 채,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 병실에 있는데, 심심하지 않니?


여전히, 대답은 없다.

그날, 자해 소동이 있고 난 뒤 후순이는 마음의 문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의사의 말로는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은 거라며, 그녀가 가장 의지하고 따랐던 사람과의 교류가 필수적이라고 했다.


난 나만 망가졌었다는 사실에, 내가 누군가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것은 몰랐다. 

망가지고 난 후에 모습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그걸 모르고 있었다. 


- 미안해. 난 내 마음의 상처로 인해 네가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외면하고 있었어. 


- ....


- 아내도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했어.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입술을 깨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안녕, 후순아. 다음에 올게.


****** 


오빠가 면회실을 떠난 후, 내 병실로 돌아간다.

품에서 그가 보내준 편지들을 꺼내고, 조금씩 찢어 입안에 넣고 삼킨다.


이미 결혼한 사람을 향한, 내 추한 집착. 


이럴 자격조차 없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

내 스스로 부수고, 찢고, 밟아버린 자리인데도.

결코 이제는 가질 수 없는 자리인데도.


오늘도, 편지 속 담긴 그의 온기를 느끼며 과거로 돌아가는 망상 속으로 추락한다.

그 세계에서는 그와 사랑을 나눈다.


소망한다.

이 망상에서 깨어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