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자 시점 -


얼마나 쓰러져있던걸까..

깨어났을땐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눈을 뜨자 처음으로 보이는건 서연이였다.

습관적으로 서연이를 보고 웃어주려고 했지만

웃을 수가 없었다.


머리 속에서 그 남자와 함께 키스를 하고 있었던,

남자에게 끌려 모텔로 가던 서연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내가 매일 서연이를 기다리던 때에 서연이는 다른 남자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걸까...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파왔다.

그 와중에도 너는 아름다웠다.

피곤에 찌든 그 모습도...

날 걱정하는 듯한 그 눈빛도...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믿고 싶지 않았다.

아직 늦지 않은거라 믿었다.

그래도 그 남자와 가지 않고 날 데리고 병원으로 왔잖아...

그런데.. 그때 내가 없었다면..? 혹은 내가 없었던 날에는..?

머리 속이 복잡했다.


되돌릴 수 있을꺼야.. 아직 ...

지금이라도 서연이가 다 말해주길 바랬다.


어제.. 같이 있던 사람은 누구야..? 라고 물어봤다.

서연이는 그냥 거래처사람이라 대답했다.

거짓말.

아무 일도 없었지..? 라고 물어봤다.

서연이는 당연하지, 우연히 거기서 만난것뿐이야. 라고 대답했다.

또 거짓말.

왜 거짓말 하는거야..? 왜..?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눈물을 참기가 힘들어서 다시 자겠다는 핑계로 서연이를 돌려보냈다.

서연이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몸조리 잘하라는 말과 함께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 눈빛마저도 내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이 아팠다.


거울을 보니 쾡한 내 모습이 보였다.

키도 크고 듬직해보이던 그 남자와 비교해보면 나는 ....

모든게 내 탓 같았다.

내가 더 잘났으면.. 내가 더 잘했으면... 내가 더.. 내가 더....

막연한 후회와 좌절감에 눈물이 났다.

혹시라도 서연이에게 들릴까봐

이불을 뒤집어쓰고 그저 소리죽여 울다 지쳐 잠에 들었다.


조금 뒤에 다시 깨어났을땐 그 남자가 찾아왔다.

그 남자는 사람 좋아보이는 미소를하며 들어왔다.

하지만 시선은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날 내려다 보는 듯한 시선이 싫었다.


그는 자신이 서연이의 거래처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바보같이 그와중에도 서연이가 거래처 사람인걸 속이진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뒤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믿을 수 없는 것이였다.

이미 서연이와 결혼을 약속했다.

이혼하고 같이 결혼하자고 약속까지 했다는 것이다.

원래는 임신까지 하고나서 찾아가서 이혼하려 했지만

빨리 들켜버려서 어쩔수없이 미리 이야기 한다고 했다.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머리가 멍했다.


아이는 천천히 가지기로 했는데..

서연이가 좀 더 둘이서만 시간을 보내고 싶다며 임신은 뒤로 미뤘었는데..

사실은 그런게 아니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눈물조차 나오질 않았다.

그냥 텅 비어 버린 것만 같았다.

남자는 위자료는 든든히 줄테니 빨리 이혼해줬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나는 또 정신을 잃었다.


저녁엔 서연이가 찾아왔다.

손에는 서연이가 좋아하는 귤을 들고 왔다.

물론 나도 귤을 좋아했다.

서연이가 좋아했으니까.

서연이가 먹는걸 보면 나도 행복했으니까.

하지만 이젠... 잘 모르게 되었다.


서연이에게 남자가 찾아왔었고,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이야기했다.

서연이는 그 남자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부정했다.

남자와 키스를 하던 서연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무 사이도 아닌 남자와 키스를 하는 서연이...

그와 결혼하는 모습.. 그와 함께 웃는 모습...

그의 아이를 임신한 모습...

이런 저런 모습이 떠올랐다.


사실 아무 사이도 아니였던건 내가 아니였을까란 생각을 했다.

내가 더 많이 사랑한줄 알았는데

나만 사랑한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연이가 사랑하는건 나뿐이라고 말했다.

평소엔 부끄럽다는 이유로 사랑한다는 말도 잘해주지 않았는데...

이제서야 들을 수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 뒤는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서연이에게 뭐라고 소리를 질렀던거 같다.

정신이 들었을때 서연이는 그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이젠 너의 얼굴만 봐도 가슴이 너무 아팠다.

죽을 것만 같았다.

서연이를 못보면 죽을 것 같았는데...

이젠 서연이를 보면 죽을 것 같이 아팠다.

그래서 너에게 살려달라며 빌었다.


너는 넋이 나간 얼굴로 간호사에게 이끌려 밖으로 나갔다.

나는 또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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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같은 가람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갈수록 그 남자가 갈아마셔도 시원찮을 놈이 되어버리고 있습니다.

원래는 대충 계기만 던지고 사라질 놈이였는데..

이젠 한강으로 사라질 위기입니다.

그만해!! 이미 늦었지만..


짧게 쓰려던 글이 계속 길어지네요.

길어봐야 3편,4편으로 끝날줄 알았는데..

서연이는 이제 열심히 갈리고 굴러야겠죠..?